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 ‘정체성’이라는 질병에 대하여』, 뿌리와 이파리, 2018.
출간된 걸 보자 마자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시간이 좀 걸렸다. 얼마전 장정일이 신문 컬럼에서 언급한 것을 보고, 부랴부랴 손에 넣어 읽었다. 우선,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정체성’이라는 질병, 그렇다 정체성은 영혼과 정신의 질곡이다. 질병이라고 하면 왠지 고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뭔가 건강 내지는 정상성과 비교하는 느낌이 들어서 내키지 않는다. 정체성에 대응하는 건강성 내지 정상성이 있을리 없잖은가. 그게 있다면 코스모폴리탄 보편성 같은 것일텐 것. 그런데,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어쩐지 밑에 깔린 보편의 언어들이 느껴진다. 그게 영 내키지 않았다. 정체성을 질병이라고 하면, 그건 불치병이다. 이미 굽어서 굳어져 고칠 수 없는 상황이며, 그 안에서 한 사람의 개인도 그 영향을 벗어나기 어렵다. 정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건 크나큰 착각이다. 그저 자신이 대응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을 뿐이지. 정체성이란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끊임없이 기속당하는 행위인 동시에, 미래를 산출해내는 하나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끊이없이 만들어가며 변주되어 가며, 지식을 생산하고, 삶을 속박하며, 도덕을 강제하는 과거로 부터 온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정체성’이라는 어항 없이는 자기를 수립하지 못한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정체성’을 수립하고, 다시 그것을 부수는 것. 그 잔해들로부터 또 하나의 ‘자기동일성’을 수립하고, 다시 그것을 스스로 부수는 것.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며, ‘정체성’의 논의로부터 미끄러져 나가는 것. 그럼에도 한 순간 숨쉴 물 한모금을 얻기 위해, 다시 기꺼이 ‘동일성’을 구축하고, 한 순간이라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되면, 다시 한 번 유리를 깨뜨리는 것. 그것 뿐이다. 여튼 어쨌거나 이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그래서 일까, 김철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그다지 충분하지 않았다. 왠지 변죽만 울리고 간 느낌이다. 그래도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몇 군데 논의해 보려한다.
머리말에서 ‘농담’과 ‘자기의 이중화’라는 시사점을 꺼낸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언급하며, 자기의 교조주의자=근본주의자의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자신의 비유사성을 껴안을 것을 말한다.(10) 근본주의자들이란 상징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11) 정치적 근본주의자들 역시 조국, 민족, 애국 등의 정치적 기표를 글자 그대로의 실물로 입증하려는 사람들이며, 이들이 21세기의 한국에 많은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12) 그 사례로 영화 「국제시장」의 국기하강식 장면을 들고 있다. 애국심 따위는 거짓임을 알면서 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13-14)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권력집단이란 이데올로기적 진술을 ‘글자 그대로 믿는’ 근본주의자, 즉 애국심 같은 것은 전혀 믿지 않는 불신자 집단이라고 평한다.(14) 지금 여기서 극단적인 수준으로 진행되는 정체성-정치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 그것이 처음 시작된 지점인 일제 식민지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식민지 조선은 근대 정체성-정치의 수원지이자 이곳에서 진행되는 폭력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이며, 정체성 회복이니 정립이니 하는 허구적fictional 정언명령은 식민지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끝없이 반복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통해 새로운 폭력의 연료를 공급받고 정당성을 확보한다(16)고 말한다. 따라서 근대 국민국가의 정체성-정치가 필연적으로 낳기 마련인 잉여적 존재들, 이를 주체subject도 아니고, 대상object도 아닌 앱젝트abject卑體에 주목했다고 말한다. 앱젝트는 체제의 필연적 산물이며, 필수적 존재로, ‘국가의 신체’ 반대 극점에 ‘가장 작고 비천한 육체(앱젝트)’가 있다고 말한다.(16) 모든 혐오는 자기 혐오이며, 타자에 대한 혐오는 내안의 더러운 것에 대한 혐오이다. 그러니, 이 비천한 육체들, 식민지 조선의 농민, 문맹자, 빈민, 범죄자, 매춘부, 정신병자, 장애인, 해방 후의 기지촌 위안보, 양공주, 혼혈아, 조작된 간첩, 광주대단지 폭도, 막걸리반공법의 빨갱이, 삼청교육대의 부랑배, 장애인, 부랑자, 매춘부, 탈영병, 성소수자, 외국인노동자, 불법체류자, 난민 등 비천한 육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17) 동시에 레이 초우를 언급하며, ‘반체제적 담론에 의해 축적되는 권력’에 도취되거나 비천한 육체를 재현하면서 윤리적 우월감을 만끽하는 위선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이를 위해 자기의 이중화가 긴요하다고 말한다.(18)
다소 길게 요약했지만, 머리말에 김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대략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인지,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혼란이 머리말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김철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정치적 근본주의자가 가져오는 ‘정체성’ 정치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정체성’ 정치란 페미니스트의 정체성 정치도, 장애인이나 난민 또는 외국인 노동자의 정체성 정치도 아니다. ‘친일청산’을 앞세우는 정체성 정치를 말한다. 친일 청산을 통해 순결하고 아름다운 민족 정체성을 되살릴 수 있다고 믿는 정치적 근본주의자들을 말한다. 일단,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비판하려 하고 있는지, 알겠다. 책을 읽다 보면, 나오지만, 경복궁 복원사업이나 한글 글쓰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일제 식민지 시기를 일제 강점기라고 부르면서, 용어에 집착하거나, 당시 친일활동을 했던 이들을 다시 단죄하려는 행위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순수한 조선 또는 한민족 따위는 존재했던 적도 없고, 상상 속의 것에 불과한데, 그걸 현실로 가져오는 일은 종교적 근본주의와 흡사한 불신 행위이자 상상계를 믿지 않는 행위라는 지적이다. 나도 부분적으로는 동의한다. 경복궁 복원이라니 정말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다. 근정전을 개조해서, 국무회의장으로 쓰고, 경회루를 고쳐서 영빈관과 연회장으로 쓰면 된다. 경복궁 안쪽을 관저로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왕조의 유물인 궁궐은 관광용이 아닌 다음에야, 그 필요에 따라, 공화국의 용도에 맡게 사용하는 것이 좋다. 복원과 관광은 창경궁이나 비원 정도면 적당하지 않겠는가. 한국어 글쓰기만 해도 그렇다. 외래어와 한자를 과감하게 사용하고, 수동태와 다양한 순수한 고유 한국어에 없는 방법을 다양하고 들여와서 언어를 풍요롭게 할 필요가 있다. 순수한 토속어로 어떻게 학문과 사상이 가능하겠는가? 모두들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김철의 글쓰기는 순수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국어’와 ‘국사’라는 말을 ‘한국어’와 ‘한국사’로 바꾸어야 한다. 대학의 학과 이름도 싹 바꾸고, 거기서부터 파시즘 냄새를 제거해야 한다. 국사편찬위원회라는 국가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보다, 한국사연구소 정도가 적당하다. 이름 바꾸는 데 다들 너무 몰두해서 이런 이야기 하기 좀 그렇지만, 일본은 패전하고 얼마되지 않나, 국어, 국사라는 명칭을 버리고, 일본어, 일본사로 바꾸었다. 정말 바람직한 변화였다. 요지는 잘알겠다. 그러나 그걸 ‘정체성’ 정치라고 부르는 지는 잘 모르겠다. ‘정체성’ 정치란 국민국가 내의 소수자들이나 피억압자들이 자신들의 권리 투쟁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식민지 조선에서 하는 독립운동이나, 자치의회 설립 운동, 참정권 운동 같은 것을 ‘정체성’ 정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국가의 주요 구성원들이 ‘국민’의 정체성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는 활동을 정체성 정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건 그냥 국민국가의 일상적인 활동이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맨날 민족정기 운운하면서 상징찾기 놀이를 하고 있는 꼬라지를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고, 퇴행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반대하려면, 국가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반대여야 한다. 친일청산이 효과 없다고 정면으로 거론하기 껄끄럽고, 곤란하다면, 소위 ‘협력자’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편이 좋다. 말하자면, ‘친일파’ 즉, 협력자들의 정체성 역사를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여기에 맨 첫번째 혼란이 있다. 비판해야 하는 것과 주장해야 하는 것 사이에 발생하는 혼란.
