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 슈미트Carl Schmitt, 『정치신학: 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Politische Theologie: Vier Kapitel zur Lehre von der Souveränität』, Zweite Auflage, 김항 역, 그린비(Duncker & Humblot Gmbh), 2010(1934).
칼 슈미트라는 학자도 『정치신학』도 유명하다면 꽤나 유명하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나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꽤나 여러 이야기를 해야하고 이 책을 두고 벌어진 수많은 논쟁들과 숨겨진 논쟁들에 대한 이야기가 따라나오다 보니 책을 읽기도 부담스럽고, 책을 읽었다고 뭔가 한 두 마디 하려하면, 이거 읽어봤어, 이거는 봤어 하는 소리를 사방에서 듣게 마련이다. 아마도 칼 슈미트에 대해 조심스러워지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잘 알려지 있다시피 그는 전통적인 카톨릭 신자로 그의 카톨릭 신앙이 자기 학문을 관통하고 있다. 게다가 나치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서, 한때 나치의 ‘계관법학자’라는 뒷날 영예롭지 않은 칭호를 들었지만, 1936년 이후 나치 법학자들의 공격으로 실각하고, 패전 후 미군에 체포, 재판, 1년여의 수용소 생활도 한다. 학자가 이렇게까지 처벌받는 경우는 드물다. 하이데거 조차 재판 없이 청문회를 거쳐, 몇 년 후에 복권되었지만, 칼 슈미트는 끝내 복귀가 허락되지 않아, 1985년 플로텐베르크에서 여생을 마친다. 야콥 타우베스와 알렌산드르 코제브 같은 학자들의 끊임없는 방문을 받았고, 에릭 페테르존Erik Peterson과의 정치신학으로서의 일신론에 관한 논쟁,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와 역시 일신론, 정치신학, 정치적인 것에 대한 논쟁,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과의 숨겨진 논쟁, 칸토로비치Ernst Kantorowicz와의 숨겨진 논쟁 등이 각각 짚어져야만 하는 지점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실상 그를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던 수면에서 길어올린 사람들은 샹탈 무페Chantal Mouffe나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그리고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같은 좌파들이 정치적 근본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의 결합 그리고 종교와 신학의 귀환, 종교적 테러 같은 현상을 보면서 되살린 결과다.
이 정도 이야긴 누구나 하는 소리지만, 어쩔 수 없이 나도 몇 마디 하고 지나가야 한다. 뭐랄까 그만큼 칼 슈미트에 관한 이야기는 출발점을 놓기가 어려운데다. 독일 공법학에 관련된 논쟁 속으로 들어가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국에서는 동아대 교수 김효전이 칼 슈미트가 쓴 글들을 오랜 기간 거의 모두 번역해 두었다. 동아대에 이런 분이 또 있어, 심지어 학교 풍토가 좋은가 보다 생각이 들 정도. 김효전이 칼 슈미트를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부터로 이미 오랜 기간 이 문제를 살펴왔다. 일본에서는 이보다 앞서 1970년대에 한 번 칼 슈미트 유행이 있었다. 아마도 1976년 출판된 삼성출판사 세계사상전집에 칼 시미트의 『정치적 낭만』이 포함된 이유는 이 시절 일본의 유행을 따른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1930년대에 제국 일본과 나치 독일이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칼 슈미트는 일본에 이 시기에 전해진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동경대학 시절 이미 칼 슈미트의 글을 세미나에서 읽고, 또 번역도 했다던가, 『일본정치사상사연구』에서 칼 슈미트의 홉스 독해를 채용하고,『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에서 이미 일본에서 나치 법학자이자 이론가였던 칼 슈미트에 대한 관심과 칼 슈미트의 자유주의 비판을 되치기해서 자유주의를 다시 정립하려는 의도가 엿보일 정도다. 개인적으로 칼 슈미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김학재의 『판문점 체제의 기원』을 읽고나서 부터인 것 같다. 그리고보니 200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칼 슈미트에 대한 꽤나 큰 관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각자 관심을 가지는 방향성과 방법은 다르지만, 꼭 짚어봐야할 학자인 건 분명하다. 그러다가 나도 더 이상은 ‘정치신학’ 또는 ‘정치종교’라는 현상을 외면할 수 없어서 칼 슈미트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칼 슈미트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쓰기 전에 이렇게 구구한 이야기들을 꺼내는 이유는 칼 슈미트에 대해서 가지는 사람들의 관심이 그만큼 다양하고 또 복잡하며, 각자가 칼 슈미트의 입을 빌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이 글의 말미에서 그럴 예정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앞서 칼 슈미트에 대해서 예단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칼 슈미트를 소개하는 많은 사람은 자기 경험과 자기 의도에 입각해서 칼 슈미트를 읽어내는 경우가 적지 않고, 그런 사람으로 아감벤을 많이 지목하지만, 아감벤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칼 슈미트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우선 자기 자신을 읽는 일이 필요한 것 같다. 그 다음에 시대를 읽고, 칼 슈미트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여기서는 칼 슈미트가 『정치신학』에서 말한 것만 가지고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머지는 다음 책들을 읽을 기회가 있으면 그때에.
우선 1933년에 기록한 2판 저자 서문에서 칼 슈미트는 그동안 새로 나타난 정치신학의 적용 사례로, 15-19세기의 ‘대표’, 바로크철학의 신에 유비되는 17세기 군주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19세기 중성 권력, 집행하되 통치하지 않는 ‘순수 조치-행정국가’를 들고 있다. 신·구교 등 모든 세력에 대해 우위를 가지는 중성 권력과 중성화가 칼 슈미트가 주목하는 개념.(8) 칼 슈미트는 자유주의 국가와 프로테스탄트가 한 통속으로 국가와 정치 그리고 신을 절대적 타자로 삼아왔다고 비판하면서, “무엇이 비정치적인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언제나 하나의 정치적 결정을 의미한다”(9)고 흥미롭게 지적한다. 규범주의와 결단주의에 제도적 보장이라라는 세 가지 법학적 사고를 제시하면서 규범주의는 비인격적이고, 제도이론은 다원주의로 전락하며, 결단주의는 인격적 결정 속에서 법 제정을 관철시키려 한다고 말하면서, 여기에 정치적 통일체의 세 가지 영역과 요소인 국가, 운동, 민족이 귀속되다고 말한다. 규범주의는 퇴락이며, 실증주의란 타락한 결단주의라고 비판하는 이는 모두 공법학의 책임이라는 주장이다.(10-11)
칼 슈미트에 대한 자유주의 비판에 담겨있는 것이 바로 규범주의와 제도이론에 대한 비판이다. 뭐 그리 복잡한 사고가 아니다. 규범주의란 최상위 규범을 제시히고, 그 아래 규범을 쌓아간다는 논리다. 책 속에서 켈젠을 비판할 때 보다 자세히 제시된다. 제도 이론이란 제도를 통해서 이를 관철한다는 것이다. 현실 속으로 가져오면 이렇다.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권이 어떤 개념으로 제시된다고 치자. 예를 들어, 자유, 평등, 소수자의 인권 등이 있겠다. 규범주의란 이런 규범들을 천명하는 것이며, 이런 규범을 법을 통해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법의 규정을 따라서 상세하게 규정하는 일이다. 제도이론이란 이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제도와 결부시키는 일이다. 이런 것들을 보호하는 기구를 만든다. 인권위원회, 양성평등위원회, 여성가족부 등과 같은 것이다. 넓게 보아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행한 민주화란 자유주의 전통 속에서 규범을 제시하고, 여기에 걸맞는 기구를 제시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얼핏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운용하는 손이 달라지자 모든 것이 급변했다. 실행과정은 점차 법실증주의에 매몰되어, 실행기관인 정부와 법원에서 법률을 실증주의적으로 협소하게 해석한 나머지, 규범은 판례로서 유명무실해졌고, 각종 기구들은 옥상옥에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없어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권리와 자유도 급속하게 위축되었다. 아마도 2016-17년에 한국이 처한 현실이 여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칼 슈미트가 제시하는 내용 중에서 특히 자유주의 비판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광장에 모였고, 그들이 다시 자유주의적 규범의 섬세한 구축과 제도를 통한 권리와 자유의 보장에 만족할 것인지에 대해서 회의가 날로 커지고 있다. 솔직히 만족할리 없다고 본다.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길 기대할 텐데. 지금 야당이 제시하는 대안이 너무나 순진무구하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시 협의체 정부기구를 강화하겠다니. 만약 얼마간의 기간 동안 그런 변화가 성공적이지 못하면, 대중은 결단을 개인의 의지로 체화한 새로운 ‘독재Diktatur’의 등장에 환호성을 보낼지 모른다. 그의 궁극적 실패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트럼프가 선거에서 이겼으니까. 규범과 제도 만으로 사람들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할 때, 규범과 제도를 넘어선 실천이 필요할 때, 정부를 구성하고 어디서 그 실천과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 지금부터 고민하고 시험해 보는 길밖에 없다. 때아닌 반동을 피하고 싶다면 더더욱.
