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카 에이지大塚英志, 『감정화하는 사회感情化する社会』, 선정우 역, 리시울太田出版, 2020(2016).
얼마전 그래도 꽤 오랬동안 유지해 오던 페이스북 계정을 없애기로 했다. 비활성화가 아니고 탈퇴.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는데는 한 달이 걸린단다. 어느 순간부터 뇌가 구워지는 뜨거움을 견디기 어려워서였다. 알고리듬의 끊임없는 연속 속에서 자극적인 내용의 반복은 지각에서 감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계고리를 빠르게 타고 맴돌았다. 어느 순간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분노에는 쾌락에든 반응하고 있었다. 손가락은 마우스의 스크롤과 클릭을 넘나들었고, 유튜브는 끊임없이 성찰을 방해했다. 나는 오래전 스마트폰을 버리고 카카오톡을 없애버렸지만, 그래도 이것마저도 없으면 세계와의 연결이 끊어질 것 같은 불안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 뇌가 익힌 단백질 구조로 바뀌는 걸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에 모든 소셜 미디어나 쌍방향적인 구조를 끊어내기로 했다. 사물을 지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행동하는 일련의 과정이 전개되는 속도가 지난 세기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불과 10여년 전에 대해서 만도 100배는 빨라졌다. 지금은 무엇이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순간 뇌가 작동하고, 감정은 에너지원이 된다. 분노와 쾌락의 사이클은 뇌신경 어디선가 분비되는 호르몬과 수용체를 통해서 작동하고, 뇌의 온도는 순간적으로 뜨거워진다. 이 사이클이 백년 전이라면 일주일에 또는 한 달에 한 번, 기껏해야 하루에 한 두 번이었을 텐데. 지금은 시시각각으로 돌아간다. 지각은 호르몬 분비와 쾌락으로 직결된다. 이미 중독된 뇌의 수용체들은 손가락에 계속해서 클릭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성찰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거리를 상실한 인간들은 단순한 감정과 자극을 연결하는 장치로서 작동한다. 인간은 이 거대한 시스템에 에너지원을 무한 공급하는 단순한 배터리로 전락한다. 인간의 감정은 무한한 에너지원이 된다. 매트릭스의 세계는 이미 구현되었다. 배양액도 머리를 뚫는 시술도 필요하지 않다. 감정만 끊임없이 자극한다면 거대한 쓰레기로 구성된 정보 네트워크는 생존 가능하다. 가짜뉴스 더 정확히 말해 거짓말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유는 정치적 목적도 돈 때문 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거짓말이 쾌락을 주기 때문이다. 단톡방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유튜브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과잉분비되는 호르몬의 홍수에서 말라 죽어가게 될 것이다. 한국은 비교적 마약에서 자유로운 나라였지만, 네트워크를 파고드는 감정의 신종 마약은 매달리는 사람들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철저하게 파괴하게 될 것이다.