책을 읽는 내내 도대체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앱젝트abject라는 개념이었다. 비체 또는 비천한 존재들, 비루한 존재들이라고 부르면 그럴 사람들을 부르는 이 명칭은 본문과 각주를 읽어보면, 줄리아 크리스테바에게서 가져온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김철의 이론적 자원은 슬로보예 지젝과 그를 통해서 읽어낸 자크 라캉이다. 이 세 사람의 이름이 거의 매 논문마다 반복된다. 간혹 푸코도 나오지만, 푸코가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규율 권력 정도에서 언급하는데 그치고 있다. 문제는 이 책에서 줄곧 말하는 비체 즉, 앱젝트들이다. 이들은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배제되는 이들이다. 순수한 민족 구성원으로 남을 수 없는 이들이다. 그러니까 가장 구체적으로 말하면 친일파다. 그런데, 친일파는 앱젝트가 될 수 없다. 이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도,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한국에서도 앱젝트가 아닌 주체로 다시 말해 주류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조선인이 모두 앱젝트라 해도, 친일파는 앱젝트와 대상 사이를 오가는 존재였다. 해방되고 세상이 바뀔 줄 알았더니만, 그때 주체는 지금도 주체였고, 그때 앱젝트는 지금도 앱젝트였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이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를 함께 설명하는 글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한 번도 앱젝트가 아니었던 사람들을 민족 또는 국민을 재서술하는 과정에서 친일의 낙인을 찍어서 밀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단지 몇몇 사람만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근대 국가의 형성과정 그 자체가 소실되고 있다. 김철은 그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또 하나의 모순이 있다. 김철이 구하고 싶은 것은 앱젝트가 아니다. 그가 구하고 싶은 것은 국민국가의 정체성 중 소실되어 가는 어떤 한 부분이다. 친일과 협력으로 얼룩지면서도, 국민국가를 실질적으로 만들어 온 그 부분이다. 그걸 되살려야 한다는 데는 십분 동의한다. 요즘 역사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걸 듣고 보면, (을사조약으로 설치된 통감부 시절부터) 일제 40년이 없었던 것처럼 만들고 싶은 강박이 느껴져서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그걸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굳이 앱젝트를 가져와서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없다. 내가 박유하의 책을 읽고 격분한 데는, 그 책 『제국의 위안부』에서 실제 위안부 생존자들에 대한 관심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안부 할머니가 아니라 위안부 생존자라고 불러야 옳다고 본다. 이 책에서 그렇다면 앱젝트를 가져와서 이야기해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까? 이 책에서 그래도 그럴 듯하게 앱젝트 역할을 한 것은 김수영의 사례 뿐이었다. 미군 위안부는 좀 결이 다른데, 그건 뒤에서 말하기로 하겠다. 그런데 김수영이 앱젝트인가? 김수영은 주체이고, 주류 중의 주류다. 일본으로 유학 같던 일제 시대에도 식민지에서 주류였고, 시인으로 활동할 때도 그랬으며, 그가 죽은 후 이제는 한국 근대시를 그를 빼고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 그도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정체성’ 투쟁에 실패한 것이다. 책을 읽어 나가면 나갈수록 배제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주류, 메인라인, 메인스트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주류가 주변화되니, 마치 자신들이 앱젝트가 된 듯하여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투쟁이며, 지식투쟁이며, 지식-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의 장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거기에 원래 앱젝트는 설 자리가 없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첫번째 글 「민족-멜로드라마의 악역들-『토지』의 일본(인)」이었다.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토지』를 읽어본 적이 없다. 원래 대하드라마 아니 대하소설이라는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소설을 읽어도 중단편을 읽고, 간혹 장편을 읽어도 한 권 분량이 넘으면 잘 손이 가질 않는다.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고, 소설이라는 것에서 내가 얻으려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박경리의 그 유명한 『토지』가 이런 내용일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토지』 드라마도 본 적이 없다. 악랄하고 잔인무도한 악당들과 영웅적 초인들의 대결(25)을 멜로드라마라고 말하는 건 역시 국문학자로서 내린 점잖은 평가고, 내 생각에 이런 건 마블 코믹스 만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구성이다. 일본문화의 정수는 ‘칼과 섹스’이고, 일본인은 ‘짐승’,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가득한 글을 노벨 문학상에 거론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충격을 받았다.(29) 누군가 추천하고 누군가 읽어봤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 무신경함이 기가 찼다. 게다가 누가 말하더라도 일본(인)과 일본문화에 대한 발언은 한결같으며,(31) 심지어 씨를 말려야 한다는 혐오, 저주, 경멸이 넘실거린다.(32) 일본인을 비롯한 악당은 추하고 못생겼다는(34) 주장까지 작가의 입을 통해서 반복되는 것을 김철은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무대 앞으로 뛰어나와 연설을 늘어놓은 계몽적 작가라고 말한다.(39) 일본의 일류대학과 일본에서 형편없는 사립을 다닌다는 학벌주의는 긍정적 인물에게도 가득하지만, 작가는 비판적 시선도 없다.(43-44) 유일하게 등장하는 일본인은 오가다 지로라는 제국주의 침략에 분노하는 양심적 일본인이며, 조선인 우국지사의 동지인데, 그의 연인은 유인실은 일본을 공격하고, 조선민족과 민족문화의 우수함을 말하며, 일본문화의 저열함을 공박하는데, 오가다는 그에 동조하거나 설득당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 연에는 ‘민족’ 또는 ‘피’에 대한 ‘배신’으로 그려진다.(44-45) 이 정도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럼에도 유인실을 사랑하는 오가다의 인격에 감복할 지경이 되었다. 작자는 일본인은 비열하다고 그리지만, 가장 인격적으로 사랑을 하는 존재는 오가다라는 일본인 뿐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각자 민족을 배신한 죄로, 떠도는 신세가 된다. 배신한 결과로 축출당한 것이다.(47) 이들의 반대쪽에 선량하고 도덕적이며, 인간적 미덕과 초인적 용기로 가득 찬 ‘선인들’이 존재한다. 최서희를 비롯한 이들은 모두 잘생겼고, 빼어난 미모와 품위를 가지고 있다.(48-49) 사건 진행이 술마시면서 하는 시국담이나 논쟁으로 일관되는(52) 함량미달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기로 하자. 작가의 붓끝이 빛을 발하는 것은 농민적 일상의 세세한 항목을 묘사할 때이고, 정치적, 역사적 환경과 무관하게 변함없이 지속되는 가정사, 예컨대 부모자식간의 불화, 부부불화, 고부갈등, 처첩갈등 등은 이 농촌 가정극의 주요 소재를 이룬다. 『토지』는 기본적으로 농촌가정극이며, 재자가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즉 혼사장애담이 기본적인 서사라고 평가한다.(53-54) 그리고는 일본이 갑작스레 망하는 것으로 끝이난다는 데.(54)
여기까지 읽으면서 입안에서 혓바닥이 입천장을 차려고, 움찔거렸다. 기가 찬 내 마음을 몸짓으로 느끼게 하고 싶을 정도였다. 왜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고 권하는데, 왜 그렇게 손이 가질 않았는지 이해할 정도다. 이보다는 「왕좌의 게임」이 백만배는 더 흥미진진하겠다. 아니 그것보다 왜 그렇게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일본일을 다룰 때, 그렇게 평면적으로만 그리는지 조금 잏가 되었다. 일본과 일본인을 악당으로 그린다 해도, 그 악당의 캐릭터가 ‘딱지’ 수준이라면, 무슨 재미로 읽고 보겠는가. 근래에 인기를 끈 「미스타 션샤인」이 비교적 일본인을 다채롭게 그리려 했지만, 그래도 역시나 평면적이었다. 이 모든 것의 뿌리에는 『토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책을 손에 잡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말이다. 김철은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토지에서 앱젝트는 누구인 걸까? 발언권을 상실한 존재, 무엇보다 가장 인격적인 오가다 지로가 아닐까. 아니면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군과 경찰에게 팔아먹고 호의호식하다 결국 망하는 존재인 걸까. 그러고 보니 왜 한국의 식민지 시대 문학에서는 민족을 넘은 사랑은 주제가 안되는 걸까?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분명히 있을 거다. 그런 작품은 일본 문학에서도 한국 문학에서도 잊혀졌겠지. 패전 후 제국에서 어느날 단일민족국가로 변신한 일본도, 한국에 비해 별반 다를바 없어 보인다. 좀 여유가 있기는 하겠지만.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랑이 그렇게 상품성이 있는 걸 보면. 꼭 그렇게 정치적인 것 말고, 그냥 사랑이야기도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현실에선, 실제 ‘내선결혼’의 경우, 일본이 패전하고 해방되자, 그대로 헤어지게 되거나, 극심한 외국인 혐오와 인종차별 속에서 살아가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재조일본인 중에서 돌아가지 않고 남은 자들이야말로 앱젝트였다.
