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1년 알치아티의 우화모음집에 실린 삽화 중 하나. Quod non capit Christus, rapit fiscus라는 제목의 뜻은 ‘그리스도가 수납하지 않은 것은 국고가 수탈한다’이다. 해면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는 군주의 모습인데. 이 우화집에는 이런 류의 그림이 여럿이다. 아래의 설명 Exprimit humentes, quas iam madefecerat antè Spongiolas, cupidi Principis arcta manus. Prouehit ad summum fures: quos deïnde coërcet, Vertat ut in fiscum quae malè parta suum. 정확성은 포기하고 대충 단어만 맞추어보면, 탐욕스러운 군주의 빡빡한 손이 이미 적셔두었던 스폰지에서 물을 쥐어짠다. 도적들을 가장 높은 지위로 끌어올린 후, 사악하게 그들이 획득한 것을 국고에 돌리기 위해 그후 그들을 처벌한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스폰지는 백성이 아니라 신하(도적)을 뜻한다. 사악한 자들에게 지위를 주어 스폰지를 적신 후, 다시 짜낸다는 뜻. 나중에 결국 군주가 빼앗아가니 교회에 미리 바치라는 것인지. 교회가 먼저 자기 몫을 가져가고, 군주가 남을 것을 다 챙겨간다는 뜻인지? 알치아티는 장 칼뱅에게 법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Ernst H. Kantorowicz, The King’s Two Bodies: A Study in Mediaeval Political Theolog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7, “IV. Law-Centered Kingship, 3. Bracton.”
제4장 법 중심 왕권
3. 브랙턴
법의 아래이자 위의 왕 REX INFRA ET SUPRA LEGUM
솔즈베리의 요한, 프리드리히 2세,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기에 법의 위이자 동시에 아래에 있는 왕권이라는 개념은 근대에 비판하는 만큼 스콜라학파적(형식에 치우친)이지도 작용불가능하지도 않았다. 자기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국가라는 관념은 그 시대에 낯설었다. 당시 모든 사상가에 의해 공유되었던, 실정법에 대립하는 신적 자연법에 대한 신념 자체는 법 위에 있는 동시에 법 아래에 있는 지배자의 지위를 거의 필연적으로 수반했다. 중세 후기 정치사상가들과 법철학자들에게 이러한 모순은 작용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연법과 실정법의 영역 안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이중성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나타났다. 프리드리히 2세와 브랙턴의 헨리쿠스Henry of Bracton는 동시대인이었으며, 둘은 자주 동일한 로마법을 전거로 사용했다. 하지만 지배권과 법의 개념들에 대한 황제와 잉글랜드 사이의 차이도 주목할만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황제가 법에 구속되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입법하는 권력을 배타적으로 가졌다고 강조하고, 정의의 위이자 아래인 자신의 지위를 분명한 용어로 기술하면서, 자기자신을 법, 살아있는 법이자 정의의 형상 자체의 육화라고 여겼다. 이렇게 거창하고 과장된 이념형태나 형이상학은 브랙턴에서 찾아볼 수 없다. 새로운 아스트라에아[정의의 처녀 여신]인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 이전, 13세기 잉글랜드는 이탈리아나 대륙에 비해 사고방식이 덜 메시아적이었다. 브랙턴의 저작에서 정의의 형상은 법의 구체성으로 가려졌다.(143-147)
법 중심 왕권에 대한 검토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처음은 솔즈베리의 요한의 『정치가론Policraticus』에서 전례에서 법학으로의 변화를 기술한다. 솔즈베리의 요한은 색슨인으로 잉글랜드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공부했고 다시 잉글랜드에서 경력을 이어가다 샤르트르의 주교가 되었다. 지금과 같은 차이는 아니겠지만. 다음은 프리드리히 2세로 그는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이어서 할아버지 바르바로사와 아버지는 독일 지역에서 활동했지만 자신은 시칠리아에서 태어났고 교황의 보호 하에서 시칠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제위를 위해 이탈리아 북부를 통과해서 독일을 다녀오기도 하고 십자군 원정으로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 왕으로 등극하기도 했으나,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세번째가 브랙턴의 헨리쿠스로 무대는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간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로마 카톨릭 교회, 이탈리아 남부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궁정, 다시 잉글랜드의 법률 연구로. 에른스트 칸토로비치는 12세기와 13세기의 유럽을 순회하면서 전례에서 법률로의 전개를 파악해 나간다. 여기서 중요한 전거는 로마법이며, 로마법의 재발견이다.
브랙턴은 왕관의 숭고함을 감소시키거나 군주의 대권을 손상시키려 하지 않았으나, 왕이 “법 아래에” 있다는 점을 확고하게 강조했다. 브랙턴의 왕도 역시 어떤 점에서 법의 위이자 아래에 있었다. 브랙턴과 그 시대 정치이론가들의 난점은 법lex이라는 단어의 애매한 사용이다. 13세기 잉글랜드에 아퀴나스의 언어로 실정법의 강제적인 힘에 대해서도 왕을 복종시키려는, 법의 전제를 수립하려는 강한 경향성이 있었다. 하지만 브랙턴와 에지디우스에 따르면 왕은 오직 신법이나 자연법에만 구속되어 있다. 이는 초월적이고 초법률적인 추상태인 자연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성직자, 유력자, 인민의 권리를 포함하는 현세적이고 구체적이고 현시로서의 자연법에 대해서이며, 이는 불문법과 관습법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는 잉글랜드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왕이 그에 구속되어 있는 것으로 브랙턴이 간주하는 법의 체계는 프리드리히 2세가 충성을 공언한 그것보다 훨씬 더 컸다. 또한 “법 위에 있는” 왕의 지위를 폐지한 것이 아니다.(147-149)
왕은 법 위에 있으면서 법 아래에 있다. 후대에 주목하는 브랙턴의 주장은 왕도 법 아래에 있다는 것으로, 사법심사의 근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왕도 신법과 자연법 아래에 있지만, 이 자연법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타난 자연법으로 이는 당연히 불문법과 관습법을 가리키게 된다. 브랙턴의 유명한 저서가 『잉글랜드의 법률과 관습에 대하여De legibus et consuetudinibus Angliae』(아래) 임을 기억해 두자.

