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즈베리의 요한John of Salisbury의 작품 Policraticus의 프랑스어판 권두삽화.
Ernst H. Kantorowicz, The King’s Two Bodies: A Study in Mediaeval Political Theolog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7, “IV. Law-Centered Kingship, 1. From Liturgy to Legal Science.”
제4장 법 중심 왕권
1. 전례로부터 법학으로
왕이 자연에 의해 인간적이고 은총에 의해 신적인 쌍생 인격이라는 것은, 왕의 두 신체라는 후대의 상상에 상응하는 중세 성기의 관념이자 전조였다. 아직 교회로부터 독립된 세속 정치신학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른 시기의 정치신학은 전례 언어와 신학사상의 일반적 틀 안에 속박되어 있었다. 왕은 축성에 의해 사적 인격으로서 만이 아니라 왕(K)으로서 제단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표상하고 모방하기 때문에, 왕으로서 “전례적”이었다. 요한 8세가 카롤루스 2세에 대해, 세상의 구세주라며, 하느님은 참된 왕(K)이자 자기 아들인 그리스도(C)를 모방하여 그를 자기 백성의 군주로 세웠고, 그리스도가 자연에 의해 소유한 것을 왕은 은총에 의해 획득할 수 있다”고 언급한 기록이 있다.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왕은 하늘과 땅의 매개자이며, 매개자성은 쌍생 본성의 존재가 현존한다는 것을 함의하며, 노르만 무명씨도 동일하다. 그 시기의 대관식 의식규정Coronation Orders에 왕의 매개자성에 관한 관념들이 표현되는데, 신과 사람 사이의 매개자와 유사하게 왕은 성직자와 인민 사이의 매개자로 행동해야 하며, 왕은 성직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주의 그리스도[도유받은 자]Christus Domoni로서 자신의 이름 안에 그리스도의 모형을 지니고 있다. 왕을 그리스도의 모형typus Christi로 선포하기 위해 그리스도론적 모형론Christological exemplarism의 언어가 사용되었다. 모형론은 왕의 직무의 존재론적 양상과 기능적 양상을 모두 포괄하는데, 이는 중세 지배자를 높이는 데 사용된 칭호인 그리스도의 모상(존재)과 그리스도의 대리인(행위)에 반영되어 있다. 이런 칭호가 본성론적 유사함을 강조하지 않는다 해도, 왕은 적어도 지상의 모든 왕권의 신적-인간적 원형인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평행현상인 쌍생 인격gemina persona으로 나타난다. 중세 성기의 그리스도의 모상과 대리자에서 하느님의 모상과 대리자로 명칭이 바뀌자, 왕과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순수하게 잠재적인 관계도 상실했다.(87-89)
전례적 왕권에 대한, 3장 전체에 대한 요약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3장을 다음장으로의 전개에 적합하도록 요약하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중심 왕권은 전례적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리고 이는 모형론의 언어로 표현되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둘로 나누면서, 앞으로 전개될 분할을 보여준다. 앞서의 신성과 인성의 본성론적 분할이 아니라, 존재와 행위의 분할이다. 이는 앞으로의 논의에서도 상당한 정도로 쌍생성 또는 이중성이 전개될 것을 의미한다. 그때그때 이중성의 특성은 달라지겠지만. 전례에서 왕(K)이 제단에 구속되어 있다는 언명에 주목하도록 하자. 이것 역시 어떤 형태의 전조이다.
신의 비유나 집행자로 그려지는 군주는 성서 만이 아니라 고대 지배자 숭배에서도 지지받은 관념이며, 중세 어느 세기에도 발견된다. 9세기 후반 왕의 직무의 성직자화와 대관식 의식규정의 영향 하에서, 왕에 대한 그리스도 칭호가 우세해지기 시작했을 때, 하느님[신]의 대리자와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이에 차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느님[신]의 대리자라고 서술하는 것이 규칙이었던 카롤루스 왕조 이후 오토 왕조와 잘리어 왕조라는 그리스도 중심적 시대에 그리스도의 대리자에 대한 선호가 뚜렸했다. 하지만 두 명칭 사이의 차이가 역사적으로 의미있어진 것은 그리스도의 대리직이 성직위계제의 특권으로 요구되었을 때로,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대리자 칭호가 로마 교황의 전유물이 되었을 때이다. 정치적, 종교적, 지적 생활의 여러 가닥들이 겹쳐져서, 일반적 전환을 초래하고, 그리스도 중심 왕권의 도상을 용해시켰다. 서임권 투쟁은 한편으로 영적 권위, 교회에 관한 권한 및 전례상 기원인정에 미치는 세속 권력을 해체하고, 다른 한편으로 영적 권력을 제권화했다. 하지만 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을 정의하는 방향인 12세기의 교의학적-신학적 발전 역시도, 대리하여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인격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고대의 관념을 새롭게 강조했다.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은 예루살렘의 헤시키우스와 위-암브로시우스를 전거로 교황 만이 아니라 주교와 사제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했는데, 이는 교령집주석가들을 자극했다. 피사의 휴구치오도 『교회법 주해 대전』에서 마찬가지였다. 인노켄티우스 3세의 교령과 함께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표현이 교회법 모음집에 처음 등장했고, 그 이후로 교황의 의미로만 배타적으로 해석되었다. 