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레이 워커, 『다이어트랜드』.

서레이 워커Sarai Walker, 『다이어트랜드Dietland』, 이은선 역, 문학동네, 2018(2015).

시간을 때우려고 미드를 뒤적거리다가 흥미로운 제목을 하나 발견했다. 「다이어트랜드」. 어떤 설명도 없었다. 뚱뚱한 여자가 심지에 불이붙은 컵케이크를 던지는 포스터가 인상적이길래 틀어서 5분쯤 보다가 그냥 껐다. 아내와 함께 보려고, 재미있고 인상적인 건 함께 봐야 이야기가 된다. 여튼 요즘 미드를 보다보면 미국이 뭐랄까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극으로 치달아가는 느낌이 드는데. 「다이어트랜드」도 그 한 결정판이랄까.

여자들을 성폭행하고, 죽이고, 학대하던 남자를 여자들이 공격해서 죽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문자 그대로 죽인다. 발견된 시체의 목구멍에서 쪽지가 발견된다. 제니퍼. 그런 남자들을 자루에 담아서 그냥 고속도로에서 던져 두어서 치어서 죽게도 하고. 문득 어제 집에 오던 길에 본 고양이 두 마리가 생각난다. 하나는 방금 치어죽었는지. 아직 뭉개지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고. 다른 하나는 사거리를 놀라움 솜씨로 뛰어서 건넜다. 그렇지만 그 아이 운명이 좋아보이진 않았는데. 여튼 길에서 고양이나 비둘기가 치어죽듯이 치어죽는다. 또 산 채로 그 남자들을 비행기에서 떨어뜨려 죽인다. 문자 그대로 난리가 난달까. 모두들 제니퍼, 제니퍼 하고 떠들어대는. AMC에서 얼마전에 시작한 드라마다.

1~2화가 나오고 3화 자막이 나오길 기다릴 때쯤, 혜화역 시위가 격렬해졌고, 메겔이나 워마드에서 나온 자극적인 이미지들이 인터넷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뭔가 답답해졌다. 그런게 도덕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이라거나 장래의 우군이 될 사람들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그런 점잖은 충고를 할 양으로 답답한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원적 인식의 답답함이 느껴졌지만, 나에겐 언어도 없었고, 시선도 없었고, 상상력도 필요했다. 게다가 마초에 기껏해야 온건한 휴머니스트가 한계인 내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도 없는 일. 나는 여자가 아니고 여자들처럼 박해를 받지 않았기에, 여자들의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 공감하려 노력하고,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다. 그렇다고 내가 분노가 없는게 아니라 나는 다른 데서 분노를 가진다. 뭐 여튼. 3회를 보다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7회까지 방영된 모양이었다. 원작은 소설이라는데 하면서 검색해보니 의외로 2주쯤 전에 번역이 나와있었고, 냉큼 사서 읽었다. 재미있다. 엄청 재미있는데. 진도가 팍팍 나가지는 않았다. 그게 아주 본질적인 어려움인데. 읽으면서 입 속으로 반복하면서 되뇌었다. 이게 한계일까. 이렇게 진도가 느려지는 게 한계일까라고 망설이면서. 그런데 또 놀라운건, 이 책 판매지수가 엄청낮다는 거다. 혜화역에서 6만명이 모일 정도면, 10만부 정도는 팔려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문학동네가 홍보를 조심스럽게 하고 있는건지.

소설은 두 가지 이야기를 따로 전개하는데. 하나는 앞에서 말한, 성폭행을 일삼고, 때론 여자들을 죽이기도 하고, 조롱하고, 법정에서 부인하고, 시스템의 보호를 받는 남자들을 위협하고, 협박하고, 죽이기도 하는 복수극이야기하고 플럼이라는 알리샤의 이야기가 병행하면서 이어져 나간다. 나중에 결국 연결은 되는데. 여튼 약간은 스릴러이기도 한 이 소설을 스포일할 생각은 없으니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시라. 플럼은 재능은 있지만, 자신감을 잃은 그런 여자다 막 30이 되려고 하는. 그녀는 ‘뚱뚱한’ 여자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는 유전적이다. 엄마는 날씬하지만 할머니는 뚱뚱한. 게다가 어려서부터 다이어트를 반복해서 실패한 다이어트에 따르는 요요라고 할까 폭식이라고 할까. 더 뚱뚱해져 버렸다. 그리고는 날씬한 십대 소녀를 위한 여성지 편집장을 대신해서 소녀들의 자해, 성, 가족 문제에 대한 이메일 상담에 답변을 쓰는 일로 먹고 산다. 어둠에서 자기 이름이 없이. 그녀는 누가 자신을 뚱뚱하다고 비난하거나 조롱해도 개의치 않는 태도를 보인다. 쿨하게 자기 일만 하는 모습이랄까. 실은 그건 극도로 억눌린 모습인데.