법이 왕을 만든다lex facit regem라는 브랙턴의 법격언은 제한의 의미로만 읽혀서는 안 된다. 왕은 그를 왕으로 만든 법에 구속되어 있지만, 그를 왕으로 만든 법은 또한 왕의 권력을 강화하고 왕을 법적으로 법률들 위에 위치시키는 특별한 권리를 부여한다. 여기서 아조 등 로마법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왕권법이다. 법의 제한이 군주를 기쁘게 하는[가납하는] 것은 법률의 효력을 가진다 즉 군주가 의지하는 것이 법률이다와 불일치하지 않는다. 왕권법은 인민이 군주에게 기쁨에 따라 법률을 만들 수 있는 권력을 양도한 것이기 때문. 울피아누스의 군주를 기쁘게 하는 것Quod principi placuit[군주가 인정하는 것]이라는 문구가 절대주의로 인도되었을 수 있다. 동시에 황제들이 법에 대한 충성을 단언했던 존엄법lex digna를 인용하여 위험을 회피했다. 브랙턴은 이와 동시에 기쁘게 하는placuit이라는 단어를 한정하여, 헌정주의에 적합하도록 했는데, 통제되지 않고 신의 영감을 받는 군주의 인격적 지배가 아니라, 유력자들의 평의회에 의해 통제되고 그에 의해 영감을 받는 비인격적이거나 초인격적인 왕의 지배를 추론했다. 유력자들의 평의회를 기쁘게 하는 법. 브랙턴의 시대와 그 이후의 중세 잉글랜드에서 헌정주의 투쟁에서, 왕의 평의회와 그 구성이 투쟁의 초점이었다. 13세기에 조언 없이 입법을 할 수 있었던 왕은 없었다. 브랙턴은 왕의 기쁨을 그의 합법적 조언자들의 기쁨placet에 위임하여 취지를 한정했다.(150-152)
여기서 다시 한번, 왕권법lex regia와 존엄법lex digna가 등장한다. 군주가 법을 만든다 동시에 군주가 법을 존중한다. 이때 군주가 법을 인정하는 것을 표현할 때, 기뻐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과거에는 이를 군주가 ‘가납’한다는 등의 궁중 용어 같은 한자어를 썼지만, 여기서 EKa가 풀어나가는 것 처럼, 기쁘게 하다 또는 기뻐하다라는 뜻으로 please를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최근까지 사용된 용법이다. 그런데 이 기쁘게 하는 대상이 왕에게서 유력자들의 평의회로 넘어가면서 초인격적인 통치로 넘어가게 된다.
교회법에 의해 채택된 “군주는 모든 법률들을 자신의 흉중문서고 안에 지니고 있다”라는 로마법의 격언은, 입법할 때 군주는 모든 관계있는 법률을 자기 정신에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법격언과 관련하여 이탈리아 법학자들은 평의회 위원들을 언급하는데, 피스토이아의 퀴누스Cynus of Pistoia는 흉중문서고는 “탁월한 법의 박사들로 가득차 있을 그의 궁정에서”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며, 마타에우스 데 아플릭티스Mattaeus de Afflictis는 “자신의 신체의 일부인 그의 평의회 위원들 덕분에, 군주는 자신의 흉중문서고 안에 모든 법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왕의 흉중문서고인 전문가들과 왕관의 법학자들의 평의회는 평의회 위원들을 통해서 말하는 군주의 입인 반면, 브랙턴에게 평의회의 입으로 나타난 것이 군주나 왕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왕권의 제한이라는 의미에서 배타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되는 데, 결국 왕의 인가에 의해서 어떤 법률이 법이 되기 때문이다. 왕은 법의 저자(만드는 손)이다. 브랙턴은 법을 만드는 것이 왕에게 속하기에, 법을 해석하는 것도 왕에게 속하며, 법의 기원과 보호는 하나의 손에서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했다. 왕을 만드는 법과 법을 만드는 왕이 상호간에 서로를 조건짓는 관계로, 법의 아들인 왕은 법의 아버지가 되는 법과 군주의 상호성과 상호의존성이다. 왕은 자신의 것인 동시에 신의 것인 법에 복종함에 의해서 신처럼 행동하는 곳에서만 그리고 그 때에만 신의 대리자로서 인정받는다.(153-155)
또 하나 흥미로운 표현형식이 등장한다. in scrinio pectoris, in scrinio pectoris sui로서 이때 주어는 군주가 되기도 하고 교황이 되기도 한다. 자기 가슴 속의 문서상자 등으로 풀 수 있는데, 여기서는 ‘흉중문서고’로 표기했다. 이 말의 의미 자체는 일종의 전제적인 군주를 전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왕이 자기 가슴 속에서 어떤 법이든 꺼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13세기 법학자들은 왕의 ‘흉중문서고’를 평의회와 군주의 조언자로 평가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하는 기쁘게 하는 즉 인정하는 존재로 연결된다. 그러나 여전히 군주는 법 위에 있다. 군주가 법을 확정한다. 군주가 법을 해석하고. 법의 보호자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법의 위 이면서 아래에 있으니, 군주는 법의 아버지이자 아들이다.
