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료타, 『신화가 생각한다』.

후쿠시마 료타福嶋亮大, 『신화가 생각한다: 네트워크 사회의 문화론神話が考えるーネットワーク社会の文化論』, 김정복 역, 기역青土社, 2014(2010).

후쿠시마 료타의 글을 처음 접한 건 『부흥문화론』이었다. 일본은 국가가 제대로 멸망해 본적이 없다. 그렇기에 멸망 서사를 외부로부터 차용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남북조 정윤논쟁애서 송의 유민 내셔널리즘. 일본의 가장 큰 멸망이 1945년의 패전인데. 거기서 만들어낸 것이 고질라와 우주소년 아톰이라는 서브 컬쳐라는 주장. 고대로부터 재앙 또는 재난 이후의 궤적을 살핀다. 후쿠시마 료타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염두에 두었지만, 나는 코로나19가 막 퍼지기 시작하던 지난 봄, 뜻밖의 재난을 맞아 모든 것을 동원해서 싸우는 한국과 그다지 절실하게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 않던 일본을 행간 뒤쪽에 배경으로 두고 책을 읽어나갔다.
『신화가 생각한다』란 되짚어 보면 신기한 제목이다. ‘신화를 생각한다’라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기존의 고정관념이다. 신화’를’ 생각한다고 하면 생각하는 주체인 ‘나’ 또는 ‘우리’ 곧 개인이나 집단, 즉 인식하고 사유하는 주체를 전제하는 것인데, 신화’가’ 생각한다고 하면, 주체와 대상의 역전을 말하는 것이다. 조금 소략해서 말하면 신화가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이다.
사랑제일교회가 바이러스의 공략에 그 정체를 드러내고, 전광훈과 그의 추종자들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나를 포함해 주위 사람들은 기이한 이질감에 사로잡혔다. 물론 분노했지만, 분노하기 이전에 다가오는 생경함.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발언이나 행동을 하고 그걸 인터넷에 공개하는 걸 보면서 느끼는 기이하고 서늘함. 포항에서 레벨D 방호복을 입은 보건소 직원 두 사람 사이에서 격리치료를 거부하고 탈주해 저항하고 있는 성경책을 든 사람의 사진은 징후적이다 못해, 기호 그 자체처럼 느껴진다. 마치 이 사람들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평행우주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드라마 「트레인」에서 묘사하는 그런. 그런 사람들이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두 평행우주를 나누고 있던 일종의 경계에 구멍이 뚫리면서, 다른 세계로 넘어들어와서 드러나는 이질감 같은 거였다. 분명 같은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지만, 다른 세계에 속한, 다른 세계의 다른 논리로 움직이는.
미적거리던 책장이 넘어가기 빠르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단순한 현실이나 단순한 허구는 그것만으로는 더 이상 리얼리티를 갖지 못하고, 모두 흩어져버린다. 그와 반대로 아주 정밀한 시뮬레이션은 리얼리티를 농축하는 확률을 높여주는 유력한 수단이다. 여기서 요점은 출발점이 우연적이더라도, 그 어설픈 출발점을 복원하고 하나의 덩어리, 즉 단위로 정리해가는 객체적이고 자기수정적인 메커니즘이 끊임없이 사회에 압력을 가한다는 것이다. ‘신화’란 바로 압력솥 같은 정보처리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한다.(31) 슈미트는 이 새로운 ‘의지’(욕망)이하는 변수의 처리방법으로서 통계보다도 감정이 알맞다고 생각했다.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듯이, 이 슈미트의 논법은 바로 ‘갈채’에 기초한 히틀러의 감정 정치 그 자체다. 그런 전제 위에서 슈미트는 ‘갈채’의 영역을 가장 잘 체현한 것으로 ‘신화적인 이미지’를 든다. ‘신화 이론은 의회주의적 사상의 상대적인 합리주의가 자명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가장 강한 표현이다. 무정부주의적 저술가들이 권위와 통일에 대한 적대감에서 신화적인 것의 의의를 발견했다면 그들은 무의식 중에 새로운 권위를 구축하고, 따라서 질서, 규율 및 계층제도에 대한 새로운 감정 구축에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42-43) 물론 이러한 서브컬처적인 현상에는 일반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는 해도 신화소를 통한 정보처리는 어디까지나 다수의 참여자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상은 단순한 취미층의 특수한 사례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것은 물론 사회나 문화의 네트워크화=민주화가 철저하게 진행되었을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떠한 정보처리를 선택하기 쉬운가라는 문제와 연결된다.(48)