그녀의 분노를 억누른 건 Y였다. 이 드라마 자막이 돌아다니는데. Take the Y나 on the Y를 YMCA에 가다로 번역하는데. 그건 틀렸다. 소설에는 제대로다. Y란 이 책에서 항우울제의 이름이다. 인터넷을 좀 뒤져보니 여러 사람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많이 사용되는 항우울제에는 프로작, 자낙스, 졸로프트 등이 있다. 이것 말고도 많지만. 졸로프트를 흔히 Z라고 표시하고, 자낙스를 X라고 표시한다고 한다. Y라는 이름의 약은 없지만. 뭐 강력하고 쎈 항우울제를 그려낸 모양이다. 그리고 플럼은 베레나를 만난 후 Y를 끊게 된다. Y를 끊는 장면을 드라마는 정말 실감나게 묘사한다. 환각과 불안, 욕망과 폭주 그리고 분노. Y를 끊고 나자 자신이 Y로 억눌러 왔던 것이 바로 분노라는 것을 깨닫고 분노를 터뜨리기 시작한다.

Y란 그래서 적지 않는 상징인데. 플럼은 뷰티 산업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간다. 뷰티산업은 여성을 소비하고 여성성을 상품화하는 산업이다. 성상품화라는 점에서 포르노와 뷰티 산업 그리고 다이어트 산업은 일맥상통한다. 이 세 산업은 모두 여성을 수동적으로 대상화는 타자를 만들어내고, 여성이 자기를 스스토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는 것에 기반해서 존재한다. 양극단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논리에 기반한 산업이다. Y를 끊는 것은 플럼에겐 분노와 직면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과 직면하는 것이기도 하다.

“약을 먹기 시작하자 슬픔이 사라지고 다른 감정이 그 자리를 메웠다-행복이라기보다는 나지막한 웅웅거림에 가까운, 볼륨을 조절할 수 없는 약한 무선주파수 같은 심정이었다.”(17)

플럼은 대학 시절 남자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은 후 우울증이 폭발하자 Y를 복용하기 시작해서 10년가까이 Y를 복용한다. 항우울제의 효능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자. 항우울제를 복용함으로써 플럼은 살아갈 수 있었다. 플럼이 뚱뚱하다고 길에서 휘파람을 불고 비아냥거리고 놀리는 남자들을 쿨한 척 피할 수 있었던 것은 Y의 효과였다. 뷰티산업에서도 플럼은 설자리는 없었다. 뚱뚱하고 약을 먹는 인생의 실패자가 그럴 듯한 상담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플럼은 재택근무라는 이름으로 있어도 없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플럼은 리타의 표현처럼 매일 장례식에 가는 것 같은 펑퍼짐한 검은 옷을 입고서, 극단적으로 맛이 없고 영양도 형편 없는 다이어트 음식을 먹으면서, 거의 굶으면서도 죽지 않고 견딜 수 있었는데. 그건 항우울제 덕분이었다.

항우울제란 어떤 의미에서 단순한 약을 넘어서서 여성을 여성화하는 하나의 기제이고, 타자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자는 만들어진다는 보부아르의 유명한 이야기를 되뇔 필요도 없이. 날렵한 몸매와 멋진 모습을 하던 하지 않던, 사회 시스템이 여자에게 요구하는 어떤 요소들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때, 그 사회 시스템 안에서 존속가능해진다. 여자에게 요구하는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에서 플럼은 우울증 약으로 자신을 속이면서 연명한 셈이다. 그러므로 플럼이 그 약을 끊는 것은 시스템을 거부하고, 자기와 직면하겠다는 이야기이고, 목숨을 건 투쟁을 하겠다는 이야기가 된다. 플럼의 경우에 진실은 자기의 분노와 직면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분노에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분노하는 것.

