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에게 영감을 준 ‘복학왕’이라는 웹툰. 아직도 네이버에 연재 중인 모양이다.
최종렬, 『복학왕의 사회학: 지방 청년들의 우짖는 소리』, 오월의 봄, 2018.
지방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다는 이야기. 소재의 흥미로움. 언론을 통한 소개. 막상 펼쳐보니 프롤로그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좀 간단히 말하기 어려운데, 한두마디로 폄하해 버릴만큼 가볍지는 않지만, 문제가 없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우선 「복학왕」이란 웹툰을 아예 본 적이 없어서.
“성실하게만 하면 좋은 성적 받으리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가? 나는 지방대에서 10년 이상을 가르친 요즘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성실이란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주어진 매뉴얼대로 하는 것이다. 영혼 없이. 어차피 나는 노력해도 성취를 이룰 수 없으니 성실하게라도 임하자는 생각이 지방대생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23)
프롤로그를 읽어나가다가 눈이 멈췄다. 최종렬은 지방대생을 다루는 부분에서, 그리고 지방대생의 부모들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서 여러번 이 성실의 문제를 제기한다. 지방대생은 성실하다. 지방대생들의 부모도 성실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성실이 통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성실이 통하지 않는 세계로 나아갔다가는 좌절하고, 자신들의 성실이 통하는 영역으로 되돌아간다. 요는 그런 주장이다. 이 부분의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문제제기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생각보다 상세한 담론이 전개되지는 않는다.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방대생에게 최고의 가치는 가족의 행복이다. 현재는 부모에게 최대한 손 벌리지 않는 것이 가족의 행복을 구성하는 길이다. 앞으로는 어떻게든 평범한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다. 이러한 가치는 성찰적 겸연쩍음을 통한 방식으로 추구한다. 가치를 추구하는 수단으로는 주변의 습속이있다. 절대 목적 수단 범주를 통해 자기계발에 나서지 않는다. 지방대생은 이러한 가족주의 코드를 특유의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로 실천한다.”(36) 어찌보면, 이 책 전체에서 그가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의 요약이다. 그는 이런 내용을 현재 지방대생, 지방대 졸업생, 지방에 남은 경우, 서울로 진출한 경우, 서울로 갔다가 되돌아 온 경우, 지방대생 부모로 나누어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기술한다. 여러가지 한계 때문에 일반화를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 대한 일종의 분석적 예시analytic illustration을 추구한다고 미리 변명도 한다.(39) 이런 내용들은 책 전체를 통해 펼쳐질 것이다. 이 책에서 분석대상으로 삼는 사례를 대구에 위치한 세 대학의 재학생과 졸업생 그리고 학부모다. 여기서 대구경북지방의 지거국(지방거점국립대)인 경북대는 제외한다. 구체적인 학교명은 나오지 않으나, 저자가 재직하는 계명대가 포함되기는 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경북대는 S대로, 그 외의 지방대를 A대, B대, C대로 표기한다. 보통 서울을 기준으로 삼으면, 서울이 아니면 모두 지방 혹은 시골이지만. 실제 그리 단순하지 않다. 여튼, 이 분석 대상에서 지방거점국립대는 제외되어 있다.
지방대생의 가치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 안에 머물자이다. 최종렬은 자신의 설명을 김홍중의 생존주의 세대 코드와 비교한다. 김홍중의 생존은 경쟁에서 낙오되지 말자 이지만, 지방대생에게 생존은 “가족 안에 머물자”라고 말한다. 지금처럼 가족 안에 살자라는 것.(56) 가족주의는 이 책 전체에서 가장 강조되는 부분이다. 가족의 문제에 대해서는 뒷부분에서 논하려 한다.
최종렬은 지방대생의 에토스를 성찰적 겸연쩍음으로 정의한다. 경쟁에 뛰어들어봐야 실패할 것이 뻔해 시도하지 않지만 겸연쩍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지방대생의 실천적 자아 이미지는 기업가적 자아, 동물, 속물이 아니다. 지방대생의 실천적 자아 이미지는 가직도 가족과 친구 안에 머물러 있는 ‘가족적 자아’를 지닌 사람이다.(66) 최종열에 따르면 어빙 고프만의 용어로 지방대생을 설명할 때, 상황에서 벌어지는 활동에 관여를 느슨하게 한다. 인지적 정서적 몰입상태나 심리적 자원의 동원에 대한 사회적 규범과 스타일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상황예절situational properities이다.(71) 습속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다. 그것은 잘 짜여진 행위전략이다.(73) 지방대생은 앎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알지 않으려는 의지, 자기계발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자기보존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습속의 왕국! 이들에게는 세상이 온통 알 수 없는 혼돈이 아니다. 습속을 따라 살아가면 세상이 너무나 자명한 사회적 사실로 다가온다 평범한 사람이 되어 살아갈 것!(77) 지방대생이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은 무엇보다도 주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서 오며, 그러려면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습속에 대해 친숙해져야 한다. ‘습속의 왕국’에서는 습속이 행위를 안내하기 때문이다. 이를 푸코의 자기통치에 빗대서 ‘습속통치’라 부를 수 도 있을 것이다. 튀지 않고 주변과 잘 어울려 지내야 한다.(80-81) 지방대생은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의해 신자유주의 주체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방대생은 자기계발 담론과 생존주의 담론 같은 집합표상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자기계발 담론을 사용할 때도 ‘적당주의’라는 특유의 집단 스타일로 걸러낸다.