『신화가 생각한다』는 후쿠시마 료타의 첫 작품이기 때문에, 다소 난삽하고, 이론적 자원들이 늘어서 있는 구석이 있다. 논의를 따라가기 위해 너무 애써야 할 때도 있다. 이런 건 아즈마 히로키를 좀 배웠으면 하는데. 여튼 1장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몇 구절을 가져왔다. 하나는 ‘신화’라는 정보처리 메커니즘. 이를 돌리는 동력으로서의 ‘감정’.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맞물려 돌아가는 가능성의 장을 열어젖힌 네트워크화. 나는 이런 요소들이 작금의 전광훈과 사랑제일교회 사건을 이해 내지는 평가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아스팔트 우파와 종교의 결합, 교리적 이단성 내지 이단옹호자로서의 행동 같은 것은 지금까지 유효하던 설명방식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고, 처리 방식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 그 역동성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쪽 방향에 휩쓸린 확증 편향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런 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보수라고 말하든 극우라고 말하든 정보처리 메커니즘이 하나의 신화로 자리잡고 있다. 페이스북과 유튜브의 알고리듬이 이들을 이어준다. 카카오톡의 단톡방의 거짓말들과 극우 유튜버의 동영상을 하루 종일 보고 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정보해석과 정보처리를 이들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세계와 자기 자신, 정치 현실과 코로나19까지 모든 상황을 그들의 말을 통해서 듣는다. 이것이 정보처리 메커니즘이고. 이런 메커니즘은 신화소들 즉 기호들을 통해서 정보에 줄을 세우고, 정보을 재단하고, 정보를 왜곡하고, 정보를 재해석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신화’를 형성한다. 후쿠시마 료타가 이걸 신화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의 집단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전광훈을 포함한 정보의 생산자들과 이 정보의 소비자들이 함께 신화를 형성하고 만들어낸다. 이들은 끊임없이 그 신화에 적합한 기호들에 어울리는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시킨다. 그 기호들 속에서 이들은 안도한다. 이를 작동시키는 것이 바로 감정이다. 칼 슈미트가 지적한 ‘갈채’. 히틀러에게 쏟아진 박수는 오늘날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로 유튜브에서 좋아요와 구독으로 바뀐다. 감정은 이 시스템을 구동시키는 원동력이다. 그것이 분노이든 환호든. 그리고 그 감정은 자본이 된다. 플랫품은 감정을 화폐로 바꾸어 준다. 슈퍼챗은 보다 직접적이다. 사람들은 돈을 쏘아 보낸다. 그리고 시공간 속에 흩어진 사람들을 모아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네트워크화다. 인터넷이 카카오톡이 유튜브가 페이스북이 이들을 연결해 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정보통신 요금이 저렴하지 않다면. 곳곳의 무료 와이파이가 없다면. 거의 모든 사람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지 않았다면.
게다가 사람들은 잘모를지도 모르지만. 교회는 원래 뉴미디어에 강하다. 본당이라고 부르는 예배당이 아닌 옆방이나 다른 건물의 공간에 유선으로 비디오를 연결하여 같이 예배드리기 시작한 것이 한경직 목사 시절의 영락교회라고 나는 알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이미 오래전 전국의 순복음교회를 위성으로 연결했다. 온누리교회는 자체 방송국과 케이블 채널을 가지고 있다. 성폭력으로 큰 문제를 일으켰던 한 목사의 설교 음성파일을 수많은 사람들이 MP3에 넣고 다니면서 하루종일 듣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설교를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교회에서 판매한 역사는 족히 사오십년은 될 것이다. 설교집이 인쇄되어서 뿌려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마틴 루터와 구텐베르크나 조나단 에드워드, 조지 휫필드, 벤자민 프랭클린 시대로 갈까.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원래 미디어에 능하다. 새로운 미디어가 나오면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지금 이들 중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주목받기에 이 점을 간과하고 있지만. 코로나19가 폭발하면서 기업들이 화상회의를 사용하기 시작한다는 뉴스가 나올 즈음, 대형교회나 선교단체들은 벌써 줌을 이용해서 심방, 리더교육을 하고 있었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회는 미디어에 능한 사람들이다. 웬만한 규모의 교회에 그래픽 디자인 툴이나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들이 없는 걸 본 적이 없다. 젊은 교역자들 중에도 능한 사람들이 많고.