「비천한 육체들은 어떻게 응수하는가: 산란하는 제국의 인종학」이란 글은 체질인류학 연구로부터시작한다. 경성학파라 불린 이마무라 유타카今村豊와 우에다 쓰네키치上田常吉 등이 체형과 혈액형 등 조선인의 체질인류학적 특성을 규명하려 한 바는 이미 잘알려져 있다.(66) 원조 격인 일본에선 교토제대의 기요노 겐지清野謙次가 독부인 다카하시 오덴高橋お伝이 처형된 후 음부를 표본으로 만들기도 했을 정도니까.(61) 각주에 나오는 혈청학과 인종관계를 연구한 白麟濟가 물론 백병원의 그 백인제라는 건 덤이다.(62) 딱히 그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땐 그랬던 거다. 김철은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郎의 아이누 연구를 제기하며, 일본 식인종론을 통해 아이누를 배제함으로써 일본인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비천한 육체로서의 앱젝트가 설명되며, 김항의 연구를 따라 ‘난민’이라고도 한다.(72-74) 작가들이 그려내는 ‘인간-짐승’은 크리스테바의 말로 바꾸면, 이쪽저쪽 사이에 있는 자들the in-between, 뭔가 알쏭달쏭한 자들the ambiguous, 이것저것 뒤섞인 자들the composite, 즉 앱젝트abject이다. 철저하게 버려딘 사물이며, 동, 오줌, 고름, 피, 토사물 처럼 역겹고 구역질나는 존재다. 이들은 정체성을 체제를 질서를 교란하는 존재다.(75-76) 식민지의 주민 역시 제국의 체제를 교란하는 범죄자, 또는 잠재적 범죄자로 조사, 감시,격리되어 최종적으로 경계 밖으로 밀려난다. 식민지의 원주민을 분류, 정의, 처리하는 문제는 제국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77) 염상섭의 『만세전』의 주인공 이인화가 동족을 바라보는 박물지적 시선은 그가 식민자나 피식민자 중 어느 하나인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둘인 자, 말 그대로, 사이에 서 있는자, 정체가 모호한 회색분자임을 보여준다.(78) 그는 東京에서 下關까지 올때가 편했다.(78) 연락선의 목욕탕 장면에서 우열감은 골상학적 시선을 따라 드러난다.(80) 그는 돌아온 조선에서 ‘조선인’으로 적발된다.(81) 경부선 열차를 타고 올 때, 촌사람인 조선인들은 그를 일본 사람이 아닌가 오인한다. 그를 오인하는 것은 제국의 권력이 아니라, 제국의 법역 바깥의 존재, 식민지의 앱젝트이다. 머리를 깎지 않은 그는, 체제를 위협하고, 질서를 교란하는 앱젝트이다.(81-82) 김철은 이를 대만에서 법 바깥의 존재였던 생번生蕃과 비교한다.(82) 주인공의 연민의 정서를 압도하는 것은 공포와 혐오이며, 이들은 경계 바깥의 폐기해야 할 존재, 동물, 무덤이다.(83) 그는 동경으로 돌아가면서 무덤을 빠져나간다고 말한다.(85) 이광수는 조선인 지원병과 징병제를 옹호하며, 이런 이인화들을 구더기가 끓는 무덤으로 몰아넣었다고, 앱젝트의 극한인 시체로 폐기됨으로써 체제를 살게 했으며, 식민지의 비천한 육체는 죽어야만 살 수 있다고 김철은 평한다.(87) 레이 초우는 제3세계의 작가들이 서구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 즉, ‘비천한 육체들’에서 매혹의 원천을 발견하고 새로운 근대문학을 탄생시켰다고 평하며, 이혜령은 식민지 소설에서 여성 섹슈얼리티의 형상화가 남성 엘리트의 억압된 욕망의 투사라고 말했다.(88-89) 김철은 앱젝트의 응수가 무표정으로 드러나며, 모호함과 불투명으로 보는 자를 불안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92) 이런 난반사의 가장 독보적 묘사는 김사량의 『천마』로, 그와 장혁주의 일본어 소설은 식민지 가간 내내 ‘조선문학’과 ‘일본문학’의 사이에 있는 모호한 존재였다.(94) 그들은 일본 문학 외부의 이질적 존재이자 조선문학의 경계 밖으로도 밀려났다.(95) 주인공 소설가 ‘현룡=겐류玄龍’라는 이름 자체가 앱젝트로서의 특징을 드러낸다. 성병에 걸려 ‘안짱걸음’을 걷는 남성 지식인의 비루한 형상이다.(94-95) 조선 사람들에게서 버림받고, 일본인들에게까지 버림받는다면 길바닥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에 몰린 것이 이들 앱젝트이다. 한편 현룡을 조선 문화의 진드기로 규정하고 몰아내기로 결정한 조선 문인들은 내지에서 좀 알려진 사람이 오면 아첨 경쟁을 벌이는 처지다.(98-99) 이를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본인 역시 같은 처지다. 지배자의 언어를 지껄이는 이 괴물은 고귀한 야만인이 아닌 것이다.(101) 경계 밖으로 내팽개쳐진 이 앱젝트는 당돌하게 경계 안쪽의 자기 동일성의 신성한 상징(류노스케)을 호명하면서 안으로 들어갈 것을 요구하지만, ‘센징’은 죽어서야 ‘내지인’이 될 수 있음을 그는 부르짖고 있다. 앱젝트는 죽어야만 살 수 있다.(102) 폭력은 살아있는 존재의 기본조건이므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폭력이 배태된 최초의 장소[식민지 조선]이다.(103) 여기서 규율의 위반/가능성과 사소한 위반들에서 폭력의 질서가 교란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104)
본래 의도가 아닌데도, 자꾸만 길게 요약하게 된다. 요지는 이렇다. 조선인이란 앱젝트이다. 그런데 이 앱젝트는 다층성을 지닌다. 식민지의 가난한 촌사람인 조선인들은 『만세전』의 주인공이 보기에도 앱젝트이다. 그러나 그 자신도 조선에 오는 순간 앱젝트임을 느낀다. 사실 이게 문제다. 누가 진짜 앱젝트인 건가. 조선인이라는 것만으로 죽어야만 사는 앱젝트라면, 민족주의가 옳지 않은가. 『천마』의 주인공은 지식인으로서 일본과 조선 사이에 놓인 존재로서의 앱젝트이다. 그러나 내지에서 이름난 이들이 달려올 때 우루루 달려가는 그를 진드기 취급하는 이들도 앱젝트이고, 심지어 조선에 와서 겐류를 멸시하는 일본인도 앱젝트이기는 마찬가지다. 김철은 이 앱젝트들이 절규하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한다. 이 앱젝트들이 무표정하게 규율과 분류를 거부하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한다. 국민국가에서 일본에서는 아이누나 부라쿠민, 한국에서 빨갱이 같은 배제되는 집단을 만들어내고 배제하는 것은 정체성(자기동일성)에 기반한 정치적 주체를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그 주체가 타율적이든, 자율적이든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배제되는 집단은 다수여서는 안된다. 다수의 노동력 또는 병력을 배제해서는 산업도 전쟁도 수행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경제의 유지에도 군대의 유지에도 방해가 되지 않는 만큼만 배제하는 것이다. 대만의 원주민인 생번이든, 일본의 아이누든 부라쿠민이든 그렇다. 일본 제국에서의 식민지 조선은 좀 상황이 달랐다. 우선 인구 구성으로 보아도, 거칠게 말해서 조선이 3천만 내지가 7천만으로 1억이었다. 제국 일본은 이 1억이라는 숫자를 중시했다. 일본 제국에서 조선인 전체를 앱젝트화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조선에서는 아니었다. 내지로 간 조선인들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앱젝트가 될 수 있었다.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이 그렇다. 반대로 총력전이 강화되자, 조선인들을 동원할 필요가 생겼다. 징용이든, 지원병이든, 징병이든, 앱젝트인 상태로 동원할 수 없기 때문에, 황국신민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비록 2등 국민이긴 해도 앱젝트는 아니었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앱젝트란 절대적으로 배제되는 자들이다. 김철이 살펴보는 엽상섭과 김사량의 소설의 그려내는 앱젝트들은 모두 상대적인 차이에 불과했다. 일본인으로 동화되려 노력했던 이들은 일본에서 영원히 동화될 수 없는 존재로 앱젝트인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인화나 겐류에게서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다수의 미개인 조선인들을 앱젝트화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일본의 창칼, 즉 무력 하에서만 가능하다. 동시에 조선의 지식인들과 내지인의 사랑과 인정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사이이다. 이때, 동화하려던 지식인은 동료 조선인들에게 자신이 앱젝트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배제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살 수 있다. ‘인정’이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해방 후의 남한은 이인화와 겐류와 그를 진드기로 여기던 조선 문인들이 협력해서 스스로 지배자가 되어서 만들어낸 체제다. 담론의 영역에서 친일을 배제하고 침묵했다고 삶이 멸절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뭉쳐서 빨갱이를 새로운 앱젝트로 배제하면서 국민을 구성했다. 이인화나 겐류가 앱젝트일 수 있다. 그는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의 단위에서 앱젝트로 존재한다. 또는 조선에서도 앱젝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이들이 다수의 평범하고 미개한 조선인을 앱젝트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나는 앱젝트를 잘 모르지만, 똥과 오물과 거름을 계층화시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들은 죽어야만 국민(일본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살아서 이들은 조선인이었다.