반대로 로마법학자들[세속법학자들, 국가법학자들]Civilians은 로마법과 세네카, 베게티우스에 따라 황제를 지상에 있는 신, 지상의 신, 현존하는 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군주는 신의 대리자였으며, [고대] 황제의 명칭으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표현은 없었다. 이처럼 지배권에 관한 그리스도 중심적 이상이 로마법의 영향 하에서 해체되었다. 교황을 뜻하는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는 황제를 뜻하는 지상에 있는 신[하느님]과 나란히 섰다. 군주는 신민들의 아버지로서 하늘의 불가시적 성부와 유사했고, 가시적이고 육화된 신, 신-인의 대리자는 사제이자, 교황이었다.(89-93)
변화를 이야기하는 칸토로비치에 주목하자. 그의 서술 순서를 무시하고, 연대순으로 배치하면, 고전고대 로마의 황제는 지상의 신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건너뛰어 카롤루스 왕조에 의해, 중세 왕권이 확립되기 시작했을 때인 9세기 말에, 왕[훗날 황제]은 하느님[신]의 대리자였다. 이때만 해도, 왕은 주교도 임명하고, 교회나 수도원의 영지를 마음대로 할만큼 망각했다. 뒤를 이은 10세기와 11세기의 오토왕조와 잘리어왕조의 왕권에 대한 표현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였다. 3장에서 주로 논하는 노르만 무명씨나 라이헤나우 채색장식화에 대한 분석이 이 시대이다. 후광 논의는 다소 부차적이나 뒤에 이어가기 위한 일종의 복선이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성직서임권 투쟁을 벌인 황제가 잘리어왕조의 하인리히 3세와 4세이다. 칸토로비치는 교회에 대한 세속권력이 해체되는 한편, 교회는 세속권력화[제권화]하는 서임권 투쟁을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명칭이 사제에게로, 최종적으로 교황의 전유물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러자 다시 반작용이 일어나는데, 이번에는 로마법학자[Civilians, 세속법학자 또는 국가법학자, 로마법을 참조한 것은 교회법도 마찬가지다] 쪽에서 황제가 지상의 신이었다는 고전고대의 언명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제 황제는 신[하느님]의 대리자가 된다.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프리드리히 2세가 그러하다. [그와 교황의 지긋지긋한 투쟁을 염두에 두자. 영지가 없는 프랑스 왕가의 후손을 끌어들인 교황이 마침내 그의 후손을 꺾어버렸다.] 이제 황제는 성부 하느님의 대리자가 되고, 교황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나뉘게 된다.
이러한 중세 후기 명명법의 전환은 의미가 깊으며, 이는 서방 종교 정서의 깊은 층위에서 일어난 진화의 표면적 증상일 뿐이다. 성 프란시스코 시대 이후 그리스도론 개념의 변화가 일어나, 인간과 신의 관계는 대상-중심적 신비의 “실재론”으로부터, 중세 후기의 특징인 주체-중심적 신비주의의 내적 안개 속으로 퇴거해 버렸다. 이런 변화는 도상학에서 분명한데, 신-인은, 순수하게 육체로 표현되지 않는 한, 점점 더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정치적인 분야에서, 보다 그리스도 지배론적-전례적 왕권 개념이 보다 신정론적-법학적 통치 이념으로 대체되었고, 후대의 통치자들이 따르겠다고 주장했던 신적 모형에서 신성deity의 인간격과 왕권의 의사-성직자적 및 성사적 본질이 점차 사라졌다. 초기의 전례적 왕권과는 대조적으로 신권divine right에 근거한 중세 후기의 왕권은 제단 위의 성자가 아니라 하늘의 성부를 모형으로 만들어졌으며, 두 본성을 지닌 매개자라는 본성론이 아니라 법 철학에 초점을 맞추었다.(93)
이러한 논의를 해석하는 다음 문단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이것이 서방의 종교적 정서의 변화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칸토로비치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해석을 결론이 아닌 중간 부분에 슬쩍 끼워둔다. 상당히 의뭉스럽달까. 대상 중심적 신비의 실재론으로부터 주체 중심적 신비주의의 내적 안개로 옮겨갔다고 말하는데, 말하자면 신비가 구체적인 대상으로 실재한다고 보는 관점, 전례를 통해서 축성된 왕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은총에 의해 가진다는 실재에 대한 믿음에서 주체 중심적 신비주의로 옮겨갔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이제 신비한 구체적인 대상으로 전례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신비를 느끼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는 말이 된다. 신비는 더 이상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인식과 감정의 영역으로 옮겨갔기에, 주의라고 부르는 것. 그러므로 더 이상 전례의 신비에 왕권이 의존할 수 없다. 그럴 경우 왕권도 사람의 마음 속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상학적으로는 신성-인성 모두를 묘사하는 그리스도 도상[왕권에 대한 도상]이 점차 사라지며, 성자의 도상이 성부의 도상을 닮아간다는 것으로 확인한다. 이제 왕권은 신정론적, 법학적이 되고, 왕권은 신권 곧 성부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문장 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 보이지만, 뒤에 이어질 내용에 대한 맛보기랄까.