스탠리 밀그램이 주장했듯이, 인간은 각 개인의 퍼스널리티에도 불구하고 조건(특히 권위 있는 제삼자로부터의 지령)만 갖춰지면 쉽게 대규모의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생물이다(악의 평범성). 더구나 그 악은 때로는 그들 자신의 양심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실현된다. 국가나 교회에 대한 사회의 자율은 오히려 최악의 ‘복종의 심리’를 유발하는 요소가 있고, 또한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추상적인 개인으로서 출발하는 리버럴한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피한 병리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구성하더라도 괜찮다면, 설령 그 구성의 방향이 대규모의 복종이라고 해도 그것을 원리적으로 거부할 수 없다. 일찍이 신학자나 철학자는 ‘(신이 만들어낸 이 세계에) 왜 악이 있는 것인가’. ‘원래 인간이 행하는 행위를 똑같은 인간이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진 것이지만, 20세기의 사상가는 오히려 평범한 인간이 아주 쉽게 악에 빠지게 되어버린다는 데 경악한 것이다. 로티의 네오 프래그머티즘적인 관점으로 보면 철학이나 문학은 그 위험성을 숙지시키는 계기가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로티의 입장에서 ‘공적’인 작품이란 사람이 어디까지나 자신은 양심에 따르고 있으나 ‘악’을 저지르게 만드는 사회를, 이른바 의사 체험시키는 작품이라는 것이다.(78)
후쿠시마 료타는 일본의 서브 컬쳐, 데츠카 오사무에서 건담까지를 훑어가면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 한다. 그 입증의 성공여부에 대한 평가는 제쳐두고라고. 리버럴한 사회의 복종의 심리, 즉 자기자신을 스스로 복종하는 자로 구성해나가는 것에 대한 지적은 일종의 비아냥일 수 있다. 리러벌한 사회란 스스로 독립적인 개인 즉 주체들을 근거로 해서 주체들 사이의 관계에 근거해서 사회를 구성하려는 사상에 기반하고 서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회에서 만들어진 인간들은 역시나 복종하는 인간들이다. 에티엔 드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이나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에 대한 담론이 다시 호출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개인을 주체로 만들려고 했는데. 만들어져 나타난 것은 대중이고, 복종하는 인간이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더니 자유롭게 새로운 신화에 복종하며, 새로운 신화에 복종하는 권리를 주장하면서 요구하고, 그런 권리의 행사가 반사회적일지라도 서슴지 않는다. 리처드 로티의 말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상상의 공동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것은 국민국가를 바탕으로뿐만 아니라 시장과 결부된 미디어를 통해서도 가상적으로 구축될 것으로 예산된다. 사람들은 미디어를 통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간의 세로축을 구비함으로써 리얼리티의 생성을 명백한 것으로 만든다. 또한 앞에서 다룬 내용을 뒤집어보면 어떨까. 시간적인 일치가 세계를 구성하는 열쇠가 된다는 것은 가령 그것을 잃어버리면 세계의 체험 가능성 그 자체가 이상해진다는 것도 시사한다. 주관적 촬영이나 최근 10년 사이에 국제적인 규모로 힘을 지니게 된 리얼리티 TV 프로그램 등은 ‘당신은 지금 세계와 의심할 나위 없이 동기同期한다’는 안도감을 시청자에게 발신하지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세계상실에 대한 불안을 반증하는 것이다.(112-113) 상상력은 풍부성에 의존하고 그 속에서 ‘가까움’과 ‘멈’에 대한 세계인식을 바꿔쓴다. 그러나 작품은 반드시 일정한 의존관게에 얽힌 것은 아니라서 모두 다른 상상력의 영역(관찰대상)에 의존하여 자기 자신의 성질을 바꿔가게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진화 프로세스를 존중한다면 오늘날의 사고라는 것은 시스템이 얼마나 적절하게 자신의 의존(또는 기생) 대상(상상력의 영역)을 발견해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으로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실제로 모종의 의존은 모종의 자율의 지지가 된다-동시에 어떤 종류의 자율의 가능성을 손상한다-는 구조를 이해하지 않으면 현대 사회의 분석은 미덥지 못하다.