그래서 나는 두 항공사 직원들의 가면 시위가 여기 겹쳐지는 것이다. 나는 가면을 벋고 불이익을 감당하면서 시위에 나서라고 충고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그러나 익명으로 이루어지는 단톡방, 가면을 쓰고 이루어지는 시위. 시위가 끝나고 나면, 자기 동료가 참석했는지 여부를 은근슬쩍 타진하면서 확인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그 중 한 두명이 인사상 불이익을 당해 지방으로 발령이 나면, 모두가 서로를 의심한다. 누가 밀고자인가. 연대는 형성되지 못하고 곧 부서진다. 회장님을 외치면서 울고 달려가 안기지 않으면 다닐 수 없는 직장이라면 적어도 그 순간에 당하는 사람은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얼마나 어렵게 들어간 직장이고, 얼마나 어려운지는 물론 안다만. 그렇다고 그걸 참으면 안된다. 물론 그 잘못된 것을 고치고, 책임질 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그게 오늘 당장 오지 않는 한, 그런 일을 통해 부서지는 건 당하는 자기자신 뿐이다. 가면을 쓰고 시위에 나선다는 건, 시스템 바깥으로 벗어나서 시스템을 때려부술 생각까지는 없고, 시스템에서 부조리만 좀 없애고, 시스템을 공정하게 만 돌리면 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근데 그게 될까. 불합리와 부조리란 시스템의 일부인 경우가 많다. 시스템을 교정하는 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면서, 성과는 아주 더딘 일이다. 그렇다고 시스템 교정을 포기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구제불능이라고 생각되는 시스템은 그냥 버려야 한다. 그리고 바깥에서 때려부술 때, 오히려 고쳐질 가능성이 높다. 대체로 유지하면서 요것만 딱 고치고 싶겠지만. 그렇게 안된다. 그동안에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선 항우울제를 과감하게 끊어버릴 필요가 있다. 그건 꼭 먹고 있는 약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약말고도 여러가지를 꾸역꾸역 먹어가면서 버티면서 살고 있으니까.

플럼에게 갑작스레 나타나 항우울제를 끊으라고 한 베레나의 부모는 다이어트 비지니스를 했다. 그건 한 마디로 사기였지만. 베레나는 부모가 죽자마자 다이어트 사업을 중단한 후 페미니스트 운동을 하고 있다. 부모의 유산을 페미니스트 운동에 쓰는 셈. 그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플럼도 고등학생 때 했었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그냥 평범하고 싶어서. 운동을 하고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열량도 없고, 영양가도 맛도 없는 쓰레기를 먹는다. 살이 빠지고 싶은 일념으로. 그건 일종의 거대한 사기 프로그램인데. 성공할 수밖에 없는 사기였다.

그 사기 프로그램의 이름을 뱁티스트라고 하는데. 옆에서 아내가 나를 툭쳤다. 실제 미국에서 유래한 종교기관과 결탁된 금욕을 요구하는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많고 성행한다고 한다. 역시 나는 모르는 세계다. 소설에선 침례교와는 관계가 없지만. 한 마디로 뚱뚱한 자는 죄인이다. 그는 회개하고 모든 죄와 악을 떠나야 한다. 그것 말할 것도 없이 음식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뚱뚱함의 원인은 자신임을 즉 모든 것은 자기 죄의 결과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가 음식에 손을 대서 다시 뚱뚱해 질지라고 욕망을 이겨내지 못한 본인의 책임이므로 이 프로그램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다이어트는 일종의 성화다. 사람은 성화에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다. 프로그램은 잘못이 없다. 실패한 너의 잘못일 뿐.

