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과는 별 상관없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초상. 그의 책 매사냥용과는 별 상관없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초상. 그의 책 『매사냥의 기예De Arte Venandi Cum Avibus(정확하게는, 새로 하는 사냥의 기예)』에 실려있다.
Ernst H. Kantorowicz, The King’s Two Bodies: A Study in Mediaeval Political Theolog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7, “IV. Law-Centered Kingship, 2. Frederick the Second.”
제4장 법 중심 왕권
2. 프리드리히 2세
우선, 어떻게 보면 핵심이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 EKa를 빛나는 샛별로 만들었던 『황제 프리드리히 2세Kaiser Friedrich der Zweite(KFII)』를 기억한다면, 이 절의 제목에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나치와 EKa 사이의 모든 관계의 중심에 있었던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언급도 이 절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무려 50쪽에 가까운 분량을 할애하고서도. 제목이 프리드리히 2세인 것이 신기할 정도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프리드리히 2세의 국법서로 불리는 『아우구스투스의 서』의 몇몇 구절에 대한 해석과 그로부터 전개되는 법률학이 중세 왕권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한 내용뿐이다. 신화까지 담았다고 비판받았던 KFII의 어떤 전기적 구절도 소환되지 않는다. 러너의 EKa 전기에 따르면, 버클리 시절 그 책(KFII)을 쓴 사람은 죽었다고 서명을 거부했다는데, 이는 일관된 것이었다. 주를 보면 더 분명한데, 그는 KFII의 본문에서 단 한 번도 인용하지 않는다. 반면, 인용할 때 상당히 자주 Erg. Bd.라는 약어가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KFII의 보유편, Ergänzungsband를 가리킨다. EKa 나름의 결연한 의사표시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이는 명시적으로 프리드리히 2세가 논의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몇몇 곳에 그의 그림자가 슬쩍슬쩍 비치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만 알 수 있을 정도. 애증의 관계인 듯.]
정의의 아버지이자 아들 PATER ET FILIUS IUSTITIAE
솔즈베리의 요한 이후 두 세대가 지나, 법률 사상이 전례의 정신 보다 우세해졌고, 법학은 자신의 세속적 영성을 창조하도록 요청받았다고 자각하게 된다. 법 자체로부터 떠오르는 혼성 인격의 새로운 유형의 표준적 전거는, 프리드리히 2세가 1231년 멜피에서 로마 황제로서(시칠리아 왕의 권능으로, 자신의 왕국에서 황제imperator in regno suo로 행위하는) 반포한 시칠리아 국법의 위대한 모음집인 『아우구스투스의 서Liber Augustalis』(멜피 헌장)에서 발견된다. 제1권 31장의 표제는 “정의의 준수에 관하여”이다. 정의의 원천으로 인정받는 군주의 대권적 권능과 의무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었다. 황제는 로마 공민들Quirites에 의해 소유되었던 고대 입법권을 회상하며 선언했다. “로마 공민들은 왕권법lex regia에 의하여 로마의 원수[군주]에게 입법권과 제권[명령권]imperium 둘 모두를 위양했으며, 동일한 그 사람 안에서 정의의 원천과 정의의 옹호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정의가 강제력을 잃지 않고, 강제력이 정의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므로 카이사르는 정의의 아버지이자 아들이며, 정의의 주인이자 시종으로.” 이런 은유는 당대 법학자들에게 관용적인 것이지만, 반어적 표현법인 동시에 황제의 인격 안에 은유가 집중되었기에 특유의 울림을 주고 있으며, 프리드리히의 이 선언에는 법적이고 신학적인 두 영향권이 중첩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문헌은 신학과 경합하는 법률학이라는 지적 운동의 조류가 최고조일 때 만들어졌다. 후대의 주석가 마타에우스 데 아플릭티스Mattaeus de Afflictis는 황제는 아버지이자 아들인 하느님을 모범으로 해서 행동한다고 기술했고, 그 경우 로마법에 따르면 황제는 법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살아있는 법이었다. 이 반어적 표현형식으로 황제는 “자기자신 보다 크면서 보다 작은 자et maior et minor se ipso,” 즉 매개자이며, 정의 그 자체도 마찬가지로 중간적 위치에 귀속되어, 그녀는 황제의 어머니이자 딸이다. 그렇다고 황제가 그리스도라거나 정의가 동정녀 마리아라고 우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97-100)
프리드리히 2세가 반포한 Liber Augustalis는 『아우구스투스의 서』로 옮길 수 있겠다. 남부 이탈리아의 멜피에서 반포되었다고 ‘멜피 헌장’으로도 불리는데, 헌장은 지나치게 근대적인 함의를 부여할 수 있으니, 전제군주의 대권과 칙령을 모아놓은 국법서 정도로 보면 좋다. 그러면서 입법권의 근거를 왕권법lex regia로부터 불러온다. 로마 공민들이 왕에게 모든 권리를 위임하고 양도했다는 것, 이로 인해 로마에서 공화정 이전에 왕정이 수립되었다고 본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로마법에서 구축된 이 이야기 구조는 홉스, 로크, 루소 등의 사회계약론자들의 이야기 구조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오래된 이야기의 변주였다고 할까. 왕권을 신학과 전례로부터 정당화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법의 시대가 왔을 때, 법은 적극적으로 세속적 영성을 추구하고, 신학을 대체하고자 했으며, 그 두 영향력은 중첩되어 있었는데, 황제는 “정의의 아버지이자 아들”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이 표현이 프리드리히 2세의 『아우구스투스의 서』에 나온다. 프리드리히 2세의 중요성은 딱 거기까지.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전례적이고 그리스도론적인 해석에 따르면 아버지이자 아들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모상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EKa에 따르면 이런 표현은 로마법에 근거를 둔 것이며, 왕권법lex regia에 근거를 둔 표현이라는 것이다. 정의의 원천이라는 의미에서 아버지 또는 주인, 정의의 수호자라는 의미에서 아들 또는 시종이라는. 비슷한 반어적 표현으로 자기자신 보다 크면서 보다 작은 자라거나, 정의를 황제의 어머니이자 딸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지만, 역시 동정녀 마리아의 우의적 표현은 아니다.