(119-120)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출판 자본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카카오톡과 유튜브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또 하나의 ‘상상의 공동체’가 탄생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현실 정치의 장에서 권력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인터넷과 유튜브를 활용하는 사람들이라면, 현실과의 접점을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선거를 통해서는 집회를 통해서는 다수의 동의를 얻지 않으면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더 이상 현실의 다수를 획득할 가능성이 없거나 원래 다수파가 될 필요가 없었을 경우, 손쉽게 서브컬쳐의 세계 오타쿠들의 세계로 몰입한다. 지도자와 추종자들의 정보의 네트워크의 세계 속에 그들은 고립되고 자신들만의 논리를 발산하며, 다수와 충돌하는 순간이 오면, 그들 세계의 논리가 외부로 노출되 기행으로 비쳐지게 된다. 손안의 미디어를 통해 연결된 이들은 그들 나름의 하나의 하이퍼 리얼리티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라이브로 연결되면 일체감을 더욱 느끼면서 세계와의 일치를 느끼는 것이다. 슈퍼챗에 돈을 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의존과 자율이 서로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공존한다. 지도자도 추종자도 발신자도 수신자도 모두 시스템에 상상력에 자율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거기에 이미 새로운 하나의 ‘상상의 공동체’가 그러니까 그 나름의 ‘국민nation’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의 생명권력은 노골적으로 권력의 얼굴을 드러내기는 커녕 오히려 하찮은 리얼리티 TV 프로그램과 같은 시도에 파묻혀버린다. 감정자본은 거의 모든 개인이 잠재적으로 언제든지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풍부하고 또한 가소성이 높은 자원이다. 또한 감정자본을 증식시키는 데는 별도의 원재료가 필요 없고(실제로 생성 비용이라는 면에서는 감정만큼 효율적인 ‘자본’은 없을 것이다), 아무런 강제력이 개입될 필요도 없다. 어설픈 강제는 오히려 본래 ‘무제한의 리소스’인 감정자본의 전파를 저해하고 전체 이익을 줄일 뿐이다. 어쨌든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인간의 선천적 능력을 그대로 자본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발상이다. 이것은 바로 모든 인간을 ‘기업가’로 간주하는 생명권력의 유형이다. 또한 여기에는 미디어를 움직이는 ‘힘’의 전환이 확실히 드러나 있다. 지금까지는 미디어에 의해 제공된 재화를 사람들이 소비한다는 사고방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상황은 한층 진전되어 시청자 쪽 감정자본의 생성을 될 수 있는 한 손상하지 않고 그것을 적절하게 실제자본으로 변환하는 방법이 나타난다. 예전에 미디어가 시청자의 반대편에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날에는 시청자 자체가 미디어로서 다뤄지기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131-132) 예를 들면 이런 SF에서 과거로 타임슬립한 주인공은 자신의 사소한 행동이 나비효과에 의해 미래를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게 아닐까 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러한 능동성이 발휘되는 것은 이미 네트워크의 움직임이 확정된 과거가 무대이기 때문이고(즉 자신만이 변동요인일 수 있기 때문이고), 만일 셸링처럼 생각한다면 인간은 본래 자기조직화의 원리에 대해 완전히 무력한 존재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개개인이 무엇을 의도했든 주위의 사소한 사건을 방아쇠로 하여 모르는 사이에 질서는 완성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타임슬립은 그 결정적인 수동성을 잊어버리게 해줄 편리한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135-136) 반복하지만 『도노 모노가타리』는 (혹은 『해상의 길』도) 일반적인 시공간의 원근감을 파괴한다. 그러나 시공을 관통하는 그 상징적인 신화는 야나기타의 내적인 감각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외부세계로부터 데이터의 축적을 통해서 받아들여야 했다. 여기서 의사擬似 종교=의미론적 디자인이 ‘불확실성의 흡수’를 지향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야나기타의 신화는 자못 시사적이다. 우리는 좋든 싫든 개인과 사회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없다. 따라서 한 번 외부의 불확실한 목소리를 ‘듣는다’는 자세를 취하고서야 비로소 타자와 공유 가능한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다. 이러한 거듭된 ‘접종接種’에 의해 디자인된 야나기타의 작품은 과거의 종교가 무너진 뒤 의사 종교적인 작품의 한 모델을 제시하게 된 것 같다.(156)
