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마에 준이치, 『근대 일본의 종교 담론과 계보』.

Chosen_Jingu남산에 있었던 조선신궁. 위키.

이소마에 준이치(磯前順一), 『근대 일본의 종교 담론과 계보(近代日本の宗教言説と系譜)』, 제점숙 역, 논형(岩波書店), 2016(2003).

“왜, 그리고, 언제, 누가 한국 기독교에 정교분리 및 내세집중이라는 세계관을 가져왔는가?”는 교회사나 기독교 연구자라면 누구나 가지는 의문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가 여기에서 근원을 찾고 종종 이리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종종 써먹는 방법은 일종의 마녀사냥이다. 친일파 청산하듯 누가 언제 어떻게 말했다. 혹은 어떻게 했다에 집중한다. 일본 제국주의를 지지하고 그 그늘에서 기독교를 전파한 초기 선교사나 이들을 맹종한 보수 근본주의 교회지도자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면 특정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가장 쉽다. 몇몇만 비판하면 되니까. 더욱이 신학이나 신앙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므로 근본 혹은 본질로 돌아가면 된다. 그리고 제나름의 본질로 돌아간다. 초기 선교사든 경건한 신앙의 선배든 종교개혁자든 초기 교부들이든. 그리곤 다들 자기 길이 옳다고 하지만 딱히 해결책은 보이지 않고, 자기가 속한 집단 안에서만 논의가 진행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는 오늘날 얼키고 설킨 문제를 풀 수 없다.

포스트 식민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로 종교에 접근하는 이소마에 준이치(磯前順一)는 새롭지만 보다 간명하고 설득력있는 이해방식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 접근법을 “종교 개념”에 대한 이해라고 부른다.

말은 어렵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종교라는 개념과 그 담론의 배치를 보겠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종교라는 개념은 서양 근대와 함께 들어왔다. 물론 그 이전에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의 신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종교란 무엇이며,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과 기능을 부여받고 행하는가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선교 초기 교육과 의료 및 서구 문명과 민족운동에 기여를 했다는 식의 해석 말이다. 이소마에에 의하면 물론 이런 해석은 표피적이다.

아주 간략히 말해서 근대 국민국가로 문명국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던 일본은 서양, 즉 구미에서 개신교의 역할에 주목한다. 개신교는 신자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넘어서는 국민nation형성에 기여하고, 윤리와 도덕의 이름으로 부의 추구와 노동을 장려하고 사회질서에 대한 순응을 이끌어내어 자본주의 노동자와 자본주의 규율에 일조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국가의 길로 들어선 일본의 국가지도자들은 이런 사실에 주목했다. 그러나 개신교를 수용할 경우 천황제를 근간으로 한 일본 국가체제가 유지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초월적 신앙 에 기반한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천황을 언제든 비판할 수 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이를 우려한 것이다.* 이들은 유신 초기 국가신토国家神道를 일본의 국교로 삼으려 했지만,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는 서양 국가의 요구에 직면하여, 이를 허용할 수밖에 없게되자 우회로를 모색한다.

1889년 메이지 헌법의 시행으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일본은 종교와 세속의 분리를 교묘하게 변형한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내면을 다루는 것으로 한정하고, 여기서 세속적인 도덕을 분리한다. 국민으로서의 윤리와 도덕은 종교를 넘어서는 종교 이상의 것이다. 이제 국가신토는 종교 이상의 국민도덕으로 천황에 대한 충성에 기반하는 일본국과 일본인을 형성한다. 개인의 사적 영역을 다루는 종교는 이보다 열등한 지위를 사회진화론에 의거해 부여받는다. 기독교, 불교, 국가신토를 분리한 교파신토 (신사신토) 만이 종교로 인정받아 나름의 특권적 지위를 향유하고, 나머지는 유사종교 내지는 신앙으로 관리와 통제 및 개종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일본 메이지 유신기에 형성된 종교 개념이다. 서양 근대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가 중세 이후로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온 과정과 다소 다르다. 미셸 푸코에 의하면 서양 중세는 연속성의 세계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뉴턴, 라이프니츠 이후 과학이 종교와 신앙 더 정확히는 교회의 관할에서 이탈했다. 종교개혁 이후 갈등하는 둘 혹은 그 이상의 교회가 등장하자, 정치권력은 교회를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종교의 권위는 상대화된다. 그 결과가 베스트팔렌 조약이고, 정치는 교회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근대정치사상의 시발점이 되는 것은 군주는 영지의 획득과 통치를 위해서 어떤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군주의 행동이 지나치거나 경멸받으면 스스로 몰락할 따름이다. 철학은 데카르트에게서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의 존재로부터 개인의 존재를 상정하기에 이른다. 거꾸로 말하면 사고하는 사람없이는 신의 존재를 입증할 방법이 없다. 데카르트에게서 신은 사람에게서 그 존립근거를 찾기에 이른다. 경제학도 사회학도 언어학도 종교의 품을 떠난다. 종교는 오직 개인의 내면세계와 도덕 및 사회통합과 자본주의의 긍정이라는 사회질서 유지 기능만을 맡게 된다.

물론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이 각기 다르지만, 일련의 역사적, 사상적 과정의 결과가 일본에 이식될 때, 일본은 자기 자신의 역사적, 사회적 필요에 의해, 세속과 종교의 분리라는 배치를 받아들이고, 종교를 세속, 즉 도덕 아래에 둔다.

