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5-1).

위는 교령집에 그려져있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그의 추기경들이고, 아래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아냐니에서 기욤 드 노가레에게 붙잡히는 장면을 그린 14세기 그림이다. 위의 모습도 아냐니에서라고 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대칙서 「하나이고 거룩한 교회Unam sanctam」의 원본은 유실되었다.

Ernst H. Kantorowicz, The King’s Two Bodies: A Study in Mediaeval Political Theolog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7, “V. Polity-Centered Kingship: Corpus Mysticum, 1. Corpus Ecclesiae mysticum.”

제5장 정치체 중심 왕권: 신비체

교회와 국가 사이의 무한한 교차 관계는 각각의 진영에 혼성물을 만들어 냈다. 휘장, 정치적 상징, 특권, 영예의 권리의 상호 차용과 교환은 끊이지 않았다. 교권은 황제의 외양을 왕권은 성직자의 기풍을 띠게 되었다. 13세기 초 영적 및 세속 고관[위엄] 모두 본질적 속성을 갖추었을 때, 포화상태에 이르자, 두 영향권의 차용은 지배받는 집단, 새로운 국가 군주국, 다른 정치적 집합체로 옮겨갔고, 정치적 신체들의 구조와 해석에 관한 법률적이고 국헌상 문제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교황은 군주이자 참된 황제라 명명되었으며, 교황의 대권 아래서 성직위계 기구는 절대적이고 합리적 군주제의 원형이 되는 경향이 있었고, 국가는 준-교회 또는 합리적 근거 위에 있는 신비한 단체가 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193-194)

무한히 반복되는 교차와 상호차용, 교환에 대한 추적이야말로 에른스트 칸토로비치의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선후관계와 인과관계를 논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어떤 시대의 흐름이랄까. 처음에는 머리 또는 수장이 뒤이어서 성속의 고관[위엄]들에서 상호차용과 교차가 이루어지다가, 마침내 정치공동체 전체가 상호차용과 교차에 이르게 되는데, 5장이 바로 이 정치공동체를 다룬다. 교회도 하나의 정치공동체의 모습을 띤다.

1. 교회의 신비체

로마교회의 단체론적 학설이 요약된 1302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대칙서 「하나이고 거룩한 교회Unam sanctam」. “하나요, 거룩한 교회, 공번되고[보편적이고, 카톨릭] 또 사도적인 교회를 우리는 절절한 믿음으로 신앙하고 견지하지 않을 수 없으며 … 교회 밖에는 구원도 없고 죄의 사함도 없을 뿐더러, … 이 여인[교회]은 단일한 신비체를 표상하며, 그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시다”(성염 역, 『제정론』, 217) 이는 발생기 세속적인 정치적 신체의 자기충족성이라는 도전에 응답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영적 권력에서의 노력이다. 그 머리는 그리스도, 가시적 머리는 대리자인 교황인 교회,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세계공동체 안에서 정치적 신체들이 순수하게 기능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성직위계적 관점을 강조한다.(194)