「’국어’의 정신분석: 조선어학회 사건과 『자유부인』」. 정렬모의 조선어 연구자가 세인에게 이매망량의 도로 지적 받고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는 체계를 갖춘 문법에 의해 통일된 언어라면 조선어도 국어라고 말한다.(106) 문제는 국어의 개념이 아니라 국어라는 이데올로기, 즉 ㅍ상과 구조의 체계로서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107) 김철에 따르면 주시경은 단군 개국 이래 4000여 년간의 시간 및 반도의 공간, 그 안에 거주해온 인종을 하나로 묶는 상상의 기반이 천연특성의 국어라고 말했다. 국어는 천연성, 즉 자연성의 감각과 그것과 자기의 동일시라는 환영을 통해 탄생했다.(110) 사카이 나오키는 본래 사용했어야 할 순수 일본어를 상실했다는 감각을 통해 일본어가 가시화되었다, 요컨대 일본어의 탄생은 일본어의 사산을 통해서 가능했는데, 한국어도 다르지 않다.(111) 주시경이 말하는 국어=국가=주권에의 믿음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속한다.(113) 김철은 계속해서 라캉의 이론을 깔고 간다. 주체는 환상을 통해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 즉 본래적 결여와 부재를 메꾼다. 환상이 없이는 주체의 현실, 즉 상징계는 유지되지 않는다. 국어는 근본적 상실을 구체화하고 상실감에 신체를 부여하는 대상, 즉 팔루스phallus 같은 것이다. 거세를 통해, 즉 팔루스의 현존을 통해 주체는 근본적 결여 그 자체로서 상상계적 ‘나’로부터 상징게적 주체로 이동하면서 현실의 삶을 유지해 나간다.(114) 조선어로서의 국어는 말할 수도 볼 수도 없는 실재를 현실에서 분리함으로써 상징적 질서 속에서 안정된 주체로서의 지위를 확보한다. 국어는 이렇게 태어났다.(115) 우리의 사회적 현실은 트라우마를 묻어둔 채 진행되는 환상, 실재의 침입으로 언제든 찢길 수 있는 취약한 상징적 그물망이다. 상징적 네트워크(사회적 현실)를유지하기 위해서는 실재가 현실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도록, 상징계적 환상을 계속해야 한다. 정상적인 상태란 환상이 유지되는 순간이며, 광기는 그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다.(115-116) 논의의 바탕 위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을 환상의 게임으로 해석한다.(116) 조선어학회 사거에서 처벌을 최대한 확대하려는 식민지 사법권력은 어문운동은 심모원려를 품은 민족 독립운동의 점진형태라고 말하지만, 그 함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피식민자는 조선어는 민족정신, 민족발전, 독립운동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이 식민권력에게 더 위험한 것이다.(122) 민족어를 통해 민족 자아를 인식하고 독립적 주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피식민자의 환상을 식민자가 피식민자에게 강조하고 피식민자는 그것을 한사코 부정하는 이 텍스트는 주인/노예 변증법이 작동하는 현장이다.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에 따르면 노예를 노예로 만드는 것은 노예가 지닌 꿈, 즉 해방의 환상이며, 그 꿈을 포기하는 순간 노예가 아닐 가능성에 마주친다. 그것은 절망, 길 없는 길이며, 실재와 마주치는 순간이다.(123-124) 조선어학회 사건 판결문에서 수세에 몰려 있는 것은 주인, 즉 식민지의 주권권력이다. 피식민자=노예가 환상을 포기했다고 선언하자, 놀란 주인은 노예가 지녀야 할 해방의 꿈을 거듭 알려주면서, 노예에게 꿈을 포기하지 말고 이 상징질서 안에 머물러주기를 호소한다.(124) 반면, 1954년 한글 간소화 파동과 더불어 등장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 사건을 김철은 주인공인 문법학자를 들어 문법은 헌법적 구조와 동일한 형상을 지닌 주권권력이라고 독해한다. 그래서 장태연에게 절대권력이 부여되어 있다.(125, 127) 아내의 외도는 비난하나 자신은 외도해도 되며, 자신이 아내의 일탈의 심판자가 되는 것은 자신이 주권자이기 때문이다.(128) 그가 아내를 용서하는 것은 그녀가 국회의 한글 공청회장에 나타났기 때문이다.(132)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녀는 남편의 불륜을 모르고 있다는 것, 아내의 무지와 오인이야말로 이 세계를 유지시키는 근본적 토대다.(132) 국어, 국가, 민족 등은 기의의 환유적인 미끄러짐을 멈추게 함으로써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전체화하는 일종의 착시, 즉 이데올로기적 왜상anamorphosis이다. 지젝이 말하듯 삐딱하게 바라보는 순간 이데올로기적 의미의 중심에서 입벌리고 있는 무의미의 틈새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환상을 횡단하는 것 뿐이다. 횡단을 통해 환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감추고 있는지 체험하고, 있는 그대로의 무, 자기 자신의 자리, 공백, 결여, 거기로 이행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우리가 보는 것이다.(134)
깜짝 놀랐다. 『자유부인』이 그런 맥락이었다니. 일단 『자유부인』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길게 요약했지만, 주제는 아주 단순하다. 국어=국가=민족은 환상이고, 이데올로기라는 거다. 사실 여기서 인용한 저자 중에 중요한 사람은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와 이연숙이다. 『사산되는 일본어/일본인』과 『국어라는 사상』. 그리고 사카이 나오키의 『과거의 목소리』도 작년엔가 번역되었다. 그리고 노예, 피식민자, 바람난 아내 즉 압젝트는 이 환상에서 깨어나면 안된다.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이 환상이 깨진다. 물론 어디까지나 처벌을 피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식민자는 환상을 부추기고 환상 안에 머물 것을 요청하는 반면, 피식민자는 스스로 무기력과 절망, 좌절을 선언한다. 그럼으로써 그 환상을 극복할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여기서 인용한 주인과 노예의 이야기는 헤겔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근대란 무엇인가: 일본과 중국의 경우」라는 글인데, 이 글은 루쉰의 우화 「현인과 바보와 노예」를 설명하는 글이다. 여기서 해방의 환상을 가지고 노예로 살아간 것은 서구를 받아들여 해방된 줄 아는 일본을 말하는 것이고, 실재와 마주친 노예는 물론 루쉰과 그의 루쉰의 중국이다. 루쉰은 꿈에서 깨어난 자다. 이때 해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인이나 바보가 구원해 주는 것이다.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하는 지점과 김철이 말하는 지점은 미묘하게 다르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말대로 라면, 일본 제국주의 사법관이 아닌 일본의 휴머니스트가 나와서 조선인이나 조선어 학자에게 말하는 것이다. 조선어를 확립하고, 조선문화를 일으키면, 언젠가 조선은 독립, 적어도 자치는 할 수 있소. 그러니 스스로 문화의 힘을 키우시오. 그러면 내가 돕겠소. 그러면서,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자들의 편에서 함께 싸우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 사람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의지하면 노예로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 다케우치 요시미의 논지다. 노예가 노예의 주인이 되는 경우가 가장 노예답다는 다케우치의 말은, 일본은 자신이 노예 상태인데, 해방된 것으로 착각하고, 다른 아시아의 중국이나 조선을 해방시키겠다고 전쟁을 하는 가장 포악한 노예라고 말하고 있다. 다케우치 요시미야 말로. 곰곰히 살펴야 할 인물이다. 여튼 김철이 직접 분석했든, 황호덕의 논지를 인용했든, 일본 사법관들이 조선어가 해방의 논리라고 주장하면서, 엄벌에 처하려는 것이 거꾸로 해방의 논리를 부추긴다는 주장은 일견 그럴 듯하지만, 어찌보면 억지스런 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일본이 조선의 손을 잡고 해방의 길로 나가자고 말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런 사례에 맞아 떨어지는 것은 일본이 조선인의 손을 잡고, 만주국이라는 신천지에서 출세해 보자면서, 만주붐을 일으켰다든가. 중국 화북지방을 점령했을 때, 조선인을 광범위하게 고용해서, 아편을 팔면서 정보를 수집하게 했던 일에 더가까운 이야기다. 여하튼, 삐닥하게 보고, 환상을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환상을 깨뜨리라는 건데. 