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얼마전 밤늦게 모임 하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한국방송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떤 출연자가 자기 인생 책 다섯 권을 소개하고 있었다. 푹하고 웃음이 나왔다. 인색 책이라니. 그런 걸 어떻게 고른단 말인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소개가 나왔다. 심상치 않았는데. 다음 책이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이었다. 그땐 옛날 책 제목을 말했는데. 정확한 건 기억이 안나지만, 전후 학생운동, 흔히 안보투쟁 세대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전공투는 68년이니까 그 이전이고. 아, 심상찮은 데. 좀 더 듣고 싶었지만, 어느새 차는 집에 도착했고, 나는 금새 그 일을 잊어버렸다. 두이노, 학생운동 같은 키워드만 남고. 책을 집어들어 읽다가 문득 인생 책 다섯 권 소개에 바로 그 책들이 실려 있는 걸 보았다. 아, 이 사람이구나.

그는 꽤 필명이 알려진 사람인 모양이지만, 여러모로 과문한 나는 이번에 그를 처음 알았다. 나는 신문이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칼럼을 그다지 많이 읽는 편도 아니고.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가 쓴 책들을 좀 읽어볼 생각이다. 그보다 그가 추천한 책들을 찾아서 읽어볼 참이다. 서평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정말 많은 책을 소개해 두었다. 편집자들과 출판사들이 정말 좋아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벌써 그의 책 내용을 광고 소재 삼아 책을 팔고들 있다.

그는 자신을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323)라고 규정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런 태도가 꽤나 마음에 든다. 주례사 비평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겠지. 그리고 칭찬할 만한 가치가 없는 책은 소개 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데. 그런데. 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 그렇게 칭찬에 인색해지다간 글도 인색해지고. 주변에서 좋은 평들으면서 먹고살기 어려울 텐데. 책의 오분의 사쯤 읽었을 때, 등장한 이 “정확한 칭찬”이란 주장은 실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정확한”, “칭찬”이 좀 많다. 그렇게 칭찬할 것이 많은 세상이던가. 어쨌거나 그런 세상이라니 좋구나.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手稿』(1844)를 인용해 돈이 비틀어 좋지 않은 인간관계의 교환을 말하는 부분에선 감탄이 나왔다. 눈을 비비면서 누렇게 변색된 마르크스의 책을 다시 들춰보아야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인간이 인간일 때,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인간적인 것일 때, 그럴 때 당신은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오직 신뢰와만 교환할 수 있다. 당신이 예술을 향유하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예술적인 소양을 쌓은 인간이어야 한다.”(344-345) 사랑은 사랑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 그리고 여기에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1943) “사람들은 이제 시간이 없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게 되었어. 상점에 가서 다 만들어진 물건들을 사는 거야. 하지만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으니까 사람등은 이제 친구가 없어.”(346-347) 백년이 조금 못된 구십구년 만에 달린 생텍쥐페리의 주석이랄까. 마르크스가 왜곡되지 않은 또는 해방된 세상을 증여로 보지 않고, 교환으로 본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김현의 『한국문확의 위상』을 인용해서 말한다. “잘 팔리는 대중물이란 그러므로 미리 주어진 해답을 갖고 있으면서도 문제를 제시하는 척하는 나쁜 놀이이다.”(394) 신형철은 오로지 대중들의 즐거움을 위해 만들었다고 겸손하게 소개되는 작품이야 말로 대중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는 대중을 은밀하게 무시하는 작품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복잡하고 심오한 내용과 형식을 동원하는 쪽이 대중이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진지하게 말을 건네는 작품이라고 홍상수를 옹호한다.(395-396) 뭐 그렇기도 하다. 나도 한때 홍상수의 영화들을 좋아해서 나오는 족족 보러다녔지만, 어느새 앞의 작품을 끝없이 자기복제하는 그에게 식상해져서 그만 관심을 끊고 말았다. 가장 최근에는 서교동의 어느 중국집에 붙어있던 그의 사인을 보았던가. 그의 작품은 처음에는 신선했고, 나의 속물적 치기를 충족시켜 주었지만, 어느새 내 목구멍 가득 구역질을 불러일으켜올만큼 찌질한 남자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헤어질 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같이 자자는 남자. 어느새 아직도 그 속에서 맴돌고 있는 이들을 더 이상 보아주기 어려운 마음이 되었다. 그 자신 정확한 칭찬만 하고 싶다고 한 것처럼. 복잡하고 심오하면 다 예술인 걸까. 롤랑 바르트였던지, 보들레르 였던지 예술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던가. 이름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작고한 황현산이 자신이 쓰거나 옮긴 책을 번역할 때, 메모지에 서명을 해서 준다는 이야기(356)는 역시나 그런가 하는 느낌이었다. 작고한 김윤식도 그런다고 하지 않던가. 책을 내다 팔거나 버릴 때, 수월하라는 것이겠지. 고작 번역서 한 권을 가진 내가 그런 호기를 부리는 것도 우습겠지만. 책에 서명 따위를 하지는 말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마다 사는 법은 다르지만. 그는 황현산의 글 만을 말했지만, 황현산의 큰 기여는 사실 번역이다.