“주권자란 예외상태Ausnahmezustand를 결정하는 자이다”라는 너무나 유명한 말로 주권의 정의를 논하는 장이 시작된다. 주권은 한계개념으로 생각해야 하며, 단순한 긴급명령이나 계엄상태 따위가 아니다.(16) 결정에 대해 김항은 법규범의 정상성이 언제나 구체적 상황에서의 결단, 순수한 인격적 결정을 통해 이루어지고, 결단주의Dezisionismus의 핵심은 구체적 상황을 예외 혹은 정상으로 분할하는 것이라 지적한다.(16) 예외상태에 대한 결정은 결정 그 자체이다. 주권이란 결국 갈등상황에서 누가 결정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17) 주권자란 통상적으로 유효한 법질서 바깥에 서 있으면서, 여전히 그 안에 있고, 헌법을 완전히 효력정지시킬 것인지 결정하는 자리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크라베Hugo Krabbe와 켈젠Hans Kelsen은 주권자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말한다.(18) 칼 슈미트의 주권 개념은 주권이 위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장 보댕Jean Bodin으로부터 출발하며, 주권자는 긴급사태에서 여러 신분이나 인민에게 구속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보댕은 주권을 분할 불가능한 통일체로 국가권력에 대한 물음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데, 유효한 법률을 폐지하는 권한이 바로 주권에 고유한 표식이며, 여기에서 선전포고와 강화조약, 관리의 임명, 최종재판권 사면권 등의 특징이 추출된다고 보았다.(18-20) 또 1921년에 쓴 『독재론』에서 푸펜도르프Samuel von Pufendorf를 들며 17세기 자연법 사상가들도 주권의 문제를 예외사례에 관한 결정의 문제로 이해했다고 보았다. 무엇이 공공의 질서이며 안전인가, 그리고 언제 위기에 처하는가. 법질서란 규범이 아니라 결정에 기초한다.(21-22) 신을 주권적이라하고, 신의 대리인들의 주권을 말할 때, 16세기부터 법학자들은 주권의 권한을 열거해 왔으나, 주권은 언제 항복하느냐와 같은 누구도 권한을 갇지 않는 사례, 즉 예외사례, 극한적 긴급사태에 관한 것이라 말한다. 이런 근거에서 자이델은 1871년 헌법에 의해 독일제국의 권한은 제한되고, 영방領邦이 주권적이라 말했고, 슈미트는 1919년의 헌법, 즉 바이마르 헌법 48조는 대통령에게 무제한의 전권을 수여하는 1815년의 헌장 14조의 예외적 권한 같은 주권을 부여한다고 말한다.(22-23) 예외상태는 원칙적으로 제한 없는 권한, 모든 현행 질서를 효력정지시키는 권한을 포함한다. 법질서가 없어져도, 국가의 실존이 우월하다다. 국가는 자기 보존의 권리에 따라 법을 효력정지시키며, 법과 질서는 서로 대립하고, 규범은 무화된다. 그러나 예외 상태는 법학적 인식의 테두리 안에 머문다.(24-25) 일반적 규범은 정상성을 확립하나 혼란상태에 적용될 수 있는 규범 따위는 없다. 주권자란 정상적 상태가 현실을 실제로 지배하는지는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자이다. 모든 법은 ‘상황에 따른 법’이며, 주권자는 이 최종적 결정의 독점자이다. 국가주권의 본질은 결정의 독점이다. 예외사례는 국가적 권위의 본질을 최대한 극명하게 드러내고, 국가의 권위는 법을 만들기 위해 법이 필용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25-26) 예외상태는 로크John Locke의 법치국가적 원리와 질서가 안정된 합리주의적 18세기와는 공통분모가 없다. 칸트Immanuel Kant에게 긴급권은 법이 아니다. 오늘날 국가론은 긴급상황에 대해 합리주의적으로 무지하며, 반법률적 이념에서 긴급상황에 관심을 가진다. 켈젠 같은 신칸트학파 법학자들은 예외 상태를 체계적으로 다룰 수 없다. 구체적 사태에 직면하여 체계적 통일성과 질서가 어떻게 스스로를 효력정지시키는가는 구성하기 어렵다. 법치국가적 경향은 법이 스스로를 효력정지키시는 사례를 정확하게 법률에 기입하려는 시도일 뿐이다.(26) 예외는 합리주의적 틀의 통일성과 질서를 흐트러뜨린다. 규칙보다 예외가 중요하다. 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예외가 규칙을 보증할 뿐 아니라, 규칙은 애당초 예외에 의해서만 존속하며, 예외 속에서 실제 삶의 힘은 굳어버린 기계장치의 껍데기를 깨부술 수 있다. 일반적인 것을 연구하려면 예외를 연구하라, 예외를 설명하지 못하면 일반적인 것도 설명할 수 없지만, 예외는 일반적인 것을 뜨거운 열정으로 사유한다고 키에르케고어Kierkegaard를 인용한다.(27-28)
칼 슈미트가 말하는 주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외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상태가 예외상태인가, 흔히 이 예외상태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을 지적한다. 아감벤은 『예외상태』에서 그 폭을 내전에서 수용소까지 넓힌다. 그러나 우선 칼 슈미트가 예외상태에서 무엇을 언급하려고 하는지 이해보려면 이 문제를 독일 역사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이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독일 역사에서 우리가 통상 진보 또는 발전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처음부터 발전이거나 진보였던 적은 없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그런데. 헤겔이 말을 탄 세계정신이라고 칭송한 나폴레옹은 결과적으로 유럽 전체에 혁명정신을 전파하지만, 그것이 독일로 찾아왔을 때, 그 내용은 군사적 지배와 침략의 형태였다. 나폴레옹은 독일의 절반을 점령하고, 라인연방을 결성했고, 프랑스의 혁명정신은 외부에 의한 압제의 형태로서 독일에 전파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를 통해 반복되는 독일의 반동은 어쩌면 여기서 부터 출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때 최초의 주권적 행위라고 언급하는 1815년의 헌장은 저자의 오기로 김효전의 역주에 의하면 프랑스 1814년 헌장 14조로, 영역본에도 [French]가 삽입되어 있다. 1815년 독일에도 독일 연방Deutches Bund를 결성하는 문서가 있어 헷갈리기 쉽다. 이 문서의 정식 명칭은 독일 연방 약관Deutsche Bundesakte이다. 김효전의 번역도 역주도 참고할 가치가 있다. 1815년 프랑스 헌장 14조는 국왕이 국가의 원수, 육해군의 통수권자로, 선전강화권, 동맹체결권, 통상권, 모든 관리 임명권을 가지며, 또한 법률의 집행과 국가의 안전을 위하여 필요한 규칙과 명령을 발한다라는 규정이며, 안전을 위한 규칙이 필요한 예외상태, 혹은 비상사태에 대한 규정이라고 한다. 나폴레옹이 물러가고 루이 18세가 복귀하여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부여된 1814년의 헌장Constitutional Charter 14조의 안전을 위한 비상대권을 지칭하여 주권이라고 칼 슈미트는 말한다. 그리고 1871년으로 넘어가는 데, 그 사이에 실상 실패했던 혁명적 시도가 있다. 1848년 독일 혁명의 결과로 성립된 프랑크푸르트의 국민회의에서 헌법 초안을 만들었고, 당시 프로이센 황제이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황제로 추대하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거부로 무산되는 일이 있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모두 나폴레옹이 남긴 상처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독일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의한 의회 민주주의로의 발전 경로를 거부하고, 프로이센 중심의 군주제 독일로 나아간다. 그 결과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주도로 만들어지는 것이 1871년 흔히 제2제국이라고 부르는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으로 전제군주국가의 길을 걷는다. 이때 성립된 1871년 독일 제국 헌법을 흔히 비스마르크 헌법Bismarcksche Reichsverfassung이라하며, 칼 슈미트는 오히려 유보된 권한이 영방에 있기에 영방에 주권이 있다는 식의 논리를 슬쩍 언급한다. 그리고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바이마르 헌법 48조를 인용한다. 그러나 그는 1919년의 질서 자체에 대해선 긍정적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이것에도 역시 1918년 독일 패전 과정의 복잡성이 깔려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의 결과 독일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의해 동부에서의 군사적 승리를 확인하지만, 미국의 참전으로 불리해진 전세에 오스트리아 항복에 따른 킬 군항 수병의 폭동, 전국적인 파업으로 인해 황제는 퇴위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독일은 내부에서 붕괴한다. 큰 원인으로 보면 당연히 무모한 전쟁으로 인한 패전의 결과이지만, 실제 독일의 보수파와 독일인들은 군사적으로 승리했으나 내부의 적인 좌파에 의해 패배하고 항복했다는 논리를 펴게 된다.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 태평양, 중국, 동부와 남부아프리카 등 모든 지역의 식민지를 상실하고, 프랑스에 알사스 로렌, 벨기에에 말뫼, 북부 영토를 덴마크에 폴란드에 영토를 내놓았고, 군사력은 억제되었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게 된다. 베르사유 조약 조인이 1919년 6월이고, 1918년의 독일혁명이 11월, 그래서 수립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이끄는 사민당 정부가 휴전 협정에 조인하고, 1919년 2월 제헌의회 수립, 여기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1919년 8월에 헌법이 가결된다. 이 헌법개정 논의가 바이마르에서 이루어져서 이를 바이마르 헌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독일 보수파들에게 바이마르 헌법이란 패전의 결과이고 오래된 상처로 남게 된다. 역설적으로 가장 민주적이고, 자유주의적이라고 불렸던 헌법이 또 바이마르 헌법이다. 그런데 이 헌법 48조에 규정된 공공의 안녕질서 회복을 위한 조치를 할 대통령의 권한, 병력 사용과 기본권의 제한 규정이 있고 여기에 의거하여 주권을 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김효전 역주, 465) 그리고 이 조항에 의거해 1930년에서 33년까지 의회 다수파가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어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수상을 지명하여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적어도 칼 슈미트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1814년의 프랑스 헌장 14조, 1871년 독일 헌법의 허점, 1919년 바이마르 헌법 48조 등 헌법이 규정하지 않고 있는 헌법 규정 또는 법률 규정의 외부로 유보되면서, 통치자가 개인의 의지를 반영하여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 만을 예외상태에 의한 주권이자 본질적 주권이라고 말한다. 반면 당연히 주권이라고 언급될 만한 제헌권력과 제헌과정 자체를 주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법 외부에서 법을 규정하는 넘는 상황의 특별한 상황 만을 주권의 발동이라고 보는 셈이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현실적인 동시에 또한 지극히 논리적인 길을 밟아간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독일 역사의 궤적, 즉 외부로부터 진보와 혁명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가치들이 정작 독일에는 때로 굴욕으로 다가오고, 반동을 이끄는 역사가 있다. 칼 슈미트의 예외상태는 1848년의 혁명이나 1918년의 혁명이 오히려 독일을 약화시킨다고 보고, 반동적 군주제로의 해결책을 선호한 독일의 역사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과연 칼 슈미트가 얼마나 반동적인지 여부에 대해 예단하기 어렵다.