브랙턴은 왕은 자기 왕국에서 상위자는 말할 것도 없고, 동등자도 갖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왕은 신과 법 아래에 있어야만 하는데, 법이 왕을 만들었기 때문이며, 왕이 신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법 아래에 있어야 하는 것은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유사성을 통해 분명해진다. 브랙턴의 비교는 법의 종복 만이 법의 주인일 수 있거나 될 수 있음을 함의했다. 나아가 이는 왕이 독생한 아들 그 자신처럼 법에 복종해야만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신의 대리자로서 다른 모든 사람들 위로 높여진다는 것을, 모든 왕의 대권은 바로 그 대권을 부여했던 법에 구속되어 있음에 대한 왕의 인정에 의존하고 있음을 함의했다. 비록 신의 대리자로서 동등자는 없지만, 왕은 그런데도 법에 의해 구속되어 있고, 판사 앞에서 그의 신민들 중 가장 작은 자와 같다.(원고일 경우에만) 브랙턴의 방법은 한정을 통한 고양이자 왕의 고양을 따라 이어지는 한정 그 자체이며, 이는 한편으로 법에 대한 복종 없이는 진실한 대권도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와 법 위에 있는 법적 지위는 법 아래에 있는 법적 지위도 또한 존재할 때만 정당하게 존재한다는 논리에 의존하고 있다. 법을 준수하는 왕은 사실 그 자체에 의해 신의 대리자가 되고, 그는 법을 따르는 것에 의해서 법 위에 있는 입법자가 되며, 그는 존재하는 법률들의, 관리들이나 사적 개인들에 의해 논박되지 않을 왕으로서의 행위의 책임있는 주창자가 된다. 왕이 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그는 왕이 아니라 폭군일 따름이다. 브랙턴의 정치이론은 겉보기에 모순적인 것들에 달려 있다. 신법과 실정법의 이원성을 가진 중세 법 체계에서, 왕은 동시에 법 아래이면서 위에 있거나, 정의의 아버지이자 아들이거나 형평의 모상이자 종복이라는 지배자 개념으로 귀결될 것이며, 브랙턴의 논고에서 잉글랜드의 왕은 자기 자신보다 크면서 보다 작은 자et maior et minor se ipso로 등장한다.(156-159)
아직 그리스도교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위와 아래, 아버지이자 아들, 모상이자 종복이라는 식의 논지 구성은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이자 인간인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충분히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왕이 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주장 역시도 성서에서 예수의 행위에 바탕을 두고 정당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어떻든 중요한 주제는 법이다. 핵심은 왕이 법의 종복이며, 법 아래에 있으며, 법에 구속되어 있고, 그 때에만 왕이며, 신의 대리자요, 입법자가 된다는 것이다. 중세 법 체계 또는 중세 이론에서 낯선 것이 아니었다.
브랙턴의 로마의 판사 앞에서의 겸손한 그리스도와 왕의 비교는 브랙턴의 왕권 개념에 대한 또 다른 문제인 정치적 그리스도론으로 이끌 수 있다. 브랙턴의 논고에서 이 비교를 제외한다면, 왕은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 일관되게 신의 대리자로 칭해지고 있다. 브랙턴은 아조에게 몇몇 단어를 추가하는데, 왕은 신을 대신하여 신의 보좌 위에서 신의 대리로 행위하는 한 사람으로, 왕의 대리로 행위하는 왕립 판사들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같이 행위하는 반면, 신의 대리자인 왕은 신(성부 하느님)의 대리같이 행위한다. 주교가 그리스도의 모상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왕은 신의 모상을 가지고 있다는 격언은 4세기의 위僞암브로시우스로부터일 것이며, 카스울프Cathwulf, 노르만 무명씨, 위클리프, 플뢰리의 휴고Hugh of Fleury 등에서 반복된다. 브랙턴의 저작에서 신의 모상인 왕, 그리스도의 모상인 성직자는 신의 모상인 왕, 그리스도의 모상인 판사로 바뀌었는데, 이는 신학적 영역에서 법적 영역으로, 성직자로부터 법률 서기로, 교회의 성직자로부터 정의의 성직자에게로 이전되었다. 심판하는 그리스도의 모상과의 유사성으로 행동하는 자,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인 왕에 의해서 표상되는 성부의 “보좌를 공유하는 자”가 된 정의의 성직자이다. 왕은 판사들과 함께, 하늘의 보좌 위에 앉은 신적인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성부 하느님을 상징적으로 표상하지만, 왕이 법에 복종하는 자일 때는 언제나, 인간 그리스도의 대형으로, 왕은 판결하고 입법하고, 법을 해석할 때는 법 위에 있는 신 같은 자인 동시에 그도 역시 법에 복종하기 때문에 법 아래에 있는 성자나 여느 보통 사람 같은 자이다. 브랙턴의 왕은 법 위와 아래에서 이중 지위를 가지고 있다. 프리드리히 2세와 달리, 브랙턴의 잉글랜드에서 법 아래sub lege있는 왕은 현실적이고 명확한 의미를 가지도록 의도되었다. 분의 험프리 대 클레어의 길버트Humphrey of Bohun v. Gilbert of Clare 사건에서 왕은 법률과 관습 위에 있는 동시에 정의의 채무자debitor iustitiae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표현형식의 잉글랜드식 변형은 유명한 잉글랜드의 왕 헨리에게 명한다Praecipe Henrico Regi Angliae라는 영장[직무집행영장]의 표현형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보았다는 주장만 남아있고 실제 존재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왕K이 왕k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영장은 적어도 13세기 잉글랜드에서 인간적 상상의 범위 안에 있었다. 고위 관리였던 노르만인 귀족 시몽(시몽 드 몽포르)은 왕이 원했지만 주 왕의 왕관에 반하는contra coronam domini regis 특허장에 국새로 날인하기를 거부하여 해임되었다.(159-164)
왕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그리느냐 하느님의 대리자로 그리느냐는 중세 정치신학에서 중요한 문제다. 교황권과의 다툼이 있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 위치에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성부 하느님의 대리자로 그려지기 시작한다. 세속 권력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성직자들이 천상의 위계에서 하위에 있다는 식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브랙턴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흥미로운 변화가 발견된다. 황제와 왕 아래에 있던 성직자들이 판사로 바뀐다. 판사가 그리스도의 모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전례에서 법학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다. 물론 왕도 법 아래에 있어야 하고 있을 수 있는데, 이때는 성부 하느님 아래서 그에게 복종하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상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성부, 성자의 관계로부터의 유비나 유추는 더 이상 논의를 전개하는 근거가 아니다. 논의를 정당화하고 보충하는 덧붙임에 가깝다.