이 정도가 지방대생의 요약이다. 실패할 것이 뻔해 도전을 망설이며, ‘습속’을 따라 행동하고, 튀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주변 사람과 소소한 행복을 누리려고 한다. 그것은 가족인 동시에 거대한 의사가족이다. 그리고 뭐든 적당히 함으로써 부담을 덜어내고, 위험을 피한다. 하는 일은 매일매일 술먹는 일. 사람들이 좋아서 계속되는 하루하루. 복학생과 신입생 여학생이 연애하고, 졸업할 때 되면 깨지고. 그리고 각자. 사실 이 정도 읽다보니 지방대생을 분석하려는 것인지, 지방대생을 고급스럽게 비하하려는 것인지 구별이 어려웠다. 연구라는 이름의 고급스런 경멸은 현장에서 흔한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내 머리 속에서는 너무나 흔한 장면이 연상되었는데. 그것은 일본 드라마에서 아주 흔히 보이는 소극적인 일본의 젊은이들의 행태였다. 튀려고 하지 않고, 튀면 경계를 받고, 스스로도 그렇도. 무엇보다 ‘습속’ 남들이 하는대로 따라하고, 습속을 따른 행위는 안전하다고 인정받고. 그러면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려고 노력한다. 이거야 말로 일본의 ‘사토리’ 세대와 한국의 ‘소확행’이 동시에 추구하는 활동이 아닌가. 게다가 일본이야말로 모든 것이 가족이다. 직장도 가족, 지역사회도 가족. 심지어는 반복되는 술자리가 이어지는 식당이나 바도 마스터를 중심으로 유사가족을 형성한다. 한국에도 크게 유행한 『심야식당』을 생각해 보라. 『심야식당』의 한국판이 실패한 것은 메뉴가 안맞아서도 아니고, 식당이 럭셔리 해서도 아니고, 식당이나 술집의 마스터를 중심으로 유사가족이 형성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다. 지방대생이란 서울과 비교해서 아주 다르고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전혀 다른 담론이 요구된다고, 최종렬은 야심차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반대로 어디서 보면 너무나 흔한 형태라서 논의가 안될 정도다. 80년대말의 대학생활 모습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때도 그렇게 날마다 술로 지내면서 놀고, 놀고, 또 놀지 않았나. 그때 모습들이 화석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지방대생은 과연 그렇게 퇴화된 존재인가? 책을 읽어가면 갈 수록 의문은 커져만 갔다.
지방에 사는 지방대 졸업생의 경우 눈에 띄는 대목은 포항에서 시어머니에게 두 아이를 맡기고 기른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포항에는 아직 ‘동네’ 가 살아 있어서, 아이를 지역공동체가 함께 키운다고 한다.(99) 저자의 가족에 대한 모순적 이해가 반복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역에서의 삶이 가능한 이유는 주거비가 싸기 때문이다. 다른 물가도 저렴하지만, 가장 큰 차이를 가져오는 것은 주거비인데. 책 전체를 걸쳐서 수십번 강조되고 있다. 조금만 저축하고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면 아파트를 마련해서 살 수 있다. 지방대 졸업생 혜영의 특징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친밀성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107)이다. 자신이 익숙한 사회를 떠나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평범함이 반복된다. 평범하게 평범하게. 그 평범에는 실은 예사롭지 않은 의미가 있다.
지방대생이라도 모두 같지는 않다. 대학생활 때 대순진리회 그 후 연구소 행정일을 하다가 증산교에 심취했던 경우가 있다. 집안이 어려워져서 문예창작학과를 가지못하고 간호학과에 억지로 들어갔던 누나의 자살의 원인이 가족의 문제일지, 조상의 문제일지, 사회의 문제일지 찾으려다 보니, 특이한 종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삶이 고통에 빠지면 종교를 찾게 되기도 한다.(123) 그러고보니 이건 대구경북 만의 일은 아니었다. 광주의 전남대는 신천지가 가장 효과적으로 포교한 곳 중 하나다. 종교, 신흥종교, 특이한 종교, 사이비 종교와 지방대 문제도 실은 꼼꼼히 따져 볼 문제 중 하나다만. 이 책에서는 이 문제는 슬쩍 넘어간다. 뭐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니까.