옮겨온 글에서 세 단어를 가져온 다면, 감정자본, 능동성, 접종이다. 사람들의 감정은 그 자체로 동력이고, 자본이다. 뉴미디어는 이를 화폐자본으로 바꾼다. 슈스케든 미스미스터트롯이든. 토지나 기계 같은 생산요소 없이도 자본이 산출된다. 노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노동을 통해서 자본이 출현한다. 이 노동은 유희의 형태를 띄고 있다. 거기서 감정은 끊임없이 작동한다. 감정의 작동은 물리적 작용이기도 하다. 뇌와 척수는 수많은 호르몬을 분비하고, 그런 호르몬의 수용체들은 신경계를 통해서 쾌락 중추에 연결되어 있다. 개인적 경험으로 말하면, 페이스북이든 카카오톡이든 유튜브든 보고 있으면 뇌가 구워지는 느낌이다. 뇌에 전류가 흐르고 열이 오르면서 단백질이 익어가는 냄새가 난다. 한 번 구워진 뇌가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플랫폼의 알고리듬은 더 많은 전류가 발생하도록 이끌어간다. 클릭이 이어지면, 그들에게는 수입으로 자본으로 바뀐다. 수익을 올리지 못해도 주가는 오른다. 뇌와 자본이 이토록 직접적으로 연결된 적이 인류역사상 있었을까. 디스토피아적으로 표현하면, 이건 「매트릭스」의 세계다. 인공수정된 인체를 유지하는 이유는 시스템을 가동시킬 에너지 원으로서가 아니었던가. 인체를 작동시키는 것은 바로 가상현실이고. 거기서 사람들을 한층 더 자극하고 움직에게 하는 것은 능동성 바로 효능감이다. 라이브, 슈퍼챗, 단톡방, 집회와 시위는 바로 그 효능감을 일깨워준다. 뭔가 하고 있다는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의식 과잉 상태에 이른다. 이런 신화, 하이퍼 리얼리티 즉 의사종교의 세계는 외부세계의 데이터에 의존한다. 외부세계의 데이터를 끊임없이 받아들이면서, 취사선택하고, 이를 자신들에게 축적된 데이터에 연결한다. 이 연결이 끊어지게 되면, 그때는.
이와 같이 생태학 혹은 시스템론에 의해 파악된 세계는 패턴(반복성)의 직물이다. 우리는 패턴으로서 결정화된 것은 인식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인식할 수 없다. 이러한 얼룩무늬의 리얼리티가 마침내 선명해진다는 것이 아마 최근의 상황일 것이다. 매우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앞으로 주체에 대한 객체의 우위라는 문제가 대두하게 된다.(164) 우리는 오랫동안 개체의 성장과 죽음을 기준으로 한 시간의 이미지에 의해 사회와 문화를 측정해왔다. 하이데거처럼 존재를 ‘죽음’과 근원적으로 결부된 것으로 파악한 철학자는 바로 그 극한에 위치한다. 그에 비해서 작은 것으로 가득 찬 세계는 그러한 개체의 삶과 죽음의 리듬을 일탈한다. 그런 점에서 점진적이고 보수적인 시간성과 비약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시간성, 즉 관리 가능성과 관리 불가능성이 공존한다. 작은 것은 개체가 살아가도록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 중의 시간성은 보통 삶의 리듬을 뒤틀리게 한다.(207) 그와 같은 상황을 근거로 하면 일본의 일부 사상가나 아티스트(나카자와 신이치, 스기모토 히로시 등 무라카미와 같은 세대의 작가)가 마침내 선사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고대적인 인식 구조를, 말하자면 ‘의태擬態mimicry’하려는 것도 설명이 될 것이다. 고대 사회에는 세계인식의 유형이 풍부하게 비축되어 있다. 적어도 그와 같이 판단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고대적인 것에 접근하면 작품을 정력적으로 산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세계나 자기를 인식하기’ 위한 원천이 현대에서는 더 이상 획득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209)
사람은 흔히 그가 먹는 것으로 구성된다는 말을 하고는 한다. 일본에서는 일본인은 ‘고메’ 즉 쌀로 구성되어 있다고 흔히 말한다. 이 쌀에는 태양에너지가. 그럼 한국도. 실제 사람들이 먹은 것은 분자들의 덩어리들인 당, 아미노산 그런 것들의 덩어리로 분해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끊임없이 세포의 구성물질을 교체하고, 세포 자체가 새로 생성되도록 한다. 먹는 것이 그 사람을 구성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인식은 또는 정신은 정보로 구성된다. 정보들의 패턴과 반복을 통한 강화는 사람을 세계로 연결한다. 네트워크의 세계. 정보들의 패치워크는 천의무봉한 것이 아니다. 얼룩지고 뒤틀려져 있다. 