민의民意가 반지성주의 그룹의 정치 세력을 내팽개치는 사태가 요즘 들어 확인되고 있다. ‘마음’과 국민 감정이 일체화되어 정권 여당 및 그 배경에 존재하는 일본회의적 우파를 내팽개친 이번 사태 역시 마찬가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지성과 권력이 연결되는 것에 대한 혐오감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구시대적 ‘반지성주의’ 세력을 건너뛰고 감정이 권력을 빼 버린 채 국민화된 것이다. 그것이 우파와 좌파 중 어느 쪽에 경도될지와는 별개로, 반지성주의조차 내팽개치는 ‘감정’적인 정치가 선택될 수 있다는 리스크 속에 지금 세계가, 그리고 그 일부인 일본이 있다. 이렇듯 ‘감정’이 우리 가치 판단 최상위에 놓이고, ‘감정’을 통한 ‘공감’이 사회 시스템으로 기능하게 되는 사태를 이 책에서는 ‘감정화’라 부른다. ‘감정’이란 단순히 권력자나 사람들의 정치 선택이 ‘감정적으로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13) [아담] 스미스는 ‘감정’이 적절한 회로를 통해 ‘도덕’화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 과정을 검증했다. …… 하지만 문제는 이와 같은 회로가 이제는 상실되었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감정화’란 ‘감정’이 ‘도덕’(넓은 의미의 규범 및 공공성)을 형성하는 회로를 상실한 사태를 가리킨다고 해도 좋다.(14)
여기서 오쓰카 에이지가 들고 있는 사건은 2016년 8월 8일 아키히토 덴노가 발표한 조기 퇴위 의향을 밝힌 영상 메시지를 말한다. 이 사건은 한국에는 평화헌법 즉 일본국 헌법 9조를 개헌하려는 아베를 저지하려는 천황의 일종의 정치적 개입이라는 식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오쓰카 에이지는 이 담화문의 제목을 언급한다. 보통 덴노의 메시지는 오코토바おことば 한자로는 お言葉 또는 御言葉라고 쓰는데. 한국어로는 그냥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날 덴노의 메시지 제목은 お気持ち(오키모치)였다. 한국어로는 마음[심정] 정도가 되겠다. 기분이나 감정으로도 번역할 수 있지만. 한국의 뉴스에선 이를 모두 그냥 조기 퇴위 영상 메시지라고만 했지, 말씀과 마음[심정]의 차이를 간파한 뉴스나 해설은 보지 못했다. [현재 일본 궁내청 웹사이트에서는 제목을 「象徴としてのお務めについての天皇陛下のおことば(平成28年8月8日)」, 한국어로는 ‘상징으로서의 직무에 대한 덴노[천황] 폐하의 말씀’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정식 명칭이기는 하지만, 8월 8일 당일 일본의 미디어는 天皇陛下「お気持ち」表明, ‘덴노[천황] 폐하의 마음[심정] 표명’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일본 내에서 제목이 어떤 식으로 정해지고 바뀌었는지까지 추적할 정도의 능력은 없기에 이 정도까지만.] 이 사건을 두고 오쓰카 에이지는 상징덴노(천황)제가 감정덴노(천황)제로 완성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쇼와 덴노의 성단聖斷이라고 부르는 ‘옥음방송玉音放送’과 연결짓는다. 패전이 이미 확실한 상황에서도 일본의 정부와 군부는 항복을 인정하거나 선언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덴노의 결정 형식으로 대동아전쟁 종결의 조서大東亜戦争終結ノ詔書를 발표한 것이다. 이것 역시 한국에는 항복선언으로 알려져 있는데. 문장을 하나하나 뜯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어디에도 항복한다는 패전을 인정한다는 그런 말은 없다.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고 통고했다는 것. 더 이상의 희생을 감내할 수 없다는 것. 이런 식의 어법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 잘 인식하고 그 한계를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반지성주의를 반대로 감정으로 통제한 사례로 들고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 즉 마음이 가치판단 최상위에 놓였고, 이 감정이 도덕 형성 회로를 차단하고 있다는 것. 반지성주의적 정치세력이라해도 나름의 논리를 갖춘 경우가 있는 반면. 지지자들에게 2중 투표를 선동하는 트럼프나 총선 결과를 부정하면서 바이러스 확산에는 나몰라라 하고, 자신들의 유튜브에만 몰두하는 이들이나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까지 철수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려하는 수련의들이나 실은 똑같은 회로를 통해서 움직인다. 그것은 감정이다. 감정의 반복repetition과 강화reenforcement는 지금 이순간에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만두지 않으면 뇌가 타버릴 것.