최종렬인 연구한 지방대 졸업생 중에는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운동을 추구하는 방식에서도 성찰적 겸연쩍음을 보인다. 그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의장님이 더 낮게, 더 이름 없이를 모토로해서 그렇다고 한다. 이를 사회운동도 아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못하는 것도 아닌 중간 정도보다 약간 잘하는 게 습속에 맞는다고 평가한다.(152) 흐음.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었다. 뭔가 흥미롭긴 한데 이해가 전혀 안 됐다. 이해도 못하면서 오기가 생겨 끝까지 다 읽었다. 하지만 결국 포기했다. “아, 이거는 사람이 읽는 게 아니야. 사람이 읽는 건 아니고 이거를 읽는 건 이상한 거야.”(155) “당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읽었는데 이해가 전혀 안 됐다. 하지만 공부 모임에 발제를 해야 해서 무조건 읽어야 했다. 이해가 단되면 암기를 했다. 어떻게든 해냈다. “약간 암기식으로 했었어요. 아, 그때 토하는 줄 알았어요. 방학 때 계속 읽었어요. 그때는 밑줄 긋고 써가면서 했던 것 같은데. 나중에 되니까 그냥 밑줄 긋고 외우기 바빴던 것 같애요.”(165)
마침 공부모임에서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좀 꼼꼼하게 읽고 있던 참이라 한층 공감이 가면서 웃음이 나왔다. 푸코의 책을 대학교 1학년 때 혼자서 읽었다니. 정말 대단하다 싶으면서 이해가 안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푸코를 읽은지 30년이 다되어 가는데 아직도 읽어도 모르겠는 곳 천지다. 대학교 3학년 때던가, 혼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붙들고 읽어내려 가던 생각이 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외에 지금 생각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조만간 새로 읽을 작정이다. 하버마스의 사례는 더 충격적이다. 교수가 지도하는 공부모임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대학 1학년. 대학 1학년에게 교수가 지도하는 공부모임을 하면서 하버마스를 그것도 『의사소통행위이론』을 발제시키는 것이 정상인가. 1학년이면 이 책에서 말하는 고학력자 즉 스카이 학생들도 이해를 못하는 건 당연하고. 그걸 요약해가면서 외웠다니, 존경심이 생긴다. 진심이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시도를 못해봤다. 혹시 흔히 그렇듯 교수가 자기가 공부하고 싶어서 모임을 만들고 대학원생으로 모자라서 학생을 끼워넣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면 뭔가 하고 싶거나. 강독을 했다면 또 이해가 된다. 공부를 시키겠다는 것인지, 공부를 가르쳐주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 책에서 말하는 현실세계 즉, 서울과 스카이 대학의 세계를 맛보게 하고 지레 포기시키려는 것인지. 나에게 충격을 준건 하버마스나 푸코가 어렵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 스카이대학 출신을 ‘고학력자’라고 부르는 지점이었다.(55) 여기에 실은 지방대생의 자기인식의 중요한 핵심이 있다. 같은 학위라고 해도 같은 학력이 아닌 것이다.
대학원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오는데.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을 진학하려는 학생 이야기가 나온다. 왠지 친근감이 간다.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가 되고 싶었는데 집에서 반대해서 정치학을 공부한 경우다.(173) 더욱 친근감이 생긴다. 그는 지방대를 졸업하고 지방에 남은 학생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가치 있는 삶을 가족주의의 용어로 정의하지 않는 경우였다. 그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용어를 쓴다. 문제는 그가 종교를 통해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책대학원을 졸업할 때 상을 받았기 때문에 더 공부를 하기 마음 먹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최종렬은 인터뷰 대상자들의 행동을 평가할 때, 악셀 호네트의 ‘인정’에 관한 이론틀을 계속 이용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사의 기능이다. 이건 저자가 보론에서도 말하는 바이다. 지방대생 특유의 자조적 서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제시되는 또 다른 서사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제일먼저 제시되는 서사는 종교였다. 하나는 특이한 종교, 다른 하나는 기독교. 나중엔 불교도 등장하고. 그런데 이런 서사들이 과연 지방대생의 가족주의와 충돌하는 것이었을까.