“뱁티스트 생활을 시작한 첫 주에는 에너지와 의지가 넘쳤다. 클리닉에서는 식사하는 사람들을, 나이프와 포크를 든 폭도들을 피할고 했지만, 음식점에서 일을 하는 마당에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씹고 뜯는 행위로 이러우진 엽기적인 세상에서 초월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뭔가를 먹는 사람들을 보면 구역질이 났다.”(81)

뷰티 산업과 다이어트 산업 대표적으로 여자를 희생자이자 먹이감으로 삼는 이 산업은 공통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소비자를 죄인으로 취급하면서 끊임없이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 산업의 소비자가 소비자가 된 것은 모두 자신의 죄 때문이며, 이 산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먹이가 되어서 돈을 가져다 바치고 있는 것 역시도 자신의 죄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그 회개가 충분하지 못하여서, 옛 습관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달콤한 케이크에 손을 대거나 관리를 소홀히 하면 재앙이 닥치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려면 이전 보다 더 큰 회개가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이 시스템에 성인병을 앓는 뚱뚱한 남자인 나도 종종 희생자가 되고 있군.

“너는 죄인이다”, “아, 나는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그 죄책감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이 사회 시스템 전체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다. 누구는 여자인 것이 죄이고, 누구는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이 죄이며, 누구는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이 죄이고, 누구는 부모가 돈이 없는 것이 죄이며, 누구는 못생기고 살찐 것이 죄다. 모든 것은 자기의 죄 때문이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 자신의 죄로 인한 결과인 한 분노할 자격이 없다. 약으로라도 분노를 억눌러랴 이 세상을 하루라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죄인이라는 건 누가 나에게 말해주지 않아도 잘알고 있다. 내가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건 늘 알고 있다. 그러니 내 앞에 손가락질을 하면서 너는 죄인이라도 소리지르지 않아도 된다. 나한테 슬쩍 문자를 보내서 죄를 깨우쳐주지 않아도 되고, 죄를 인정하고 무릎꿇고 회개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사회는 내가 죄인이라는 점을 시시각각 다각도로 일깨워주는 동시에 그것만으로 부족해서인지 굴복을 요구한다. 무릎을 꿇고 죄인임을 인정하라고 외친다. 그런 외침과 강요에 한 번 굴복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 내 죄가 아닌 것도 내 잘못이 아닌 것도 내 죄로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처벌을 감수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속죄양도 아닌데 말이지.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원님재판은 이제 좀 지겹지 않나.

“여자들은 나처럼 되고 싶어하지 않고, 남자들은 나와 떡치고 싶어하지 않는다.”(200) 플럼이 만난 말로의 몸에 새겨져 있는 문신이다. 한때 시트콤의 주인공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배우 말로가 머리를 자르자 NBC 경영진 중 한 명이 프로그램 제작이 취소를 통보하면서 한 말이다. 말로는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떡치기 지수 이론』이란 책을 쓴다. 왜 이 책에 나오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석사, 박사일까. 그게 좀 씁쓸한 느낌이 모두들 공부를 했고, 공부를하고 싶어한다. 여튼 플럼은 변신을 해야하는데. 그 변신 과정이란 플럼의 떡치기 지수를 높이는 일이다. 한 마디로 플럼을 떡치고 싶은 여자로 바꾸는 과정이라는데. 실은 그것은 플럼이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인정받고 싶었는지. 그리고 그걸 남자들은 어떻게 이용해 왔는지. 그리고 이 문제를 어떻게 넘어서 나아가야 하는지 보여주는 실마리다.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나 플럼이 선택할 문제였다. 선택당하는 것이 아니라. 여튼 흥미롭게도 이 소설에서는 플럼과 진지한 동지애를 수립하는 단 한 사람의 남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드라마는 그게 아쉬웠는지 한 사람을 남자로 바꾸었지만.