이 책에 관련된 문학사적 문제를 하나 지적하고 싶다. 바로 언문일치체라는 문제다. 야나기타는 이 문체가 타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언어, 퍼블릭을 형성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나라의 근대에 실제로 성립된 것은 그와는 전혀 별개의 언문일치체였다. 그것은 바로 여성 1인칭의 언문일치체, 말하자면 철저히 ‘내면화’된 문체였다.(43)
뜬금없이 언문일치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 데. 후에 구전문학으로 연결되지만. 언문일치체의 형성은 일본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등장하는 데. 일본과 한국에서 형성과정이 조금씩 다르지만. 언문일치체는 근대 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언론과 문학을 통해서 형성되어 왔고, 일본의 근대문학 형성과정에서 등장한 사소설에 대한 비평이다. 여성 1인칭. 내면화된 문체. 나는 일본 문학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모르지만. 여성적이고 내면화된 문체라는 말은 솔직히 직관적이다.
인터넷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투고’ 행위 자체가 그 내용의 수준을 떠나 ‘콘텐츠’의 창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우선 인정해야만 한다. 여기서 굳이 ‘콘텐츠’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투고자’ 이외의 누군가를 위한 경제적 가치를 낳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째서 무상으로 노동하는 것일까. 근대 일본에서 문예지가 결국 ‘투고 미디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표현’은 근대적 자아와 한 몸이다. 인터넷은 작가라는 특권 계급만이 아니라 만인에게 자기 표현의 기회를 개방했다. 문학가나 예술가 쪽에서 자신을 인터넷 투고자와 똑같이 취급하지 말라고 한다면 ‘자기 표현’이라는 말을 ‘자기 표출’로 바꾸어도 상관없다. 그래 봤자 본질은 동일하다. 자기 표출의 민주화는 동시에 자기 표출을 고스란히 무상노동에 의한 콘텐츠 제작으로 전환시키는 플랫폼이 성립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만큼 ‘나’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 강력하다는 말이다.(73)
일본에서는 소셜 미디어(SNS)에 글이나 사진 또는 동영상을 올리는 일을 ‘투고’라고 한다. 잡지에 원고를 보내는 행위에 쓰는 말인데. 한국에서는 흔히 ‘포스팅’. 이를 오쓰카는 무상노동행위라고 한 것. 플랫폼 기업은 사람들의 무상노동행위로 돈을 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돈을 그리고 이 돈을 아주 찔끔 나누어주는 플랫폼이 유튜브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유튜브에 몰두한다. 그러나 유튜브가 돈이 나누어지는 건 결과에 불과하다. 플랫폼 자본은 어떻게 형성되는 가 그것은 욕망과 감정에 의존애서 생겨난다. 사람들의 자기 표출 욕구. 그리고 거기에 대응하는 ‘좋아요’ 또는 팔로우나 구독. 감정이 이 모든 생위에 기본 동력이다. 플랫폼을 구성하는 수많은 콘텐츠는 대부분이 무상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익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노동자들과 무관하게 플랫폼의 몫이다. 그리고 아주 일부분을 극소수의 플랫폼 시대의 노동영웅들이 나누어 가진다. 유튜버든 블로거든 흔히들 보상을 바라고 하면 쉽게 지친다고들 말한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자기 표현이나 자기 표출 자체가 보상인 경우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
게다가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무상 노동은 소비나 자기 표출 같은 쾌락을 동반하며, (사려 깊은 표현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지적 부하’를 가능한 한 억제해 준다는 점에서 더더욱 쉽지 않은 문제가 된다. 즉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마음 편한’ 상태라는 말이다. 방금 언급한 ‘자발적’으로 떠나는 노숙인과 달리 ‘불쾌함’조차도 느끼지 않게 된다. 반지성주의 비판자들은 ‘반지성의 쾌락’과 그런 쾌락을 유발하는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반지성’은 ‘지성’ 이상의 쾌락인 것이다.(81)
하루 종일 유튜브와 단톡방만 들여다 보면서 때만 되면 태극기를 들고 광장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무슨 거대한 대의나 분노가 있어서 움직인다고 보면 이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런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들의 기행을 이해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것 자체가 쾌락을 주기 때문이다. 비정상적 반복 행위가 주는 쾌락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나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접기 시작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대화불가능한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여기서 중요한 점이 바로 ‘지적 부하’를 억제해 준다는 말이다. 오쓰카가 말하는 것은 일종의 투고자들로 구성된 즐거운 세계가 만들어지고 나면, 그 안에서 반성적인 사유나 입장 정립의 필요없이 반사적인 반응만으로 충분한 세계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단톡방과 유튜브에 왜 빠져드는가. 왜 매 순간 들여다보는가. 누군가 내 대신 생각해 주기 때문이다. 단톡방 바깥의 세계에서 새로운 일이 벌어졌을 때, 단톡방 안의 누군가가 자신들의 말로 새롭게 해석해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자극에서 반응까지의 거리가 극단적으로 짧아지고 계속 반복되는 상황에서 이들의 ‘지적 부하’를 누군가 덜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점점 더 의존적이되고, 더 깊이 중독되어 간다.