이 책 곳곳에서 내가 발견하는 건 지방대생들의 문제보다 지방대 교수들의 문제가 더 커보였다는 거다. 곳곳에서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는 모습이 나온다. 도대체 무슨 배짱인 건지. 학생이 공부하고 싶어하면, 이 책의 표현대로 스카이나 서울대 대학원에 재수해서라도 진학하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요즘은 서울도 대학원은 미달이다. 인문사회계라면 더더욱. 그 학생의 장래를 정말 고민한다면, 차라리 유학을 권해야 하는 거 아닐까. 모든 결과를 감수하고 공부를 하겠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지방대생들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자신들도 서울에 있는 대학들과 똑같이 학부 차려놓고, 대학원 석사과정 차려놓고, 대학원 박사과정 차려놓고 똑같이 운영하려고 한다. 거기서만 공부할 수 있는 특색이 있는 학과라면 모르겠다. 대구경북의 예를 들면 대구대 장애학과(전국에 유일하다). 대구대 특수교육과도 예전부터 그 바닥에서 유명하다. 그렇지만 정부 프로젝트 되었으니 장학금 받을 수 있다고 권유하면서 학생을 데려오고, 정작 중간에 그 프로젝트가 중단되자, 학생은 벌어가면서 공부를 해야하는 처지가 되는 이야기도 나온다. 정부 지원이 끊기면 그걸로 그만이다. 물론 상황이 이렇다 저렇다라고 그러니 이렇게 저렇게 될 수 있다고 미리 알려줬을 수도 있다. 여기 나오는 지방대생들의 특성대로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이 무엇이 문제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것 실은 그게 바로 문제다. 정작 자신들은 높은 연봉에 연금을 확보해 놓은 65세까지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업을 확보한 처지들이 아닌가. 학생들은 대부분이 서울의 스카이대 출신인 교수들을 보는 시선도 남다르다. 교수들을 자신들의 동류로 보지도 않는다. 그것은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이책 곳곳에서 그런 차이가 또렷이 느껴진다. 그러나 지방대 교수들의 처지도 마냥 한가하지만은 않다. 그들도 자신들의 직장을 유지시킬 수 있는 퍼포먼스가 필요하다. 인구절벽인 시대에 학생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으면, 그나마 있는 일자리도 날아갈 수 있다. 65세 정년이 보장된다고 해도, 자기 과에 학생들이 충분히 들어오고 유지가 되지 않으면 권위가 서지 않거나 학내 권력이 약해지거나 때론 앞날이 위태로워질수도 있다. 학과에 학생도 모집하고, 대학원생도 모집해서 운영은 해야 한다. 그러나 대학원생은 이런저런 어려움과 결점을 무릎 쓰고, 졸업한다해도 아무런 보장이 없다. 요즘엔 스카이도 보장이 없다지만, 그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당연히 그게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고들 생각하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면 대학원도 당연히 달라야 한다. 물론 그럼에도 스스로 원해서 또는 필요에 의해 공부하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만 존속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있으면 학생 뽑고, 없으면 말고. 안되면 대학원은 문닫아도 무방하지 않은가. 아니면 지역주민을 위한 성인재교육 기관으로 탈바꿈하거나, 물론 그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정 어려우면 대학원 만큼은 몇 개 학교가 통합해서 운영해도 되지 않나. 대구경북 같으면, 책에서 S대로 지칭하는 경북대에 학적을 두고, 필요한 사람이 지도하는 식으로 유연하게. 그러나 한국에선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게도 개인에게도 ‘나와바리’도 중요하고, 돈도 중요하고, 대학원생에게 등록금으로 받던, 장학금이나 프로젝트로 받던. 대학과 교수도 실은 현상유지만을 바라고 있다. 문만 열고 학생만 모집해도 등록금들고 학생들이 몰려오던 그런 시절을 기대하고 있다. 그런 시절은 지나갔고 다시 오지 않는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지방대 학생과 졸업생을 향해 들이댄 시선을 자신을 향해 들이대야 하지 않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들은 지방대의 구성원이 아닌건가? 그들은 지방에 속하지 않는가?
서울로 간 지방대생은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삶은 빡빡하고, 관여도가 높아야 살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세팅이 느슨한지 빡빡한지 가늠한 후 자신의 행위를 구성한다. 느슨한 세팅에서는 습속에 따라, 그러나 계속 느슨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서울로 이주하며, 빡빡한 세팅에서는 그에 맞춰 행위를 구성한다. 그러나 목적 수단 범주를 통해 자기계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200) 지방대생은 자기계발에 나서지 않는다. 그러니 푸코와 그를 인용한 서동진은 틀렸다. 반복되는 이야기다. 서울로 온 또 다른 사람은 가족적 자아를 가지고 살면 경쟁에서 낙오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집을 나와 홀로 큰 세계에나가는 체험을 해야만 삶을 치열하게 살 의지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가족 안에 머무르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208) 서울에서의 삶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는 별말 하지 않는다. 지방에서 가족 구성원은 서로 큰 기대를 하지 않으며, 부모는 자녀가 평범하다는 사실을,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밀어주고 뒷받침해주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서로 기대를 낮춘다. 말 그대로 평범한 존재로 지금까지 살아 온 방식으로 살며, 학과 역시 서로 가족 같은 작은 공동체를 구성한다. 사회학과가 그렇다.(217)
서울에서의 삶을 풀어나가는 지방대 졸업생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하나는 지방에서의 자기의 삶과 서울에서의 자기의 삶에 서로 다른 기준을 부여한다. 당연히 서울의 삶에는 긴장과 부담이 많다. 비싼 주거비로부터 시작해서 삶 자체가 고달프가. 게다가 지방대 출신이라는 한계를 안고 살아간다. 중요한 프로젝트는 주어지지 않는다. 올라가려해도 한계가 보인다. 그런 좌절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런 사실에 대해 그리 크게 분개하지도 않는다. 분개해야 자기만 지칠 뿐. 그래서 다시 한 번 평범을 되뇌인다. 나는 평범하다. 나의 부모는 평범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상처주지 않는다.