그건 뭐 전적으로 옳은 이야기고. 문제는 압젝트가 그런 걸 할 수 있느냐는 건데. 다만, 이글에는 직접적으로 압젝트는 안나온다만. 문법학자의 아내가 남편의 진실을 알면 환상은 존재할 수 없겠지. 그러나 진실을 알고서 환상 안에서 안락을 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만. 여하튼, 『자유부인』은 읽어보는 걸로. 그런데 좀 흥미로운 생각이 든다. 현실을 직면하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루쉰이고 앱젝트들의 저항 방법이라면, 한국에서는 20대들이 지금 그걸 하고 있다. 더 이상 꼰대들의 희망 고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야심에도 장밋빛 전망에도 넘어가지 않고, 욜로의 삶을 추구한다. 아이도 낳지 않는다. 어떤 미래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저항에서 어떤 결과를 끌어낼 수 있을 런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지금 남녀를 막론하고 20대와 30대의 저항은 이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소위 기성세대들은 당황해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할지 몰라서 인데. 이 방향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런지는 모르겠다. 반면에, 반대방향으로 현실에서 고개를 돌리고 환상 속에서 희망 만 찾고 있는 부류도 있다. 현대 한국의 기독교가 그렇다. 총소리가 나자 땅에 고개를 처박은 새의 모양새다. 그리고는 정신 안으로 무한한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다. 반대로 새로운 기독교인 보수 정치인을 찾아 그를 앞세우고 있다. 이 역시 현실화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이지만. 이런 일은 현실을 직면하는 일을 뒤로 미루고만 있을 뿐이며, 자신의 세대에서 현실의 절망을 확인하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욕심 또는 책임회피 때문이기도 하다. 길없는 길로 가는 것만이 길이기에 모두에게 퇴로가 막힌 모양새다.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일제 청산’과 김수영의 저항」. 1966년 김수영은 일본어로 시작노트를 보내면서, “해방 후 20년 만에 비로소 번역의 수고를 덜은 문장을 쓸 수 있었다. 독자여, 나의 휴식을 용서하라”고 말한다.(138) 그러나 잡지사는 이 글을 번역해서 출판함으로서 그 사건성은 사산되고 말았다.(139) 물론 그들은 해방된 후에야 ‘가나다’를 배운 세대다. 1920~30년대에 태어나 식민지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이들 세대는 ‘해방’이 될 때까지 일본어와 조선어의 이중언어 상황 속에 살았다. 그러나 지식인으로서 고급 지식과 교양은 일본어를 통해 습득했다.(141) 그는 자신에게 낯설고 서투른 언어로 문학을 해야만 했다.(142) 해방 이후 일본어는 가장 우선적인 청산의 대상이었고, 국어의 습득을 통한 ‘국민화 프로세스’는 거대하고 장기적인 ‘기억의 재편성’을 수반하는 것이었다.(143) 김수영은 당대 한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금기에 정면으로 도전했는데, 하나는 ‘공산주의’ 또 하나는 ‘일본’이었다.(144) 김수영의 시작노트 사건이야말로 식민지의 기억을 민족국가의 순수성이라는 신화 속에 봉인하고, ‘민족주체’의 기원 속에 각인된 ‘오염’과 ‘혼종’의 흔적을 서둘러 지우고 분칠하는 탈식민지 사회의 집단적 자기기만을 보여주는 사례다.(146) 이 해 1929년 생인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을 출간했고, 1932년 생 이호철은 오염되지 않은 순종 한국인을 자처했던 것이다.(147-148) 한글세대의 등장과 함께, 민족사의 정통성, 연속성, 순수성을 구축하려는 열망이, 일제 잔재의 청산을 더욱 강도 높게 수행하게 만들었다.(150) 김수영의 저항은 간단히 잊혀졌고, 민족사의 연속성과 순수성의 신화는 신성불가침의 신앙이 되었으며, 20세기 전반의 역사는 일시적 일탈로 규정된다. 식민지의 체험을 지니지 않은 세대가 등장하면, 식민지의 기억은 더욱 타자화된다. 아래아 한글에서 자동수정되는 ‘일제강점기’ 같은 단어 말이다.(151) 이는 식민지의 치욕과 굴종의 기억을 깨끗이 ‘청산’, 즉 ‘망각’하고자 하는 한국 사회의 오랜 욕망을 반여하는 용어이다. 식민지의 기억은 식민화되었다.(152)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그 부재를 전시하는 공간에서 일제 잔재의 청산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절망감, 식민지는 영원할 것이라는 공포를 느낀다.(155)
1966년 김수영의 시작노트 사건을 다루는 이글은 아주 흥미롭다. 장정일이 인용한 것도 이글이다. 이글이 흥미로운 건 실은 김수영이다. 「이 韓國文學史」, 「H」, 「눈」 이라는 세 편의 시에 대한 시작 노트인데, 어느 잡지인지는 모르겠고,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흥미로운 건 이 시작노트가 발표된 시기가 1966년 2월이라는 것. 한일협정이 타결된 것이 1965년이다. 그리고 내용에 자신이 번역에 열중하고 있으며, 시의 비밀은 번역에 있다는 것. 자신의 비밀은 생명이며, 원하는 바는 침묵이라는 것. 이 시는 낡은 것과 혼용이라는 것. 그리고 글에서도 인용된 것처럼 일본을 기피함으로써 배일은 완벽해 졌다는 것. 한글 세대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그들은 자신의 고등지식의 원천이 일본임을 감추고 있었다. 나는 대학시절 뒤늦게 그들의 책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하고 깨닫게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모두들 영어공부에 몰두하고, 각주나 전거도 부러 구미의 것을 사용하곤 했던 것 같다. 나는 뒤늦게 수많은 지식이 일본을 경유했으며, 실은 그것이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매우 늦어서였다. 이 사실을 감춘 것은 잘못이다. 물론 이해할 만도 하다. 그것을 한글세대 탓이라고만 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한글세대를 가르친 것은 누구인가. 물론 한글세대들은 자신의 순수성을 자신의 무기로 삼은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위협적이었고. 그러나 또 돌이켜 보면 과연 오늘날 한국이 또 한국인들이 민족의 순수성을 찾고 기대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일본을 가장 좋아하고, 일본에 가장 많이 가는 사람들이 또 한국인들이다. 홍대 앞이나 좀 뜬다는 동네에 가보면, 여기가 일본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인 곳도 많다. 역사에서도 이제는 대중은 그렇지 않지만, 식자들 중에는 식민지 영향을 복원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평범한 젊은이들을 붙들고, 식민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면, 설득이 안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인기는 없다. 인기야 환○가 끄는 것이니까. 아마도 김철이 지적하려는 것은 지금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한글세대들이겠지만. 그들의 시대도 이미 끝나가고 있다. 그들이 뿌려놓은 민족주의 역시, 그 열매가 가볍지 않지만.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 오지 않은 ‘전후’」. 이제는 이미 해산되어서 흔적도 사라진 통진당과 관련한 토론회에서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박탈하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이글은 시작한다. 한국의 전후 민주주의를 유지-보호해온 두 개의 강력한 기둥은 ‘빨갱이’와 ‘친일파’이다. 이것들은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끝없이 부유하는 공허한 기표이며, 우연적이고 비일관적이다.(162-163) 통진당에 대한 해산 결정문은 한국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의 한계가 삼팔선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 한계를 넘은 자들이 우리에게서 나온 앱젝트라고 말한다.(165) 이 경계선 넘어에는 시체들이 있다.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빨갱이(한계를 넘은 자)의 이름으로 제거되었고, 체제 바깥으로 토해진 존재들에 의해 체제의 안은 유지보호되었다.