이 반어적 표현형식은 법학자들의 세기의 지적 풍토 및 판사와 법률가들이 성직자들처럼 정의를 섬기는 것이 기대되던 프리드리히의 대법정Magna Curia에 일치했던 것으로, 거기서 고등법정의 개정은 교회예식과 비교할 만한 “정의의 가장 거룩한 사역 [신비]”라 불렸고, 거기서 법학자들과 법정실무자들은 교회의 예배형식의 보충물이자 대응형 양자 모두를 표현하는 법의 예배 또는 황제의 교회라는 관점에서 “정의의 제식Cult of Justice”을 해석하고, 법률 서기의 법복은 성직을 수여받은 성직자의 예복에 대립하고, 위대한 조물주의 손으로 창조된 인간인 황제 자신은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칭호였던 정의의 태양이라 불렸다. 『아우구스투스의 서』의 언급은 이러한 정치신학 또는 정치적-종교적 혼종성 안에서 자리를 찾는다. 프리드리히 제국의 “지배권의 신학”은 교회사상이 배어들었고, 교회법 어법의 영향을 받았으며, 통치의 비의를 표현하는 유사-그리스도론적 언어가 주입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 이상 그리스도 중심 왕권 관념에 의존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와 그의 법률 조언자들의 논거는 법률, 로마법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정의의 주인이자 시종이라는 황제의 이중 기능은 왕권법lex regia, 즉 오래전 로마 공민들이 제한된 법을 창출하는 권리와 법률에 대한 면책권과 함께 제권[명령권]을 로마의 원수[princeps]에게 수여하는 데 사용되었던 유명한 법률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법 중심 이념형태가 이전 세기에 지배적인 지층을 대체하기 시작한다.(101-102)
법정의 개정에서 의식과 예복 등은 그리스도교의 예배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EKa는 이를 정치신학 또는 정치적-종교적 혼종성이라고 평가한다. 프리드리히 제국의 지배권 신학에서 유사-그리스도론적 용어가 사용된다고 해서, 그리스도 중심 왕권 개념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논거는 법률 즉 로마법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EKa가 이해하는 정치신학의 의미는 “지배권의 신학”이다.
잘 알려진 대로 왕권법에는 인민 주권의 기초와 왕권의 절대주의의 기초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법학제요』에는 “군주를 기쁘게 하는 것[구역, 원수가 가납하는 것]은 법률의 효력을 가진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왕권법이 일반적으로 황제에게 권력의 완전하고 영구적인 이양을 함의하는지 개인적으로 개별 황제에게 제한적이고 취소가능한 인가 만을 함의하는지 명확하지 않고, 이런 애매모호함은 인민의 물적 대권과 군주의 인적 대권이라는 이중 주권의 구축으로 이어지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그런 이중성에 도달하지 않았으며, 행동하는 인민에 의해서 그리고 영감을 주는 신에 의해서populo faciente et Deo inspirante같은 지배자의 지위를 인민과 신으로부터 동등하게 유래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정식화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제국과 황제를 구별하지도 않았다. 그는 동시대 로마법 전문가들과 함께 군주를 유일하게 정당한 입법자이자 법의 궁극적인 해석자로 간주했으므로, 인민의 입법 권력을 배제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왕권법으로부터 도출한 이중의 책무는 솔즈베리의 요한처럼 카이사르는 동시에 “정의의 아버지이자 아들”이었다는 한 문장이다.(103-104)
앞에서 말한 사회계약 사상이든 인민 주권 이든 절대주의든 그밖의 무수한 해석가능성이 왕권법lex regia에 있으며, 실제로 여러 세기 동안 수많은 변형과 변주가 이루어졌다. 프리드리히 2세의 『아우구스투스의 서』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이들 중 어떤 사상의 비조라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상상을 끌어올릴 수 있지만, EKa는 다중적 함의의 가능성을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끌어내지 않는다. 이중적 함의는 그 황제에게서 확대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의 지배자와 법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왕권법lex regia 만이 아니라 존엄법lex digna에도 기초하고 있다. 이는 주석학자들이 왕권법과 관련하여 관례적으로 인용하는 것이지만 애매함을 극복하지는 못한다. 존엄법lex digna을 공포한 황제 테오도시우스나 발렌티니아누스는 군주가 법률을 도덕적으로 준수할 의무를 암시하면서도, 황제는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라는 주장의 타당성을 부인할 의도도 없었지만, 6세기 칙령의 편찬자들은 법률에 대한 보다 실질적 구속을 제안했다. “군주가 스스로 법에 구속되어 있다고 공언하는 것은 지배자의 위엄에 합당한 말이다. 그만큼 우리의 권위는 법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진실로 원수위를 법률들에 복종시키는 것이 제권 보다 더 위대하다.” 솔즈베리의 요한을 비롯해 여럿은 성서적 모형, 그리스도의 반영, 즉 왕 중의 왕이지만, 강제가 아니라 의지로 법을 따르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이는 중세 법률가들이 왕권법과 존엄법이라는 겉보기에 양립할 수 없는 격언을 조화시키려 시도할 때 의존했던 방편이었다. 이때 법에 대한 황제의 복종은 그러한 것[존재 혹은 상태]esse이 아니라 원하는 것[의지]velle로 간주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도 관례적 법 해석을 따라, 당연법을 언급하고, 우월한 판단을 인정했으며, 스스로 의무가 있다고 간주하는 법률의 종류를 공식적으로 설명했다. “왕들에게 명령하는 매우 강한 이성은 짐의 제국 치세에 도시[로마]의 영광을 향상시킬 의무를 부과하였다. … 비록 황제의 대권은 모든 법률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할지라도, 모든 법의 어머니인 이성 자신의 판단보다 전적으로 높지는 않다.” 이는 결국 군주의 이성에 의해 규정되는 의지voluntas rationes regulata에 이른다. 이는 자신의 법전에서 왕권법을 설명하고, 자신을 정의의 아버지이자 아들이라고 선언했을 때 수립한 비율과 유사했다. 이는 황제가 이론적으로 매개하는 역할이라는 점을 다시 드러내는데, 황제는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지만, 이성이 주재하는 실정법에 구속되어 있으므로, 이성에 구속되어 있다. 이성의 해석을 군주에게 의존하는 이 학설의 위험성이 없지 않은데,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아, 반은 신적인 이성Ratio이 왕과 조국의 이성ratio regis et patriae이 될 것이며, 이는 곧 국가이성Reason of State의 동의어로서, 국가통치술의 경세의 도구이자 단순한 수단으로 바뀔 것이다. 법철학에서 이성은 여전히 여신의 모습, 신과 동등한 자연의 현현임을 보여주고 있었다.(104-107)