그리고 인간은 끊임없이 정보의 네트워크에 자신을 연결하고, 받아들인 정보로서 자신의 의식, 인식, 감정과 행동까지 결정한다. 주체와 대상은 역전되었다. 인간은 스스로 정보를 판단하고, 파악하여, 취사선택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자기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정보들의 패치워크가 수용하는 패턴은 반복적으로 수용하여 자기를 재구성하고 확장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패턴은 거부하고 토해낸다. 그 사람이 수용하고 습득하는 정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문학이나 문화의 영역에서 조차 이런 정보의 원천을 고대로 이끌어가고 있다. 최근 김훈이 신화를 선택한 건 나에게 큰 실망이었다. 이문열도 신화와 삼국지를 선택한 후엔. 서브컬쳐의 세계에는 신화가 난무한다. 성경과 현실정치와 비대해진 자아를 제멋대로 이어붙인 패치워크는 네크워크에 넘쳐난다.
문제의 정리를 위해 여기서는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네트워크에 매몰된 존재라고 생각하는 입장을 ‘생태학적’이라고 칭하고, 그러한 유형무형의 관습으로부터 자유를 호소하는 입장, ‘무엇이든 된다’를 긍정하는 입장을 ‘미학적’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얼핏 보면 상반된 두 가지 견해는 실은 양립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소프트웨어의 생태계에 편입되어 그 지원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동물’(아즈마 히로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생태계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 또는 그 축적에 의해 장차 무엇이 생겨나는 가를 오늘날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도 없다. 우리가 시장의 생태계에 얽혀 있다는 것과, 전통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선택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 관습의 동물이라는 것과 우연의 동물이라는 것은 완전히 모순이다. 우리는 은신처shelter에 격리되어 있지만, 실은 끊임없이 미지의 병원균에 노출되어 있다.(228) 이해할 수 없더라도 배열할 수 있다는 것, 진리 추구에서 정합성=균형상태의 설정으로의 이행은 포스트모던적 프래그머티즘의 알기 쉬운 현상 중 하나다.(235) 네트워크 소비는 작가와 수용자 사이의 피드백을 확실하게 해준다. 팬은 ‘환상향’의 세계에 상당히 자유롭게 개인적 혹은 집단적 환상을 맡기고 2차적인 창작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단순히 캐릭터의 이름만을 빌려서 원작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창작물도 드물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는 동방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다. 그래서 그것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네트워크로서 사람들의 욕망을 수혈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동방은 네크워크 소비의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245) 육성의 마스킹이 선호되는 것은 딱히 서브컬처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다. 예를 들면,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오에 겐자부로나 나카가미 겐지와 같은 매우 독창적인 순문학 작가들마저 과거의 집단언어를 밑바탕으로 그에 다라 현재의 신화를 직조해냈다. 육성을 한 번 집단화(기호화)의 과정에 밀어넣어버리는 것, 즉 자기표상 능력을 한 번 발산하고, 자타를 구별할 필요가 없는 풍부성=상상력의 영역에 몸을 던지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표현의 자유로움을 획득할 수 있다. 이것이 일본 전후의 순문학의 발명이었다. 반대로 지금 순문학이 쇠퇴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된 것은 많은 순문학 작가들에게 어떠한 집단언어를 끌어낼 만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순문학에서는 ‘커먼센스’를 생성하는 문체(스타일)의 힘이 경시되고 신화를 그려내기가 어려워진 것이다.(254) 완전한 동물도 될 수 없고 완전한 기계도 될 수 없는 우리에게 문화라는 활동은 그것 자체가 일종의 대체행위다. 우리는 문화로 세계를 대신하게 만들고 불규칙이 발생하는 ‘사회의 죄’를 보상하게 한다. 근대라는 시대는 기독교적인 ‘원죄’의 관념에서 서양인을 서서히 분리시켰다. 그 대신에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는 것은 사회의 죄가 깊다는 새로운 유형의 신학적 발상이다. 그러나 사회의 죄는 완전히 말소할 수 없다.(284)