책의 앞부분에 모아 둔 슬픔에 대한 글들이 좋다.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의 『슬픔의 위안』을 냉큼 주문했다. 몇 군데 소개한 것만 봐도 마음에 꼭 든다. 슬픔에 빠져 있지 말고 외출도 하고 사람도 만나라는 헛소리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쉬고, 필요하면 수면제도 먹으라는 말. 수면제 대신 캐머마일 마시라는 말 따윈 무시하라고, 함께 기도해주겠다는 사람에겐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나 좀 해주시겠어요?”라는 구절을 인용하는 데선 박장대소 했다.(39-40) 나는 기독교 공동체에 이렇게 저렇게 속해 있는 터라 이런 말을 정말 많이 듣는다만. 시간이라는 이름의 생명 일부를 내어 같이 있어 줄 요량이 아니면 닥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딘가에서 이런 말도 했는데. 쪽수를 못찾겠다. 광주를 오며가며 읽은 부분이 많아서.

영화평도 재미있다. 김성훈의 『터널』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도 똑같이 생각했다.(42) 터널 사고를 당한 주인공이 다시 터널을 지나가다니 이건 판타지라고. 아내와 함께 속삭인 기억이 난다. 그런 판타지가 아주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김현은 대중물의 뻔한 결말을 비판했지만, 예를 들면 흔한 수사물 특히 한 회에 사건의 발생에서 해결 또는 결말까지 모두 끝나는 미드나 일드를 보는데도 이유가 있다. 대략 45분만에 세계는 완결된다. 007도 마찬가지다. 나는 젊은 날 007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 한 여인을 마음 속으로 비웃었는데, 이제는 내가 젊은 날 얼마나 스노비즘으로 물들서 가벼웠는지 알겠다. 나도 삶에서 지쳐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는 배배 꼬아서 무엇인가 다른 것을 보여주려는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비추려는 이야기를 보거나 듣지 않는다. 차라리 45분짜리 경박한 위로를 선택한다. 뻔한 결말에서 따뜻함을 느낀다. 삶에는 어딘가 그런 구석도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공감에도 거기 반응하는데도 에너지가 필요하다.(39) 아무런 에너지를 요구하지 않는 편이 좋을 때도 있다. 차라리 잠을 자라고, 잠을 자기 힘들만큼 피곤하고 지칠 때도 있는 법이다.

모임에서 민용근 감독의 영화 『혜화, 동』에 대한 평 ‘슬픔의 불균형에 대하여’를 읽어주었다.(45-57) 길지만 아름다운 글이었다. 영화는 보지 않아 알 수 없었으나 글만으로도 아름다웠다. 음식을 앞에 두고도 긴 글을 읽어나갈 만큼. 그러나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 모임에 참석한 몇몇 젊은 여성들은 동의하지 못했다. 그녀들은 무책임하고 미성숙한 남자에게 버림받은 후, 자신이 낳은 아이 마저 두 번에 걸쳐 버려야 했던 여인의 슬픔이 군대에서 얻은 불의의 사고로 인한 장애로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했다. 앞에 인용한 손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말하는 사랑의 불균형,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에는 모두 동의했지만. 그러나 그런 슬픔에는 어떤 식으로든 균형 따윈 불가능하다. 불균형을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균형의 논리. 현실에서 한 번 무책임했던 남자는 대개 평생 무책임하다 어떤 계기로 책임에 대해 배울 수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나는 여성들의 이런 뜨악한 반응이 동의하는 척 했지만, 마음 속으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며칠 간 담겨 있던 의문은 여전히 이 영화가 가진 남성의 시선을 발견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평론에서도 그런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 것이 마음 속으로 깨달아질 즈음, 홍상수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선 역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건 누가 나쁘다라기 보다 그냥 그런 거다. 어떤 인식하는 방법의 틀 같은 것. 요즘은 60년대 명작영화를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때 저렇게 여성들을 험하게 다루었던가. 화면이 이렇다면, 또 현실은. 아무리 그런다해도 동시대 여성들의 감수성을 공유할 수 없는 꼰대로서의 나는.

책을 덮으면서 몇 가지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의 글을 좀 더 읽어봐야 겠다. 그의 글은 권할 만하다. 이 사람이 추천하는 책들을 좀 골라서 읽어봐야 겠다. 그런데, 이 사람은 글을 좀 너무 많이 쓰는 것이 아닐까. 뒤로 갈수록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기분이었다. 아니다 이런 말도 지나치게 성급한 일. 그의 말처럼 세 번은 아니 세 권은 보아야.

며칠 전에도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들었다. 자동차 여행은 독서의 적이라는 가토 슈이치의 말은 정말 옳았다. 꽤 유명한 사람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다가 문장이 좋은 사람으로 유명한 어떤 작가를 꼽는 대목에서 라디오를 껐다. 마음 속으로 문득 든 생각을 아내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책을 안읽어.” 정답만 말하고 싶거나. 나도 한동안 아니 꽤 오래 그리 말하고 다녔다. 지금은 좀 다르다. 나에게 가장 좋은 작가는 미셸 푸코다. 그의 책을 번역서로 읽기에 한계가 있더라도 상관없다. 마루야마 마사오도 나에게 가르침을 준다.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기 어려운 역사가들은 언제나 나의 스승들이며, 책의 첫 쪽에서 마지막 쪽까지 내 생각을 새롭게 하는 사람이라야 좋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전적으로 나만의 주관적인 기준이지만. 내 기준으로 신형철을 좋은 작가 또는 평론가라고 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의 글은 꽤 좋다. 많은 걸 알려준다.

2018. 12. 27.

* 이 글의 저작권은 ⓒFELIVIEW.COM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FELIVIEW
FELIVIEW
felixwon.lee@gmail.com

Must Read

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7-1).

0
튜더 왕가의 가계도. 앞쪽에서는 아담과 이브로부터의 기원과 노아의 방주도 등장한다. 중간에 리처드 3세에서 단절이 있고, 그 아래로 헨리 8세가 이어진다. British Library, Kings MS 395, fols. 32v-33r. Ernst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