왕권법lex regia의 짝을 이루는 것으로 존엄법lex digna를 가져온다. lex digna는 우리말로 옮기기 매우 어렵다. 의미를 따라 준수법이라 할지, 가치법, 합당법이라고 해야할지. 로마법, 특히 중세 로마법을 깊이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lex regia와 lex digna가 얼마나 중요하고 우월적인 개념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EKa가 인용한 프리츠 슐츠Fritz Schulz가 “Bracton on Kingship”에서 famous lex digna라고 한 것을 따라가는 정도. 중세 로마법학자들은 이를 ‘rosa inter spinas’ 즉 가시나무 속의 장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정도의 법이면, 근대 이후의 정치철학에서 엄청나게 활용되었을 것 같기도 한데, 여하튼. 이 법률은 『칙법휘찬Codex』에 있는 테오도시우스(2세)와 발렌티니아누스(3세)의 칙령에 근거한다. 429년의 두 황제의 칙령이란, 『테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us』를 가리키는 것일 터. 칙령 구절들 법에 구속, 법의 권위, 법률에 복종 등의 의미심장한 단어들이 나온다. 솔즈베리의 요한은 이 둘을 조화시킬 때 또 한번 그리스도교를 가져온다. 이런 것이 혼종성이다. 그러면서도 법에 대한 황제의 복종은 상태가 아니라 의지velle라고 표현되고 있다. 여기서 루소가 엿보이는 것은 나의 과잉일까. 프리드리히 2세는 이성으로 넘어가고, 이는 결국 군주의 이성에 의해 규정되는 의지에 이른다. 그리고 여기서 EKa는 이것이 곧 왕과 조국의 이성, 마침내 헤겔이 말하는 국가이성으로 이어질 것으로 본다. 프리드리히 2세가 얼마만큼 근대의 비조가 되었는지, 르네상스를 얼마나 이른 시기로 끌어올릴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프리드리히 2세에게서 어떤 종류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만은 분명한다. 그것은 고대 로마의 흔적이기도 하고, 현대가 더듬는 흔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흔적이 과거에 대한 어떤 해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우리도 2025년이라는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매개자로서의 정의 IUSTITIA MEDIATRIX
1192년에 사망한 플라켄티누스Placentinus의 『법의 정묘함에 대한 질문Quaestiones de juris subtilitatibus』의 서문에서 정의의(여신) 신전Templum Iustitiae을 문학적으로 묘사하면서, 법의 여신들을 묘사한다. 거기서 이성Ratio이 가장 높은 지위를, 정의Iustitia가 중앙에, 그의 딸인 형평Aequitas이 저울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다른 딸들, 시민적 덕들은 수호자처럼 정의를 둘러싸고 있다. 신전 내부의 접근할 수 없는 지성소adytum는 황금글자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전문이 새겨진 유리벽으로 분리되어 있다. 지성소 내부에는 정의의 성직자들이 혼란스러운 구절이 나타날 때마다 본문을 수정할 준비를 하고 있고, 바깥에는 공경할만한 법의 교사가 법률 문제를 논의하고 있으며, 『질문』의 저자는 법의 해석자와 청중 사이의 논의를 재현하려 한다. 이는 정의의 신전 안에서 실행되는 법률학의 환상이었다. 이는 법의 재료로 정의의 신전을 축성하라고 명령한 유스티니아누스가 트리보니아누스에게 보낸 서한으로 촉발되었으며, 아울루스 겔리우스의 『아티카의 밤』의 처녀인 정의 및 정의의 신관antistes iustitiae에 대한 묘사를 차용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플라켄티누스가 정의의 신전이라는 은유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그 의인화를 관습적 법철학의 위계 속에 통합했다는 것이다. 그의 논고에서 이성은 실제적으로 신법과 동일한 자연법과 동일한 것으로 드러냈다. 형평은 실정법, 인정법률의 영역에 속했다. 정의는 매개하는 위치를 맡았다. 정의는 모든 판단과 상태state 및 인간의 모든 제도의 목적이자 최종적 시험대test였다. 하지만 정의는 법이 아니라 하나의 이념이고 여신이었다. 그녀는 법외재적 전제였으며, 매개자로서의 정의는 신법과 인정법 사이에서 매개하거나 이성과 형평 사이에서 매개했다. 카푸아에 있는 프리드리히 2세의 개선문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카이사르의 정의Iustitia Caesaris」에는 황제 아래 정의가 좌우에 판사들이 있었지만 결론을 도출하기에는 불명확하다.(107-111)
정의는 본격적으로 매개자로서 등장한다. 매개자라면 그리스도를 따른 해석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중보자라는 표현을 더 사용하는데, 그렇지 않다. EKa는 플라켄티누스의 책에서 등장하는 정의의 신전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환상이라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인 묘사를 담고 있는 하나의 아름다운 영상이다. 특히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수정이다. 본문은 언제나 수정된다. 이것보다 더 그리스도교와 법 사이를 구별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주제는 언제나 본문을 확정하는 것이다. 이 정의는 이념이자 여신이며, 법외재적이었다. 지금은 파괴되어 다리의 일부가 되어버린 카푸아에 있었던 프리드리히 2세의 개선문도 비슷한 그림자를 보여준다.