플럼이 칼리오페 하우스에서 접하는 또 하나의 변화과정에는 24시간 포르노를 틀어대는 방이 있다. 그 방에는 사방에 여러개의 화면이 있어서 24시간 포르노가 나온다. 그리고 누워도 볼 수 있도록 천장에서도 포르노가 나온다. 포르노허브USA를 연결해 놓고 틀어대는 거다. 그 곳은 처음에는 불편하고 괴로운 곳이지만, 이내 분노를 확인하고, 실탄을 재장전 하는 장이된다. 여자가 성의 상품화를 벗어나려면 이중적인 성의 상품화를 모두 벗어나야 한다. 그중 하나가 포르노와 매매춘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성상품화이고, 또 하나는 뷰티 산업과 다이어트 산업이라는 여자가 자기자신을 스스로 산업의 대상으로 상품화하는 성상품화이다. 이 둘은 서로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어떤 점에서 이 소설은 지나치게 솔직하다.

“베이킹에는 회복의 힘이 있었다. 보석 같은 베리류와 포크로 찔러서 터뜨린 달걀노른자의 노란 빛깔을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졌고, 부드러운 밀가루에 손을 얹을 때와, 연두빛 사과의 흰 속살을 가르면 손가락 사이로 과즙이 흐를 때의 느낌도 좋았다.”(306) 플럼은 어린 시절의 행복한 한 때에 익힌 베이킹 그리고 다이어트를 하는 동안은 만악의 근원이었던 베이킹으로 되돌아간다. 표준 체중을 적잖게 초과하는 나로서도 밀가루는 항상 첫째가는 금기사항이다. 그런데 나는 빵을 너무 좋아한다. 어려서 부터 그렇게 빵을 좋아했다. 그리고 면류도 종류를 가리지 않고 탐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어쩔 도리 없는 죄인이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큰 위로를 받았다. 베이킹을 배워볼까.

“나는 독기 어린 눈빛의 달인이 되었고, 뭘 그렇게 눈깔 빠져라 보는네? 라고 대응하는 수법을 애용했고, 어떨 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썅, 뭘 그렇게 눈깔 빠져라 보는데? 라고 했다. 그들과의 만남이 점점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맞받아치면 사람들은 내가 대응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 것 같았고 시비를 걸지 않았다.”(346) 때로 분노는 쏟아내어야 한다. 분노를 쏟아내는 장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쓸 필요는 없다. 가면을 써서도 안된다. 그게 바로 온라인 익명의 커뮤니티가 가진 한계다. 분노는 나에게 그 분노를 불러일으킨 바로 그 구체적인 대상에게 직접적으로 쏟아내야 한다. 허공에 대고 소리치면 분이 풀리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그때 뿐이다. 분노를 내지르는 대상으로부터 받게 될 위협이나 반격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그 분노를 쏟아냄으로써 내가 얻을 수 있는 회복의 힘은 충분히 얻지 못한다. 익명의 공간에서 쏟는 분노는 지하로 깊이 파고들 뿐이다. 그래서 자꾸만 자극적이 되어가면서 그걸 또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논리를 동원하게 된다. 면전에서 눈을 흘기고, 욕을 하고, 싸대기를 날려야 정신을 차려도 차리는 법이고. 무엇보다 분노하는 나 자신에게 훨씬 좋다. 그런 분노는 자신에게 힘이 된다. 물론 댓가도 따른다만, 내 경우엔 아깝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여자들이 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꼰대소리란다. 아내는 보통 무조건 내편인데, 어딜가서 그런소리 하지말란 말이겠지. 우리가 초등학교 때로 고개를 돌려보면, 까부는 남자애들 둘셋 정도 쉽게 때려눕히는 여자애는 어딜가나 있었다. 2차 성징이 생기면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남자들의 힘이 세지는 것도 물론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면서 길들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여자가 어떻고, 남자가 어떻고. 그리고 그게 모두 여성혐오로 이어져서, 사회가 여자들에게 이렇게 공격적인데. 여자들은 좀 더 강해지고, 더 불량해질 필요가 있다. 그게 싫을지는 모르지만. 어두운 골목길에서 남자를 만나거나 하면 그냥 얼어붙는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그건 사실일꺼다. 나도 어두운 곳에서 일대일로 남자든 여자든 만나면 무섭다. 그래서 사람은 육체를 단련해야 한다. 육체를 단련하면, 상대를 때려눕히진 못해도, 덜 무서워진다. 재빨리 판단하고, 도망갈 힘도 생긴다. 어차피 모두 피할 수 없는 거라면. 남자들이 원하는 대로 이끌려 가거나 피하면서 몸 사리고 살게 아니라면. 키보드를 아무리 두드려도 남자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끄러워지면 신경은 쓴다. 신경쓰는 정도의 변화는 있었다. 그러나 분노한 여자들이 그 변화를 느낄 만큼은 아니었다. 그건 여자들의 분노가 남자들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해서다. 책에는 없지만 드라마에만 나오는 키티의 대사가 있다. “They won’t stop until they’ve freed woman from oppression once and for all. And that’s never gonna happen. Men would rather destroy the world than let us rule it.”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지배권을 넘기느니 차라리 이 세상을 때려부술 것이라는 이 대사를 나에게 전해 들은 여자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혜화역 집회에 대한 소식이 전해질수록 나는 답답한 기분이 든다. 뭐랄까 그런 시위가 부적당하다는 것도 아니고, 맘에 들지는 않는 몇몇 구호 때문에 그런 집회를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단일 의제로 6만명이 모인 건 한국 여성운동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던가. 그만큼 여자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모두들 혐오표현에 너무 둔감해진게 아닌가도 싶다만. 그럼에도 답답한 느낌은 가시지 않는다. 전해지는 구호들은 한결같이 ‘공권력이 정당하게 사용되어야 하고, 여자들은 공권력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렇다. 그 말은 한 마디도, 틀린게 없다.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당연한 권리와 요구다. 그런데 아마도 그런 변화는 생각보다 훨씬 더디게 움직일꺼다. 남자중심사회, 남자가 지배하는 사회가 운영하는 공권력이 여자들이 원하는 만큼의 보호를 제공해줄까,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리고, 어떤 과제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당하고 당연한 권리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그만큼의 변화도 여자들의 힘만으로는 오지 않고, 남자들의 지원을 받아야한다. 그리고 그런 법질서는 여자들이 충분히 분노할 만큼 가해자인 남자들의 인권과 권리도 보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치사하고 더럽겠지만 그게 또 시스템이니까. 시스템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싸움. 공정한 시스템을 요구하는 싸움. 그리고 각자의 일상에서 당하는 문제와의 싸움. 이 세 가지 차원은 결국 각기 따로 움직이면서 동시에 전개되지 않으면 안된다. 스스로 해결하려고 나서지 않으면, 변화는 한 없이 더딜 것이다. 남자들이 두려워할 정도가 되지 않으면.