공법의 이론과 개념은 정치적 사건과 변화를 반영하고, 주권학설은 다양한 정치적 권력투쟁을 통해 구획된다(30)는 그의 언급은 독일 역사를 들여다 보면 이해가 되지만, 그럼에도 역사로 모두 설명되지는 않는다. 유럽이 16세기 국민국가로 해체되면서 보댕의 주권개념이 생겨나고, 18세기 새롭게 탄생한 국가들에서 바텔의 국제법적 주권 개념이 발견되고, 1871년 독일제국은 영방국가의 권한 영역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주권 개념과 국가 개념의 구분을 발견하지만, 주권은 지고의 연역 불가능한 권력이다. 지고의 힘이다.(30-31) 그러나 지고의 힘, 최대 권력은 정치적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은 법의 존립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사실상의 최고 권력과 법적인 최고 권력을 결합시키는 것이 주권 개념의 핵심 문제이다.(32) 켈젠은 주권개념을 구성하면서 사회학과 법학을 대립시키고, 법학에서, 순수성 속에서 여러 규범들과 궁극의 통일적 근본규범이 귀속된 하나의 체계가 획득된다. 존재와 당위, 인과와 규범의 대립은 사회학과 법학의 대립으로 전위된다. 국가에 대한 법학적 사유는 순수 법학적이며 규범적으로 유효해야 한다. 하나의 통일체로 자기충족적이고 독립된 법질서이다. 이때 국가는 법질서의 창출자도 원천도 아니다. 법질서는 궁극적 귀속점과 최종규범이 속하는 귀속의 체계이다. 최상위의 권력은 인격이나 사회학적 심리학적 권력복합체에서 비롯되지 않고 오로지 규범체계의 통일체인 주권적 질서 그 자체에서만 비롯된다. 법학적 사유에는 인격체가 아닌 귀속점만 존재하며, 국가는 귀속의 최종점이다. 여기서 귀속의 체계는 정지하고, 연역불가능한 질서가 된다. 국가는 국가의 헌법, 즉 통일된 근본규범이다. 연역에서 핵심은 ‘통일성’이다.(34) 이는 어떤 ‘헌법’의 기초 위에 하나의 체계가 성립함이 얼마나 순수하고 정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보여 준다. 체계적 통일성은 법학적 인식의 자유로운 행위이다. 하나의 지점, 하나의 질서, 하나의 체계, 하나의 규범.(35) 이 규범과학은 법률가의 자유로운 행위를 통한 판단을 내리므로 규범적일 수 없고, 통일성과 순수성은 엄청난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하는 근본적 어려움을 무시하고 형식적 근거를 내세워 체계를 거스르는 모든 것을 배제하면 쉽게 얻을 수 있다. 결연하게 방법론에만 머무르는 자는 손쉽게 비판한다. 켈젠은 주권개념이라는 문제를 무시함으로써 이를 해결한다. 이는 낡은 자유주의가 법을 내세워 국가를 부인하는 일이며, 법실현이라는 독립된 문제를 무시하는 일이다.(36) 크라베Hugo Krabbe의 법주권설은 국가가 아니라 법이 주권자라는 테제에 기초해 있다. 크라베에 따르면 현대의 국가이념은 인격적 통치권력 즉 군주나 통치권자 대신에 영적 권력을 내세운다. 인간의 정신적 본성에서 비롯되어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는 규범이 영적 힘이다. 법질서의 원천은 “민족협동체의 법감정과 법의식” 속에서만 발견된다. 이것이 하나의 현실적 가치이다. 크라베에게서 직업 관력이 독자적 지배권력으로 국가와 동일시 되고, 공무원제도가 보통의 직업제도와 구분되며, 모든 영역에서 분권화와 자치가 광범위하게 발달한다.(36-37) 국가가 아니라 법이 힘을 가지며, 권력은 법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국가는 법을 만드는 일을 통해 자신을 알린다. 여러 이해관심이 법적 가치를 가지는 것은 법의 원천을 통해서이다. 이는 국가에 대한 이중의 한정으로 이해관심이나 복지를 법으로 한정하고, 국가를 결코 구성적일 수 없는 선언적으로 확정하는 행위로 확정하는 일이다. 현대 국가에서는 법적 이익이 최고의 이익이며, 법적 가치가 최고의 가치이다. 중앙집권적 권위주의 국가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이는 협동체 이론에 가깝다.(38-39) 기르케Otto von Gierke는 국가나 여타 통치자의 의지는 법의 궁극적인 원천이 아니라, 인민들의 삶으로부터 생겨난 법의식을 표명하기 위해 마련된 인민들의 기관으로, 통치자의 인격적 의지는 유기체적 전체로서 국가의 한 부분이 된다. 그에게 법과 국가는 대등한 권력이다. 또 법과 권력은 합치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의 법률제정은 ‘궁극의 형식적 인장’일 뿐이며, 법에 새기는 국가적 각인이다.(39) 프로이스Hugo Preuß는 협동체적으로 밑으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공동체야말로 지배의 독점이 불필요하고 주권이 등장할 필요가 없는 조직이라 보았다.(40-41) 협동체론자 볼첸도르프Kurt Wolzendorff는 국가와 법이 서로 필요로 하지만 법이 궁극적으로 국가를 구속하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권력은 질서의 힘으로, 삶의 형식으로 자유로운 개인이나 협동체가 할 수 없는 일에만 개입하도록 요청된다. 그의 순수국가란 질서 기능으로 한정한 국가이다. 국가는 수호자이고, 책임을 지고 최종결정을 내려야 하는자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권위주의에 접근했지만, 실체적 의미에서의 형식이라는 개념을 논의의 장에 제기했다. 그는 질서 자체의 힘을 높이 평가하고, 국가는 법이념의 확정자이거나 전달자가 아님을 밝혔다. 형식이란 사회-심리적 현상이며, 역사적이고 정치적 현실을 움직이는 요소로서, 국가는 삶의 형식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형식이 된다.(41-43) 베버Max Weber는 법사회학에서 세 가지 형식 개념을 구분하는 데, 첫째 법 내용을 개념적으로 엄밀화한 법형식, 규범적 규제, 곧 양해행동의 인과적 요인이다. 둘째, 합리화, 전문화, 예측 가능성의 동의어로, 자각적인 판결 원칙을 지닌 복합체이며, 형식적으로 발달한 법이란 법률전문가와 사법관료로 구성되어 합리화되어 형식적 성격을 가진다. 첫째는 법학적 인식의 초월론적 ‘조건’을 둘째는 훈련의 반복과 전문적 연구의 결과에서 비롯된 합법칙성을 의미한다. 셋째 합리주의적 형식은 증대하는 사회적 교류와 법률적 소양을 갖춘 관료의 이해관심에서 비롯된 예측 가능성에 목적을 두는 기술적 완성이다.(43-44) 그러나 기술상의 형식 개념은 사법형식에는 적합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숙고는 법형식에 적합하고 행동은 기술적 형식에 적합하다. 법형식을 지배하는 것은 법이념이고, 법적 사고를 구체적 사례에 적용해야 하는 필연성, 법실현이다. 법이념은 구체적 모습으로 형식화되어야 한다.(44) 현대 국가론은 형식이 주관에서 객관으로 옮겼다. 라스크Emil Lask의 범주론에서 형식 개념은 주관적이었지만, 켈젠은 법질서의 통일성을 법학적 인식의 자유로운 형태로 자리매김하며, 세계관을 표명하는 단계에서는 객관성을 요구한다. 켈젠의 객관성은 일체의 인격성을 회피하고 비인격적 규범의 비인격적 효력으로 법질서를 환원하는 일이다.(45) 크라베, 프로이스, 켈젠의 공통점은 인격적인 것을 모두 국가개념에서 제거하는 일이다. 켈젠은 인격적 명령권이라는 표상이 국가주권론의 본질적 오류로 보았고, 국내법 우위설은 주관주의적이며 법이념의 부정으로 단정한다.(45-46) 크라베는 인격 대 비인격의 대립을 구체 대 보편, 개별 대 일반의 대립으로, 관헌 대 법규, 권위 대 내용적 타당성의 대립으로 나아가, 인격 대 이념의 대립에 이른다. 이는 법치국가적 전통에 합당하고, 여기서 추상적 규범은 유효한 인격적 명령에 대립된다. 프로이스나 크라베에게 인격이라는 표상은 모두 절대군주제의 역사적 유물이다.(46) 칼 슈미트는 이런 모든 논의가 인격이라는 표상이 특수한 법학적 관심, 즉 법적 결정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에서 비롯되었음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결정은 법적으로 무엇인가를 지각할 때 따라다닌다. 법적 결정은 법의 내용과 무관한 계기를 포함한다. 어떤 결정을 요구하는 상황 그 자체가 결정적 계기로 남는다. 결정이 법적 가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가 문제가 되며, 사회적으로 결정의 명확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구체적 사례는 구체적으로 판결되어야 하며, 개별 사례에 따라 사례 만큼의 판결의 변화가 있다. 모든 변화에는 권위가 개입해 있다. 결정을 내린 권한기관이 있다. 결정은 결정이 내려진 논거로 독립하여 가치를 가진다. 잘못된 결정도 법적 효력이 있다. 반면 규범적으로 보면 결정이란 무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결단의 법적 효력은 결정이라는 귀속점으로부터 무엇이 규범이며 무엇이 타당성인지 규정된다.(46-48) 법형식의 특수한 고유성은 순수하게 법학적인 성격 속에서 인식해야 한다. 로크John Locke가 법이 권위를 부여한다고 말할 때, 그는 법률을 의식적으로 군주의 개인적 명령과 대립시키지만, 법률은 누가 권위를 주었는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결정개념으로서의 법규는 결정이 내려져야 함을 말할 뿐이다. 최종심급은 결코 결정규범에서 도출될 수 없다. 문제는 권한이다.(49-50) 결단주의의 고적전 대변자는 홉스Thomas Hobbes이며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률을 만든다는 대립의 고전적 정식화를 발견했다. 홉스는 결단주의와 인격주의 사이를 관계 짓고, 국가주권 대신 추상적으로 효력을 갖는 질서를 내세우려는 시도를 배격했다. 권력은 인격의 속성이라, 다른 권력 예를 들어 영적 권력에 복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홉스는 17세기 추상적 자연과학의 흐름을 대표하면서도 인격주의 입장을 취했다. 홉스는 자연과학 사상가로 자연계를 파악하듯 법학 사상가로 사회적 삶의 실제 현실을 파악하려 했다. 그는 국가라는 통일체를 주어진 한 기점에서 구성하며, 구체적으로 규정된 심급으로부터 비롯되는 결정을 탐구했다. 결정이 독자적 의미를 가짐으로 결정의 주체가 그 내용과 함께 독자적 명료성을 띄게 된다. 법적 삶이라는 현실에서 중요한 점은 누가 결정하느냐이다. 법학적 형식은 법학적 구체성에서 비롯되며, 기술이나 감성적 형식도 아니다.(51-52)