‘하나이고 거룩한’ 이라는 형용사로 시작되는 보니파키우스 8세의 가장 유명한 대칙서는 흔히 ‘우남 상크탐’으로도 불린다. 교황권을 가장 높이 제기한 것으로 이 문서는 불리지만, 교권과 왕권의 오랜 투쟁에서 교권이 패퇴하기 직전의 마지막 몸부림 같은 문서이다. 11세기와 12세기에 걸친 성직서임권 투쟁은 교황 측이 한때 기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결국 승자없이 끝났다. 13세기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 2세는 수 차례에 걸친 파문에도 불구하고, 교황에게 일방적으로 굴복하지 않았는데, 결국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 사후 프랑스를 끌어들여 그이 자손들이 이끌던 시칠리아 왕국을 무너뜨렸지만, 이 섬은 시칠리아 만종 사건 후 사실상 스페인에 속하게 되었다. 14세기로 들어서는 순간에 발표된 이 대칙서는 미왕 필리프가 이끄는 프랑스와 주교 및 교회 재산에 대한 과세권을 두고 벌인 오랜 투쟁 과정에서 발표된 것이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교황은 아냐니 사건으로 모욕을 당한 후 곧 죽고 만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아비뇽 유수와 교회의 대분열로 이어지는데, 이로써 한동안 프랑스가 사실상 교황을 지배하게 된다. 이 시기와 그 후 프랑스의 주교 임명 등 교회 문제에서 교황 보다 프랑스 왕이 우위에 있다는 입장을 갈리아주의[프랑스국민교회주의]라 부른다. 역설적으로 대혁명으로부터 100년이 지나 정교가 완전히 분리된 후 프랑스에서 갈리아주의는 흔적만 남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몇 명의 스페인과 독일 출신 교황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요한 바오로 2세 이전까지 5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교황은 모두 이탈리아인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귀족 출신. 프랑스 교회가 교황권에서 벗어난 갈리아주의야 말로 종교개혁에 의한 신교의 등장이 프랑스 지역에서 두드러지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신교를 후원해야 할 정치적 이익이 없었던 것. 오늘날 바티칸 박물관의 한국어 오디오가이드에도 그 내용이 등장할 정도로 ‘우남 상크탐’이 아주 중요한 문서이기는 하지만 그로부터 어느날 갑자기 견고한 교황제가 수립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신체]으로서의 교회라는 개념은 성 바오로[바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신비체라는 용어는 성서적 전통도 없고,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처음으로 두드러진 것은 카롤루스 왕조 시대, 코르비 수도원의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와 라트람누스에 의한 성체성사에 대한 논쟁 과정에서였다. 라트람누스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은 신체는 고유하고 참된 몸이었고, 성체성사는 신비체였다고 지적했다. 카롤루스 왕조의 신학자들의 언어에서, 신비체란 교회의 신체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었고, 그리스도교 사회의 단일성과 통일성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었고, 축성된 제병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변화는 실체변화에 대한 11세기의 대논쟁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인데, 제단의 성사를 영화하고 신비화하는 투르의 베렌가리우스의 학설과 이단적 분파의 가르침에 대응하여, 교회는 성체성사에 신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그리스도의 영적이지도 신비하지도 않은 실제적 현존을 가장 단호하게 강조하게 되는데, 축성된 빵은 의미심장하게 참된 몸 내지 자연적 몸, 그리스도의 몸으로 명명되었고,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이 1264년에 제정되었다. 원래 그리스도의 교회를 명시했던 사도 바오로의 용어가 이제는 축성된 제병을 명시하기 시작했고, 이제까지 제병을 서술하려 사용되었던 신비체라는 관념은 점진적으로 제단의 성사에서 통합된 그리스도교 사회의 조직된 신체로서의 교회로 이전되었다. 전례적이고 성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신비체라는 표현이 사회조직적 내포의 함축을 나타내게 되었다.(194-196)

신비체라는 용어가 아주 오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주목받지 않아왔음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의 바오로 서신에서 등장하는 교회의 몸의 비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담이지만, 피에르 아도는 지도자를 머리로 나머지를 사지로 비유하는 신체의 비유, 유기체로의 비유는 스토아 학파에는 아주 일상적인 것이고, 그 이전의 고대에도 흔한 것이었다. 누군가의 발명품이라 하기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플라톤도 자신의 국가를 말할 때, 머리, 가슴, 배로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로 나누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흔히 화체설이라 불리는 실체변화의 교리, 성찬(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실체가 변화한다는 것, 훗날 신교와 구교가 분리되는 결정적 이유가 됨, 이 교리는 12세기에 확립되지만, 여기서 언급하는 라드베르투스와 라트람누스의 논쟁은 9세기의 것이다. 여기서 칸토로비치는 고난받은 신체인 참된 몸과 성체성사 시의 신비체를 구분하는 라트람누스에 주목한다. 훗날 확립된 교리는 중간 어디에 위치하지만. 우선, 9세기에 신비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고, 이때 신비체는 성체성사 시의 제병[호스티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교회나 그리스도교 사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렸다. 11세기의 논쟁을 거치면서 교리가 확립되고, 축일도 지정되면서, 축성된 제병은 참된 몸, 자연적 신체,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 이와 반대로 이때까지 제병을 가리키던 신비체라는 말은 사회조직체로서의 교회로 이전되었다. 요약하자. 9세기에 신비체라는 말이 나타나 제병을 가리켰다. 11세기가 되자 교회를 가리키던 그리스도의 몸, 참된 몸이라는 말은 제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제병이 그리스도의 살로 실체가 변화한다고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신비체는 교회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는 교리상의 문제 때문이다.

