
1523년 헨리 8세가 잉글랜드 의회 개회에 참석한 모습이다. 문장관이었던 사우샘프턴 백작인 토마스 라이어슬리Thomas Wriothesly가 펴낸 『라이어슬리 가터훈장서Wriotheley Garter Book』에 실려있다. Royal Collection.
Ernst H. Kantorowicz, The King’s Two Bodies: A Study in Mediaeval Political Theolog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7, “V. Polity-Centered Kingship: Corpus Mysticum, 2. Corpus Reipublicae mysticum.”
제5장 정치체 중심 왕권: 신비체
2. 국가[공동체]의 신비체
신비체라는 고귀한 개념은, 그 초월적 의미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고, 정치화되고 여러 면에서 교회 자체에 의해서 세속화된 후, 발생기의 영토 및 세속국가들을 위한 새로운 이념형태를 발전시키고 있던 정치가, 법학자 및 스콜라학자들의 사상세계에 손쉬운 희생물이 되었다. 하나의 신체로서의 교회에 대립하는 하나의 신체로서의 국가는 초기 서임권 투쟁 문헌에 나타났는데, 황제파 저술가는 교회의 하나의 신체를 보완하기 위한 국가의 하나의 신체를 주창했을때, 관례적인 유기체 개념에 머물렀다. 그러나 13세기 중엽 보베의 빈켄티우스가 국가의 정치적 신체를 명시하기 위해 국가[공동체]의 신비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먼저 신비체라는 관념은 유기체론적 양상에서 그리스도교 사회의 전체성을 머리와 사지로 구성된 하나의 신체로 상징했다. 이에 더하여 신비체는 특정한 법률적 내포를 획득했는데, 하나의 의제적 또는 법적 인격을 의미하는 단체론적 성격을 획득했다. 유기체론적 해석이 단체론적 내용과 나란하거나 융합되어 법률가들 사이에서 신비체라는 관념이 의제적 신체, 상상된 신체, 표상된 신체 등으로 사용되었다. 법학자들은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참된 몸과 의제적 신체, 법률학상 의제로만 존재했던 단체적 집합체 사이를 구별하게 되었으며, 의제적 인격을 신비체로 정의하는 것이 드물지 않았다. 이는 다섯 단계로 구별한 단체로서의 공동체의 위계질서 내부의 모든 통합체Universitas에 적용가능했다. 안토니우스 데 로셀리우스의 인간 사회의 다섯 신비체. 촌락, 도시, 지방, 왕국, 세계. 각각의 신비체라는 관념은 다른 세속 단위에도 용이하게 이전될 수 있었는데, 발두스는 인민populus를 신비체, 특정한 지성적 신체로 정의했는데, 인민의 신비체는 정치체 내지 통합체 또는 아퀴나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서 잡힌 다수multitude ordinata와 동등한 것으로 여겨진다. (207-210)
교회에서 시작된 신비체는 먼저 교회에서 세속화되어 단체나 통합체를 가리키게 된 후, 세속국가로 넘어간다. 이때 신비체의 성격은 단체론적이고 유기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기체란 인체의 유비를 사용했다는 뜻이므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단체론적corporational의 의미인데. 이를 보다 결과론적으로 표현하면, 법인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단체론적이라는 말에는 의제적, 특히 법적 의제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굳이 단체론적이라는 생소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아직 법적 의제를 통한 법인격의 수립이라는 결론을 향해서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고, 그보다는 더 넓은 의미를 가졌는데다. 독일 등에서는 이 단체가 보다 실체에 가까운 의미로 쓰였기 때문이다. 아직은 의제적 신체를 뜻하기도 했고, 인간공동체의 여러 층위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발두스는 인민을 신비체로 불렀고, 이는 정치체 및 통합체로 해석된다. 여기서 통합체로 새긴 universitas 역시 현대의 시점에서 보면 법인체라 해석 할 수 있지만, 아직 중세 후기인 점을 감안하려 한다.