서울에 갔다 되돌아 온 경우도 적지 않다. 한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유사 가족 안에 넣어 살아가다가 졸업하고서는 생존주의자로 내몰린다. 생존 경쟁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한다. 그는 지방대생이라 어차피 해도 안 될 거라는 패배감과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성찰적 겸연쩍음에서 벗어났다. 대신 절실함과 단기간 극도의 몰입으로 공무원시험을 통과한다. 그러나 경쟁에서 한 번 이기자 다시 가족적 자아로 자신을 정의하고, 습속에 따라 산다. 다시 유사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245-246) 그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경우와 달리 경쟁에 성공한 경우다. 그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바꾸는 계기 역시 서울 생활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작은 성공 후 그는 다시 옛 습속과 유사 가족주의로 돌아간다. 비록 급여는 많지 않지만, 보장되는 정년과 연금, 적은 주거비와 업무부담으로 여유롭게 살면서, 재테크도 하고 있다.
최종렬은 지방대 졸업생을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로 명명하다. 지방대 졸업생은 재학생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행복을 가치고 설정한다. 가족의 행복이란 생존 유지에 필요한 생필품이 온전히 갖추어지고 몸도 아프지 않은 안락한 상태를 뜻한다. 이 역시 가족이나 유사 가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주어져 있으며, 주어진 상황에 느슨하게 관여하면서 가족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목적 수단 범주를 통해 일상을 체계적으로 조직하지 않아도 주변의 습속을 따라 살아가면 가족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지방대생의 가족은 자기가 태어나 자란 지향 가족으로 부모처럼 평범한 가족을 꾸려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부모가 구성한 가부장적 핵가족을 모델로 가족의 구성과 성공을 꿈꾼다.(248) 결혼한 경우는 자신이 새로 구성한 생식 가족을 중심으로 행복을 꿈꾼다.(249) 지방대 졸업생도 사치를 원하는데, 여분의 물건인 사치스러운 대상을 추구하기 보다 특정 활동을 통해 감각적·쾌락적 경험을 추구한다. 이는 리포베츠키의 나르시시즘적 개인주의narcissistic individualism를 떠올리게 한다.(260) 지방에서의 삶은 이런 적당주의를 용인하는데, 이는 가족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와 함께 살면 주거비와 식비가 해결된다. 독립한다 해도 수도권보다 싸다.(267) 지방대 졸업생이 서울에서 몰입주의의 길을 걸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몰입주의를 실천하려면 성공의 가능성이 보이고 좋아서 해야 하는데, 지방대 졸업생의 경우 남아서 버텨야 하기 때문에, 따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존주의자가 되는데, 흉내 내거나 하는 척해서는 승자가 될 수 없다.(271) 특히 지방대생의 사회자본은 확장성이 없다. 지방대생의 배경적 기대의 핵심은 서로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고받을 재화와 서비스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275) 그렇기에 애초부터 눈높이를 낮추어 남들이 꺼리는 바닥에서 성실하게 살아가기도 한다.(279) 게다가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면 체화된 문화자본이 없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어다.(282) 그렇기에 문화자본 없이 단기간의 집중 노력 끝에 붙을 수 있는 9급 공무원이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공정한 게임이다.(283) 지방대생은 객체화된 문화자본을 이용한 미적 감흥을 느끼고 싶지만 지방에는 문화시설이 열악하고, 술마시고, 먹고, 게임할 시설만 있다. 그래서 지방대생은 해외여행을 많이한다.(283) 지방대 졸업장은 문화자본이기는 커녕 고달프게 짊어져야 할 짐이다.(286) 여기서 한층 더 부족한 것이 문화화용능력으로 지방대 졸업생이 구사하는 서사의 장르는 ‘가족 휴먼 다큐멘터리’라고 부를 만하다. 폄범한 사람이 지향 가족에서 시작해 생식 가족으로 이동해 가는 소소한 일상, 특유의 성실성, 남을 탓하지 않고, 자기에 책임을 돌리며, 배우자와 가족을 꾸리고 세상 풍파를 이겨나간다.(288) 다만 지방대 졸업생에겐 공동체 해체와 실향의식으로 정의되는 휴먼 다큐멘터리, 압축적 근대화를 통해 고향을 잃고 가족이 해체되었다는 담론은 통하지 앟는다. 고향은 상실되지 않았으며, 가족 또한 굳건하다. 가족은 등산이나 탐험을 할 때 근거지로 삼는 베이스캠프처럼 활용된다.(290) 그러고 이들은 부부 중심의 가부장적 핵가족을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남편은 생계 부양자이고 아내는 하우스키퍼다. 이것이 가족 휴먼 다큐멘터리가 되는 이유는 지방대생의 능력으로는 부부 중심의 가부장적 핵가족을 꾸릴 수 없다는 데 있다. 남성은 없는 능력에 가부장 노릇하르나 죽어나고, 저임금을 벌충하기 위해 장시간 노동도 마다하지 않으며, 여성은 돌봄 노동도 하며 임금노동도 한다. 겉으로는 평범한 중산층의 가부장적 핵가족의 삶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청중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가족 휴먼 다큐멘터리가 펼쳐진다.(293)