시에나의 공회당Palazzo Pubblico에 있는 암브로지오 로렌체티Ambrogio Lorenzetti의 프레스코화 「좋은 통치(정치)Buon Governo」라고 하는 14세기 초의 표상이 훨씬 더 시사적이다. 정의는 등신대 크기 이상이며, 하늘로 들려 올려진 소녀puella erecta in coelum이고 격렬하고 두려운 용모aspect vehementi et formidabili이다. 머리 위에 이성Ratio의 동의어이거나 그의 자리를 차지한 지혜Sapientia가 있고, 마지막으로 낳은 딸 화합Concordia가 발 아래 있다. 좋은 통치가 왕좌에 앉아있는 데, 머리 위에 참사랑, 신앙, 희망이 있는데, 조국애는 참사랑의 뿌리에 기초하고 있다(Amor patriae in radice Charitatis fundatur)라는 1300년대의 정의를 생각하면, 참사랑은 조국애를 지칭할 수도 있다. 이 프레스코화는 매개자로서의 정의의 역할을 하는 정의와 정의의 상대로서의 황제 또는 좋은 정치를 전시한다.(112-113)
그리고 너무나도 유명한 시에나 공회당의 로렌체티의 프레스코화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어쩌면 이 그림으로 이어가기 위해 플라켄티누스가 필요했던 것처럼. 여기서 caritas는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한국어 번역을 따라 참사랑으로 읽는 것이 좋겠다. 예전에는 애덕愛德으로 읽었던 것으로 기억, 이것이 조국애로 이어질 것이라고 슬쩍 밑밥을 깔아놓는다.

황제 하인리히 2세Henry II가 1022-3년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 기증한 복음서의 수사본 채식화가 있다. 제4복음서 바로 앞에 성 요한의 표상이 있을 자리에 황제와 다수의 의인화된 상들이 함께 있는 도상이 있다. 중앙의 큰 원 안에 모든 표장을 갖춘 황제가 앉아 있고, 위쪽 모서리들에 정의와 경건이, 좌우 측면에 지혜와 현명이, 아래쪽 모서리들에는 법률과 법이 의인화되어 그려져 있으며, 발 아래는 폭군이 처형되고 있으나, 머리 위에서 황제에게 조언하는 것은 이성의 여신이 아니라, 신적 지혜와 이성을 모두 상징하는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다. 이 장면에서 하인리히 2세는 신적 이성과 인정법률 사이의 매개자로서 역할하되, 오토 왕조의 군주답게 성령의 에피클레시스로, 전례적으로 표현된다. 이 그림의 언어는 신학적이며, 지배권 개념이 전례 영역으로부터 얼마나 분리되었는지를 극단적으로 잘 예증하고 있다. 왕권의 중세적 유형과 개념은 프리드리히 2세는 물론 다른 이들에 의해서도 일소되지 않았으며, 실질적으로 이전의 모든 가치가 존속되었지만, 세속적이고 주로 법학적인 새로운 사고 양식으로 번역되었고 세속적 환경으로 이전되어 존속되었다. 더욱이 그 유형과 가치는 신학이 아닌 가급적이면 학문적인 법률학을 수단으로 합리화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모든 국가의 공식적 행위, 입법과 사법에서 직접적으로 신성에 의해 영감받았다고 주장할 때, 이런 정당화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서 채택되었다. 그는 천상으로부터의 영감과는 별개로 모든 중세 지배자들처럼 신위Deity의 대리권을 가진 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서』에서 황제는 “신적 섭리의 집행자”라고 주장했다. 신의 대리자의 직무는 세네카의 황제라는 모범을 따라 프리드리히의 법률 조언자들에 의해 해석되었고, 성서나 교부문헌이 아니라 중세 구전에서 모범적 지배자가 아닌 네로가 말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구로 나타냈다.(113-116)
다시 한번, 교회에 기증된 수사본 성서의 채색장식화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성인이기도 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2세(잉글랜드의 헨리 2세가 아님)는 오토 3세의 바로 다음 황제이고 그의 사촌이며, 오토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지만, 몬테 카시노 복음서의 이 도상은 매우 다르다. 정의, 경건, 지혜, 현명, 법률, 법으로 둘러싸인 그는 신적 이성과 인정법률 사이의 매개자이다. 아직 이 그림의 언어가 신학적이기는 하지만. EKa는 여기서 이를 다시 표현하는 데, 이전의 모든 가치가 존속되었으나 새로운 사고 양식으로 번역되었고, 세속적 환경으로 이전되어 존속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주장하는 신성은 성서가 아닌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서 나온다.
법률주석학자들이 순수한 성서 인용구절에, 『학설휘찬』, 『칙법휘찬』, 『신칙법』, 『법학제요』를 참고하여 주석하기를 즐겼다는 점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마리누스 데 카라마니코Marinus de Caramanico는 로마법학자들의 일반적 관습, 로마법전의 세속적 권위는 법학자들에 한해서 거룩한 문헌 보다 더 가치있고 중요하고 설득력있는 증거로, 성서로부터 곧바로 인용한 것 조차, 로마법의 내용을 인용하여 우회하여 도달하는 것이 선호되었다. 주석학자들과 후기주석학자들도 충분히 자주 성서를 인용했지만, 최고의 권위는 법이었다. 서임권 투쟁까지 인정되었던 전례적이고 성사적 개념의 유출인 왕권의 종교적 가치를 대체하고 복원하는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 돌아갔다. 당시 노르만 무명씨는 주의 그리스도(c)인 왕의 성직자 직무로 희생 행위까지 인정했는데, 왕은 살아있는 희생제물, 정의의 희생, 영적 제물이었다. 레위인 제사장이 제단에서 육적 희생을 바치는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재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왕에 의한 정의의 희생과 왕이자 성직자라는 고대의 이상에 대한 새로운 관념은 이와는 매우 달랐다. 군주가 사제이기를 중지하지 않았지만, 법률학자들은 자신의 이전의 사제적 성격을 되찾았다. 1140년 시칠리아의 왕 루제루 2세Roger II의 『법령집Assizes』 서문에서 이를 자비와 정의의 공물이자 신에게 바치는 봉헌이라고 불렀으며, 그에 의해서In qua oblatione 법의 해석자들은 법의 사제들이라고 불렸다. 그 주요 전거는 자신의 법률 중 하나를 짐이 하느님[신]께 헌납하는 가장 경건하면서 신성한 봉물로 공포한 유스티니아누스였다. 『학설휘찬』의 첫 문단으로부터 법률가들과 판사들이 정의의 사제들이라는 관념이 분출된다. 정의의 신관antistes으로부터 성직자(사제)sacerdos로의 변화는 중세 주석학자들에게 이어져 아조Azo는 법은 거룩하고, 법을 베푸는 자는 사제들이라 불렀고, 아쿠르시우스Accursius는 교회의 사제와 법의 사제들 사이에 평행현상을 이끌어냈다. 영적 사제직과 세속적 사제직의 평행은 『표준주석』 보다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공통의 언어였다. 판사라는 현세의 성직자와 사제라고 불리는 영적인 성직자 사이를 구별하는 것은 수 세기의 관례로 남아있다. 제국 판사인 비테르보의 요한John of Viterbo은 판사는 신의 현존으로 신성화되며, 모든 법률적 문제에서 신이라 말하는 구절을 로마법에서 추출했다.(116-122)
법률주석학자들이 행하는 성서 해석에 아주 흥미롭다. 예전처럼 성서의 한 구절을 법의 전거로 들며, 중요한 근거로 삼지만, 그에 대한 주석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따른다. 성서는 더 이상 신학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법학적으로 해석된다. 이보다 더 완전한 역전을 찾아볼 수 있을까. 군주는 여전히 사제이지만, 법률학자들도 사제였는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법전을 신성한 봉물로 헌납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의의 신관은 법의 사제가 되었다.