어쩌면 지나치게 상세한 요약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런 논의를 끌고 들어오기가 스스로에게 낯설어서 이기도 하다. 칼 슈미트는 장 보댕의 주권이론으로 시작해서 18세기와 19세기 유럽에서 주권사상이 변화되는 과정을 간략히 요약하면서, 한스 켈젠의 공법학과 국가학에서의 주권이론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한 마디로 켈젠의 법사상에서는 주권이 사라지고, 헌법이 최상위 규범으로 있는 순수 규범의 세계이며, 국가는 국가의 헌법에서 시작된 모든 법률의 통일체이고, 이 순수하고 정합적인 세계는 법률가의 자유로운 인식에 맡겨져 있다. 이런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현실과 고투하면서 벌여야 하는 노력을 외면하고 방법론에만 머물러서 형식적으로 완성된 체계를 구성했다고 켈젠을 비판한다. 크라베는 법이 주권자인데, 이런 법질서의 원천은 “민족협동체의 법감정과 법의식”이지만, 이는 관료를 통해 구현되며, 분권화와 자치가 발달하고, 법이 힘을 가진다고 말한다. 기르케는 법과 국가의 합치를 프로이스는 주권이 필요없는 아래로부터의 공동체를 볼첸도르프는 법이 국가를 구속하는 질서 기능에 한정된 순수국가를 제창하며, 실체적 의미에서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베버를 따라 법사회학에서 법이념은 법형식에 구현되어야 하고, 구체적 사례에 법실현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대 국가론에서 법형식은 주관을 버리고 객관화, 비인격화되었다. 켈젠 등은 국가에서 인격성을 제거했다. 이 모두는 결정을 망각한 것이다. 법은 판결의 형태로 결정되어야 하는데, 이때 구체성을 띄어야 한다. 그러므로 결정하는 자가 중요하다. 이 지점에서 로크와 홉스를 대립시키며, 홉스를 부각시켜서 구체적 결정에서 결정의 주체가 명료성을 띄고, 현실에서 이 점이 중요하다고 이어간다.
계속해서 이어가면서 비판하는 자유주의 국가는 칼 슈미트에 따르면, 헌법으로부터 출발해서 형식적 완결성이 자의적으로 구성되는 순수하고 정합적인 규범 그 자체다. 여기에 주권 또는 주권자의 자리는 없다. 이 순수 규범의 내용이 민족공동체의 법감정과 법의식이라고 해도. 그러나 이 법이 실현되는 과정, 그것이 관료에 의한 행정이든, 법원에 의한 재판이든 그 과정에서 법이념이 구체적 현실과 만나 형식화가 이루어지고, 실현되는 과정에서 결정하는 자의 존재가 나타남으로써 사라졌던 인격성이 복원된다. 거기서 부터 결정하는 자, 앞으로 나아가 법을 만드는 주권의 존재가 요구되게 된다. 칼 슈미트의 표현을 빌면, 법학과 사회학의 충돌이고, 규범과 현실의 충돌이기도 하다. 문제는 결정하는 자의 자리를 만들기면 하면 된다는 식으로 나아가는 슈미트의 발걸음이다. 전제군주가 사라지는 과정에서 사라져 버린 결정하는 자의 자리를 되살리기 위해, 잘못된 결정의 문제를 일단 덮어버리고, 우선 결정하는 자의 존재, 결정의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런 태도는 변화가 절실한 나머지 그런 변화가 어떤 변화인지에 대해서 따지지 않는 그런 태도를 가리킬 수도 있다. 왜 결정하는 자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문제에 언급하지 않는지는 뒤에서 드러난다. 실상 그는 의회권력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칼 슈미트의 지적을 전적으로 따라가기에는 어딘가 마음 한 구석에 개운하지 않지만, 켈젠 비판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규범의 순수 형식적인 체계가 한국에서 구성되어 있다거나 그런 구성이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방향으로의 움직임을 이끌어가는 원리들이 작동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구조를 형식으로 완비하려는 태도. 정부기관에서 일하거나 정부기관에 관련되어서 일할 때, 늘 그런 압박과 강요에 시달린다. 형식적으로 틀만 갖추면, 실상 별 내용이 없어도 혹은 내용에 꽤 문제가 있어도 별상관이 없다. 받은 돈 만큼 일을 하지 못해도 무방하다. 이래서 정부 돈을 눈먼 돈이라고도 한다. 심지어는 그런 상황과 요령을 잘 알아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형식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기관과 그런 기관의 사정을 잘 알고,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거나 실질적인 양보는 하지 않으면서도, 그저 구색만 맞추어서 하는 시늉만 내면 통과가 되는 수많은 보고서와 자료집과 매뉴얼을 만들어 내고, 또 제법 돈도 벌었던 입장에서 말하는 이야기다. 칼 슈미트의 지적 처럼 방법론만 번드르르하게 들어맞는 그런 식으로 일하려고 하면, 그건 너무나 쉽다. 외부인들은 도대체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한다. 상위규범에 어긋나지 않게 일처리만 하면 된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너무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는 일도 너무나 간단하다. 기다려 달라, 시간이 필요하다, 선례가 없다. 상위 원칙에 어긋난다. 관례가 그렇다. 켈젠이 추구한 법이념이 이런 식으로 말만 번드르르한 건 아니었겠지만, 그것이 한 순간에 이렇게 되어버릴 수 있다. 칼 슈미트의 말에 따르면, 잘 해봤자,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칼을 쥐어주었더니, 악의를 가진 자들이 칼을 휘둘러 칼춤을 추고, 사람들을 가난하게 하면서 돈을 긁어가는 지난 끔찍한 9년이 지나갔다. 악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데는 막을 방법이 없다. 완벽하지도 못한 형식주의는 악에 대항하는 데, 그저 조금 지체되는 약간의 방해물에 불과했다. 좀 더 영악한 축은 법적 책임으로부터 슬쩍 빠져서 관망하고 있고, 무능하고 어리석었던 축은 스스로 구렁에 머리를 집어넣고, 더더욱 들이밀고 있지만, 그 조차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건 진퇴양난이다.
여기서 맥락과 다소 다를 수도 있지만, 지적해 두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것은 칼 슈미트와 마루야마 마사오와의 관련성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1930년대에 이미 칼 슈미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2014년 4월 일본의 『現代思想』이 마루야마 마사오 탄생 100주년 특집호를 발행했다. 나는 작년에야 알게 되었는데. 거기 이 책 『정치신학』의 번역자 김항金杭의 글 「 近代市民の哀悼劇:丸山真男と決断の帰趨 근대 시민의 애도극: 마루야마 마사오와 결단의 귀추」라는 글이 실렸다.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막여우의 블로그에 이미 오래 전 번역문이 있는 것을 알고 읽게 되었다. 김항은 칼 슈미트와 마루야마 마사오의 연결고리를 결단으로부터 이어나가는데, 그 핵심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대한 슈미트의 해석과 관련이 있다. 이 책에도 인용된 진리가 아닌 권위가 법을 만든다Auctoritas, non veritas, facit legem!이라는 구절이 마루야마 마사오가 보는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자연自然과 작위作爲를 구분하는 핵심이다. 소라이가 성인聖人의 작위로 부터 내재적인 근대성의 단초를 발견하는 것이 그의 소라이 연구는 물론 『日本政治思想史硏究』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 모티브를 칼 슈미트의 토마스 홉스 해석에서 얻었던 것이다. 이런 소개글을 읽고, 다시 『日本政治思想史硏究』펼쳐보니,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런 일본 사상과 사회계약론의 교차를 너무나 명백하게 기록해 두었다. 이를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성인聖人에 대한 나의 오해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본래 유학에서 말하는 술이부작術而不作의 성인을 나는 나의 인식 속에서 자꾸만 고대에 위치시켜 두려한다. 그러나 소라이가 생각한 성인은 현실 속의 정치가 였고, 정치가의 작위 이전의 상태가 자연상태이고, 작위 이후의 상태가 사회상태라고 보았던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칼 슈미트에게 큰 영향을 받고 또 그와 싸워나갔다. 그러나 그 이후에 대한 문제제기는 마루야마 마사오와 칼 슈미트가 거의 정반대의 길을 간다. 칼 슈미트는 결단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다시 규범화 내지 인공적인 세계로 변하여 가면서 현실과의 교차를 이루지 못하고, 현실을 포섭하지 못하는 데 반대하여, 새로운 현실 포섭의 길을 열기 원했고, 결단을 통해 그 길을 열려고 했으나, 김항의 말처럼 권력의 대기실Vorraum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를 마루야마 마사오 식으로 표현하면, 홉스적 작위가 열어젓힌 길에 자연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방법론적으로 작위인 자유주의와 규범주의의 작위가 자리를 잡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독재 혹은 의지의 새로운 작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된다. 반면 마루야마 마사오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물론 『만엽집万葉集』을 통해 일본혼, 일본의 정서, 봉건질서에 대한 충성을 말하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에 대한 독해 과정에서 다시 슈미트의 무엇을 비정치적으로 만드는 것이 정치적이라는 주장을 끌어오면서, 일본 국학国学가 적극적으로 일종의 신학神学을 구성하며, 이루어진 모든 것이 성인의 작위가 아니라 신의 작위라는 주장으로 작위를 이어간다고 마루야마 마사오는 보고 있다. 이 지점에서 칼 슈미트에 대한 독해 특히 『정치신학』과 일련의 작품에 대한 독해 그리고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대한 독해 없이 마루야마 마사오 독해는 불가능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에서 작위적 근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의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는 물론 파시즘을 비판하는 일련의 글에서 패전 이전까지 일본의 근대는 자연自然인 천황과 작위가 뒤섞인 혼돈의 질서이므로 새로운 작위로 즉 내셔널리즘에 의한 국민의 형성과 개인의 창출을 통해 다시 근대를 세워야 한다는 자신의 기획으로 넘어가게 된다.