13세기에 널리 알려졌던 “정치적 신체”라는 관념은 초기 단체론 학설 및 아리스토텔레스와 분리할 수 없었다. 신비체라는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어떠한 도덕적 정치적 신체에 적용가능하게 되었다. 국가 또는 정치적 집합체는 자연이성의 결과로 그 자체 도덕적 목적과 윤리적 규정을 가진 제도였다. 법학자들과 정치 저술가들은 도덕적 정치적 신체로서의 국가와 신비하며 영적인 신체로서의 교회를 비교하거나 대립시킬 새로운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교회화한 후, 고드프루아 드 퐁텐은 인간은 자연에 의해 사회 공동체의 한 부분이며, 신비체의 구성원이라 말했다. 단테는 얼마 후에 인류 또는 인간공동체humana civilitas로 다른 사람들은 인민, 도시국가, 왕국, 조국, 목적이 그 자체로 도덕적이었던 다른 사회 공동체와 단체로 정의할 수 있었다. 신비체와 도덕적 정치적 신체는 거의 상호교환가능한 관념이 되었다.(210-212)
신비체는 정치적 신체라는 관념을 타고 넘어 그 의미를 도덕적 정치적 신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국가 내지 정치적 집합체는 도덕과 윤리를 가진 제도이다. 결국 이 책의 끝부분에서 논하는 단테가 말하는 인류 또는 인간공동체humana civilitas로 논의된다. 이렇게 중세 후기에 생겨난 세속 국가에 대한 관념들과 오늘날의 국민국가에 대해 가지는 관념은 수평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의미없다 생각될 정도로 차이가 크다. 오늘날의 국가는 의미가 한층 협소해 진 느낌이랄까.
법학자들은 국고 재산의 양도불가능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지배자와 왕국의 결혼이라는 은유를 쓰기 시작했다. 중세 후기 법학적 유추와 단체에 대한 학설의 영향 하에서, 세속적 결혼 즉 군주와 자신의 신비체, 즉 국가의 신비체와의 결혼이라는 수사적 비유가 국헌상 의미있는 것으로 나타나며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고위성직자가 교회의 신랑이 되는 주교의 반지라는 교회법적 은유가 처음 세속적 법률-정치 사상으로 이전되었는지 말하기 어렵다. 피스토이아의 퀴누스는 1300년에 국가[공동체]에 의한 군주의 선출과 그 수락을 혼인과 유사한 계약이나 상호합의로 간주했으며, 알베리쿠스 데 로자테는 이를 반복했다. 1312년 황제 하인리히 7세 주위에 있던 어느 이탈리아 법학자는 황제의 대관식을 결혼의 의식에 비교했다. 앞의 두 법학자처럼 『칙법휘찬』에 대한 주해를 저술했던 나폴리의 루카스 데 페나Lucas de Penna에게 군주는 명백히 국가[공동체]의 남편이었고, 국가와 그의 혼인은 도덕적이며 정치적 혼인으로 나타났다. 그는 『교령집』의 주교는 교회 안에 있고, 교회는 주교 안에 있다는 구절은 인용하는데, 튜더 왕조의 법률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신체 안에 있는 왕은 그의 신민들과 통합되어 있고, 신민들은 왕과 통합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네로에게 보낸 세네카의 말을 인용해, 당신은 국가[공동체]의 혼이고, 국가는 당신의 신체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에페소서 5장에 대한 정치적 주해를 계속하고, 교송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고, 아내는 남편의 신체이다”를 군주에 적용하여 군주는 왕국의 머리이며, 왕국은 군주의 신체이다라며, 도덕적 정치적 결합을 말했다. 루카스 데 페나는 왕국과 주교구의 신랑으로 군주와 주교의 대등화 뿐 아니라 군주와 그리스도의 대등화에도 도달했다. 국가는 군주로부터 독립체였다. 루카스 데 페나가 도덕적이며 정치적인 혼인을 설명할 때, 목표는 기본법, 즉 국고 재산의 양도불가능성을 예증하는 것이었다. 국고를 신부인 국가[공동체]의 지참금으로 해석하여, 사용할 자격은 있었으나 양도할 자격은 없다고 그렇게 서약했다고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혼인을 폴리스적[민주적] 통치에, 자녀에 대한 남편의 권력을 군왕의 통치와 닮았다고 주장했다. 주교와 군주는 초-개인적 집합적 신체인 교회와 국가의 머리이자 남편이었다. 법학자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사회적, 유기체적, 단체론적 요소를 군주와 국가에 이전했다.(212-218)
왕과 국가[정치공동체]의 관계는 결혼으로 비유되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교회와 주교의 관계에서 영향을 받았다. 대관식은 결혼식으로 비교되고, 이 결혼은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혼인으로 등장하는 데,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듯, 군주는 왕국의 머리가 되며, 이를 통해 왕은 다시금 그리스도의 위치를 차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는 군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는데, 이는 국고라는 양도불가능한 재산, 곧 지참금으로 설명되었다.