그리스도-국고 CHRISTUS-FISCUS
브랙턴의 관심은 법, 행정, 국헌에 관한 문제에 있었지만 그의 시대에 국가에 대한 신학주의[신학화된 이론]가 전개되고 있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신학 언어와 사상을 세속국가의 새로운 조건에 적합하게 만든 결과였고, 부분적으로는 왕국 자체라는 공동체의 적절한 필요로부터 생겨난 비인격적 공적 영역을 수립한 결과였다. Nullum tempus currit contra regem, “왕에 대하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법격언에는 항구성의 관념 또는 초개인적 영속의 관념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시효와 양도불가능성이라는 두 관념의 존재를 전제한다. 시효는 법률에 의해 정해진 기간 동안 연속적으로, 도전받지 않고, 평온하게 선의로 점유한 소유물에 대한 소유권이나 권한의 상실을 의미했다. 시효는 교회법에서 중요한 개념이었으며, 브랙턴의 시대에 시효취득 요구에 대한 숙고가 왕립 판사에게 중대한 것이 되었다. 시효와 시간의 시효적 효과는 왕의 토지와 권리의 복합체에 대한 양도불가능성 관념과 격돌할 수 잇었기에 중요했다. 왕의 권리와 토지의 양도불가능성 개념은 시효 개념과 함께, 왕에 대하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표현형식에 대한 근거를 형성했고, 이에 따라 왕관의 재산에 대한 시효 주장이 무효화되었다. 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에서도 1275년에 왕령지royal demesne의 양도불가능을 명시한 공식문서가 있다. 헨리 2세의 즉위와 함께 왕령지를 공고하게 했고, 양도불가능하다는 이해가 심어졌는데, 본질은 헨리 2세가 창설한 권리와 토지의 사실상 양도불가능한 복합체로서, 후에 고래의 직영지ancient demesne로, 로마법의 언어로 왕국의 공적 재산bona publica 또는 국고재산fiscal property를 형성했다. 고래의 직영지, 곧 개인적 왕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그의 사적 재산이 아닌 권리와 토지의 초개인적 복합체의 순전한 존재가 그와 동시에 발전된 비인격적인 왕관Crown이라는 관념에 실체를 부여했다. 헨리 2세의 관리들은 봉건적 권리에 의해 군주국monarchy에 들어가게 된 토지와 보다 고유하게 왕 또는 왕관에 속하는 왕령지인 토지를 행정적으로 구분해야 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편찬자는 왕의 대관 서약에 “왕국의 왕관의 모든 토지를 전체로서(in integrum cum omni integritate, 모든 완전함으로 완전하게) 어떠한 감축도 없이” 보전하고, 양도되었거나 상실했던 모든 것을 회복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야 할 것이라 제시하기도 했다.(164-167)
Nullum tempus 왕은 시간 즉 시효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상이 생겨난다. 다시 말하면 왕의 권리와 토지는 양도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고래의 왕령지를 공고하게 한다. 왕이 시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왕의 권리와 토지는 양도불가능하다면, 이는 누구에게 대항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왕 자신이다. 왕의 권리를 양도하는 자도, 왕의 토지를 양도하는 자도 왕이다. 비록 선임 왕들이 양도하거나 증여한 토지라 할지라도, 후임 왕과 궁정은 재판을 통해서 토지와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 왕에게는 시효가 없기 때문에, 그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대관 서약에 왕관에 속한 토지의 보전과 회복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추상화된 왕관이라는 관념이 왕 보다 더 중요하게 된다. 현대 국가들이 한 조각의 땅도 내어주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것을 보라.