칼 슈미트에 따르면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다. 개념적으로도 그렇고 체계적으로도 그렇다. 예를 들면 예외상태란 신학에서의 기적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국가철학상의 발전을 이해할 수 있다. 현대 법치국가의 이념은 이신론理神論으로 지탱되어 왔다. 기적을 추방하고, 자연법칙의 중단을 거부하며, 주권의 직접 개입을 거부하는 일이다. 반혁명의 보수적 저술가들은 유신론적 확신을 가졌고, 신학과의 유비 속에서 군주의 인격적 주권을 지지했다.(54-55) 라이프니츠Leibniz는 법학을 의학이나 수학과 유비시키지 않고 신학과의 근접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자연신학과 자연법학이 있다.(56) 멘첼Adolf Menzel은 자연법의 기능을 사회학이 맡아 법학의 하위에서 정치적 경향에 과학성의 외피를 씌우지만, 실무적 법학은 기계장치로 된 신deus ex machina처럼 도처에서 국가가 개입하여, 입법자, 집행자, 고발자, 사면자, 비호자로 등장한다. 논의에 신학의 잔영이 있다.(56-57) 실증주의 시대에는 학문상의 적을 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라 비난했는데, 이는 유신론적 신을 국왕과 동일시한 군주제 국가이론의 잔영일 것이다.(57) 헤넬Albert Hänel과 프로이스는 논쟁 상대를 신학적 형이상학적이라고 추궁한다. 라반트Paul Laband와 옐리네크Georg Jellinek의 국가론의 주권개념과 지배권력이론이 준 개인을 만들고, 이런 이론은 신의 은총을 법학적으로 변장한 종교적 허구를 법적인 허구로 치환한 것이다. 베르나치크Edmund Bernatzik는 유기체적 국가론에 대해 삼위일체 교리를 연상시킨다고 비판한다.(58-59) 켈젠도 1920년 이래 신학과 법학 사이의 방법론적 근접성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의 인식론적 출발점과 세계관적이고 민주주의적 귀결 사이에 이질성이 있고, 국가와 법질서에 대한 법치국가적 동일시에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을 동일시하는 형이상학이 놓여 있다. 이 형이상학은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어 자의를 폐기하고, 예외를 배제한다.(59-60) 밀John Stuart Mill도 법칙은 모두 예외 없이 타당하다고 말했다.(60) 켈젠은 흄David Hume이나 칸트의 실체 개념 비판을 그대로 국가이론에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데, 스콜라적 실체 개념이 수학적-자연과학적 실체개념과 다름을 무시하고 있다. 켈젠에게는 수학적-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이 몸에 배어 있고, 민주주의란 정치적 상대주의의 표현이며, 기적과 도그마에서 해방된 인간 오성 및 비판적 회의에 토대를 둔 과학성의 표현이다.(60-61) 주권 개념의 사회학을 위해 해명해야 하는 법학 개념의 사회학은 신학과 법학 개념의 체계적 유비가 강조된다.(61) 반혁명의 저술가들은 세계관의 변화에서 정치적 변화를 설명했다. 급진적 혁명가들은 사유의 변화를 정치적이고 사회적 관계의 변화에 귀속시켰다.(61-62) 물질적 현상에 대한 유심론적 설명이든, 정신적 현상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든 인과관계를 설정하려는 시도이다. 예를 들면 엥겔스가 칼빈의 예정설이 의미를 상실했고 자본주의 경쟁의 투영이라고 본 것처럼.(63, 『공상에서 과학으로』 영어판 서론) 혹은 어떤 개념의 비롯됨을 사회학적 담지자로 환원하는 심리학이 있을 수 있다.(64) 개념 사회학은 이와 달리 법생활의의 실천적 이해관심에서 비롯된 법률적 개념성을 넘어서서 궁극적이고 근본적으로 체계적인 구조를 발견하고, 이 개념적 구조를 특정 시대의 사회구조에서 이루어진 개념적 변용과 비교하는 작업이다. 이때 개념성과 사회적 현실의 정신적이면서 실체적 동일성이 입증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17세기 군주제가 데카르트적 신 개념을 투영한 현실로 드러나면 군주제의 역사적-정치적 존립이 당시 서유럽인의 총체적 의식상태를 나타내고 역사적-정치적 현실의 법적 형태화가 당대의 형이상학적 개념구조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 하나의 개념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은 이 시대 주권 개념의 사회학에 속한다. 당대 의식에서 군주제는 자명하다. 이 근본적 개념성은 형이상학이나 신학의 영역까지 나아가는 논리적 일관성이다.(64-65) “신이 만든 불변의 계명을 본받는 일”이 국가적 법생활의 이념이었고, 루소는 이를 「정치경제론」에서 사용한다. 루소는 신학 개념을 눈에 띄게 정치화했다. 루소는 신에 대해 철학자가 만들어 낸 이념을 주권자에게 적용한다.(65-66) 군주가 신과 동일시되고, 데카르트 체계에서 신이 세계에 대해 점하는 자리를 주권자가 국가에 대해 점하고 있다. 군주는 정치세계에 옮겨진 데카르트의 신이다. 심리학적으로 완전한 동일성이 형이상학적, 정치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표상을 관통하며, 인격적 통일체 및 궁극적 창조자로 기능함을 『방법서설』의 훌륭한 일화가 보여준다. 단 한 사람의 건축가, 단 한 사람의 입법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 유일한 신이 세계를 통치한다. 자연법을 정한 것이 신이듯 왕국의 법을 정하는 것은 국왕이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거대한 하나의 인격으로 만들어 낸 까닭이다. 결정의 궁극적 심급에 대한 요청과 국가의 인격화는 방법론적이고 체계적인 필연이다. 세계 및 국가 창조자는 ‘입법자’였다.(66-67) 자연과학적 사유의 논리적 일관성은 정치적 표상에도 침투했고, 본질상 법적이고 윤리적인 사유를 밀쳐 냈다. 법조문이 예외 없이 유효한 자연법칙과 동일시 되었다. 주권자는 철저하게 배제되고, 기계는 자동으로 작동한다. 신은 일반의지만을 표명한다는 명제가 라이프니츠나 말브랑슈의 형이상학을 지배했다. 루소에게 일반의지는 주권자의 의지와 동일시된다. 인민이 주권자가 되면서 주권 개념의 결단주의적이고 인격적인 요소가 상실된다. 인민은 언제나 선하고, 인민은 언제나 올바른 의지를 가진다. 국민이 연출하는 유기체적 통일성에는 결단주의적 성격이 없다.(68-69) 미국에서는 인민의 소리는 신의 목소리라는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믿음이 되었고, 토크빌은 신이 세계에 군림하듯 민주주의적 사유에서는 인민이 모든 국가적 삶 위에 군림한다 말했으나, 오늘날 켈젠 같은 국가철학자가 민주주의를 상대주의적이고 비인격적인 과학성의 표현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69) 17-8세기 신 개념이 가진 세계에 대한 신의 초월은 국가에 대한 주권자의 초월이 국가철학에 포함되듯이 있었으나, 19세기에 내재표상의 지배가 확장되었다. 즉 동일성이 있다는 주장은 내재표상에 기초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에 대한 민주주의 학이든, 국가와 주권의 동일성에 대한 유기체적 국가이론 이든 국가와 법질서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크라베의 법치국가론이든 국가와 법질서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켈젠의 학설이든.(69-70) 보수적 저술가들이 정치신학을 주장한 이후 프루동이나 바쿠닌 등 기성질서에 대한 급진적 반대자들은 신에 대한 신앙 일반을 이데올로기 투쟁의 대상으로 삼았다. 동기는 다양했으나 교회 기독교 세력의 보수적 태도나 왕좌와 제단의 연합이 그런 싸움을 유발시켰다.(70) 싸움은 많은 교양인들 사이에서 초월의 이미지가 모두 사라져, 비교적 명료한 내재-범신론이나,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적극적 무관심이 뚜렷해지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헤겔 철학에서는 내재-철학이 신 개념을 유지하는 한 신을 세계 속으로 끌어들여 객관적인 것의 내재에서 법과 국가를 도출하지만, 급진주의자들은 일관적인 무신론에 의해 지배당했다. 독일의 헤겔 좌파는 신 대신 인류의 등장을 주장했고, 맑스나 엥겔스는 인류가 자기의식을 획득한다는 이상이 무정부주의적 자유로 귀결됨을 알았다. 엥겔스는 국가와 종교의 본질은 인류의 스스로에 대한 공포라 말했다.(71) 이념사적으로 19섹기 국가론은 한편에서는 유신론적이고 초월적인 표상이 제거되고, 다른 한편 새로운 정통성이 생겨난다. 전통적 정통성, 사私법적이고 세습적이며 왕조에 한 감정적 순종적 애착으로는 이 발전에 저항할 수 없다. 1848년 이래 공법학은 모든 권력을 인민의 제헌권력에 귀속시켜 민주적인 정통성 개념이 등장한다.(71-72) 카톨릭 계열의 결단주의자 후안 도노소 코르테스Juan Donoso Cortes는 더 이상 왕도, 왕정주의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이때 남은 건 독재였다. 신학적 사고가 법학적인 중세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19세기 수학적이고 자연과학적 상대주의를 벗어나지도 못했다.(72)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에 대한 기여는 법학적 사유의 신학적 특성을 정리하는 데 있다. 이를 정리하기 위해 우선 신학적 사유의 변천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의 출발점인 16세기의 장 보댕으로부터 시작해 왕정복고의 법학자들에서 19세기 반혁명적이고 반동적 국가철학자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유신론 더 정확히는 일신론monotheism적 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사유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국가철학 혹은 법사상은 인격화된 주권자의 존재, 신의 다른 이름인 주권의 절대성과 지고성을 인정한다. 이 신학에 기적, 다른 말로 하면, 신의 개입이 있듯이, 국가에는 예외상태가 있고, 주권은 마치 고대 그리스 연극의 기계장치로 된 신deus ex machina처럼, 개입하는 것이다.