가족 이야기는 조금만 더 뒤로 미루자. 우선 지방대생이 바라는 행복이라는 것의 내용이 생각보다 소박하다는 점에 눈길이 간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문화자본 또는 자본 개념의 남용이다. 부르디외가 말한 교양이나 예절이라는 문화자본 개념의 유효성을 문제삼자는 것이 아니다. ‘영어’가 문화자본일까? 미국에 어학연수 다녀와서 부드럽게 굴러가는 완벽한 미국식 영어를 구사한다거나 영국에서 공부하고 우아한 퀸즈 잉글리쉬를 구사한다면 그게 문화자본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나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토익 등 공인 영어시험의 점수다. 그 이상의 영어능력을 보통 취업과정에서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학원을 열심히 다니면 딸 수 있다. 물론 학원비와 시간과 관심과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그렇다 자원이 동원되어야 한다. 영어점수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자각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그런 것을 이미 몸에 익히고 있는 경우와는 비교가 되겠지. 그렇다고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을 남용해서는 곤란하다. 영어 능력이라는 문화자본을 몸에 밴 능숙함으로 정의한다면, 인 서울 대학생 중에도 많지 않다. 물론 지방대생의 눈으로 보면 큰 차이가 느껴지겠지만, 그리 큰 차이가 아니다. 작심하고 노력하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듯이. 지방이 문화적으로 소외된 것도 사실이고, 문화자본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지방에는 문화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책에서 말하는 미술관은 물론 공연장과 좋은 공연도 모두들 서울에 몰려 있다. 그래도 영화는 이제 전국이 평등하게 동시에 개봉하고 동시에 내려간다만. 그래서 서울은 문화자본이 많은 것일까? 미술관이 문제라면 주말에 KTX로라도 다녀갈 수 있다. 곁에 있지는 않아도, 접근 불가능하지 않다. 실제 지방에 비해 서울에 월등히 많은 것은 문화를 파는 소비시설이다. 내가 오랜 서울살이를 끝내고 수도권의 한적한 매립지로 이사해 보니 그것을 알겠다. 서울을 떠나니 인터넷 쇼핑 이외에는 마트에서 생필품을 사고, 가끔 식사하는 경우 외에는 돈을 쓸 곳이 없다. 우아하게 소비할 곳이 없는 것이다. 문화자본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소비할 곳과 소비할 것이 부족한 것이다. 우아한 문화적인 소비만으로 문화자본이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어려서부터 몸에 배어야 하는 그런 것이다. 어려서 악기를 배우고,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환경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돈과 시간만 아니 돈만 충분하다면, 서울에 있는 식당과 미술관과 공연장을 통해서라면 충분한 문화적인 소비가 가능하다. 그런데 서울살이하는 이들 중에 얼마나 그렇게 우아하게 소비할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될까. 서울살이가 너무 이상화된 것 아닐까. 지방과 서울을 피상적으로 단순 대조항으로 삼다보니 지나치게 논의가 거칠어진 것은 아닌가.
마침내 지방대생의 부모 이야기는 지방대생과 지방대 졸업생에게 나타나는 보수주의적 가족주의의 뿌리를 보여준다. 보수적 권위를 지닌 가부장 밑에서 자라고 가부장적 가치를 몸에 익힌 그들이다.(297) 그런데 여기서도 삶의 가치를 잃었을 때, 기독교를 만나 삶의 의미를 되찾는 사례가 나온다.(308) 지방대생 부모는 자기 삶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그런대로 잘 되었고, 열심히 산 덕분인지, 모든 것을 남의 도움 안받고 이루었다. 남을 탓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데. 이를 성찰적 자신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뒤에는 성찰적 겸연쩍음이 감춰져 있으며, 이는 자아를 가족을 넘어 지역에 놓게 되면 성찰적 자괴감으로 약화된다.(312) 이런 삶을 구성하는 것은 가족주의 습속이며, 평범한 사람이 되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328) 그런데 문제도 발생한다. 지방대생 부모에게 살아있는 가부장적 핵가족 규범이란 중산층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러나 지방대생 부모는 중산층이 아니기에, 성별분업노동은 규범적으로 강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모장의 희생이 필요하며, 지방대생 부모는 특유의 성실주의 집단 스타일로 가부장적 핵가족 규범을 실천한다.(344) 대구 경북 사람은 근본이 순하다고 흔히 말하며 그것에 자부심을 느낀다.(346) 나도 여러번 들어 본 말이다. 동의는 잘 안되지만. 사람은 각자 다르니까. 지방대생 부모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장르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성격을 띄며, 이는 근대화 과정 중에 탈성화된desacralized 세계에서 힘을 잃어버린 기족의 도덕을 여전히 자신의 덕성으로 삼아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이 겪는 온갖 우발적인 수난이 핵심을 이룬다. 