성사에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에 주어진 새로운 강조에, 제도적이고 교회론적 측면에서 교회에 대한 명칭으로 신비체라는 용어의 전개가 있었다. 성직서임권 투쟁 이후 정치적 신체로서의 교회의 제도적 단체적인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위험이 생겨나자, 성직위계제의 행정 부문과 기술적 기구에 대해서조차 의도적으로 한층 신비적 해석에 의해 균형을 잡았던, 중세교회 세속화의 시작이었다. 신비체라는 새로운 용어는 그리스도의 법률적 신체를, 즉 투쟁하는 교회가 그 위에 기초를 두는 거인 같은 법적, 경제적 관리기구를, 동시에 성화함으로써 가시적 교회 유기체의 구조물을 이전의 전례 영역에 연결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신체 또는 정치적 법적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스스로 자기충족적 독립체라 주장하기 시작했던 세속의 정치적 신체와 대등하게 위치시켰다. 그때 이후 신학자들과 교회법학자들이, 주의 두 신체, 제단에서의 개별적인 참된 몸인 제병과 집합적인 신비체인 교회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두 신체 사이의 구별과 신적이고 인간적인 그리스도의 두 본성 사이의 고대 그리스도론적 구별이 단순하게 동일시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투르네의 시몬이 만들어낸 것은 개별적 신체와 집합적 신체 사이의 사회조직적 구별이다. 베르가모의 그레고리우스는 한 신체는 그 자신이고, 다른 신체는 그가 머리인 신체라 구별했고, 노장의 구이베르투스는 이분화된 주의 신체에서 개인적인 원초적 신체와 비유적 신체인 신비체를 구별했다. 13세기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개인적[인격적] 신체와 집합적 신체[신비체]를 관례적으로 구별한다. 주의 두 신체, 자연적 신비적, 인격적 단체적, 개인적 집합적에 대한 단언적 주장 속에서 왕의 두 신체의 정확한 선례를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196-199)

신비체라는 용어는 본격적으로 교회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어찌보면, 성직위계제의 발전과 교회가 세속조직을 닮아가는 데 따른 교회 측의 대응일지도 모른다. 관리, 행정 조직을 성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정 관리 조직은 가시적 교회로서 세속의 정치적 신체와 대응화되기 시작한다. 성직서임권 투쟁부터 3세기에 걸친 세속권력과의 지속적 투쟁과정을 생각해 보면, 성직위계제에 따른 관료화와 법적 정치적 조직의 성립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의 두 신체론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참된 몸인 제병과 교회라는 신비적 신체. 두 신체론은 너무나 당연하게 왕의 두 신체론의 선례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EKa는 끈질기게 이어지던 두 본성론과의 분리를 지적한다.