신비체의 유비는 정치적 신체의 여러 신분들과 왕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하는데, 결혼 은유는 국고의 특유한 성격을 묘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국가와 신비체와의 비교는 프랑스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는데 이는 샤를 5세 시대와 그 이후 프랑스 왕권의 신비주의 및 여러 신분들의 신비주의에 응하고 있었다. 장 제르송은 신비체에서 모든 신민들은 자신들의 봉건 군주를 옹호할 의무가 있으며, 인민들 각자는 자신의 신분에 만족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국가[공동체]의 신비체의 질서가 완전히 전복되기 때문이라 경고했으며, 조세를 신비체 전체에 균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군주를 정치체나 신비체와 동일시하면서 왕에게 두 신체가 아닌 하나는 자연적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적[국가공동체적] 또는 정치적인 두 생명을 귀속시켰다. 프랑스의 여러 다른 법학자들도 여러 신분들과 신비체를 언급했는데, 여기서도 정치적 신체 및 신비체의 유기체론적 개념 안에서 왕의 절대주의를 제한하는 국헌론자 세력도 존속하고 있다. 1489년 프랑스의 최고법원이었던 파리 고등법원은 왕을 머리로, 12명의 대귀족, 상서, 법원장들, 관리와 평의회 위원들로 구성된 신체로 간섭을 거부했고, 이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혼합된 신비체는 왕의 인격을 대표하는 데, 왕국의 최고법원은 프랑스 왕국의 지고한 정의이고, 왕 자신의 참된 왕좌, 권위, 장엄, 대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비체는 왕의 인격을 표상하거나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왕과 그의 참사회는 고등법원에 대항하여 행위할 수 없다는 이념이다. 마찬가지로 제한의 의미에서, 프랑스 법학자들은 왕의 왕국과의 결혼이라는 은유를 사용했는데, 이는 국고의 양도불가능성이라는 나라의 다른 기본법을 품고 있다. 프랑스아 1세 치하의 샤를 드 그라사이유도 왕이 프랑스 왕국과 결혼할 때, 국가[공동체]로부터 국고재산을 지참금으로 받았고, 양도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1547년 프랑스의 앙리 2세가 즉위할 때 대관식 의식규정에서 반지로 왕은 자신의 왕국과 결혼했다고 말한다. 1594년 의식규정은 축성된 날 왕은 자신의 신민과 분리할 수 없게 결합되어 왕은 왕국과 결혼했다고 말했고, 이러한 상호적 결합의 증표로서 샤르트르의 주교는 왕에게 반지를 증정했다. 왕국은 왕 안에 있고, 왕은 왕국 안에 있으며, 신민들은 왕과 통합되어 있고, 왕은 신민들과 통합되어 있다. 법학자 중 하나인 르네 쇼팽은 마침내 왕은 국가[공동체]의 신비한 배우자라고 이야기했다.(218-223)
프랑스는 조금 달랐지만, 신비체의 유비는 마찬가지였는데, 여기서 신비체를 구성하는 것은 신분들이다. 흔히 삼부회로 옮기는 프랑스의 신분회는 제신분회 또는 총신분회로 새기는 것이 더 적절한데. 신분들은 만족하는 반면, 균등해야 했다. 장 제르송은 왕에게 자연적 생명과 정치적[시민적] 생명의 두 생명을 부여하여, 이 책의 주제인 두 신체를 슬쩍 엿보게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왕의 절대주의를 제한하려 신비체를 활용하기도 했다는 것이며, 이때 국가가 아니라 파리고등법원을 신비체로 설명하며, 왕은 이에 대항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왕과 왕국의 결혼이나, 혼인의 반지, 국고라는 지참금의 양도불가능은 여기서도 나타났다. 왕국과 왕, 신민은 통합되어 있었다.