이와 같은 구별, 반립, 유사, 적합은 여러 차례 반복되어, 세속 국가와 그 신비들의 새로운 거룩함을 창출하는데 기여했으며, 이는 단지 법적 직업을 신성화하거나 법적 학문을 신학과 동등한 기반 위에 두거나 법적 절차를 교회의 의례와 비교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법학자들의 직업적 자부심으로 아쿠르시우스는 법률학자나 법률 전문가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신학을 연구할 필연성이 없는데, 모든 것은 법전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라 말했고, 발두스Baldus도 법학 박사들은 고위 관직에 포함되며, 사제들이며, 법학 교수들도 백작으로 불리기를 원했는데, 13세기 말 법학자들은 준기사직위를 실제 획득했다. 천상의 군대인 성직자와 무장한 군대인 귀족과 함께 법의 군대 또는 학식의 군대가, 발두스가 말한 박사의 군대(박사의 기사직)가 새로운 귀족 지위를 차지했다.(123-124)
구별, 반립, 유사, 적합의 여러 차례의 반복이,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EKa의 방법론이다. 이 방법은 실제 이 책 전체를 그의 연구 전체를 관통한다. 그의 방법론은 기원과 인과관계를 따지는 데 익숙한 근대적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이제 법학자들은 더 이상 신학을 연구할 필요도 없고, 그들은 법의 사제들이며, 새로운 귀족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법복귀족의 탄생이었다. 여기서 드러나 있지 않지만, 흥미로운 점은 중세 법학자의 상당수가 그리스도교 사제나 수도사로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현대적인 신앙적 헌신이라기 보다는 학문적 출발점에 불과하지만.
판사들에게 유효한 것은 법적 위계질서의 수장인 군주에게도 유효했다. 『학설휘찬』에서 성직자라고 불려진 것은 법률학자 뿐이지만, 유사 성직자적 성격이 판사로부터 왕으로 이전되는 데는 어떤 문제도 없었다. 왕의 법적 사제직은 교회 내에서 왕의 성직자 신분을 입증하는 데까지 기여했고, 피에르 다이Pierre d’Ailly가 왕의 도유를 언급하며 영적인 것과 현세적인 것 사이의 중간적 인격이라고 말한 것처럼, 왕은 교회론적으로 전적으로 속인인 것만은 아니라는 일반적 단언을 지지했다. 귈렐무스 두란두스William Durand는 법률학자들이 사제들이라 말하는 구절을 따라서 황제는 사제의 품급에 있다는 구절을 인용했다. 성유의 도유의 결과가 아니라 울피아누스가 판사들을 사제들과 비교한 결과로, 교회 내에서 군주의 비-속인적 성격을 입증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주석학자들은 신전들과 다른 신성물res sacrae을 신관들의 손으로 봉납하는 것에 대해 논의할 때 과거 황제의 대신관 직무를 상기했다. 16세기 인문주의 역사법학파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기욤 뷔데Guilliaume Budé는 아쿠르시우스와 주석학자 일반이 고대 로마의 성직자들과 신관들을 자신들의 시대의 사제들 및 주교들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을 조소했다. 하지만 중세 법학자들의 저작에 풍부한, 객관적으로는 잘못인 이러한 동등화에 의해서, 완전히 새로운 통찰이 조금씩 수집되었고, 여러 면에서 우리 자신의 시대를 형성했고 오늘날에까지도 영향력이 남아있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중세 법학자들은 고대 로마법의 장중한 엄숙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로마의 종교적 기풍을 자신들의 사상세계에 적용하기를 갈망했다. 따라서 왕권의 직유들이 법학자들의 행위작용을 통해서 전례적이고 그리스도 중심 왕권의 시대로부터 계속 이어져서 학문적 법률학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권에 대한 새로운 이상에 적합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법학자들은 왕권의 어느 정도 특유하게 교회적인 속성을 법적 무대장치로 이전시켜 상당한 중세 유산을 구출해냈고, 그로 인해 떠오르는 국민국가와 선이든 악이든 절대 군주정들의 새로운 후광을 준비했다.(124-126)
왕의 사제직을 법률에 따라서 다시 구원해 낸다. 그렇다면 왕이 사제가 아닌 시기가 있어야 한다. 고대나 중세 초기로 가면 정치적 지배자나 통치자들이 사제 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은 사제였다. 앞서 12세기 초에 대한 기술을 보면, 왕의 사제적 성격으로부터 법률가나 판사의 사제적 성격을 이끌어 낸다. 그런데 왜 다시 구원하는 일이 필요할까? 이 문제가 중요해진 것은 성직 서임권 투쟁 때문이다. 황제와 왕은 사제가 아니므로 속인이라는, 그럴 경우 교회의 품급에 따라 사제 아래에 있는 부제 또는 차부제 자리에 왕을 위치시키기도 한다. 당연히 주교후에 대한 임명권에 문제가 생긴다. 법학은 여기서 법의 사제직을 통해서 왕의 사제직을 다시 구원해 낸다. 이는 중세 법학자들에 의해서 로마법에 있는 고대의 신관과 사제를 동등화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법학자들의 왕권에도 교회적인 속성을 법적 무대장치로 이전시켜 혼종성을 만들어냈고, 국민국가와 절대군주정이 준비되었던 것. 하지만 EKa를 읽는데 주의할 점은, 몇 년부터 몇 년까지는 왕이 사제였다가, 언제부터 법률가가 사제가 되었다가, 왕이 사제가 안되었다가, 다시 왕이 사제가 된다는 식으로 하나의 선형적 구조를 추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서유럽의 곳곳에서 벌어졌던 일과, 문헌의 일부에 주목해서 이런 논고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물론, 루제루 2세와 프리드리히 2세기는 시칠리아 왕국을 통해 연결되지만. EKa는 충분한 가능성과 근거자료를 제시하면서 논거를 전개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인과관계를 시계열적으로 구성해내지는 않는다. 