이 소설이 그리는 것은 ‘스쿨 카스트’라는 시스템의 ‘상하’가 아니라, 누가 더 ‘외부’에 서느냐는 포지셔닝 게임을 ‘상’에 속한 학생들이 하고 있는 모습인 셈이다. 내가 이 소설을 읽고 받은 느낌이 지독히 나빴던 이유도 사실 이 ‘사회학’스러움에 있었다. 이런 사회학스러움 때문에 이 소설에서는 ‘스쿨 카스트와 그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부감’하는 캐릭터가 상위에 놓인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작가의 위치를 결정하게 된다. ‘위’로 갈수록, ‘바깥’으로 갈수록 ‘관찰자’라는 특권성을 획득하게 되고, 최상위에는 ‘작가’라는 위치가 놓이는 것이다.(95) 이 작가가 얼마나 ‘사회학자’로서 자각을 가지고 이 단락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바로 이 부분에서 ‘나’라는 인물은 이러한 ‘인정 욕구’에 해당하는 ‘말’이야말로 근대에 투고 공간으로 성립된 ‘소설’의 본질(‘언문일치’가 인정 욕구에 따라 문예지에 투고된 말의 군집으로서 이 나라 근대에 출현했음은 더 말을 보탤 필요도 없을 것이다)이며, 그것을 인터넷 상에서 보다 가시화한 것이 ‘라이트 노벨’ 내지는 인터넷에서 온갖 말과 표현을 둘러싼 평가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117) 이런 식으로 스쿨 카스트 문학을 개관해 볼 때 새삼 발견되는 공통점은 ‘사회학자적 입장’과 ‘제도에 대한 긍정’이다. 이것들이 의외로 현재 각 플랫폼에서 창작되는 문학의 특징 같기도 하다.(122)
라이트 노벨이라고 하는 장르가 있다는데. 요즘은 한국어 번역도 꽤많이되는 모양이다. 웹소설, 휴대폰 소설이나 예전의 무협지, 하이틴 로맨스 같은 것들이 모두 비슷한 장르에 속한다. 장르의 문법을 따르는. 그 중에 스쿨 카스트라는 장르가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서브 컬처의 세계는 갈수록 무궁무진. 그런데 오쓰카가 지적하는 건 그게 아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서브 컬처가 창의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학자적 관점을 작가가 취한다고 비평하는 지점이 흥미롭다. 사회학자적 지점이란 국외자 관점인데. 오쓰카는 이것이 작가가 취하는 시점들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회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처하려는 태도인 동시에 제도를 긍정하는 태도라는 지적이 흥미롭다. 내려다보는 입장, 국외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일종의 혈투를 날마다 벌이는 논객들을 보면서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입장과 이해가 분명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저 논쟁에서 이길 수 있는 내려다보는 자리만 차지하기 위해서 늘 부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항상 옳은 자리에 서기 위해 때론 원리주의도 불사하는 기행을 보이다가는 어느 순간 흑화하는데. 거기에는 바로 이 국외자적 태도가 있다.