중세 잉글랜드에서 결혼 은유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지만, 제임스 1세는 1603년 의회 연설에서 “나는 남편이며, 이 도서 전체는 나의 정당한 아내다”라고 말했다. 실제 잉글랜드는 신비체 신조와 친숙했다. 랭카스터 왕가 시대의 존 포테스큐는 주저함 없이 왕국의 신비체에 대해 말하면서, 정치적으로(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법으로 왕국의 신체 전체에 의해서) 통치되는 왕국의 기원을 군왕[혼자]에 의해 통치되던 프랑스와 반대되는 것으로 논의했다. 그는 어떤 인민이 스스로를 왕국 또는 정치적 신체로 수립하기 원한다면, 신체 전체의 통치를 위한 한 사람, 즉 왕을 세워야 한다고 썼다. 포테스큐는 이를 사회적 신체와 인체의 유비를 상기시켜 입증하려 시도했는데, 머리 한 사람이 통치하고, 심장과 신경을 정치적 신체의 구조적 체계로, 신체의 신경을 국가의 법률과 동일시하며 설명한다. 포테스큐는 [왕국의] 신비체를 인간 사회 완성의 최종단계로 시각화했다. 린드우드의 윌리엄은 왕국의 유기체적 통일성을 인체와 사지의 통일성과 비교했고, 의지의 일치와 상호적 사랑과 관련하여 신비체와 비교했다. 이들은 정치적 신체와 신비체라는 용어를 되는 대로 사용했다. 1483년 존 러셀은 잉글랜드의 정치적 신체가 지고한 군주 왕을 머리로 하면서 세 신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논의했으며, 사지가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자연적 신체를 왕국의 정치적 신체와 비교하며, 인민의 집합체의 신비체 내지 정치적 신체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잉글랜드의 정치적 신체, 신비체, 또는 공적 신체는 왕이나 머리 혼자 만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의회 및 의회와 함께 왕에 의해서 정의되었는데, 이러한 복합적 신체의 개념, 및 복합적 권위의 개념은 그렇게 새롭지 않았다. 1365년 에드워드 3세의 한 재판관은 “의회는 왕국 전체의 신체를 표상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 모두는 결국 왕 혼자서가 아니라 왕과 정치체가 함께 국가[공동체]에 관해 책임을 지는 그러한 통치체를 설명하는 군왕과 정치[체]의 지배dominium regale et politicum라는 포테스큐의 유명한 정의에 도달한다. 잉글랜드의 왕은 정치체 중심이며, 마찬가지로 정치체 자체 또는 왕국의 신비체는 머리인 왕 없이 존재할 수 없었다.(223-227)
중세 잉글랜드에서 결혼의 은유는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흔하지도 않았다. 존 포테스큐 이래로 잉글랜드에서 인체를 유비로한 비유가 전해져 왔으며, 존 포테스큐는 군왕과 정치[체]의 지배 또는 통치dominium regale et politicum라는 왕과 정치체가 함께 국가공동체에 책임을 지는 통치체를 표명하게 된다. 여기서 비로소 신비체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정치적 신체 전체의 통치라는 잉글랜드적 형태는 세속 제도와 교회 제도를 유비로 설명하는 외관상 독특한 방식으로 이어졌다. 1401년 의회 폐회 시에 평민원 의장은 왕국의 정치적 신체를, 삼위 일체, 즉 왕, 영적이고 현세적인 귀족원, 평민원이 결합한 통일체 안의 삼위일체이자 삼위일체 안의 통일체를 형성하는 것에 비교했다. 그는 의회의 절차를 미사와 성찬전례의 거행과 비교했다. 이는 고딕 성기의 정치 사상이 왕국의 정치적 신체를 신비화로 이끌어 가는 것을 보여준다. 중세 잉글랜드에서 왕 혼자서만 신비체를 표상했을 법하지 않으며, 1608년 에드워드 쿠크는 왕의 정치적 신체가 신비체로 명명되었던 에드워드 4세의 연감을 언급했는데, 이는 잉글랜드에서 단체론적 개념의 진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머리와 사지를 구별하는 오래된 유기체론적 개념이 여전히 널리 퍼져있었다. 14세기초 프랑스의 필리프 4세가 교황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갈리아화된 교회Gallican Church” 전체를 왕을 머리로 하는 프랑스의 조국 안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가져오는 데, 유기체론적 학설이 유용했는데, 이제 헨리 8세가 그의 제국의 진정한 신비체인 잉글랜드 교회를, 자신이 왕으로서 머리였던 잉글랜드의 정치적 신체 안으로 통합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정치적 신체와 영적 신체의 융합은 절대적이고 완전했다. 여기서 전선이 기묘하게 역전되어, 국가를 신비체로 다루는 대신, 헨리를 교회를 단순한 정치적 신체로, 잉글랜드 왕국의 본질적 부분으로 다루었다.(227-230)