개인이 고통받는 이유는 사회가 이미 가부장제를 낡은 도덕으로 만들었는데도 인물들이 여전히 이를 자기의 덕성으로 살기 때문이다. 지방대생 부모는 부권적 사회에서 가부장적 사회로 나아가는데, 이런 전이과정은 그대의 가족 로망스의 특징을 지닌다. 근대 기획은 전통 부정의 경향을 띈다. 그러나 지방대생 부모에게는 아비 부정과 정치적 고아의식이 드러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부정할 만큼의 커다란 악이 아니라, 능력이 부족한 연민의 대상이다.(355) 지방대생 부모의 성장기는 모험을 떠나지 않기에 성장소설의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356) 특히 가족의 세대 유전의 경우 서울의 세대 전쟁 담론, 선한 청년 세대가 악한 기성 세대로부터 착취당한다는 담론은 누군가가 이를 활용해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것일 뿐이다. 현실은 빈곤한 부모와 빈곤한 자녀의 쌍봉형 가난이 두드러지고 있다.(364) 지방의 가족 공동체는 견고하며,지방의 부모 세대는 형식상 부부 중심의 핵가족을 구성한 듯하지만, 실상은 부모를 봉양하는 확대가족의 성격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365) 지방대생 부모도 자녀 세대가 자신들과 같은 삶을 반복해서 사는 것을 원치 않으며, 진짜 중산층 가족처럼 살기를 바란다. 그냥 평범하게 가족을 꾸려 살아가면 좋겠다는 바람은 사실상 자녀가 중산층 이상으로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계층 상승 언어를 직접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367) 정말 문제는 지방의 열악한 삶이 단지 사회구조적 차원의 서울 중심주의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보수주의적 가족주의의 언어를 통해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374)
여기서 드디어 그토록 여러 사람이 입에 올리던, 거의 모든 지방대생과 졸업생과 부모가 입에 올리던 그 마력의 단어 ‘평범’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중산층 적인 삶을 소망한다는 것이다. 가족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그대로의 중산층적 가족의 삶. 계층 상승 욕구를 다시 한 번 표명한 말이다. 그러므로 평범이란 말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평범하게 살아 왔다는 말은 튀지 않게 습속의 왕국에서 살아왔다는 의미이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것은 중산층으로 살고 싶다는 이야기다. 이 양쪽에 모두 가족주의가 개입한다.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이 가족이란 무엇인가인데. 그 자신도 사회학자이기에 부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과 아내로 구성되어 상당기간 안정성을 가지고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면서, 자녀세대를 양육하는 가족제도는 근대의 산물이다. 그가 말하는 근대의 로망스는 바로 이 가족결합을 유지시키는 장치로서 사랑이 도입된 것을 말한다. 사랑과 성과 가족의 일체화는 그 자체로 근대의 이데올로기에 속하며 구미에서도 그 역사가 200년이 채 되지 않고,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 비로소 도입된 시스템이다. 최종렬은 ‘가부장적 핵가족’의 이상화라고 예리하게 짚어낸다. 중산층 가족을 지향하지만 현실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현실은 이상적인 핵가족이 아닌 빈곤한 확대가족의 형태를 띈다는 것. 이런 구분과 관점 자체가 근대 가족의 신화에 함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가족의식의 근대적 형성에 대해서 재론할 필요가 있을까.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이런 가족 로망스에 의한 근대적인 가족 담론이 형성된지 백년은 커녕 본격적으로 대중속으로 확산된 것은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되고, 전쟁을 겪은 이후이다. 즉 이 지방대생의 부모 세대는 자신들이 평범하다고 말하는 가족 로망스에 의한 가족 멜로 드라마의 가족을 처음 경험한 세대이다. 부권에서 가부장으로 이동했다는 평가 역시 평면적이다. 부권에서 가부장으로 이동하려면 부권이 있어야 한다. 부권이 있으려면, 가족이 보유한 재산이 있어야 한다. 토지개혁 즉 농지혁명 이전이라면 그것은 소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된다. 근대가 벗어버리고 단절했다고 하는 전통은 실은 모두의 과거가 아니라 특정 계급의 과거였다. 근대 가족은 그런 서사를 모두가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일본이 메이지 유신기에 사무라이의 윤리와 도덕을 변형시켜 국민도덕으로 만든 것이 그렇다. 최종률은 마치 가족주의는 그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유구한 것처럼 말한다. 적어도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 습속의 왕국이라는 표현이 그렇다. 가족주의와 유사가족주의는 주어진 것 즉, 소여처럼 여겨진다. 물론 그 근원을 알 수 있는 수많은 습관들이 있고, 그런 근원에 대한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고 전개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전통이라는 기원을 가졌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실제로 그런 기원이 있는지, 그리고 그런 기원이 유지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런 기원이 있다는 식으로 전통적이라는 식으로 습속이라는 식으로 끊임없이 말해지고 서로간에 동의를 얻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구체적인 형태들은 형성된 것이며, 그것 역시 최근에 형성된 것이다. 