브랙턴은 nullum tempus라는 법격언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그는 왕의 평화와 재판권에 속하는 것들이 준신성물res quasi sacrae라서 교회에 속하는 신성물 같이 양도불가능한 것이라 설명했으며, 이는 왕국의 어떤 공통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공유물公有物”이었다. 브랙턴은 이것이 만민법으로부터 유래하는 왕의 특권으로서 왕관에 속하는 것이며, 이는 자연법과 유사한 반-신적인 성격 내지 완전히 신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준신성물과 관련하여 왕의 권력은 명백히 법 위에 있었다. 왕은 왕의 권리를 오랜 시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왕관의 본질로부터 소유하는 것이고, 그의 이의제기는 왕국의 공통의 유익을 위해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유물 또는 준신성물에 관련하여, 왕은 자기 자신의 사건에 대해 판사가 될 것이며, 준신성물에 대해 저질러진 부정행위는 시효의 법률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Nullum tempus라는 법격언은 왕과 그의 시효로 소멸되지 않는 권리를 다른 모든 인간을 구속하는 법 위에 위치시킨다. 왕은 난파선의 잔해나 매장물, 대어 등은 공통의 유익과 관련이 없으므로 개인에게 양도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 브랙턴은 왕관을 왕관답게 만드는 본질적인 것과 왕에게 속한 우유적인 것 사이에, 왕국의 공동체의 공적, 공통의 유익을 위해 왕에게 부여된 권리와 개인으로서 왕의 유익을 위해 도움이 되는 다른 권리 사이의 명료한 구별에 도달했지만, 이러한 사소한 군왕의 권리 조차 만민법에서 유래한 것으로 주장되어, 왕의 양도에 의해서만 취득할 수 있고, 시효에 의해서 취득할 수는 없었다. 시간의 효과를 통한 양도에 대항하는 이러한 일반적 보호는 “비신성물[그렇게 신성하지 않은 사물]” res non ita sacrae (통행세, 장원의 재판권)에 대해서는 시효로부터 보호하지 못했는데, 이는 고래의 직영지에도 군왕의 권리에도 속하지 않아, 로마법학자들이 국고재산과 구별하여 황제의 세습재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왕이 자신의 기쁨에 따라 증여할 자격이 있고, 직무의 본질에 관련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관련되는 것quod omnes tangit도 아니고,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키는 데에만 도움이 되었던 권리, 토지, 자유와 관련하여 왕은 시효의 법률에 구속되어 있었다.(168-171)
준신성물res quasi sacrae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공유물res publicae를 가리킨다. 말할 것도 없이 훗날 republic 공화정 또는 공화국이라는 단어의 시작이다. Res publicae는 공적인 것으로서의 국가를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준신성물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데, 이는 신성물 또는 신유물神有物로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양도불가능성이라는 속성을 전유하기 위해서 있다. 로마법의 개요서인 『법학제요』는 법法, 인人, 물物에 대한 규정으로부터 시작한다. 물은 신법과 인법에 관한 것으로 나뉘며, 신성물, 종교물, 신호물 및 공유물, 사유물로 구별된다. 현대 한국의 민법 역시, 총칙, 물권, 채권, 친족, 상속의 순서로 서술되고 있다. 총칙에서 인, 법인, 물건의 순으로 기술한다. 국가라고 하는 공유물은 신성물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것으로 그 본질에 해당하는 것은 양도불가능하다. 본질이 아닌 난파선, 매장물, 대어 등의 권리는 양도할 수 있지만. 비신성물에 해당하는 봉건 장원에 대한 권리 등은 귀족에게 양도된 것이다. 여기서 예민한 구별이 등장한다. 결국 이는 왕의 행위를 제한하는 것이며, 전쟁과 평화, 확장을 위해 여러 나라의 왕족들끼리 빈번하게 결혼하는 과정에서 상속과 증여 등을 통해 하나의 왕관 아래 결합된 왕령지 및 직영지가 분할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국고란 어떤 의미에서 왕권을 제한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약하면 어떤 점에서 왕은 시효의 법률 아래 즉 시간 안에 있었고, 다른 점에서 준신성물 또는 공유물과 관련하여 시간과 시효의 효력에 영향을 받지 않고 즉 ‘거룩한 영들과 천사들’ 처럼 시간을 넘어서 있었으며 영속적이고 항구적이었다. 왕은 시간과 관련하여, 명백히 하나는 시간적 다른 하나는 영속적인 “두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시간에 관하여 왕은 쌍생 인격으로, 어떤 면에서는 시간에 구속되어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시간을 넘어서 있었다. 이러한 분할은 지배권 그 자체의 개념 안에 있는 이중성이다. 구별하는 선은 개별적인 신민들과의 관계에서 왕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문제와 모든 신민에게, 즉 정치체 전체, 왕국의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 사이에 그어져야 한다. 봉건적(주군과 봉신 사이의 개인적 관계에 관련) 왕과 국고의(모든 사람에게 관련) 왕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 낫다. 브랙턴도 준신성물과 국고물을 동일시하는 동시에 주의 깊게 통치하는 왕rex regens과 왕관을 구별했다. 브랙턴은 왕관과 국고에 관해 이야기할 때, 명료하게 공적 영역과, 공통의 유익을 언급한다. 그는 불변성과 항구성이, 교회재산, 성물, 그리스도의 사물 만이 아니라 준신성물 또는 국고물에도 속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함께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시기 정치사상의 중심문제를 가장 정확하게 예증하는 그리스도와 국고라는 이상한 반립명제 또는 평행이 등장한다.(171-173)
왕의 두 본성과 쌍생 인격이 다시 한번 등장한다. 왕의 이중성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개인으로서의 왕과 그 자체로서 본질로서의 왕 사이의 이중성이 아니다. 영향을 미치는 대상의 분할이다. 모든 신민 즉 정치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불변성과 항구성이 한 마디로 말해, 왕이 자의적으로 양도하거나 증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훗날 영토국가로 발전하게 될 전조가 보인다. 그러나 개별적 신민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 봉건 귀족들의 권리, 그들에게 봉토로 부여된 토지는 준신성물이 아니라 비신성물에 속하는 것이므로, 제한되지 않는다. 기묘한 분할이다. 항구적이고 불변적인 것은 이를 유지할 의무와 제약이 따르는 것이다.