이러한 정치적 신체 전체의 통치 아래에는 교회적 유비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왕국의 정치적 신체를 삼위일체로, 의회를 미사나 성찬전례로 비교하기도 했으며, 중세 잉글랜드에서는 유기체론적 개념이 여전했고, 미왕 필리프는 “갈리아화된 교회”를 조국 프랑스 안에 부분으로 가져가는 유기체론적 학설이 유용했다. 이를 이어 헨리 8세도 잉글랜드 교회를 정치적 신체 안으로 통합시키게 된다. 교회의 세속화는 이렇게 정치적 신체 곧 왕국의 일부가 된다. 정치적으로 통일되었던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각각의 교회를 카톨릭인채로 갈리아화하고, 로마로부터 분리하여 잉글랜드에 속하게 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으로 인한 분열과 정치적 목적이 깔려있었던 신교와 구교 사이의 기나긴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단체론적 학설이 머리 단독 만으로 정치적 신체 전체와 동일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는 것이 교황이 있었던 곳에 교회의 신비체가 있었다고 주장했던 교황파 저술가들에 의해서 알려졌으며,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잉글랜드 법학자들은 여전히 머리와 지체를 구별했는데, 머리와 지체는 통합되어 하나의 단체를 구성하고, 머리는 지체를 단독으로 통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자체로 단체론적 학설이 일차적으로 유기체론적인 한에서, 반드시 사지와 머리의 완전한 동일시로 귀결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참된 군왕과 정치[체]의 지배dominium regale et politicum로서의 잉글랜드라는 포테스큐의 정의는 가장 정확한 서술로 남아있었다. 이는 그것이 유래했던 스콜락 철학자보다 잉글랜드 정치사상가 사이에서 훨씬 더 중요했고, 머리와 신체는 상호 의존하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왕이 최고였듯 다른 면에서는 정치체가 최고였다. 그와 동시대인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군주는 단지 자기자신을 집합적으로 자신의 모든 신민들의 피조물로 인식하는 한에서만 개별적인 시민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후에 군주는 하나하나[개별 시민] 보다 크고 그들의 통합체 보다 작다Princeps maior singulis, minor universis라는 표현으로 수렴되었다. 포테스큐의 왕은 정치적 신체 위에 있는 동시에 아래에 있었다. 중세 후기 왕권은, 13세기의 위기 이후에 정치체 중심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에 의해, 그 이후로 법에 의해 보증되었던 연속성은 이제 교회의 신비체처럼 결코 죽지 않는 영원한 왕국의 신비체에 의해 보증되었다. 신비적 성격을 부여받은 정치 공동체에 대한 관념은 교회,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 로마법과 교회법의 이론, 중세 후기 정치, 사회, 경제적 발전 전반 등의 자극이 동일한 방향으로, 즉 정치체를 교회와 함께 영원하게 만들고, 왕과 함께든 아니든 정치체를 정치적 논의의 중심으로 가져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중세 후기의 단체론적 문제는 앞선 시대의 법적 문제와 법의 전제의 우세를 능가하고, 이것이 정치체와 왕의 관계라는 더 광범위한 문제에 의해 흡수, 포함되어 있었다.(230-232)
정치체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머리의 중요성과 역할이 더 컸던 프랑스와 달리 잉글랜드는 “군왕과 정치[체]의 지배”라고 하는 포테스큐의 서술을 따라 머리와 신체의 상호의존을 이야기했고, 이것이 잉글랜드 정치사상에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는 군주가 개별자보다는 크지만 통합체보다는 작다는 표현에 이르게 된다. 중세 후기 왕권은 이제 왕국의 연속성을 결코 죽지 않는 영원한 왕국의 신비체에 두게 되었다. 정치체는 정치적 논의의 중심이 되었고, 법은 이제 정치체 및 정치체와 왕의 관계에 흡수되기에 이르렀다.
2025.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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