이런 저런 상황과 사건과 경향성들이 있었던 것이고. 시칠리아 왕국이 그랬다고 해서, 잉글랜드나 프랑스 또는 독일이 그랬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 그럼에도 EKa가 주장하는 만큼을 입증하는 자료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중세의 왕권 이론은, 로마법에서 말미암았고 왕의 매개자성이라는 관념에 의해 강화되었던 세속 개념의 도입에 의해 실제로 대담하게 부각되었다. 로마 시민법의 영향이 효력을 갖기 시작했을 때, 군주는 단지 신적 권력의 신탁oraculum으로만 나타났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lex animata 살아있는 또는 생명있는 법이 되었고, 정의의 육화가 되었다. 관념 자체는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유래했고, 로마 황제가 모든 덕과 살아있을 가치있는 것들의 화신이라는 이념과 혼합되었으며, 그리스도교의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았다. 『신칙법』 중 하나에서, 신[하느님]이 황제를 살아있는 법으로 인간에게 내려보내 법률들 자체를 그에게 복종시켰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법이라는 그리스 철학에서 흔한 주제를 하늘로부터 아래로 보내진 중재자라는 관념과 융합시킨 것은 락탄티우스Lactantius인 것으로 보인다. 살아있는 법으로서의 군주라는 학설은 중세 초기 서방에서 알려지지 않았다가 볼로냐의 학문적 법률학의 재흥과 문장체를 통해 재생되었다. 비테르보의 고드프리Godfrey of Viterbo에 따르면 볼로냐의 네 박사들은 론카글리아의 제국의회에서 바르바로사에게 살아있는 법이라고 말했다. 잉글랜드의 알라누스Alanus는 이 관념을 교황에게 이전시켰고, 13세기말 이후 교황도 지상에서 살아있는 법이라 언급되었다. 『표준 주석』은 반복해서 황제를 지상에서 살아있는 법으로 언급한다. 비테르보의 요한도 『아우구스투스의 서』에 대한 주석학자와 남이탈리아의 법학자들도 황제를 살아있는 법으로 정의했다. 프리드리히 2세도 자신의 입법권력을 이런 정의의 의지했다. 이러한 용어는 황제가 모든 법률을 흉중문서고 안에in scrinio pectoris 안에 지니고 있다는 법률 격언에 가까운데, 이는 로마법으로부터 유래했고, 관념들의 동일하며 일반적인 복합체에 속했다. 관례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왕도 자신의 영토에서 살아있는 법in terra sua lex animata라고 칭해졌고, 이는 후대 절대주의 왕정의 정치이론에서 상당한 역할을 맡아 공연했다. 또한 살아있는 법 이론은 법률에 근거한 공동체인 통합체universitas에도 적용되었다.(126-132)
왕의 매개자성 관념으로 군주는 살이있는 법, 생명있는 법, 정의의 육화가 되었다. 여전히 그리스도교 영향이 있기는 하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먼저 연결된다. 수많은 주석가들에 의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황제 또는 왕이 살아있는 법이라고 주장되었음을 EKa는 보여준다. 그리고 뒤에서 말하게는 통합체universitas, 현대에서는 결국 법인으로 연결
13세기 후반에 새로운 전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완벽한 판사를 살아있는 정의라 부르는 것이 더해졌다. 오직 정의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중재자. 13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자들이 중요한데, 아퀴나스는 판사가 일종의 살아있는 정의임을 인정하면서도, 판사들에 중재자라는 정의를 덧붙이는데, 이는 매개자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신학대전』에서 판사는 살아있는 정의이고, 왕은 정당한 것의 수호자라고 말한다. 아퀴나스의 아리스텔레스 『정치학』 주해는 오베르뉴의 페트루스Peter of Auvergne에 의해 이어지는 데, “왕에게 의지하는 것은 살아있는 정의에 의지하는 것”이라며 판사는 소실되고 왕만 남는다. 울피아누스의 정의의 성직자들의 경우에서처럼 판사로부터 왕으로의 이전은 여기서도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혼동은 마침내 왕을 살아있는 정의로운 자라고 칭하면서 『신칙법』을 가리킨 발두스에서 실증되었다. 단테는 유스티니아누스 자신이 살아있는 정의viva Giustizia라는 표현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러한 이론은 『군주통치론』을 저술한 에지디우스 로마누스Aegidius Romanus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철저하게 소화하여 군주를 정의의 수호자라 칭하고 그를 정당한 법의 기관이자 수단으로 정의했을 때, 어떤 결론에 이르렀다. 그에 따르면, 법은 생명없는 군주이며, 군주는 생명있는 법이기 때문에 왕이나 군주는 법을 능가해야 한다. 이는 왕에 의한 지배가 법에 의한 지배보다 낫다로, 최종적으로 법학자들에 의해 선한 왕이 선한 법보다 더 낫다라는 격언으로 집약되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완전한 역전이었다. 에지디우스는 실정법이 지배자 아래에 있는 것처럼 자연법은 그의 위에 있다, 지배자는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의 중재자 같은 결론에 도달하여, 매개자성에 관한 신조와 법들의 이원성에 관한 신조가 융합되었다.(132-135)