그리고 이런 식의 종교개념은 일본의 영향 하에 있는 대한제국과 식민지 조선에 한 번 더 왜곡된 채로 이식된다. 식민지 조선의 선교사가 이런 식민 정책과 종교 담론을 어떻게 수용했는지 아직 간략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1930년에는 세속/종교 분리에 근거한, 정교분리 담론이 한국의 기독교인에게 내재화된다. 이소마에는 정교분리란 동시에 정교유착이라고 말한다. 정치적인 문제, 식민통치에 대한 침묵을 대가로 선교의 자유를 얻는다. 그런 점에서 1920년에 기독교계 미션 스쿨에서 예배와 성경교육이 허용된 점은 의미심장하다. 1910년 병합 후 일본은 교육은 세속 도덕의 영역임을 강조하며, 미션계 학교에서 예배와 성경교육을 금지시킨다. 기독교와 천도교 두 종교의 항거라고 볼 수 있는 3.1운동의 결과 일본 식민당국이 양보했다는 해석은 너무 순진하다.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 총독부와 선교사의 회합이 빈번했고, 선교사는 3.1운동에 반대했다. 총독부 회합에서 적극적인 설득을 주장하기도 했다. 3.1운동의 결과 기독교계가 얻은 것은 미션계 학교에서의 예배와 성경교육이지만, 이후 민족운동가는 교회를 떠나고, 교회는 개인의 내면세계로 개인영혼구원으로 더욱 침잠한다. 말하자면, 정교유착에의한 거래를 통해서, 선교사는 선교의 자유를, 일제 식민통치 당국은 선교사와 원주민(조선사람)의 분리를 꾀했다. 아직 선교사를 내쫓기에는 부담이었다. 일제는 이 목표를 신사참배 강요와 적극신앙단, 흥업구락부 사건 등을 통해서 이루게 된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친 후 산업화기 기독교는 본격적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공식종교로 기능하게된다. 신앙과 애국을 동일시하고, 국가 정체성 및 국민정체성 형성에 기여하면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유입되는 노동자의 정착을 돕고, 지지하며, 노동을 권장하고, 부의 추구를 적극적으로 옹호함으로서 근대국가의 공식 종교로서 개신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그 댓가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동시에 근대의 한계와 해체와 함께 기독교에도 위기가 왔다.

어쩌면 종교 이론과 신학의 두 영역에서 동시에 탈 세속post secular 담론이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근대가 기반하는 세속/종교의 분리가 무의미해질 정도로 공식 종교는 세속화하고, 반면 세속화를 거부하는 교파, 섹트, 신흥종교가 유행한다. 종교의 이름으로 폭탄 테러가 행해지고, 종교분쟁은 빈발하지만, 근대적 이해의 틀로는 설명하지 못하고, 흥분하고, 분개한다. 세속화된 기독교는 견제가 발전된 나라와 지역에서 영향력을 잃고 있다. 새로운 방향성을 내용은 달라도 저마다 탈 세속이라 부른다. 종교학, 신학, 인류학의 곳곳에서 이 논쟁에 뛰어들고 있다. 탈랄 아사드Taxal Asad와 존 밀뱅크John Milbank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소마에 준이치에게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논의가 다소 중복되고, 가끔은 공허하다. 본인도 인정하듯, 제국사 관점이 부족해 일본 국내 이야기에 머문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시론에 가깝고, 윤해동과 함께 편집한 [종교와 식민지 근대]는 많이 미흡하고, 기고자의 역량차이가 뚜렸하다. 김성례의 글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이소마에는 천황제를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소수에 속한다. 마루야마 마사오, 야스마루 요시오, 사카이 나오키 등을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그는 [죽은 자들의 웅성임死者のざわめき]에서 천황에게 개인 자격을 부여하자고 한다. 지금은 모르지만 원래 천황은 일본국 호적이 없다 하니. 이소마에 역시 천황에게 전쟁책임을 묻지 않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는 모호하지만 종교적인 문구를 패전 이후 평화헌법에 남긴 것을 한계로 지적한다.

역자는 2003년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서 간행된 [近代日本の宗教言説と系譜]를 대본으로 하지 않고, 2010년 도쿄대에 제출돤 박사학위 논문을 번역대본으로 했는데, 이는 2012년 도쿄대학출판회東京大学出版会에 의해 [宗教概念あるいは宗教学の死]이란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한다. 그렇다고, 초창기 일본 기독교인들이 천황제를 비판하거나 천황제를 거부하지 않았다. 선교사도 기독교인들도 제약 속에서도 공인 종교가 제공하는 혜택을 누렸다. 황도 기독교로 변질되기에 이른다. 일본 교단인 조합교회를 내세워 식민지 경영과 동화에 협력하기도 했다. 우치무라 칸조内村鑑三의 불경사건, 즉 교육칙어에 대한 경례를 애매하게 해서 비펀받은 사건도 확대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일본에 자유주의 기독교가 먼저 확산된 것도 지식인 위주의 기독교 확산, 즉, 메이지 유신에 반대한 구 도쿠카와 바쿠후徳川幕府 지지파의 자손들이 영어를 배우다 투신한 것과 진화론 및 사회진화론의 서양欧米과 거의 동시대 확산과 관계가 있다. 일본 선교 초기 즉, 19세기 후반 서양의 주류 기독교인 자유주의 신학의 자연스런 전파로 보아야 한다. 다만, 일본의 진화론 수용 정도가 높아,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교파나 신학이 더 높은 평가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우치무라 칸조도 평생 [성서]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으며, 둘의 조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한다. 가가와 도요히코도 마찬가지.

2016. 6. 30.

** 이 글의 저작권은 ⓒFELIVIEW.COM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FELIVIEW
FELIVIEW
felixwon.lee@gmail.com

Must Read

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7-1).

0
튜더 왕가의 가계도. 앞쪽에서는 아담과 이브로부터의 기원과 노아의 방주도 등장한다. 중간에 리처드 3세에서 단절이 있고, 그 아래로 헨리 8세가 이어진다. British Library, Kings MS 395, fols. 32v-33r. Ernst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