소설에는 페니스 블랙리스트라는게 등장한다. 제니퍼 현상도 퍼져나간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명문대학에서 남학생회 회원들이 “싫다는 말은 좋다는 뜻, 좋다는 말은 뒤로 하자는 뜻!”이라고 외치면서 여학생 기숙사 앞을 행진하자. 여학생들이 징계 위원회에 회부하는 대신, 남학생 회관을 때려부수고 유리창을 박살낸 다음 불을 질러 버렸다는 이야기다. 그리곤 남학생회 회원들을 페니스 블랙리스트에 올려버린다.(343)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던 타자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보편의 길을 택하느냐 복고의 길을 택하느냐. 탈식민 담론이 항상 직면하는 위험이다. 보편의 길을 택해서 제국의 식민자의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스스로를 다시 타자화하느냐, 아니면 전통이라는 환상 속에 안주해 버리든가. 이것도 자기 타자화의 길이다. 인도 타밀 지역에서 있었다는 식민통치 이전의 전통사회로 복귀 같은 것 말이다. 페미니즘 운동도 이런 복고적인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생물학적 여성에 집착한다면. 가족과 모성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지는 않을까. 간통죄를 폐지하면 여성들이 보호받지 못한다고, 여성운동이 반대했던 것처럼. 그럴리 없다고들 말하지만, 여성성에 대한 강조는 어느새 익숙한 길로 이끌지도 모른다. 불편함을 무릎쓰고 자기의 언어로 보편을 흡수해서 새로운 보편을 제시하지 않으면, 스스로 타자화하는 길을 걷게 된다. 언제나 그렇다. 그리고 거기에는 해방이 없을 것이다.

2018. 7. 13.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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