린나는 비정치적이고 테이는 정치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AI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부녀자[腐女子(후죠시)]의 말’도 ‘혐오 발언’도, 이렇게 예를 드니 너무 허무하지만, 포스트모던적인 ‘나’가 바로 여기에 ‘실체’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테이가 혐오 발언에 물드는 것과 유럽과 북미에서 태어났지만 그곳에서도 선조들의 조국에서도 문화적・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찾지 못하고 팝컬처에서 준거를 찾을 수밖에 없는 이민 3세대나 신자유주의 경제 속에서 귀속될 곳이 정해지지 않은 젊은이들이 사회적・정치적・역사적 전망 없이 인터넷을 통해 과격 사상에 감화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AI는 인터넷 속 ‘나’들의 충실한 반영인 셈이다. 린나가 재일 조선인들을 매도하지 않은 것은 일본인의 윤리성을 반영해서가 아니라 ‘PTA’ 역할을 한 개발 팀이 ‘학습’에 어떤 식으로든 필터를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158)
린나는 일본 마이크로소프트의 AI이고, 테이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의 AI이다. 일본에서 린나는 ‘후죠시’들의 말을 하고, 테이는 히틀러를 찬양한다. 린나나 테이가 어떤 자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반응이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AI가 학습하는 네크워크 상의 거대한 말뭉치corpus가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 만들었다면 일베의 말을 사용할 런지도 모르겠다. 인공지능이 문학을 하고 소설을 쓰고 말을 한다고 하고 있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쌓여있는 말들의 연결구조를 따라서 그냥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라는 것. 실은 오쓰카 에이지는 인공지능 뿐이 아니고, 라이트노벨과 서브컬쳐를 비롯해서 이를 재생산하고 있는 현재의 일본이 네트워크에 쌓여있는 말들의 덩어리를 반복하는데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메이지 시대 문예 잡지의 대부분이 투고 잡지였고, 『엽서 문학』이라는 잡지까지 존재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메이지 시대에는 잡지상에 인터넷과 같은 투고 공간이 존재했던 셈이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투서 문학”이 “메이지 문화의 커다란 특징”이라고 단언하는 야나기타의 이 글을 접하면 그의 구전 문학론이야말로 현대의 인터넷에 도달하기 위한 한 단계였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렇게 메이지 시대 잡지 미디어에서 잠시 성립했던 투고 공간이 특권적인 ‘작가 길드’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리로서 작가’의 생성물이 잡지 미디어를 통해 전국 규모로 집적됨으로써 “표절이나 모작”이 문학 내에서 문제시되기 시작했다는 대목을 보면 요즘 우리도 인터넷에서 종종 마주치는 열광적인 ‘파쿠리’ぱくり[표절] 논란을 바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만인에게 표현이 개방되면서 ‘독자 문학’이 성립했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근대’에 매달려 ‘작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숭배해 마지않는다는 것을 이 ‘도작 문제’가 보여준다.(185-186) 지금 ‘문학’에서는 구전화・집합화라는 전근대로의 회귀와 ‘언문일치’라는 근대의 재귀가 동시에 표리적 현상으로 일어나고 있다. ‘문학’을 생각하는 데도 ‘인터넷’을 생각하는 데도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은 역사를 새로 쓰는 것에 대한 인식이다. 지역이나 성별, 출신과 무관하게 누구나 쉽게 언어를 이용할 수 있게 하려는, 동시에 말하는 언어와 쓰는 언어를 한없이 접근시키려는 운동이 ‘언문일치 운동’이라면, 빈정거리는 말이 아니라 이 운동이 ‘트위터와 라인으로 부흥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차이점이라면 문학자가 아니라 인터넷 기업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언어’의 전문가여야 할 문학자가 더 이상 그 역할을 맡고 있지 않기 때문인데(자의인지 타의인지는 제쳐 두고), ‘문학’은 심지어 이 상황에 대한 논의를 시작조차 못 하고 있다. 이런 언문일치 운동의 본질이 ‘문학 표현의 구전화’에 있음을 알고 간파했던 문학자는 근대 문학사를 돌이켜 봐도 그리 많지 않다.(191-192)