17-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이르게 되면, 신학은 이신론deism의 형태를 띤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눈먼 시계공 같은 개념인데. 창조세계에 기적과 같은 형태로 신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다. 19세기를 풍미한 자유주의 신학이 기본적으로 이런 태도를 지녔고, 미국의 제퍼슨 같은 사람을 포함해 많은 당대의 교양인과 지성인들이 이신론적 태도를 가졌다. 이런 이신론은 자연과학적 사유방식이 지배적이 되면서 나타났다. 이때, 자연과학의 개념은 21세기 자연과학의 개념과 다소 다르다. 오늘날에는 과학적 원리가 새로운 사실의 발견과 해석을 통해 자연스럽게 귀납적으로 개정된다. 연역과 귀납은 통합되어 있다. 과학적 사실과 진리는 자주는 아니라해도 다시 쓰여진다. 반면 19세기 과학, 그 중에서도 물리학이 기초한 관념은 오늘날 보다 훨씬 연역적이었다. 뉴튼의 운동의 3법칙이 모든 현상을 설명할 있다는 식의 방식. 5개의 공리로부터 출발하는 유클리트 기하학. 최상위 공리, 법칙들로부터 각종 현상을 설명하는 정리와 명제에 이르기까지 연역되면서 실증되는 구조를 가진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켈젠을 비롯한 자유주의 국가철학자들이 현실과 무관하게 최상위 규범으로부터 연역적인 방법으로 순수하고 정합적인 규범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자연과학적이라고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1세기의 관념에서 그런 체계는 자연과학적이라기 보다는 형이상학적으로 느껴진다. 반면에 그가 법학적이라고 말할 때는 현실과의 적합성을 찾는 것을 말하고, 사회학적이라고 할때는 현실에 더 반응하고 현실과 통합적임을 뜻한다. 이런 식으로 현재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개념들의 뉘앙스가 꽤 다른 점이 칼 슈미트를 읽을 때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자연과학의 논리가 신학과 종교는 물론 법과 국가도 지배하는 이신론적 체계에는 개입도 기적도 없다. 따라서 예외상태도 주권도 없이, 법질서의 체계가 그 자체의 안정성으로 움직여가는 세계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세계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를 칼 슈미트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신앙 자체를 투쟁의 대상으로 삼는 급진적 반대자들, 이들은 무신론자이며, 무정부주의자이거나 헤겔 좌파의 공산주의자들이 있다. 신 대신에 인류를 말하는 이들을 칼 슈미트가 가장 격렬하게 공격한다.
일신론-주권-반혁명 왕정, 이신론-법규범-자유주의, 무신론-인간-무정부주의 혹은 헤겔 좌파의 이 구도는 너무나 산뜻하게 지난 500년간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여기에 대한 반론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에릭 페테르존Erik Peterson이 아우구스티누스를 활용하며, 로마시대를 언급하며 삼위일체에 입각해 일신론으로서의 정치신학을 일소하는 견해이고, 칼 슈미트 1970년에 「정치신학II」라는 반론을 쓴다. 에릭 페테로존과 칼 슈미트는 두 글을 비교하면서 달리 소개하려 한다.
여기서는 숨겨진 논쟁으로 알려진 에른스트 칸토로비치Ernst Kantorowicz를 언급해 두고 싶다. 왕의 두 신체King’s two bodies로 유명한 그의 견해는 왕권신수설 내지 왕의 정치체political body 혹은 신비체corpus mysticum에 입각한 죽지 않는 왕에 근거한 왕권을 옹호하는 법학자와 신학자들의 견해가 신비한 의제mystic fiction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칼 슈미트는 단지 동일성 혹은 유비라고 말하는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칸토로비치에서 의제임이 분명히 그러난다. 그가 물론 신학적 사유 자체를 의제라 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적 사유를 이용해 왕권의 원리를 만들어 내는 과정과 그 결과가 의제라는 것이다. 칼 슈미트가 언급하는 장 보댕의 시대의 플라우던Plowden이 정리한 판례들과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리처드 II세에서 가져온 왕권과 왕직에 대한 이야기로 부터 찰스 I세에 이르러 통치하던 왕은 군림하는 왕으로 변하고, 마침내 의회의 왕King in Parliament로 넘어가는 과정이 같은 논리구조를 이리 저리 변형하면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아타나시우스 신조나 칼케돈 신조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충실히 원용하며, 아리우스파, 도나투스파, 네스토리우스파를 모두 피하는 신중함을 보여준다. 그것이 왕권에 중요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왕권을 옹호하는 논리는 신앙이 아니라 인공의 허구fiction였다. 특히 칸토로비치의 바로 앞 저작인 Laudes Regiae 즉 국왕찬가는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프랑크 지방에서 네 번에 걸친 왕조 혹은 지배체제의 변화 과정이 어떻게 신학적으로 정당화되는 혹은 신학으로부터 가져온 허구fiction으로 정당화하는 지 보여준다. 샤를마뉴에게서 나타난 갈로 프랑크 양식의Gallo-Frankish 국왕 찬가는 왕을 그리스도-왕의 위치에 놓아, 세속과 종교를 모두 다스리는 모습이지만, 이어지는 카롤링거 왕조기에는 왕이 다소 제한되고, 교황과 사도들이 그와 함께 있으며, 그를 지켜보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교황권이 강화된 후에는 교황이 종교와 세속을 다스리는 교황 찬가Papal Laude가 나타나고 이후 찬가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교황권과 세속권이 나뉘게 된다. 일신론monotheism과 결합된 정치원리가 국왕 주권 혹은 예외상태 주권을 항상 표시해 주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중세에서 초기 근대early modern에 이르는 동안 그 구체적인 양태는 반복적으로 변화해 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것이 동일성의 추구나 유비가 아니라 허구fiction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마루야마 마사오로 되돌아가 보자. 그는 천황제를 자연으로 보았지만, 다카시 후지타니는 『화려한 군주』에서 일본의 근대 천황제를 허구fiction으로 보는 견해를 가져온다. 그의 중요한 논거는 에른스트 칸토로비치다. 칸토로비치의 ‘왕의 두 신체’와 영국 유학생이 보내준 영국 국왕의 demise에 대한 견해 등이 일본에서 서양 중세의 왕의 두 신체와는 또 다른 형태의 허구적이면서 이중적 근대 천황제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전통이 천황제의 영속성을 보장하고, 천황의 친림과 강한 힘은 천황의 통치를 표상하는. 일본도 서구도 역시 허구였다는 주장은 매우 통렬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패전 이후 상징천황제는 전통으로서의 영속성의 천황만 남은 것인가 싶기도 하고. 슈미트와 칸토르비치의 대화가 마루야마 마사오와 다카시 후지타니를 통해 이어지는 참 흥미로운 아이러니다.