축성된 제병이 자연적 신체가 되었고 교회의 사회적 신체가 신비체가 되었던 용어법 상의 변화는, 서양사상사에서 사회에 대한 단체적이고 유기적 구조에 관한 학설의 서방의 정치 이론에 다시 한번 널리퍼지기 시작했고, 중세 성기와 후기의 정치적 사고를 가장 의미깊게 결정적으로 틀 잡아 형성하기 시작했던 시기와 동시에 일어났다.(솔즈베리의 요한, 『정치가론Policraticus』, 인체 유기체론) 의인화된 비유적 묘사가 영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신비체라 칭하는 행정상의 유기체로서의 교회 양자 모두에 이전되었다. 유기체 유형은 13세기 내내,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비체라는 용어를 사회현상으로서의 교회에 적용하기 시작했던 이후, 신비체에 대한 표준적 해석을 제공했다. 아퀴나스도 신비체가 성체의 영역에 속했고, 축성된 제병으로 표상되는 참된 몸에 대립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했지만, 아퀴나스조차 성체성사의 빵을 언급하지 않고 두 신체를 말하는 데, 참된(자연적) 몸은 육체적이고 육신을 가진 개별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로, 이는 사회조직적으로 교회의 초-개인적 집단적 신비체의 모형이 되었다. 참된 몸은 성사적 의미와 기능을 유지하지 않았다. 아퀴나스는 매우 빈번하게 교회의 신비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리스도의 바로 그 신비체였던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체가 되었다. 교회 유기체는 거의 법학상의 의미에서 신비체: 신비한 단체가 되었다. 이는 교회의 법률적 신체인 성직자 단체의 제도가 교회의 신비체와 일치할 수 있게하고 그에 의해 신비체라는 관념이 세속화할 수 있게하는 방향으로의 일보를 의미했다. 아퀴나스가 머리와 사지를 신비한 인격이라 말했을 때, 제단과 단절되었다. 신비체가 품고 있던 신비한 물질성이 포기되고,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단체로 변화되었다. 이는 신비적 인격이라는 법학적 추상개념으로 교환되었는데, 법학자들이 법률사상 안에 도입했고 중세 후기 내내 수많은 정치적 이론화의 기저에서 발견될 의제적 인격, 즉 표상된 인격을 연상시켰고 실제로 동의어인 관념이었다.(199-202)

신비체에 유기체적 해석이 더해진다. 아니 신비체를 유기체로 해석한다. 솔즈베리의 요한과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러하다. 그런데 EKa가 지적하는 아퀴나스의 두 신체가 앞서와 살짝 다르다. 이제 두 신체에서 제병은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란 고난받은 육체적 신체 그 자체다. 이 유기체로서의 신체가 신비체의 모형이 된다. 아퀴나스가 성체성사의 제병을 중시하지 않았다거나 이를 참된 몸의 현존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퀴나스가 신비체를 언급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참된 몸은 그리스도의 육체였다는 것. 동시대의 다른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유기체론적 해석을 따라 자연적 신체[참된 몸]와 신비체를 비교했다는 것. 안타깝게도 한국어로는 아직 46권까지 출간된 『신학대전』의 해당 부분은 49권, 54권, 59권 등이라 아직 한국어로 볼 수는 없다. 이 부분을 EKa는 앙리 드 뤼박의 Corpus Mysticum에서 재인용하는데, 어떤 부분은 「에페소서 주해」에서 인용한다. 여기까지는 나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일단 뤼박이 EKa가 말한 바로 그대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믿어볼 수밖에. 뤼박이 말하는 것, EKa가 해석하는 바는 신비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제병이 빠져있다는 뜻일 것이다. 신비체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적 신체가 주로 때로 참된 몸이 등장하는 데, 이때는 육체를 뜻한다는 것. 신비체는 교회로 이해되고, 법학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뤼박이 여기서 강조하고 있듯이, 아퀴나스는 반복해서 신비체를 신비한 인격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를 EKa는 법학적인 용어로 보고 신비한 물질성과는 단절되어 그리스도교 단체에 대한 지칭으로 훗날의 의제적 인격으로의 전환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EKa가 주목한 것은 신비체에서 신비한 인격으로 전개가 아니었을까?