1441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어느 수도원이 특허장에 기초해 과세의 면제를 요구했던 소송에서 판사 존 패스턴John Paston은 자신의 토지를 사수死手, 교회에 양도한 후 중죄인으로 죽은 남자의 사례를 상정했는데, 그는 중죄인의 동산은, 그리스도가 확보하지 못한 것은 국고가 확보하기 때문에 왕에게 몰수된다고 주장했다. 1531년 이탈리아의 알티아치의 우화모음집에도 해면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는 모습이 등장한다. 특정한 부담금이 왕과 그리스도(주교의 금고) 사이에서 분할된다는 의미인데, 이는 법률가들에 의해 속담처럼 사용되어오던 문구의 인용이며, 1355년 즈음 플랑드르의 로마법학자 레이덴의 필립푸스는 유언없는 상속재산에 대한 국고의 권리에 대해 저술하면서 그리스도의 세습재산과 국고는 비교될 수 있다고 언급한다. 궁극적 전거는 그라티아누스의 『교령집』으로, 그리스도가 수납하지 않은 것을 국고가 수취한다(Hoc tollit fiscus, quod non accipit Christus)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 주해에서 그리스도가 국가를 갖지 못했다면, 국고도 결여하고 있다는 구절이 있으며, 이것이 그리스도의 국고에 기여했다. 그리스도와 국고를 중세법학자들에게 비교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교회 재산과 국고 재산 양자 모두의 양도불가능성에 있다. 교회의 영적 사수死手와 국가의 세속적 사수死手. 루카스 데 페나는 사수manus mortua라는 단어를 영속수manus perpetua로 대체하는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영속성이 교회와 국고 양자에 중요한 공통의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교회와 국고는 동등한 조건으로 함께 걷는데, 제국과 로마 교회에 대해서는 시효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법률가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의 진실성에 대해서가 아니라 유효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군주는 제국의 재산을 양도할 자격이 없고, 교회도 기증받은 토지를 시효로 취득했다고 주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3세기에 교회 재산이 개별 주교나 교황의 생명에 의존하지 않는 만큼 개별 지배자의 생명에 의존하지 않는 제국이나 왕국 내에서 초인격적인 연속성이나 영속성을 국고가 대표한다는 개념이 인정받게 되었다.(173-177)
이 절의 제목이기도 한, 그리스도와 국고의 반립과 평행이 드디어 등장했다. 이 둘은 사수死手라는 관념으로 연결된다. 죽은 손dead hand, mainmorte, manus mortua, 교회나 국가 또는 그에 준하는 것의 손은 죽었기 때문에, 그들의 부동산은 양도할 수 없다는 것. 한 번 그리로 들어간 것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 양도하거나 증여할 손이 없다는 것. 먼저는 그리스도 즉 교회가 사수이고, 이를 따라서 국고도 사수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국고가 연이어서 개인을 수탈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쥐어짜고 남은 것은 국고가 쥐어짠다. 위의 그림이 보여주듯. 흥미로운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 대한 논의이다. 사수를 근거로 이 기증의 유효성을 따졌다. 에라스무스가 기증장이라는 문서의 진실성을 논파하기 전부터 이 기증장이 위조되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었지만, 당시에 중요한 것은 그 문서가 교회에 도움이 되는 지의 여부였지, 진실성 여부가 아니었다. 이 점이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지점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로마에 다녀왔는데, 바티칸 박물관의 한국어판 오디오 가이드는 특히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를 설명하면서, 세속 권력에 대한 교회 권력의 우위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의 유효성을 여전히 말하고 있었다. 이제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조금 무서웠달까. 어쨌든 연속성을 대표하는 것은 왕 그 자체, 왕(K)가 국고가 된다.
로마법과 그 국고법은 지배자의 인격으로부터 분리된 불멸의 국고라는 존재를 상술하는 새로운 방법을 책임졌고, 교회 재산의 양도불가능성에 대한 교회법 개념들은 독립적이고 비인격적 국고의 수립을 위한 모형으로 도움이 되었다. 12세기 이래 법률학자들은 국고라 불리는 이상한 사물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데, 왕의 사적 재산을 의미했던 카롤루스 왕조 시대에는 국고를 왕의 돈지갑sacculus regis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국고의 인격적이고 사적인 양상으로부터 보다 비인격적이고 공적 해설로 나아갔다. 국고와 국가, 군주에 대한 수많은 질문이 제기되었지만 일치된 답변은 없었다. 법률가들은 공유물과 사유물 사이를 구별하려 노력했고, 공법에 속하는 사물의 새로운 영역, 왕국 안에 어떤 새로운 왕국을 창출하려는 참이었다. 『표준주석』은 국고를 공유물로 생각했고, 국고는 인민이나 군주의 것이 아닌 제국의 금고로 간주되었으며, 국고재산은 양도불가능했고, 영속적이거나 불멸했다.(177-180)
어떤 의미에서 교회법의 발전이 다소간 먼저였다고 할 수 있다. 고대 로마법이 가지고 있던 관념들이 교회법에서 되살아났지만, 중세 초기에 다시 재정비되던 정치권력은 개인으로서의 왕의 권위에 더 기대고 있었다. 왕의 지갑이 그러한 표현이다. 중세 성기로 넘어가면서, 개인으로서의 왕의 권력을 제한하면서 왕권은 강화되는데, 영속성, 항구성, 불변성이 바로 그 강화되는 왕권의 속성들이다.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반론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사적 개인들, 영주들 등의 손 안에 있던 국고의 손실과 국고의 권리, 재산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매우 다른 사안이었다. 기억할 수 있는 시간tempus memoratum은 로마교회와 관련하여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100년으로 고정되었으며, 교회재산에 대한 시효는 100년 이상이 경과한 후에만 유효했는데, 이는 교회 만의 특권으로 교회 재산을 보호하고 양도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발두스와 다른 법학자들은 100년이라는 교회의 특권을 제국도 향유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국고에 대항하는 시효에 관한 권리를 인정하는 로마법은 100년의 시효를 알지 못했기에, 당시의 사건에서 국고는 통상 40년, 랑고바르드 법에 의하면 60년의 기간으로 보호되었다. 발두스가 반복해서 오늘날hodie (유스티니아누스 시대를 뜻하는 말)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는데, 100년의 시효와 관련하여 가까운 시기가 되어서야 겨우 교회와 제국의 국고가 대등해졌음을 함의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우구스투스의 서』에서 국고에 대한 40년, 60년의 시효를 100년으로 연장한다고 말했으며, 시칠리아의 주석학자들은 이 법률로 100년의 시효가 확립되고, 황제가 교회의 특권을 국고에 이전했음을 명료하게 했다. 교회와 국고의 대등화aequiparatio.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반론할 수 없는 시간이 대략 100년으로 정의되었던 것은 13세기 잉글랜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180-183)
100년의 시효, 다시 말해 100년 안에 소유권을 주장하기만 하면, 되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그 주체는 국고와 교회이다. 시효에 관한 법은 평온하고 공공연하게 점유할 것을 요구한다. 분쟁 없이 그리고 공개적으로 100년 간 차지하고 있어야 교회와 국고의 토지를 시효로 취득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안된다는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교회가 누리는 100년의 권리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부터였지만, 국고나 황제는 40년 내지 60년에 불과했다는 점. 그러니까 40년 내지 60년 밖에 보호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 정도 점유하면 빼앗겼다는 말. 13세기가 되어, 교회의 100년이라는 특권을 국고도 가지게 된다. 이를 대등화라고 표현.