마지막으로 칼 슈미트는 반혁명의 국가철학자들을 다룬다. 우선 먼저 카톨릭계 국가철학자들이 낭만주의와 다르다고 말한다. 독일 낭만주의의 고유한 본원적 관념이 있는데, 이것이 ‘영원한 대화’이다. 그러나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국가철학자들에게 영원한 대화 따위는 처참한 희극이 불러일으키는 환상에 불과했고, 카톨릭 철학자는 위중한 양자택일을 요청받고 그 위중함에는 영원한 대화보다 독재의 울림이 있다.(74-75) 칼 슈미트의 1921년 작 『독재Diktatur』는 이를 통해 예외상태를 이해하려 한 시도로 일정기간 임명되는 위임독재와 주권의 발동으로 초법적 권력을 행사하여 새로운 체제를 산출하는 주권독재로 구분했다.(75, 역주 3) 전통과 관습이라는 개념, 역사의 완만한 성장이라는 인식에 의한 왕정복고는 이성과 행동을 거부하는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도덕성을 이끌어 내고, 이런 오류는 ‘독일적 감상주의’에 있으며, 극단적인 전통주의는 사실상 모든 결단의 비합리주의 배격에 도달한다.(75) 전통주의의 창시자 보날드Louis Gabriel Bonald에게 전통이란 인간의 형이상학적 신념이 수용할 수 있는 내용을 획득하기 위한 단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는 개개인의 오성은 스스로 진리를 인식하기에 너무나 왜소하기 때문으로, 지팡이에 의지해 절룩거리는 한 명의 맹인에게 이끌리는 맹인들 무리라고 보날드는 비유하면서, 두 심연의 중간,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걸어갈 뿐이라고 말한다. 그에겐 양자택일이 존재할 뿐이다.(76) 드 메스트르Joseph-Marie de Maistre에게 주권은 본질적으로 결정이며, 국가의 가치는 결정을 내리는 데, 교회의 가치는 궁극의 항변 불가능한 결정에 있다. 무오류성과 주권은 완전히 동일하다. 모든 지배는 절대적이다. 정부는 존립하기만 하면 선하다. 정부라는 권위의 존재 속에 결정이 있고, 결정을 뒤집을 상위심급은 없다.(77-78) 1848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급진주의로 반혁명의 국가철학적 사유에서 결정의 강도가 강렬해졌다. 인간본성에 대한 공리적 의미의 명제가 강화된다.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는 인간을 교육할 수 있는 존재로 보고, 합법적 전제주의의 이상을 내세웠고, 루소Rousseau는 입법자에 의한 교육을 피히테는 국가를 교육공장으로 보았지만, 맑스주의적 사회주의는 경제적·사회적 조건에 의해 인간이 바뀌기에 이를 불필요하다고 보나, 무신론적 무정부주의자에게 인간은 선한 존재이고 악은 신학적 사고와 그 파생물의 결과다.(78-79) 드 메스트르와 보날드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선한 존재가 아니라고 보고, 카톨릭 기독교도인 도노소 코르테스는 원죄의 교리를 인간 본성의 절대적 유죄성 및 극악성이라는 교리로 논리를 첨예화한다.(79) 도노소는 일부 카톨릭 신학의 반대와 달리 이를 교리가 아닌 논쟁이라 생각했으며, 모든 국가적 권위에 굴복하는 루터파와도 달랐다.(80) 드 메스트르도 인간의 극악성에 경악했으나, 아무런 환상도 없는 도덕과 고독한 심리학적 경험에서 비롯된 힘이 있으며, 보날드는 악한 인간 본능에 대한 환상을 배척하고, 근절하기 힘든 인간의 ‘힘을 향한 의지’를 꿰뚫어 보았으나, 도노소 코르테스는 인간 본성의 극악성과 저속성을 비판하고, 끝간데 없이 인간을 멸시한다. 인간의 맹목적 오성, 연약한 의지, 육체적 욕구의 처참한 분출은 매우 처참한 것이었고, 그의 전방위적 죄악시는 청교도보다 더하다. 그의 역사철학에서 악의 승리는 명백하고 자연적이며, 신의 기적만이 그것을 막고 있다. 인간 미궁 속을 마구잡이로 비틀거리며 걷고 있으며,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도는 배이다.(80-81) 도노소에 따르면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본질은 이 결전에 태도 결정을 하는 대신에 논의를 개시하려는 데 있다. 그는 부르주아지를 “토의하는 계급una classa discutidora”라 정의한다. 부르주아지가 결정을 회피하려 한다고 규탄한다. 모든 정치적 활동을 신문이나, 의회, 즉 논의에 내맡기는 계급이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는 내적으로 불안하고 철저하지 못하며, 자유주의적 입헌제는 의회를 통해 국왕으로부터 힘을 빼앗으면서도 그를 왕좌에 앉혀 놓으려 하는데, 이는 신을 세계로부터 추방하면서도 그 존재에 집착하는 이신론이 범한 바와 동일한 논리적 모순이다. 신을 원하지만 신은 활동해서는 안되며, 군주를 원하지만 군주는 무력해야만 한다. 부르주아지는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면서도 교양과 재산에 따라 선거권을 제한하는, 혈통과 가계에 의한 귀족지배는 폐기하지만 파렴치하고 저급한 금권적 귀족지배를 용인한다. 부르주아지는 군주주권도 인민주권도 원하지 않는다.(81-82) 이런 정치적 사태에 대해 헤겔적 교양을 가진 독일의 부르주아 학자와 스페인 카톨릭 신자 사이의 대결이 생녀났다. 슈타인Lorenz von Stein에 따르면 그들은 국왕, 즉 인격적 국가권력, 독립된 의지와 독립된 행위를 원하면서도 국왕의 인격적 요소를 다시 박탈한다. 국왕이 헌법에 서약을 하도록 하여 그가 헌법을 위반할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한 소추는 못하게 했다.(83) 프로이센의 보수주의자인 슈탈Julius Stahl은 왕정과 귀족정에 대한 증오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를 왼쪽으로 몰았고, 과격한 민주정이나 사회주의의 위협으로 생긴 자기 재산에 대한 불안이 오른쪽으로 몰았다며,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는 쌍방의 적 사이를 오고 가면서 양쪽 모두를 기만하려 한다고 입헌주의적 자유주의의 모순을 지적한다.(83-84) 슈타인은 여러 대립의 상호 침투를 유기체적 자연과 인격적 생명에 비유하면서 국가 또한 인격적 생명을 갖는다고 말한다.(84) 드 메스트르나 코르테스에게 중요한 지점에서 결정을 회피하고 결정이 내려져야 함을 부정하는 일은 기묘한 범신론적 혼란이고, 코르테스가 보기에 논리가 일관되지 않고 타협을 일삼는 자유주의란 예수냐 바라바냐는 물음에 대해 회의의 연장을 발의하거나 조사위원회를 설치하자는 제안에 다름아니다. 이는 자유주의의 형이상학에 기초한다. 부르주아지는 언론·출판의 자유의 계급이다. 코르테스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직관적이라 ‘토의하는 계급’이라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정의나 언론·출판의 자유가 부르주아지의 종교라는 식으로 인식한다. 이는 대륙 자유주의에 대한 훌륭한 파악이다. 자유주의는 결정을 추방하는 일이고, 정치 문제 뿐 아니라 형이상학적 진리까지 토론으로 해소하려 한다. 본질은 결정적 대결, 피비린내 나는 결전을 의회의 토론으로 바꿀 수 있고 영원한 대화를 통해 영원히 유보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기대 말이다. 자유주의는 이런 기대를 하며 수다를 늘어놓는 셈이다.(84-86) 이런 토의의 대극점에는 독재가, 코르테스의 정신에는 극단적 사례를 상정하고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결단주의적 태도가 있다. 그래서 한편 자유주의자를 경멸했고, 다른 한편 무신론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사회주의를 불구대천의 적으로 삼으면서도 이를 존경하여 악마적 위대함을 인정했다. 이 시기 악마주의는 강고한 지적 원리였다. 악마는 암흑의 분노로 지상의 천국으로부터 하느님 아버지를 쫓아낸 자들의 양아버지, 형제를 살해한 카인. 동생 아벨은 선조들의 난로로 배가 따뜻해진 부르주아였다.(86-87) 프루동은 가부장의 권위나 일부일처제라는 가족원리에 집착했지만, 바쿠닌에서 신학에 대한 싸움에서 절대적 자유주의의 완전한 일관성이 생겨난다. 모든 도덕적 평가는 신학과 권위로 낙찰된다. 오늘날 무정부주의자들이 부권과 일부일처제를 기반으로 하는 가족을 진정한 타락상태로 간주하여 낙원적 원시상태로서의 모권제를 주장한다. 도노소는 부권에 기초한 가족의 해체가 초래할 궁극의 논리적 귀결을 염두에 두고 있다. 직접적이고 자연적인 삶과 무구한 ‘육체’성이라는 낙원적 피안 속에서 모든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결정이 해체된다.(87-88) 정치적인 것에 대항하는 투쟁만큼 현대적인 것은 없다. 오늘날 지배적인 경제-기술적 사고방식은 정치적 이념을 파악할 능력이 없다. 현대 국가는 베버가 통찰한 대로 하나의 커다란 기업이 된 듯하다. 다른 한편 정치적인 것이 문화철학적 및 역사철학적 일반성의 영원한 대화 속에서 소멸된다. 결국 정치이념의 핵심인 위중한 도덕절 결정을 회피하고 마는 셈이다.(88-89) 반혁명 국가철학자들의 현재적 중요성은 결정을 끝까지 밀고 나가고, 결단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정통성이라는 사고를 폐기하는 데 이른다. 도노소 코르테스는 군주제가 끝났음을 알아차리고 정치적 독재를 요청하게 되었다. 드 메스트르는 국가를 결정의 계기로 환원하는 무로부터 내려지는 절대적 결정, 순수 결정으로 국가를 환원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독재이지 정통성이 아니다. 도노소는 근본적 악에는 독재만이 요청될 뿐임을 알았다. 반면 무정부주의자에게 통치는 독재이기에 모든 통치는 타도되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바쿠닌은 이론적으로는 반신학적 신학자이며, 실천적으로는 반독재적 독재자일 수밖에 없다.(89-90)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을 들여다 보고, 그의 사유를 전유하는 첫번째로 꼽는 대상이 자유주의 비판인데. 그 비판 만큼은 통렬하다.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부르주아지는 결정을 미루고 “토의하는 계급”이다. 모든 것을 의회에 맡긴다. 왕에게서 힘을 빼앗지만 자리에 두고, 신을 세계에서 추방하지만, 이신론적 존재에 집착한다. 신은 원하지만, 활동해서는 안되고, 군주는 원하지만 무력해야 한다. 자유주의 부르주아는 왕정과 귀족정은 싫고, 민주정과 사회주의는 두려워 쌍방의 적 사이를 오가면서 양쪽 모두를 기만하는 존재이다. 이들에게 언론, 출판의 자유는 종교이다. 앞서 자유주의가 가진 규범주의, 제도 의존, 자연과학적 사고방식과 이신론에 언론, 출판의 자유와 미결정성 내지는 결정 추방을 그 위에 얹는다. 말하자면 자유주의는 일종의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실상 그 정치의 결과는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표류하기 싶상이다.