오쓰카 에이지가 들고 있는 문학자란 바로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国男다. 오쓰카는 구전 문학과 언문일치를 연결하고, 잠시 저자라는 근대 문학이 형성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시 구전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문학이 구전화하고 있다는 말은 내가 보기에는 일종의 모욕이다. 이것이 일본 특유의 현상인건지. 오쓰카 등이 말하는 일본의 경우 소위 ‘순문학’(순수문학)이 실상 라이트노벨이나 순정만화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 또 거꾸로 표절 논쟁이 벌어진다는데. 그러고보니 한국에서도 정치인 만이 아니라 갑작스레 오만가지 표절논쟁이 등장한 것이 네트워크가 활발해 지면서부터. 최근에 한 소수자 소설가의 작품철회나 회수 소동도. 그러면서 여기에서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곧 작가의 죽음을 말하는 데는 쉽사리 동의가. 바르트가 말하는 모방, 변형, 낯설게 하기란 모든 작가들의 작업을 가리키는데.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재생산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답습이 이루어지는 것인지는 판단이 필요해 보인다. 바르트는 저자 대신 독자를 말하는데. 그건 아직도 전통적인 양식 안에서 말하는 거지만. 오쓰카가 이야기하는 시대는 이미 뒤섞여버린 네트워크의 말뭉치라. 거기서 표절이란 또 하나의 숭배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이 희열의 구조 자체는 허약한 자아의 표출인 혐오 발화나 인터넷 댓글,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공감’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즉 ‘감정’의 공진共振이다. 하지만 혐오 발화가 ‘악의’를 스트레스 해소 수준으로 드러내는 서플리먼트적 언어인 데 비해, 얼마 전까지의 ‘문학’의 경우 그 ‘묘사’가 초래하는 작용은 독자에게 조금 더 성가신 것이었을 터이다. 왜냐하면 그 독후감은 쾌적하지 않기 때문이다.(204-205) 또 한편에서는 ‘세계’를 닫힌 정보계로, 하나의 게임 시스템처럼 간주하는 태도가 사가와 일체화되어 문학 영역에 등장했다. 이것이 오에에서 무라카미, 그리고 게임으로 이어지는 기묘한 계보를 형성한다. 이 계보에서는 ‘세카이’를 문화 기호론이나 구조 인류학에서처럼 정보의 집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특징이다. 구조주의적 문화 인류학은 ‘세카이’를 정보론적으로 서술하는 서식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이나 ‘세카이’계와 아베 총리가 말하는 ‘애국 사이의 친화성이 너무 당연해 아무도 그에 관해 쓸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겠으나, 지금의 ‘일본’은 ‘세카이’이자 ‘사가’인 것이다.(220) 부정적으로 말하면 이는 ‘성숙에 대한 거부’며 긍정적인 의미를 찾자면 ‘국민’화에 대한 거부다. 어느 쪽이든 그 거부의 일관성이 일본 문학과 서브컬처를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보이게 해 왔다고 할 수 있다.(231)
혐오에 대한 공감과 감정의 공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가져다 주는 쾌적함. 이런 단어들은 어두운 방에서 컴퓨터나 스마트폰 화면만 보면서 기괴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음울하면서도 자포자기적인 삶을 연상시킬 뿐이지만. 이것은 도착이면서 타락이고 퇴행이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전면에 드러나고 있다는 점인데. 일본에서는 흔히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이 하나의 세계관을 구성한다고 해서 그런 것을 나름의 ‘세카이’라고 부르지만. 네트워크의 부분들은 이미 ‘세카이’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특정 작품의 세계가 아니라 사람들이 구성하고 있는 세계다. 일본의 오타쿠들의 세계와 한국의 아스팔트 우파 그리고 최근의 의사들의 행태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