(166) 국가권력은 우리는 아직 냉전구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뻔뻔하게 선언하면서, 냉전적 지배질서를 끝까지 지키고 유지하려 하고 있다. 냉전 구도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권력의 얼굴이다. 한국의 전후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이념적 동질성을 구축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핵심적 요소가 ‘빨갱이’이다.(167-168) 또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나이, 신분, 직업, 지역 등 모든 차이와 갈등을 일시에 해소하며, 한민족으로 집단적 동질성을 확립하는 데, 일본 및 친일파 만큼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없다. 삼팔선은 빨갱이가 지키고 동해는 친일파가 지킨다. 전후 남한의 민족-국가는 이렇게 탄생했다.(168-169) 정부는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이는 민족 내부 오염원인 친일파를 색출하고, 추방하여 민족동질성을 확보하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겠다는 열망이었다.(169) 그러나 법이 규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추상적이고 일관성이 부족한데, 그것이 바로 법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실정법적 행동으로 구체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불가능성이다.(170) 민족/반민족으로 선명하게 구분된 식민지의 기억 속에서 모든 주체의 삶과 죽음은 오로지 민족주체의 관점으로 환원되며, 발화의 위치와 주체를 민족 이외에는 허용하지 않는 구조, 이 폭력의 구조가 제국 일본의 유산이다. 이는 식민지의 의연한 연속이며, 전후 민주주의가 아닌 전시기 파시즘이다.(171) 한 사람의 일생을 그것도 60~70년 후에 단죄할 수 있는가? 수많은 조선인의 복잡한 내면을 헤아릴 수 있는가?(171-172) 일본, 특히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것인 한, 사회 전체가 완전한 사유 불능, 즉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일종의 최면상태에 빠져있다. 여기에 의문을 품게 하는 자는 용납되지 않으며, 정체성을 체제를 질서를 교란하는 불순하고 위험한 존재이다.(173)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사태가 그러하다. 학자와 지식인들은 저자의 인권유린에는 방관하거나 심지어 가담하고 있다.(174) 멍청한 좌파들과 무지막지한 우파들이 자기도 모르는 채 손을 잡고, 삼팔선의 ‘빨갱이’와 동해의 ‘친일파’를 보호막으로 ‘민족의 안전’과 ‘국가의 질서’를 구가하는 것이 한국의 전후 민주주의의 실체이다.(175) 여기서 김수영가 폭로하는 반공국가에서의 삶이 지닌 정신적 기형성을 보아야 한다. 그의 작업은 오물을 색출하고 씻어내고 격리하고 감춤으로 질서와 안전을 지키려는 민족-국가의 광적인 편집증에 맞서는 것이다. 그는 생애의 절반을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살았고, 북한군으로 참전했다,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다. 그는 자신의 기원에 새겨진 빨갱이와 친일파를 씻어냄으로써 흠 없는 순결에 이르고자 하는 민족-국가의 욕망에 가차 없이 침을 뱉고, 앞서의 시작 노트 처럼, 친일파와 빨갱이를 그의 시 속에 거침없이 끌어들였다. 「永田絃次郎」와 「○○○○○」 함께 월간지에 발표할 예정이었다. 나가타 겐지로는 친일파와 빨갱이를 온 몸으로 구현한 인물이고, ○○○○○은 물론 金日成萬歲였다. 김수영은 얼굴에 침을 뱉고, 자유의 과잉과 혼돈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178-179)
빨갱이와 친일파가 한국의 민족주의를 강렬하게 규정하는 두 단어라는 데는 어떤 의의도 없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사뭇 다른 층위를 가지고 있다. 빨갱이라는 말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해 왔든지 간에.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 단어는 사람을 죽여왔다. 문자 그대로 죽였다. 해방 후 남쪽에만 대한민국을 구축한 세력은 자신의 정치적 반대파와 공산주의자와 그밖의 사람들을 몰아서 학살했다. 전쟁을 틈타 많은 사람이 북으로 올라갔고, 그래서 일단 국민국가의 어떤 순수성은 확보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 빨갱이 타령은 그치지 않고, 수많은 간첩 사건을 만들어내며, 반정부 인사들을 옭아맸다. 정부를 비판할라치면, 나는 빨갱이라 아니라고 먼저 어두를 떼어야 할 정도였다. 김수영의 시 「○○○○○」은 아주 최근에도 문제여서,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 말이 나올 때도 다시 입에 오르락내렸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시를 「○○○○○」이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를 「김일성만세」로 부르면, 마치 그런 정신적 자유를 향한 저항이 가능했던 것 같은 환상에 빠지기 때문이다. 빨갱이는 아주 구체적인 금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실정법과 폭력을 가지고 찾아왔다. 친일파가 감당할 수 없는 욕설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1948년 이후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구속하거나 바꾸지는 않았다. 친일파라는 이유로 체포되지도 않았고, 구금되지도 않았으며, 처벌은 물론 처형도 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이 치른 대가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침묵하는 것과 한쪽 구석에서 들려오는 비난을 감내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점점 커져서 국가에 의해 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이미 죽은 그들에게 기껏 쏟아지는 불명예란, 동상이 헐리고, 도로에 달리 거리명을 빼앗기는 정도이다. 자손이 사과를 하고, 정치적으로 몰리는 정도다. 훈장을 빼앗기고, 보조금이 없어지는 정도다. 친일파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남겨지는 것이다. 빨갱이에 대한 배척은 실질적이고, 피와 살을 내주는 현장이었던 반면, 친일파라는 형태의 규정은 거의 모든 일이 기억과 상징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김철이 썼듯이 「永田絃次郎」는 1981년에 공개되었지만, 「○○○○○」은 2008년에 비로소 알려졌다. 여기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친일과 일본에 대해 말하는 것이 봉쇄되었을 뿐이다. 그것이 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시인에게는 큰 충격이고, 몸부림쳐야 하는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친일파와 빨갱이가 국민국가의 국민을 구성하는 두 개의 기둥이라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상상계의 영역에서 담론의 영역에서 지식을 통한 권력은 그렇게 설정되었을지언정, 그 밑에서 흘리고 뭉개진 피는 그 정도가 다르다. 이 문제를 논하려면, 일본으로 귀환한 재조일본인을 다루어야 그나마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한국 사회의 압젝트로 부르기는 어렵다. 박유하와 『제국의 위안부』는 좀 다른 이야기다. 나는 이 저자의 인권유린과 형사처벌에도 반대하지만, 이 저자의 허술한 논지와 자신이 행한 위안부 및 위안부 생존자들에 대한 인권유린에도 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전 일본 정부의 어느 인사가 친일 청산이란 과거 문제로 이해한다고 하는데. 실제 한국사회에서 친일 청산은 과거 문제에 국한되어 전개되고 있다. 전국을 기념관으로 만들고, 기념일을 만드닌 일이 때론 꼴 사납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지식인 사회에서는 어떻게 느낄지 모르지만, 빨갱이와 친일파라는 이 두 가지 단정과 국민의 경계를 행사하는 배제의 동학은 실제 진행되고,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과정이 매우 달랐다. 그러니 그만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남긴 상처도 깊고, 흔적이 큰 법이다. 이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이런 논의는 견강부회가 된다.