13세기 후반, 르네상스의 전조가 시작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이다. 아랍세계로 넘어갔던, 아리스토텔레스가 되돌아와 다시 번역되면서, 그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진다. 그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주석 중 하나가 아퀴나스의 것들이다. 그 철학자는 판사를 살아있는 정의라고 했고, 『정치학』 주해에서 살이있는 정의가 왕으로 넘어가고, 발두스와 단테 및 에지디우스 로마누스에서 확인된다. 그는 심지어 군주가 생명있는 법이기에 더 우월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역전하기도 한다. 물론 자연법과 실정법의 중재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인 고대 그리스에서 또는 초기 로마에서 직업 판사가 없었던 것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오늘날의 판사에 해당하는 라틴어 iudex는 흔히 심판인으로 번역된다. 전문적인 법률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고 배심원으로 번역하는 것도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두 법들 사이의 중재자인 군주, 신이 인간들에게 내려보낸 살아있는 법인 군주,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법에 구속되어 있는 군주. 중세의 모든 법철학은 자연법이 그 자체로 자기충족적으로 존재하고 어떤 실정법과도 구별되어 존재하는, 왕국이나 국가에 의존하지 않는, 초법적인 자연법이 존재한다는 가정 위에 기초하고 있다. 법의 이러한 근본적으로 이중적 양상에 대한 법학자들과 신학자들의 불일치는 없었는데, 아퀴나스는 실정법의 강제하는 힘과 관련하여 실로 군주는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지만, 군주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자연법의 지도하는 힘에 구속되어 있다고 간주했을 때 그러했다. 이런 교묘한 문구는 난제에 대해 수용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했고, 후대의 왕권 절대주의의 반대자들과 옹호자들 모두에 수용가능했으며, 황제가 법 위에 있을지라도 이성의 지도적인 힘에 구속되어 있다고 선언했던 프리드리히 2세와도 본질적으로 일치했다. 정의의 아버지이자 아들이라는 프리드리히의 자기 정의도 철학적으로 의미있는 것이 되며, 법률 문제에서 매개자성에 대한 그의 주장은 자기 세기의 정치사상에서 비롯되고 그에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가 신과 세상을 중재하는 힘이었다면, 살아있는 정의로서의 군주도 유사한 지위를 획득했다.(135-137)
어떤 의미에서 결론적인 문장들. 이런 식으로 함의를 찾을 수 있는 때로는 방법론에 해당하는 문장들이 항상 중간에 슬쩍 들어가 있다.
초기 중세 내내 정의의 형상의 특징을 설명하는 방식이, 덕, 두 본성, 추상과 구체, 보편과 특수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모든 것은 결정적이지 않았다. 결정적인 것은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법률학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에 의해 정의가, 삼위일체의 하느님[신]의 본성이나 하느님의 섭리의 작용을 전문적으로 해석하는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바와 동일한 직업적 헌신과 동일한 내적 충동을 가지고 정의Iustitia와 법Ius의 본성을 탐구하는 데 집중하는 학술적 해석자들의 특별한 학문적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정의는 로마법에 대한 대답으로 학식있는 직업의 도덕적 윤리적 가치를 강조했을 뿐 아니라, 정의를 자신의 으뜸가는 숭경의 대상이자 법의 예배의 살아있는 중심으로 삼은, 정의의 숙련자들의 궁극적 존재이유를 입증했다. 로마법에 따르면 법률학은 신적인 것들 것 인간적인 것들에 관한 지식이었고, 이는 단지 학지로서 만이 아니라 기예로도 정의되었다. 기예는 자연의 모방이었다. 보편자든, 형상이든, 여신이든 법학자들 측에서 정의의 숭배는 반은 종교적인 것이었고, 발두스는 후대에 정의를 거의 신으로 숭상하여, 죽지 않는 습성으로, 혼처럼 영속하고 불멸하는 것으로, 종교적 예배와 신으로 이끄는 것이라 불렀다. “이성의 명령이 판사의 정신 속을 주재한다”, “진실을 심문하는 정의 그 자신이 판사석에 좌정하고 있다.”(137-139)
전문적인 직업적인 법학 또는 법률학의 등장과 그에 헌신하는 법학자와 법률가들의 존재는 법을 사실상 하나의 종교, 하나의 예배로 만든다. 본래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기에 그와 투쟁해야 하지만, 중세 그리스도교는 법률학과 공존하게 된다. 학지이면서 기예인 법률학. 일종의 또 하나의 종교적인 예배. 성직 서임권 투쟁이 보여주듯, 권력투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교황권이 세속권력을 위협했던 것은 아주 제한적 영역에서 아주 일시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에 불과하다. 세속권력에 의해 패퇴된 교회권력은 이탈리아 중부의 로마냐로 훗날 바티칸으로 물러선다. 수백년에 걸쳐서 교황들이 모두 이탈리아 사람들이었던 점에 주목해 보라. 법률이라는 또 하나의 종교와 끊이지 않는 공존과 혼종이라는 현실은. 여하튼 법률학은 그리스도교의 논리를 따라 빼앗으려고 했던 지배자의 신학적 권위를 되찾아서 새로이 법률학적으로 정당화된 신학으로 되돌려준다.