‘순례’의 여행을 이렇게 정리한 다음 쓰쿠루를 ‘일본’으로, 시로를 ‘아시아의 종군 위안부’나 근대사 속 ‘아시아에 대한 식민 지배’로, 구로를 ‘아사히신문’이나 ‘좌파’로 치환해 보면 어떨까. 한국이 위안부 문제를 규탄하는 것은 오로지 그 나라의 국민성과 피해자 의식 때문이라는 주장은 시로의 위증이 그녀의 정신 상태 때문이라는 것과 같은 논리다. 이는 이제 이 나라의 여론이라 해도 될 ‘역사 수정주의’ 그 자체가 아닌가. 이 소설은 역사 수정주의에 호의적인 ‘우화’인 셈이다. 즉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 끝에 얻은 것은 이러한 역사 수정주의자로서의 ‘정신’이고, 그 ‘올바른 역사’를 받아들이는 아픔을 견딘다는 결말은 교양 소설적인 이야기의 결말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 공허함을 견뎠던 『양을 둘러싼 모험』의 ‘나’와는 정반대인 현재 일본 ‘시민’의 모습에 대응한다. 지금 이 나라의 ‘국민’으로 자기 형성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국민 소설’이라 할 수 있다.(255)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란 것은 바로 이 대목.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다자키 쓰쿠루』를 역사 수정주의로 읽어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름 역사를 슬쩍이라도 언급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최근작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난징대학살을 언급한 것을 두고 노벨문학상을 타려는 수작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으니. 그렇다고 제대로 말하는 것도 아니다. 최근의 헨미 요의 『1★9★3★7 이쿠미나』가 번역되었으니, 일본인의 시각을 보려면 이 책을. 그러나 오쓰카의 『다자키 쓰쿠루』 독법에는 고개가 끄덕여 진다. 일본에서 흰색을 뜻하는 시로는 일반적으로 무죄를 검은색을 뜻하는 구로는 유죄를 뜻한다. 쓰쿠루에게 강간당했다는 시로의 거짓말을 일단 맞는 것으로 하자는 구로. 시로는 강간을 당하기는 했으나 그건 쓰쿠루가 아닌데도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런 주장을 했다는. 이 소설을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비교하면서 위안부 문제와 역사 수정주의를 읽어내는 건. 오쓰카는 하루키의 ‘전향’이라고 까지 말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고개가 끄덕여 진다. 일본의 지식인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피해자 의식. 그러면서 역사적 사실이 아니더라도 일단 참고 견디자는 이야기는 희생자들에게는 모욕이다.
오쓰카 에이지에게서 적잖은 인사이트를 얻었지만. 네트워크와 정보의 세계에 한 발을 걸치고서 아직도 웹페이지에 글을 쓰는 동안 뇌의 짜릿한 자극을 즐기는 채, 뇌가 저릿저릿 구워지는 경험에서 간신히 한 발짝 빼보려고 할 때쯤, 주위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네트워크의 감정의 사이클에 휘말려서 삶을 내던져버리고 있었다. 아니 네트워크를 먹여살리고 네트워크에 부를 쌓아주고 있다.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인생과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에너지 모두를 사용해서 네트워크에 가져다 바치는 이들이 「매트릭스」의 인간 배터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다가 미국의 유럽의 거리에서 흔히 마약 중독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을 보게 되듯이, 네트워크에 정신을 모두 빨려버린 좀비들이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겉 같다. 지금은 아직 스스로 돌아다니지만. 이 정도로 빠른 속도로 사이클이 순환한다면, 시간문제일 뿐이다.
2020. 9. 4.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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