이어지는 「자기를 지우면서 움직이기」는 강연문이라 보다 명료하다, ‘최근 들어 더욱더 극성스러워지는 한국 사회의 파시즘적 국수주의Fascist Ultra-Nationalism에 대처할 방안’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189) 그는 ‘국가’와 ‘국민’이 한국학을 가로막고 있으며, 현대 한국은(북한을 포함해서) ‘국민/민족’을 교리로 하는 일종의 신정국가theocratic nation이라는 주장한다. 한국과 일본이 손잡고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일본군 위안부를 민족의 딸, 민족사의 참된 주인공으로 호명하는 위안부 지원단체의 대표자는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여러 사례를 들면서, 한국이라는 신정국가의 국민화=신도화 수준이 심각하고, 국가의 신체 국가주의를 실현하는 주체로서의 국민은 누가 더 순결한지만을 말하고 있다고 비판한다.(190-191) 그리고 이런 종교화한 국민국가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민주주의라며, 호전적 애국주의jingoism나 집단적 국수주의가 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한다.(193) 한국인으로서의 국민적 정체성을 확실하게 하고 그들의 국민으로서의 나르시시즘, 집단감상sentimentalism, 집단환각, 자기기만, 나아가 집단적 자기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내러티브나 퍼포먼스 없이 대의민주주의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나 정당은 한국에서 상상할 수 없다고 평가한다.(193) 그러면서 토마스 만을 받아들이 미국을 언급한다.(193)
사실 이 글을 읽으면서, 비로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요지는 좀 세련되고, 관용적인 선진국처럼 민주주의를 해야하지 않느냐? 한국의 민주주의는 왜 이리 우악스럽고, 촌스럽느냐는 비판이다. 내가 이 글에서 읽어낼 수 있는 건 엘리트주의 딱 하나였다. 파시즘적 국수주의, 신정국가, 나르시시즘과 집단감상 등의 비판을 읽으면서 한숨이 나왔다. 김철은 도대체 내셔널리즘이 뭐라고 생각했던 건가. 국민국가가 뭐라고 생각했던 건가. 1750년대 이후로 북미와 유럽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정치체제 및 정치적 단위를 국가를 구성하는 방법으로서의 내셔널리즘이자 국민nation 형성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한국은 남쪽과 북쪽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국민형성nation building을 하고 있는 중이다. 70년째 하고 있다. 그리고 큰 줄기를 잡아가고 있다. 그러니 그 과정이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면서 민족환상 따위가 퍼지는 것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에는 이런 민족 환상이 없는 줄 아는 모양이다. 국민국가의 형성이 절대선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모든 걸 양보해야 하며, 모든 건 기다려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을 궤도 이탈이나 몰락 또는 타락과 같은 식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실패나 극단화 등으로 보는 시각이 성립하려면, 그렇지 않은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국민형성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 책의 어느 곳에서도 바람직한 국민형성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지만, 이 글의 각주에서 독일인 작가 토마스 만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한 미국 정부를 그 바람직한 사례로 들고 있다. 여기에 답이 있다. 그의 글 깊은 바닥에 모범이 되는 기준이나 보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증거가 민주주의가 사라진다는 그의 표현이다. 종교화된 국민국가에서 민주주의가 사라진다. 쉽게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또 그럴 수 없는 말이다. 여기에는 어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으로서의 민주주의와 그것을 형상화하는 가치가 있고, 한국에서는 한때나마 그런 것들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것이 사라져가는 파시즘적 국수주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개탄이다. 말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란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기준의 민주주의 따위는 없다. 민주주의는 개별 국가에서 구체적인 제도와 장치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또 이 민주주의를 가장 잘 구현하는 정치적 단위나 제도가 바로 국민국가이다. 국민국가나 민주주의를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체적으로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형성된 특이성을 가진 하나 하나뿐이라는 점이다. 이 글은 역사적인 듯하면서도 의외로 몰역사적이다. 나는 그래서 답답해졌다.
「’위안부’, 그리고 또 ‘위안부’」라는 글은 어찌보면 논점을 회피하는 글이다. 김철은 이 글에서 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다. 일본군 위안부를 다루는 방식이 그대로 미군 위안부를 다루는 방식으로 전개된 과정을 설명한다. 이 글은 SBS의 한 다큐멘터리를 평가하고 있는데. 그는 이 다큐멘터리가 미군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과 일본군 위안부의 동질성을 연상하도록 해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국민적 상식과 그 표상 방식에 균열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어떤 사회적 논의도 이끌어내지 못했는데, 이는 위안부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담론구조의 기형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200-201)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 제작자들과 박유하가 비슷한 지점에 있다고 평가한다.(202)
「저항과 절망: 주체 없는 주체를 향하여」. 일제시대는 탈식민지 한국을 일종의 종교사회로 구성하는 기원이며, 모든 한국인을 하나의 종교적 신념으로 동질화하는 가장 큰 동력이다. 따라서 저항하지 않고 살아갔던 ‘비겁자들’의 삶과 죽음은 발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 도미야마 이치로는 ‘비겁자’와 ‘겁쟁이’에 주목하는 데, 신정국가로 화한 한국에서의 삶은 민족-국민주체로 회수되지 않는 한, 어떤 주체성, 어떤 역사성, 어떤 사회성도 같지 못한다고 평가한다.(208) 조선과 일본 제국주의를 생각할 때, 한국인이나 일본인의 지배/피지배, 가해/피해의 경험을 국민적 주체의 이름으로 말하는 행위, 그 행위가 연속시키는 식민주의의 가능성을 그는 우려한다.(209)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일본 국민을 대신해 사죄하는 이들에게도 위화감을 느낀다고 말한다.(210) 그는 개인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근대 민족-국가의 탄생에 관한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이렇게 말할 수 없다며, 봉건적 속박에서 풀려난 자유인으로서의 ‘개인’, ‘자본주의 행위 주체로서의 ‘사인私人’의 출현 없이 민족-국가의 성립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민족-국가는 개인 및 사적인 것과 동일체이며, 서로를 구성하는 필수적 요소이고, 민족-국가와 대립하는 것은 공적인 것, 공공성의 영역이라고, 용감하게 너무나도 용감하게 말한다.(211) 그러면서 민족주체가 다른 주체 형성의 가능성, 다른 발화의 지점을 끊임없이 억압하고 제거한다고 말한다.(212) 다시 한번 비겁자와 루쉰, 다케우치 요시미, 크리스테바를 언급하고, 도미야마 이치로를 들어 죽은 자가 스스로 말하는 다른 기억의 양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215-216)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사카이 나오키를 인용해 ‘과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는 윤리적 행위를 통해 나의 주체성을 완성해 가야 한다고 말한다.(217)
그럴듯해 보이는 이런 주장은 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일까? 여기서는 지금 주체 또는 주체성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층위에서 혼용되고 있다. 그 하나는 집단적 주체성을 말한다. 집단적 주체성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될 때, 예외나 틈새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솔직하게 이해가 안된다. 내가 바로 틈새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인데. 그리고 압젝트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원래 그 자체가 투쟁이기 때문에, 저항과 반발이 있고, 권력이 작동하게 된다. 반작용이나 반발은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게 정당하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다른 말을 한다고 잡아 가두고, 베어 죽이지만 않는다면, 다른 말은 할만한 것이다. 어디까지 말할 것인가는 발화자인 나에게 그 말이 얼마나 절실하며, 나는 어디까지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아스팔트 위에서 태극기와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끌고 다니는 무리들도 발화권을 인정받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그러나 발화한 것이 공정하게 취급받고, 열린 토론의 장에서 논의되기를 바라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것은 담론이 취급되는 하나의 형태이며, 바람직한 것이기는 해도, 쟁취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든 발언권은 싸워서 획득한 것이다. 그리고 국민 이외에는 다른 형태의 정치적 주체성을 상상하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거꾸로 어떤 정치적 주체성을 상상하고 싶은지 묻고 싶었다. 그러면서 반복되는 다케우치의 노예 이야기는 왠지 무지몽매해서 휩쓸리는 민중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지식인의 시선이 느껴졌다. 주먹을 움켜쥐고 현실과 마주서는 자는 노예일텐데. 그러다가 결론에서 다른 기억을 만들고, 나의 주체성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주체성은 어느 순간 개별자로 전환된다. 개별자의 주체성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이냐? 어떤 윤리적 행위를 할 것이냐? 이 주제가 바로 푸코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그 주제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를 합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대부분은 무지하게도 민족주의의 광풍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주체에 휩쓸리고, 그것을 자신의 개별적인 주체성으로 수용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다른 주체성을 만들어 갈 수도 있는 일이라고. 그야 물론이다. 그게 정말 중요한 문제다. 그걸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글에서 가장 놀라운 주장은 민족-국가는 자유인으로서의 개인, 자본주의 행위주체로서의 사인의 출현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신분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평등한(?) 개인들의 자유로운 결합에 의해 생겨난 민족에 대한 신화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이 국민이 프랑스에서 영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형성될 때, 그들은 각기 어떤 국민인지를 규정하면서 형성되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시작된 프랑스의 국민만들기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뒤를 따르는 나라들의 국민 만들기는 국가가 앞서서 국민을 주조해내는 형태였다. 다시 말하지만, 국민 형성에는 정답도 없고, 정해진 경로도 없다. 역사적 형성 과정은 모두가 특이성을 가진다.