초기 전례적 왕권에서 중세 후기의 신권에 근거한 왕권으로 전환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왕의 매개자성은 기묘하게 세속화되었지만 존속했던 반면, 왕의 사제직은 법 그 자체에 부여되었다. 왕의 그리스도 모방은 엷어져 갔지만, 군주의 쌍둥이 이중화의 이상은 여전히 유효해서, 성사와 제단에 관한 지위를 대체하는 법과 정의에 대한 왕의 새로운 관계성에서 명확해졌다. 노르만 무명씨의 약 50년 후인 1159년 경 솔즈베리의 요한John of Salisbury의 『정치가론Policraticus』에서 법적 관용어구들의 침투와, 법적 관념들의 빈번한 사용이 발견된다. 4권 시작 부분에서 그는 형평의 모상인 왕rex imago aequitatis이라는 학설을 전개한다. 그의 변형은 오래된 주제의 사소한 변화로, 그리스도를 전례적 측면에서 법적인 측면으로 미미하게 전환한 것이다. 그는 군주에게 절대적인 권력과 법에 의한 절대적인 제한이라는 자기모순적인 두 가지를 모두 부여했다. 그는 군주를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legibus solutus라고 선언하는 로마법 격언의 근본적 타당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가 자유롭고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것은 생득적인 정의에 대한 의식에 기초하여 행위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며, 처벌에 대한 공포가 아닌 정의 그 자체에 대한 사랑 때문에 법과 형평을 공경하도록 직무에 의해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공적 인격으로서 재판하며 피를 흘리는데 무죄하다, 이는 로마법이 군주의 의지가 법으로서 효력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 형평의 모상의 담지자는 동시에 형평의 종복이 된다. 솔즈베리의 요한의 공적 인격persona publica과 사적 의지private voluntas라는 대립관계는 공적 인격으로서의 군주와 사적 인격으로서의 군주 사이의 구별을 암시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적 인격의 군주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이 없다. 그가 말하는 군주의 공적 인격 안에서 내적 긴장이 발견되는데, 공적 인격으로서의 군주는 법으로부터 해방되어legibus solutus 있는 동시에 법에 구속되어legibus alligatus 있고, 형평의 모상image aequitatis인 동시에 형평의 종복aequitatis servus이며, 법의 영주인 동시에 법의 농노이다. 이중성은 직무 그 자체 안에 있다. 솔즈베리의 요한이 말하는 군주는 완벽하므로, 정의의 이념 그 자체이며, 그 이념이 법의 목적이기 때문에, 이 이념은 법에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법 위에 있다. 군주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도구이자 살아있는 법lex animata인 군주를 통해서 또는 군주 안에서 정의가 지배한다.(93-97)
앞으로 상당히 길게 전개될, 법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은 중간자적 인물인 솔즈베리의 요한을 통해서 시작된다. 그는 노르만 무명씨로부터 불과 5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저술한 1158년은 붉은 수염Barbarossa이라 불린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프리드리히 1세가 독일왕이 되고, 황제가 된지 얼마되지 않았을 시점이고. 그가 활동했던 잉글랜드에서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막 즉위했을 무렵이다. 솔즈베리의 요한의 논의에서 왕의 두 신체는 아직 드러나지 않는다. 두 본성에 대한 논의도 사라졌다. 주목할 만한 것은 형평의 모상인 왕이라는 언명으로부터 왕의 공적 인격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왕의 공적 인격이 사적 인격과 충돌하는 두 신체가 드러난 것은 아니다. 사적 의지가 존재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아니다. 왕은 공적 인격이 지배한다. 왕은 정의 그 자체이다. 왕은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지만, 법에 구속되어 있다. 형평의 모상인 동시에 형평의 종복이다. 법의 영주이자 법의 농노이다. 공적 직무 안에서 이중성이 구성된다. 정의의 도구이자 살아있는 법인 군주를 통해서 정의가 지배한다. 어떻게 보면, 사적 의지에 대한 설명이나 대립을 구성하지 않는 그의 논의가 비현실적으로 여겨지지만, 그건 그대로 두자. 중요한 것은 legibus solutus와 legibus alligatus를 대립시키는 그의 이중화다. 이런 논의를 수립한 것은 분명 잉글랜드 국헌에 관한 논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직 실지왕 존과 마그나 카르타가 등장하기 전이지만, 안셀무스와 헨리 1세 사이의 성직 서임과 공경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협약의 영향력 하에 있기도 했다. 법을 이야기하는 그도, 성직자 출신이었다. 말년에 샤르트르의 주교를 지내기도 했다. 프랑스로서는 중요한 교구다. 솔즈베리의 요한은 고대 로마법 『학설휘찬』 등으로부터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왕이라는 훗날의 절대주의로 이어지는 관념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법의 이념인 형평과 정의를 도입하여 왕을 법에 구속되어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이중성은 영원한 것인가?
프리드리히 2세가 우리를 기다린다.
2025.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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