그리스도와 국고는 양도불가능성과 시효 양자 모두에서 비교가능한 것이 되었다. 대등화의 법학적 근거는 로마법의 여러 개소에서 발견된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칙법휘찬』은 성당에 속한 사물과 황제의 신성한 소유권, 신성한 직영지에 속하는 사물과 동등한 위치에서 취급되었다. 법학자들은 가장 신성한 국고, 가장 거룩한 국고에 대해 논했다. 이는 그리스도와 국고가 평행현상이 되는데 용이함을 보여준다. 발두스는 국고를 어떠한 생명없는 신체quoddam corpus inanimatum이라 생각했다. 신성물과 국고물의 평행은 시간 만이 아니라 공간에도 관련된다. 법률가들은 국고에 편재성을 귀속시켰다. 아쿠르시우스는 국고는 어느 곳에나 현존한다Fiscus ubique praesens고 말했으며, 발두스는 국고는 편재하고, 그러므로 신을 닮았다고 결론내렸다. 성 피스쿠스sanctus Fiscus는 공식 성인 명부에 포함되지 않은 말은, 국고를 신화神化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국고의 영속성과 보편성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국고의 의제적 성격, 편재성과 영원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의제성fictitiousness의 상징이나 암호를 신[하느님] 또는 그리스도로 대신하며, 신학적 용어를 사용했다. 국고는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결코 죽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황제의 용어법이 교황의 국고 소유물에 적용되었다. “복된 베드로의 군왕의 권리”라는 용어로 나타났고, 이는 성직 위계제의 왕이자 성직자rex et sacerdos라는 학설을 북돋우는 데도 사용되었다. 교황직의 제권화와 세속국가와 그 제도들의 성화가 평행현상으로 진행되었다.(183-185)
이제 신성해지고, 거룩해진 국고에는 후광을 두르는 것만 남은 것일까? 국고는 편재성을 획득하게 된다. 편재성이야말로 신의 속성. 국고는 의제에 의해 편재성과 영원성, 영속성을 획득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교회는 군왕의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이 둘은 끊임없이 특권과 특성을 주고 받는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신칙법』의 하나에서 입법자는 제권imperium과 교권sacerdotium 사이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고, 신성물과 공통물 및 고유물 사이의 차이도 크지 않다고 명료하게 언급하여, 교회재산과 국가재산의 평행을 입증하는 데, 자주 인용되었다. 브랙턴은 자기 시대에 발아하는 국고 “신학”과 일치했다. 그는 국고를 의제적 인격이라고 착안하지 않았지만, 신성물과 준신성물 양자 모두 무주재산이라 언급하며, 무주의nullius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의제적 인격에 접근했다. 그것은 단독 인격의 재산이 아니라, 신의 또는 국고의 재산일 뿐이다. 브랙턴은 신적인 것과 국고에 속하는 것의 기묘한 결합을 야기했다. 신과 국고의 공통분모는 무주물이었고, 이는 대등화 만큼이나 효과적으로 교회재산과 국고재산 양자의 법적 동의성을 포함했다. 브랙턴이 통치하는 왕과 왕관 사이를 구별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필멸하는 왕 보다 왕관 자체가 무주물, 비인격적이고 초개인적인 국고와 내적관계를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 왕관이라는 추상적 관념의 발전은 헨리 2세 치하의 국고 또는 왕령지의 발전에 동반하는 것이다. 그의 동시대 판사들은 국가의 공적 영역과 교회의 공적 영역을 병치하려 했을 때, 왕 보다 추상적 왕관을 언급했다. 신성물과 관련된 무주물이라는 관념은 브랙턴이 유스티니아누스의 『학설휘찬』과 『법학제요』를 따르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브랙턴은 누구에 의해서도 소유되지 않은 비교회적 사물을 준신성물이라 불렀지만 로마법은 이를 공유물이라 불렀다. 신성물, 준신성물은 무주물로서 자연적 인격이 아니라 시간의 우발성에 노출되지 않는 법적으로 의제적 인격인 그리스도 또는 국고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동일한 분모로 환원될 수 있다. 로마 법사상의 가장 초기로 돌아가면, 로마인들에게 신들의 재산과 국가의 재산은 법적 정의에 의해 동일한 수준에서 나타나는데, 신유神有물과 공유公有물은 무주물이기 때문에 어떤 개인이 미치는 범위도 넘어서 있었다. 신유물에 대한 이교적 관념은 그리스도교 교회에 이전되었음을 성 암브로시우스와 젊은 황제 발렌티나우스의 대화가 보여준다. 신유물은 무주물이기 때문에 군주가 미치는 범위 조차도 넘어서 있었다. 하지만 봉건시대 동안 사회유기체에 대한 가부장적 개념과 함께 공유물에 대한 관념은 의미를 상실했다가 12, 13세기에 신성물과 공유물이라는 상호보완적 관념이 새로운 조건 하에서 이전의 의미를 찾게 되었는데, 이는 학문적 법률학이 회복된 결과였다. 이는 고대 말기와 중세 전통을 따는 교회재산 만이 아니라 세속국가 발생기 주권에 속하는 사물들에도 적용되어, 무주물이라는 전문용어는 공유물과 국고물은 신에게 바친, 손댈 수 없는 것으로, 그리스도라는 법률 암호로 나타낸 신에게 속한 사물, 영속적이며 시간을 넘어서는 것으로 존재했다는 관념을 표현했다.(186-189)