신비체라는 이전의 전례적 개념은 퇴색했고, 상대적으로 무색의 사회조직적, 유기체론적, 법학적 관념으로 변형되었다. 이는 보니파키우스 8세 주위에서, 14세기 초 교황파 저술가들의 저술에서 교회는 후기로 갈수록 더욱 더 그리스도교 정치체, 곧 교회의 왕국 또는 교회의, 사도의, 교황의 군주국으로으로 나타났고, 로마법학자 루카스 데 페냐조차 아퀴나스를 인용하면서 교회는 인간들의 정치적 회중에 비교되고, 교황은 그의 전권을 이유로 자기 왕국에서의 왕과 같다고 말했다. 교회가 다른 세속 단체처럼 정치체로 해석되는 한, 신비체라는 관념은 세속적으로 정치적인 내용으로 가득채워져 있다. 이전에 성체에서 통합된 교회를 고양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원래의 전례적 관념이 황제와 같은 교황, 즉 그리스도교의 정치체 전체를 움직이고 규정하는 제1의 군주라는 지위를 고양하는 수단으로 성직위계적 교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제1의 원동자인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비유를 발견하게 된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머리인 것보다 더 용이하게 단체나 정치체 또는 왕국으로서의 교회의 신비체의 머리일 수 있다. 교황이 아비뇽 거주를 옹호하기 위해 알바루스 펠라기우스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즉 교회는 그 머리, 즉 교황이 있는 곳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국고가 있는 곳에 제국이 있다(Ubi est fiscus, ibi est imperium)는 로마는 황제가 있는 곳이다라는 고대의 격언이 발두스에 의해 비틀어진 것이다. 교황이 있는 곳이 로마라는 말은, 예루살렘, 시온산, 사도들의 묘소, 공통의 조국을 교황의 인격에 결합시켰던 교회법학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축성된 제병이 있는 곳이 아니라, 교황이 있는 곳에 신비체가 현존한다고 상정되었다.(202-205)

중세 후기로 갈수록 교회는 빠르게 정치체로 전환되고, 교황은 군주가 된다. 교회는 정치체로 해석되기에 이른다. 전례는 다시금 교황을 정당화하고 그의 권위를 강화하는데 활용되지만, 교황이 신비체의 머리인 한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머리라는 설명을 우회하지 않고서도, 단체와 정치체로서의 교회의 머리라고 신속하게 인정되기에 이른다. 교황이 있는 곳이 로마다, 교황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표현이 바로 그것. 전례가 정치체를 존재하게 하는 근거로 우선되었던 과거에서, 전례는 정치체를 보완하는 보조적 중요성 만을 가지는 것이다.

오컴의 윌리엄이 교황이 교회재산을 양도할 권력을 부정했을 때, 그는 이전 법학자들의 근거를 반복했을 따름으로, 그에게 개인적으로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교회라는 그의 신비체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아닌 하느님의 신비체로서의 교회는 신비체라는 관념이 본래의 희생제의로부터, 제단과 성체성사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그 신속함을 명시하는 개념이며, 그 결과 후대의 법학자는 교회가, “하느님이므로, 육체적이지도, 필멸하지도 않는 인격이기 때문에, 이전에 살아있었다고 말할 수 없는 어느 인격을 표상하는 단체”라고 용이하게 정의할 수 있었다. 제단의 성체를 명시하던 신비체라는 관념은 12세기 이후 교회의 정치적 신체 내지는 법률적 신체를 묘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그리스도의 두 신체에 대한 단체론적이고 비-그리스도론적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참된 몸은 교리와 축일에 의해 그 자체의 생명과 신비주의를 발전시켰지만, 고유한 신비체는 점점 덜 신비한 것이 되었고, 정치적 신체로서의 교회 또는 전이에 의해 세속 세계의 정치적 신체를 의미하게 되었다.(205-206)

오컴의 윌리엄이 말하는 하느님의 신비체를 EKa는 희생제의, 제단과 성체성사로 멀어지는 것으로 본다. 황제에 대한 묘사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에서 신[하느님]의 대리자로 변화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과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교회가 하느님이므로 육체적이지 않은 인격을 표상하는 단체라고 말하는 법학자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두 본성은 두 신체로 바뀌며, 신비체는 정치적 신체를 의미하기에 이른다. 어디까지나 EKa의 논의를 따라간다면, 적어도 나는 상당한 정도로 동의하는 바이고.

2025. 12. 15.

* 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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