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호·하지현, 『공부 중독』.

6341171808995539264176 신대원 다니던 시절 기숙사 책상 사진, 이 정도면 공부 중독인 건가.

엄기호·하지현, 『공부 중독』, 위고, 2015.

십여년전 친하게 지내던 선배 한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학원사업이 최고니 학원을 차려보자. “대리로 승진하기”나 “직장상사와 대화하기” 같은 과정을 만들어서, 엄마들을 대상으로 팔면 대박칠 것이다라는 농담이었다. 어느새 면접 컨설팅을 하더니 이젠 연애 코치까지 등장하는 걸 보면, 그때 생각이 맞았던 거다. 요즘 같으면, “아재 파탈 부장 되기”과정을 만들면 대박이지 싶다. 어쨌거나 학원화는 똑같은 셈. 직장생활이 서툰 신입에게 늘 하던 핀잔이, “회사가 학교냐!”가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교회도 학원이었다. 제자훈련부터, 아버지학교, 중보기도학교, 선교학교, 무슨 무슨 프로그램 등. 뭔 놈의 학교가 그리 많은지, 고작 주1회 두어달 모이면 졸업이니 좋다. 매번 수료증도 발급하고, 약간의 회비도 걷는다. 꼭 학원이다. 『공부 중독』에서도 이반 일리치를 인용해서 ‘학교화된 사회schooling society’라는 표현을 쓰는데, 난 늘 교회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기에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엄기호와 하지현의 대담집 『공부 중독』은 손에 잡고 앉은 자리에서 읽을 수 있는 소품이지만 흥미로운 부분도 적지 않다.

하지현이 소개한 ‘디투어링detouring’을 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5만5천원으로 닷새 동안 모든 기차를 이용할 수 있는 내일로가 나온 후, 인터넷에 족보가 떴다고 한다. 어기서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자고, 어디서 무엇을 먹고, 어디서 샤워하고, 그리고는 더 빨리, 더 정확하게 경쟁이랄까. 헌데, 이런 일은 지금 처음일까? 유럽배낭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유레일 패스 기간에 맞춰, 찍고 돌아가는 여행. 여행 소개책자, 여행사와 인터넷에서 이미. 게다가 게임도 보면, 공략집이라는 것이 있고, 스타크래프트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은 빌드 오더가 돌아다닌다. 이런 의존성과 복제는 오래된 일이었다.

‘오버퀄리파잉overqualifying’. 흔히 쓸데 없는 고퀄이라고 한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모두가 스펙을 위해 노력하는 사회. 한 사람 몫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자꾸 미루기만 하는 사회. 실패에 대한 두려움. 486 혹은 586 세대의 성공경험. 표준화된 성공 모델이 가져오는 강박 모두 그럴듯한 이야기다. 표피적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인문학 강의를 소비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도 꽤나 적절했다. 나도 간혹 강의하면서 느끼지만, 강의를 듣고 무엇인가 배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안타깝다. 어떻게든 책을 직접 읽도록 유도하고 싶은데, 잘 되지않는다. 삶이 바쁜 탓도 있겠고, 지금까지 스스로 책을 읽고 공부하지 않은 탓도 있다. 늘 누군가가 잘 정리해 준 것을 받아먹다 보면, 평생 남이 해주는 밥을 사먹어야 한다. 시는 써야 시고, 책은 읽어야 책인데. 공부도 스스로 해야 공부고. 강연이 공부를 대체할 수 없다. 때론 관람에 불과하다.

언제나 재기발랄한 엄기호는 공부에 의한 식민지화, 공부가 삶을 식민지화한다고 말했다. 일견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실은 아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했지, 영어가 영국인이 세운 학교가 인도를 식민지화한 것은 아니다. 도구와 주체를 혼종하면 안된다. 일견 공부가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는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부라는 수단은 자본주의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이며, 공부를 열심히 하는 품행이 방정한 이들에게 자본주의는 댓가를 제공한다. 이 댓가에 심취해서, 공부가 단순한 도구임을 잊어도 문제지만, 공부가 사람에 대한 식민화의 주체로 과대평가해서, 공부를 극복하고 다른 경쟁의 수단을 택한다고 해서, 식민화를 벗어날 수 있지 않다. 대담자들이 제시하는 유럽과 일본의 표준 트랙을 벗어난 다양한 경로도 역시 마찬가지로 역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삶을 살아가기 의한 다원화된 경쟁에 불과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어떤 방식으로든 구성원을 대상화시킬 수 있다. 그 자신이 경쟁을 거부하고, 벗어나지 않는 한. 그런데, 이 살아가는 한 그럴 수 있을까?

서울 근처의 경기도 변두리와 서울에서 변두리의 삶을 거쳐가면서, 많은 젊은이들을 만나다 보면 여러 생각이 든다. 공부에 의한 자기 식민화의 길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들도 꽤 많다. 같은 나이 또래에서 절반을 넘을 것이다. 대학에 진학 못했거나 소위 이름 있는 학교가 아닐 경우 생존을 위해 죽도록 노력하면서 근근이 버티는 사람이 정말 많다. 학원 몇 달 다니다가 알바 세계로 돌아가는 이들을 ‘공부 중독’이라 말하면 지나친 일반화일지 모른다. 이들은 한층 더 답이 없다.

요약하면, 이 대담의 문제제기는 지금까지 공부가 답이라고 믿어왔던 사람들에게 공부가 더 이상 답이 아니라는 것 뿐이다. 그건 사실 그들에게만 답답하고 아쉬운 일일 뿐이다. 예전보다 그런 사람이 좀 더 많아지긴 했지만, 당연히 그게 다가 아니다.

‘공부 중독’에 대한 해독제가 ‘공부 안하기’ 일까, 아니면 다양한 길 찾기 일까? 그것 역시 자본주의 사회가 열어놓은 길처럼 보인다. 오히려 공부하기가 답일수도 있다.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느냐의 문제겠지.

오히려 이 자본주의 사회가 자신을 유지시키며, 사람들을 도구화, 대상화하는 방법은 경쟁 그 자체일지 모른다. 탈경쟁적인 삶이 식민화에 대한 더 나은 해독제가 아닐까.

2016.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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