흥미로운 것 하나는 ‘영원한 대화’라는 낭만주의 비판의 핵심 어구이다. 『정치신학』을 쓰기 1년 전 『정치적 낭만Politische Romantik』을 출간해서 복고적 성향을 지녔지만, 자기 스스로에게만 치중해서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낭만파들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런 낭만주의적 성향과 낭만주의 주변을 떠돌던 상당수가 나중에 파시즘을 지지하고 나치즘으로 합류한다. 이들이 생각하던, 민족, 국가, 신화 등의 사고방식이 나치즘의 기반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로버트 팩스턴의 말처럼 초창기에는 낭만주의가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지며, 열정을 분출시키는 창구로 기능하지만, 파시즘이 의회로 진출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보수파와 손잡는 과정에서 버려진다. 파시즘 지도자들은 소위 정상화라고 하는 파시즘의 이데올로그들을 버리는 결단을 내리며,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순수한 파시즘 이론에 매달렸던 사람들은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다. ‘영원한 대화’는 그러므로 파시즘의 추동력이었다가 파시즘에 의해 버려지는데. 이는 마치 칼 슈미트의 낭만주의 비판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칼 슈미트는 나치로부터도 버림받는다. 마치 그의 나치를 향한 사랑이 짝사랑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칼 슈미트의 용어로 말하면, 칼 슈미트는 나치에게서 일신론을 기대했지만, 실제 나타난 것은 그가 말한 대기실이 아니라, 다신교가 아니었을까? 나치 국가의 지배구조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이 국가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영원한 대화’는 동시에 자유주의 비판의 딱지로도 쓰인다. 자유주의도 의회에 모든 것을 맡기는 예수와 바라바 중에서 누굴 고를지 조사위원회를 설치하는 기관이라고 비판한다. ‘영원한 대화’ 속으로 자기를 몰아간다는 것. 이 비판은 흥미로우면서도 고약한데. 정치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낭만은 실상 서로 다른 극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칼 슈미트는 다만 이들 모두가 결단을 추방하고, 미결정 상태를 헤맨다고 이야기 한다.
마지막 장에서 부각되는 또 하나가 반혁명적 국가철학, 즉 반동적 보수적 세계관이다. 보날드, 드 메스트르, 도노소 코르테스 등 세 명의 카톨릭 보수적 국가철학자들을 내세운다. 이들은 단순히 보수이거나 카톨릭이라고 하는 정도를 넘어선다. 먼저 성악설을 내세운다. 개신교적으로 말하면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와 유사한 원죄설을 내세우지만 그 내용은 개혁파도 훨씬 넘어선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 멸시’ 수준에 다다른다. 몇 년 전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서 다른 지역에 있는 꽤나 보수적 교단에 속한 목사를 데려온 적이 있다. 한 3일째 쯤이었는데. 너무 어이가 없는 이야기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 했다. 다들 그 바쁜 삶을 살면서, 부흥회라고 허접 쓰레기 같은 잡담을 설교랍시고 듣고 있는데, 그 목사라는 작자는 청중을 모욕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교인들을 가리켜 당신들은 아주 천하고, 못한 죄인이면서, 아무 짝에도 쓸데 없는 존재들이기에, 강대상에도 안보이는 두루말이 휴지 같은 존재들, 화장실에서 밑을 닦을 때 사용되는 존재들 만큼 무가치한 존재들이라는 거였다. 그러니 하나님께 교회에 목사에게 충성하라는 류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설 뻔 했다. 그런데 의외로 교인들은 별로 충격받지 않았다. 그 부흥강사는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아 사람들이 뒷말이 많았는데. 휴지 이야기만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넌지시 물었다. 그 휴지 이야기도 좀 너무한 것 같아요. 그러자 교회 오래다닌 나이 지긋한 분들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그런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었다고 말하는 거였다. 순간 나는 심각한 혼란에 빠졌는데. 너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목사들이 하고 다니기에 늘 대충 흘려들어서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설교라는 이름으로 거듭된 인간성 비하와 멸시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감각해지고 익숙해진 탓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사람들이 분노도 하지 않고, 돈도 내는 걸 보면 어쩌면 후자일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반혁명적 국가철학자들은 인간에 대한 멸시 때로는 저주에 가까운 원죄설을 내세워서 인간의 무능력과 인간의 한계를 깔아뭉갠 후, 거기에 독재를 세운다. 군주제가 사실상 폐지되고, 더 이상 인민의 지지를 받지 않고서는 군주로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는 상황에서 그들은 결단주의에 입각한 독재를 불러들인다. 국가는 절대적으로 선하다. 무엇을 한다 해도. 나는 책장의 거의 마지막에 다다르면서, 문득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와 목사들은 교인들을 죄인이라고 깔아뭉개면서, 걸핏하면 모욕하고 겁을 주면서, 명령을 따르게 하고, 돈을 내게 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끌고 다닌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는 성경적이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왕국이므로 독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진지한 얼굴로 그걸 받아들인다. 탄핵반대 집회가 시작되던 초창기 부터 교회가 사람을 동원한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고, 성조기와 태극기의 물결 속에 십자가가 등장하더니, 목사 가운을 대여해 주고 입고 돌아다니기 까지 하게 되었다. 이 부분에서 정말 코웃음이 나왔는데, 언더우드가 한국에 왔을 때, 늘 목사 가운을 입고 다녀서, 다른 선교사들의 제지를 받은 적이 있다. 여하튼 기독교는 원래 민주주의와 상극인 건가? 기독교는 원래 자유주의와 상극인 건가? 기독교는 원래 교리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독재 혹은 반동적인 국가철학과 친한 것인가?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교회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탄핵 반대 설교가 나오고, 기독교인들이 돌리는 카카오톡이나 밴드 같은 메시지에는 근거도 없는 가짜 뉴스fake news가 돌아다니는 건가? 그래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또 트럼프를 지지하는 건가? 원래 교리적으로 독재를 지지하지는 않는다 해도, 독재와 친화적인 정서를 사람들에게 만들어 내는 건가?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 더 문제는 기독교 세계관이다.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기독교 선교단체와 제자훈련이다. 차라리 주일에만 교회에 모이고, 예배만 하는 전통적 종교라면, 전도나 하러 다니고 교회나 짓는 다면 문제가 덜할 수도 있겠다. 바깥 세계에 담을 쌓고, 바깥 세계는 그 나름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면 그 뿐이니까. 그러나 신학과 교리와 신앙을 내세워서 세계관에 입각해서 살고 있는 세계를 해석하고, 그런 세계를 기독교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문화명령이라고 하면서, 사회 참여라는 이름으로 다가가는 사람들이야 말고, 그들이 신실한 신앙인일수록 더더욱 수구적 행태를 보일 수 있다. 그들의 인간적 성실함이나 신앙, 아름답고 좋은 품성과 무관하게 이웃과 세계에 대해 파괴적일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사례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에 여기에 새삼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이다.
만일 그렇다면, 만일 기독교가 독재 혹은 군주 전제와 친화적이고, 이 시대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흐름에 대해서 반동적이라면, 반인간적이고, 반인격적이며, 반역사적이라면, 그렇다면 기독교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거대한 위기에 시대에 등장하는 보수적이고 수구적이며 자기파괴적 흐름 만을 기대하고 있다면. 이걸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제도나 절차 구성의 원리를 성경에서 찾지 않고 가치만 추구하는 방법이었다. 살아가는 영역에서 정의와 사랑과 평화 등을 앞세우고 살아가는 일. 그런데 누군가의 반론이 있었다. 그런 방식은 19세기 구 자유주의자들이 기독교를 윤리화시킨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가치만을 추구하는 일은 때로 무력하다. 그런데 성서에서 그 모습을 직접 제시하는 조직이 셋 있다. 가족, 교회, 국가[민족]의 이 셋 이다. 사실 성서에 직접 나타난 모습은 그렇지 않지만, 오늘날에는 성서의 내용을 기반해서 일부일처의 가족주의를 보수적 가치로 구체화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가족제도가 여러 가지 문제에 의해 무너져 가고 있다. 기독교는 가족 붕괴의 현실에서 중요한 가치를 하나씩 포기하고 있지만, 아직도 비혼가정과 자녀 이슈를 비롯하여, 가장 마지막까지 고수할 성소수자 이슈까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족 재편 과정에 무력하기 그지 없다. 반면,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전통적 가족 형태를 강조하고, 때로 강요하여, 그런 가족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결핍된 사람 취급하기도 한다. 일종의 배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교회와 국가의 모습도 급격하게 변해가고 있다. 문제는 성서에서 가족, 교회, 국가의 모습에 대해 여러가지로 자세히 써 둔 덕분에, 성서적이라는 명목으로 어떤 가치를 고수하는 일이 번번히 일어나고, 어떤 것이 성서적인지 아닌지 논쟁이 벌어지고, 그러면서, 기독교가 자꾸만 고립되고, 더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집단으로 자리매김되는 현실이다. 가치와 구조의 양측면에서 모색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빚게 될지 암담할 따름이다. 자꾸만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수적인 건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랬던 거였다.
하나 덧붙여야 한다면 예언자적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면 고뇌하는 욥인가? 독재관이 필요한 게 아니라 실상 필요한 것은 호민관이 아닐까. 아니면 철학자인가.
2017. 2. 20.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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