교회와 국고의 공통분모는 이제 무주물로 전환된다. 주인이 없으므로 선점하면 자기 소유가 된다는 현대의 땅따먹기 식의 무주물이 아니다. 그러고보니 비트코인 채굴이야말로 무주물 선점의. 여기서 무주물이란 달리 주인이 없는 신의 소유나 공적인 소유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소유주인 개인의 생사나 활동과 무관한 물건을 가리키는 것. 이를 로마법의 재발견과 학문적 법률학의 발전을 통해 정당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제 왕(K)은 보다 더 추상적인 왕관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국고라는 표현형식은 그리스도교와 세속적이고 거룩하지 않은 국고가 준-거룩한 것으로 바뀐 길고 복잡한 전개의 간단명료한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다. 마침내 국고는 그 자체로 하나의 목표가 되었다. 그것은 주권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받아들여졌고, 원래의 질서를 역전해서 “국고는 국가와 군주를 표현한다”고 말해질 수 있었다. 국고와 국가공동체 뿐만 아니라 국고와 조국도 대등했다고 지적했다. 무주물 관념은 공법의 문제에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신과 국고의 평행은 왕국 내에서 항구적인 공적 영역의 개념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데 기여했다. 13세기 통치하던 잉글랜드의 왕들은 자신과 공유물 사이의 균열의 존재조차 무시하려 했던 데 반하여, 제후들은 분열을 확대하고 통치하는 왕과 공유물[국가]을 대항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13, 14세기 국헌에 관한 투쟁 내내 제후들의 반대는 언제나 국고-직영지 영역을 중심으로 했던 반면, 봉건적 영역은 도전받지 않은 채로 확고하게 남아있었다. 공적 사항, 공공 재정에 관한 영향권 내에서 제후들은 왕을 통제하고, 평의회에 왕을 구속하며, 공적 관심사인 사항들이 더 이상 왕 혼자에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관련되는 것, 왕에 더하여 왕국의 전체 공동체에 관련되는 것임을 보여줄 수 있었다. 볼로냐의 법률가들도 지배하는 군주가 단지 국고의 관리자이자 대리인일 뿐이라 간주했고, 잉글랜드의 제후들은 자신들의 왕을 정치적 신체 전체의 유익과 안전에 도움이 되는 공적 부속물들의 개인적 소유자가 아니라 후견인으로 보았으며, 개인으로서 왕의 생명을 아득히 넘어서는 영속하는 정치체에 도움이 된다고 상정했다.(189-191)
군주가 소유하는 지갑이던 국고는 군주가 임의로 처분할 수 없는 신성하고 불변하는 것이 되더니 이제, 국고가 대표성을 확보하게 된다. 국고와 조국은 대등해지고, 신 또는 교회와 평행해진다. 봉건제후들은 국고를 들어서 왕을 구속하고 통제하려 하게 된다. 군주는 국고의 관리자이자 대리인으로 그 후견인으로 전환되며, 영속하는 정치체가 앞으로 떠오른다.
잉글랜드 정치사상의 전개에서 브랙턴의 시대는 가장 결정적 시기이다. 그때 왕국 공동체는 개인적 봉건 주군으로서의 왕과 영속적인 국고가 포함된 공적 영역의 초 개인적 관리자로서의 왕 사이의 차이를 의식하게 되었다. 브랙턴의 시대에는 왕도 변화했고, 우리가 과정해서 국고에 의해 공공 영역 전반을 이해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부터 국고의 대리자로 변화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초개인적 왕의 영속성도 또한 국고가 그에 속해 있는 비인격적 공적 영역의 영속성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지배자들에게 공통이었던 것은 그들이 자신의 항구성이라는 성질을 교회로부터 라기 보다는 학식있는 법률학자들에 의해서, 정의와 국고라는 이름에 의해서 상세히 설명된 정의와 공법으로부터 차용했다는 점이다. 전례적 왕권의 고대적 관념은 점차 해소되었고, 그 자신의 신비주의를 원하지 않았던 법의 영역을 중심으로 하는 왕권의 새로운 유형에 길을 내주었다. 새로운 후광이 새로운 조국의 아버지의 지도를 받는 발생기 세속국가와 국민국가에 내려오기 시작했고, 국가가 자기자신의 행정 기구와 공공기관들에 대해, 이제까지 교회에만 돌려졌으며 로마법과 로마법학자들에 의해 로마 제국에 돌려졌던, 제국은 영원하다 라는, 항구성과 영속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교권과 왕권이라는 중세의 이분법은 왕과 법이라는 새로운 이분법으로 대체되었다. 법률학의 시대에 주권 국가는 교회와 유사하지만 교회와는 독립적으로 그 본질의 신성화를 이루었으며, 왕이 자기 자신의 왕국에서 황제가 되면서 로마 제국의 영원성을 상정했다.(191-192)
이렇게 길게 쓰려던 것은 아니었다. 한 장씩 지금 쓴 분량의 절반 이하로 정리해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딱 결론만 남는다. 칸토로비치의 논의는 결론만 생소한 것이 아니다. 논의의 전개방식도 생소하고, 전거나 논거로 삼는 문헌이나 사례도 생소하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것 투성이 인데다. 중간을 모두 생략하고 세 줄로 요약하면 오히려 의미가 없을 듯도 하고 해서. 이리저리 요약하다 보니 주저리 주저리 길어지기만 한다. 다 마칠 수 있을까?
2025. 12. 14.
*
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 이 글의 저작권은 ⓒFELIVIEW.COM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