문자 그대로 병원균이 아니 바이러스에 전세계가 노출되어 신음하고 있다. 2020년은 전례없는 재앙의 한 해로 기록될 것 같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폭염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코로나19도 여전하다. 중국은 바이러스는 억제했지만, 폭우와 홍수로 신음하고 있다. 한국도 수해와 코로나 바이러스로 정신없이 휘말리고 있다. 미국과 유럽도 바이러스로 정신없지만, 그 와중에 산불, 낙뢰로 어지럽다. 기후위기의 시대가 이제 막 시작되어 앞으로는 주욱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트워크 사회에서 네트워크에 연결된 완전한 동물도 완전한 기계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네트워크에 완전히 먹혀버리지 않으려면, 네트워크에 대한 단속적 접근이라도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스위치는 끄고 켤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네트워크의 어떤 패치워크에 접근할 지, 그리고 접근장소와 영역을 어떻게 바꾸어갈지도 고민해야 한다. 아즈마 히로키의 말처럼 검색어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네트워크의 세계에 함몰되어, 네트워크에 완전히 포획당하고, 그 안에서 감정 자본을 생성하면서 네트워크를 작동시키고, 그 안에서 소비하다가. 그런 네트워크의 패치워크 조각들의 느슨한 연결사이로 뜻하지 않은 바이러스가 침투하여, 네트워크의 큰 덩어리로부터 끊어져 나가 표류하게 될 때, 그들은 자신들의 네트워크 안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 것이고 그것이 어떤 결말을 낳을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전광훈의 행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추종자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가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다. 고령층의 기저질환을 가진 바이러스 감염증에 가장 취약한 이들을 최소한의 보호장비도 없이 내몰았다. 그에게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도구나 이용대상에 불과했던 것일까.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을 이용대상으로 보는 자를 소시오패스라고 하지 않던가. 다른 사람을 자기를 위해 희생시킬 수 있는 자를 사이코패스라고 하지 않던가. 이미 위험에 빠진 추종자들을 위한 어떤 구조의 손길도 내밀지 않고. 그들을 계속해서 사회로부터 고립시켜서 라도 자기 정당성을 확인하려는 태도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짐 존스와 인민사원이 떠올랐다. 그건 물론 극단적인 사례지만. 종교, 이단, 정교분리와 같은 전통적인 근대적 사유의 도구로는 전광훈과 사랑제일교회 현상 내지는 사태를 파악하기 어렵지 않을까. 그런 식의 대응 외에는 딱히 쓸 수 있는 수단도 없을 테지만.
전광훈과 사랑제일교회 그리고 그 추종자들이 보이는 기행에 당황해 하던 사람들은 전광훈 뒤의 거대한 세력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 세력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세력과 전광훈의 관계를 조직도 그리듯이 그려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직접적인 연관성이나 협의 또는 지령을 내리는 장면을 찾기도 쉽지 않을테고. 일상적인 연락 같은 것이 없으리라고 보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거대한 정보의 네트워크, 그 거대한 메커니즘을 각자 자신의 감정을 동력으로 돌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이들 사이의 교환과 소비. 정보라는 대상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그 대상에 먹혀버려서 스스로 대상화된 사람들을 일목요연하게 가려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미 모두들 평행우주, 평행세계가 교차하는 세계 속에서 꿈꾸듯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020. 8. 22.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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