이러한 관념들을 배경으로 해서 프리드리히 2세의 “정의의 아버지이자 아들”과 “정의의 주인이자 시종”이라는 반어적 용어법을 이해해야 한다. 중세 초기를 지배하고 있던 정의로운 왕rex iustus이라는 고대적 이상의 유효성은 계속되었으나 중세 후기의 정치적 세계에서 엷어져갔으며, 이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복식이 아니라 법학자들의 복장을 하고, 제단에서 판사석으로, 은총의 왕국에서 법률학의 왕국으로 이전하는 것을 대가로 살아남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지닌 왕은 정의의 모형을 지닌 군주로 대체되었다. 법학자들의 세기의 군주는 멜기세덱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쿠르시우스의 또는 울피아누스 교단의 영원한 사제라는 의미에서 진정한 정의의 모형이 되었다. 이는 축성의 효력이 아닌 학문적인 법률학으로부터 그 힘을 이끌어냈다. 군주는 신-인의 체현자이자 대형이 아니라 매개자로서의 정의의 체현자이자 대형으로서 매개자였다. 그러나 이전의 가치들도 계속되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법률학을 통한 왕의 매개자성의 명백한 세속화이다. 전례적 왕권의 본질인, 은총은 법학자들이 구축하고, 살아있는 정의로서 군주를 그 안에 배치한 형이상학적 초월세계 안에 참여하지 못했다. 법 중심 시대에 법학자들의 언어 안에서 군주는 정의의 살아있는 모상이자 직무에 따라 신적이자 인간적인 형상의 화신이었다. 군주의 새로운 이원성은 신학사상이 흩뿌려진 법철학에 기초하고 있었고, 법의 예배의 여신 위에 기초하고 있었다. 긴장관계는 자연의 법과 인간의 법 또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법학적으로 정식화된 양극성을 향해 움직였고, 얼마 후 은총이 더 이상 식별할 수 있는 위치를 갖지 못하는 “이성과 사회”로 움직였다. 발두스는 자신을 정의에 내맡긴 군주에 대해, 선하고 올바른 것의 실체이고, 판결하는 인격을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정의는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군주는 살아있는 정의의 권능으로 그 여신을 현현시켜야 했고, 그녀의 구성요소로서 그는 어떤 내적 논리를 가지고 자신의 법정에서 실질적인 편재를 주장할 수 있었는데, 프리드리히 2세가 말하는 대로, 자신의 관리들을 통해서 “잠재적 편재성”을 소유했다.(140-142)
새로운 법률학은 왕의 매개자성을 세속화한다. 이제 은총은 법학자들이 구축한, 살아있는 정의인 군주를 중심에 두는 형이상학적 초월세계에 참여하지 못한다. 새로운 법철학은 자연법과 인정법, 자연과 인간 사이의 긴장 속에서 움직이고, 이는 결국 “이성과 사회”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EKa는 중세 그리스도교에서 근대로의 전환 과정에서 형이상학적 초월세계의 변형이 법의 형이상학을 경유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법 내지 살아있는 정의로서의 군주는 모든 보편자들이나 형상들에 내재하는 이원성을 정의와 공유했다. 인간적이자 신적인 정의의 이러한 이중적 양상은 자신의 지상에서의 대리자 황제에 의해 반영되었는데, 그는 주로 정의를 통해서 신의 대리자였다. 정의 그 자체는 학문적 법률학의 언어로는 아직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제단의 신과 동일시되지도 않았고, 절대주의 또는 신화된 국가에 종속되지도 않았는데, 짧은 과도기 동안 그녀는 살아있는 덕으로, 법률학이 주도권을 쥐고 지식의 거의 모든 분야에 지적으로 활력소가 되었던 시대의 여신이었다. 유추하면 군주는 더 이상 영원한 왕 그리스도를 현현하는 그리스도 모방자도 아니고, 아직 불멸하는 국민을 대표한는 인물도 아니었으며, 그는 한 불멸하는 형상의 구체화hypostasis였기 때문에 불멸성을 분유하고 있었다. 정의를 모범으로 하는 신위deity로 삼고 군주를 그녀의 육화이자 그녀의 대신관으로 삼는, 혼성인격의 새로운 유형이 법 그 자체로부터 생겨났다.(143)
학문적인 법률학이 살아있는 법, 매개자로서의 정의를 자신의 형이상학의 주축으로 삼았던 시기는 길지 않았다. 이 과도기에 정의는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지만, 제단의 신도 아니고, 신이 된 국가에 종속되지도 않는 중간에서 자율적인 하나의 신처럼 여겨지는 시기가 있었다. 정의와 군주를 연결하는 새로운 혼성인격을 뒷받침하는 법의 시대.
법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규율하고, 어떤 방식으로 지배하지만, 사람들은 아주 본격적으로 법의 지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법의 지배 그 자체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법의 지배가 작동하는 방식, 이를 구현하는 사법과 정치에 대해서. 셰익스피어 희곡의 대사를 통해 “Let’s kill all the lawyers.”라고 외친 것이 1591년이다. 1895년에 고등재판소를 설치하고 이를 평리원으로 바꾼 것이 1899년이다. 이때 비로소 행정과 사법의 분리가 이루어졌다고 평한다. 단순히 권력의 분리 만을 따진다면, 영국의 대법원은 21세기 초까지 의회의, 상원의 위원회 형태로 존속했다. 하지만 직업 판사, 직업 법률가에 의한 재판으로 본다면, 서유럽은 13세기, 14세기 또는 그 이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독립적인 법원, 사법에 대한 요구가, 영사재판에 대한 치외법권의 철폐나 불평등 조약 폐지의 핵심조건 중 하나였다. 조선이야 식민지였으니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서도. 조선시대에 잡과의 하나로 율과가 있었고, 율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요재판의 판결은 문신들에 의해 조정에서 이루어졌으니, 법률 전문가에 의한 판결이라 보기 어렵다. 애초에 형법도 없이 대명률을 원용하는 조선이었으니. 그렇다고 조선시대에 왕을 법으로 통제하지 못한 것도 아닌데, 주로 예법이었다. 예송논쟁이라는 것이 『주자가례』를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논쟁아니던가. 표면에는 상복은 1년 입네, 3년 입네 하는 싸움이지만, 그 배경에는 왕권의 정통성 및 엄청난 권력과 자산을 두고 벌어진 경쟁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법복귀족이 생기기 시작한지, 이제 130년째고, 사법제도나 사법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해서 정리하려면, 좀 짧게 줄여야 할 것 같은데.
2025.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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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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