식민주의의 가장 큰 죄악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식민주의는 그 지배를 받은 자와 그 후손들로 하여금 식민지적 틀을 넘어서는 세계에 대한 상상을 원천적으로 박탈함으로써 그 지배를 영속화한다. 그 전형적인 에가 식민지의 역사를 일제에 대한 저항이냐, 협력이냐 라는 따위의 저열하고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멜로드라마적 이분법으로 설명하는 일체의 언설이다.(238)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이 이런 문제에 아직도 골몰하는 이유는 식민지의 유산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본어 찌끄래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단이다. 그리고 이후에 형성된 냉전 구조다. 일본이 무슨 세계의 삼라만상을 지배하고 조정하는 만능도 아니고 이걸 모두 계획해서 만들었다는 식의 음모론도 아니다. 그러나 분단은 분명 식민지의 유산이다. 식민지가 해방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냉전 구조는 한국전쟁이라는 열전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협력과 저항의 레토릭을 반복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 또는 해소해 낼 때, 설령 그 해소방식이 2국민 2국가 체제의 완성이라고 해도, 협력과 저항의 레토릭을 넘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더불어 저항의 기억은 분명 과대 포장되어 평가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나는 이것이 늘 못마땅하다. 그러나 협력의 기억은 가려지고 사라졌다. 지난 50여년간 너무 열심히 감추고 지운 탓에 흔적이 없어졌다. 협력의 기억, 더 정확히는 그 시대를 구체적으로 살아나갔던 사람들의 삶과 그 애환을 더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발굴하고,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이런 단순한 멜로 드라마의 레토릭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더 많은 기억과 더 많은 서사가 필요하다.
맨 마지막은 도노무라 마사루의 『조선인 강제연행』에 실린 역자 후기이다. 여기서 김철은 위안부 생존자로 오키나와에서 살아오던 배봉기를 들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일본이 패전했을 때, ‘우리 편이 져서 분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조총련이 이분을 보살핀 후, 돌아가신 후 1991년 추모기사에는 미군기지가 있는 남조선은 가고 싶지 않고, 평양에서 보신탕을 먹자고 약속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쓰고 있다. 대만에서 자신이 어디로 끌려왔는지도 몰랐다고 회고하던 피해자가 20여년 후 우리가 없었으면 오늘의 대한민국도 없었다며, 자신을 독립운동의 선구자라고 말하는 사례를 들고 있다.(266) 여기서 김철은 우리 편이 져서 분했다거나, 어딘지도 모르고 좌절했다는 피해자로서 피해자다운 진술은 참된 자기 표현이라고 말하는 반면, 남조선의 미군기지와 독립운동은 각각 남한과 북한이 심어놓은 환상적 주체화로, 국민주체로 호출되어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 일이라고 평가한다.(227) 나는 위안부 할머니나 위안부 피해자라는 호명보다, 위안부 생존자라로 말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오키나와의 배봉기의 경우, 오키나와는 다름 아닌 미군기지가 있는 곳이며, 기지는 오키나와의 삶의 가장 큰 문제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군기지로 가득한 오키나와에서 줄곧 살았던 배봉기가 미군기지 있는 남조선에 가지 않겠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허위의식인지 모르겠다. 배봉기의 삶은 전쟁으로 일단락되고 봉인되지 않았고 계속 이어진다. 그의 기억은 삶 속에서 재해석되고, 또 다른 주체화로 이어진다. 이 변화는 강제된 것도, 허위의 환상도 아닐 수 있다. 이런 변화를 환상으로 보는 건 지식인의 오만이다. 절망과 좌절 끝에 모든 것을 포기했던 피해자가 어느날, 자신이 없으면, 대한민국도 없다고 표현하는 것은, 김철이 말하는 앱젝트로서의 존재로서 자기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위안부 생존자는 귀국해서도 갖은 차별과 손가락질로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지도 못하고, 후유증으로 아이를 낳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그들은 대한민국에서도 계속 앱젝트로 살았다. 그리고 자신 같은 앱젝트의 존재가 대한민국의 경계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알고 본격적으로 성원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김철이 김수영에게 그리고 박유하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요구하던 바로 그 성원권이다. 그 성원권을 획득하고서, 앱젝트가 살아남은 것이 독립운동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다케우치가 말하는 루쉰의 노예가 자기를 직면하고 저항한 낸 것이다. 앱젝트가 앱젝트가 되었을 때, 자신이 위안부 생존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다가 사람들 앞에서 공표하고 나온 그 순간 그들은 자유를 얻고 성원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금 주체화하게 되었다. 이렇듯 사람은 누구나 일생을 거쳐 자기 인생을 새롭게 고쳐쓰고 다시쓰면서 주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김철의 자기 고백적 글을 보면,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김철은 자기 인생을 고쳐써도 되지만, 왜 위안부 생존자는 자기 인생을 다시 쓰면 안되는가. 왜 그들의 감정과 느낌은 1945년 8월에 멈추어 있고, 고정되어 있어야 하며, 그때 그들이 느낌 감정과 생각만이 진짜인 것인가. 이거야 말로, 위력에 의해 강요받은 성관계를 할 수밖에 없었던 미투 피해자들에게, 그때는 동의하지 않았었느냐고 캐묻는 격이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서 가장 신경이 쓰였던 부분은 위안부들의 증언이 피해자 단체인 정대협에 의해서 왜곡되고, 다른 증언은 봉쇄되었다는 부분이었다. 피해자 단체가 무엇을 봉쇄했는가? 박유하가 보기에 그들은 피해자들의 순수한 심경, 때론 협력자이고 동조자였으며, 연민의 감정을 느꼈던 그 순수한 심경을 숨기고 민족주의로 오염된 거칠고 정제된 민족주의의 서사 만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것을 피해자 단체의 왜곡이나 조작이라고 보는 부분이 나는 마음에 걸렸다. 실은 이런건 모든 성폭력 피해자 단체가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고, 폭력의 대상이 된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을 알려주며 증언과 싸움을 북돋우는 일이다. 나는 정대협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해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에 대한 판단은 실은 유보되어 있다. 더욱이 피해자 단체의 활동을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피해자들이 피해자 단체에 의해 왜곡된다는 생각, 이 생각의 배경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순진무구한 원주민 처녀라는 인식이 깔려있다고 본다. 피해자들의 원초적 감정을 발견하려는 태도야 말로 제국주의의 핵심이다. 제국주의와 엘리트주의의 시선이 읽혀서 내게는 거북했다. 게다가 피해자들이 지칭하는 민족의 꽃이라는 명칭이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가 꽃은 순결해야 하는데, 그들은 더럽혀졌기 때문인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민족의 꽃이라는 내셔널리스틱하면서도 가부장적인 상징이나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런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 다른 사람들에 비추어서 볼때, 그들이 자신을 민족의 꽃이라 지칭하면 왜 안되는 건가. 나는 영웅이나 메시아 자꾸 등장하고, 그들을 떠받드는 것도 반갑지 않지만. 그들에게 어떤 해석을 강요하는 것도 딱 질색이다. 앱젝트로 사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비루함을 감당하는 만큼, 자유를 얻을 것이다. 이렇게 길게 쓸 작정이 아니었는데. 쓰다보니 자꾸만 길어진다. 책을 펼쳐들었을 땐 공감했는데, 읽다보니 머뭇거리게 되었고, 글쓰기는 생각을 바꾸어 버렸다. 어쩔 수 없다.
2019.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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