재료는 오래된 것도, 외부에서 들어온 것도, 새로 만들어진 것도 있겠지만. 그러기에 무너지려고 마음만 먹으면 아주 쉽게 무너질 수도 있고, 오래가려면 아주 오래 갈 수도 있다. 그것은 담론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역량에 달린 문제다. 게다가 성장 드라마가 취약하다는 것은 꼭 지방대생 만의 경우가 아니다. 한국은 전반적으로 성장 드라마가 취약하다. 오히려 점진적인 노력을 통한 성장 드라마는 일본 특유의 담론이다. 미국에도 적지 않지만, 일본만큼 보편적이지는 않다. 일본의 아이돌들은 역량이 부족한 채로 출발해서 팬들이 그들의 성장을 염원하면서, 그 과정에 함께 한다. 그러나 한국의 아이돌들은 고된 훈련 후에 거의 완성품으로 출하된다. 여기에는 분명히 서로 다른 문화적인 코드가 있다. 한편, 부모세대를 죽이고, 극복하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다는 것은 한국 문학이나 대중 예술의 오래된 화두였다. 그와 동시에 복고적인 전통 회귀 역시 끊이지 않았다. 많은 경우 이때의 전통이 실제 존재했던 전통이라기 보다 상상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대구경북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겹쳐진 내가 외부자로서 본 광주전남의 풍경이었다. 정치적 투표성향을 제외해 놓고서는 자신들을 순진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가족주의, 유사가족주의, 과묵함, 습속 등 겹치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물으면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비슷할 것이다. 잘못한 건 많지만, 공은 인정해야 한다고. 평가가 바뀌는 부분은 전두환부터겠지. 대구경북과 광주전남은 지방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문화적으로 수렴될 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면 지나친 속단일까.
저자는 김덕영의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사회영역이 제대로 분화되지 않고 개인주의도 성장하지 못했다고 비판을 인용하며, 한국에서 가족적 인간관계, 가부장적 인간관계가 전 사회적으로 확대되었고, 미시적 가족과 거시적 가족 사이에 수많은 중시적 가족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시민사회가 아니라 가족사회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덕영의 비판의 타당성에 대한 평가는 제쳐두고, 최종렬은 김덕영의 진단은 서울에서는 반만 맞고, 지방에 오히려 더 잘 들어맞는 비판이라고 한다. 지방에서는 가부장이 살아 있으며, 성실하고 바르지만 무능한 가부장에 대한 연민과 가모장의 경험은 지방대에 들어가서 가족이나 유사가족 안에서 살아가는 지방대생들은 가부장을 부정하지 못하고 그 품안에서 살아간다고 평한다. 그리고 가족 사회 밖으로 나가지 앟은 이유는 ‘집’ 밖 노동시장에는 작은 박정희가 장악한 온갖 조직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기 멋대로 전횡을 휘두르는 가부장과 이를 떠받드는 가신 조직이 지방에는 수도 없이 존재하며,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과 온갖 갑질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서울에서는 갑질에 맞서기라도 하지 지방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데, 가족주의의 언어로 살다보니 가부장의 부당한 권위에 도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가족 밖의 성취주의란 다른 세계의 언어라고 평한다.(379-381) 지방에서의 삶은 이것이 본질이 아닐까? 가족주의가 본질이아니고, 사회 전체가 수많은 가부장들로 즉, 영역마다 직역마다 소위 토호들이 존재해서 지방 안에서의 공정경쟁이 이루어지지 않는 점이 아닐까? 지역 엘리트들이 서울 엘리트들과의 경쟁을 당연시하면서 지방 내에서 행사하고 있는 특권적 권력의 고착화 오히려 이것이 본질이 아닌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지방에서 내적 민주화와 분권화가 아닌가?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출산, 육아, 교육, 주거, 문화, 건강, 의료, 노인 부양, 실직 등 모든 짐을 떠안은 채 씨름해왔다. 국가가아 공적 의무와 책임을 가족에게 떠넘긴 일종의 가국체제家國體制라고 평한다.(381) 일견 올바른 지적이다. 실제 2018년의 전환기에서 복지가 가족 중심으로 구성된 것을 개인 중심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실은 정부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그 발걸음이 너무나 더디다, 이제사 부양의무제를 폐지한다지만 고작 그 정도다. 가家가 국國이 되어버린 공적 영역이 부재한 체제다.(382) 이 지적 자체는 옳지만, 이것을 마치 전근대나 전통의 산물인 것처럼 폄하하면 곤란하다. 공적 책임의 의무를 가족에게 떠넘긴 것이야 말로 산업자본주의 형성의 본질이 아니던가. 가국체제와 같은 말을 써서 한국에만 존재하는 매우 특이한 현상 정도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도 모든 이런 시절을 지나서 왔다. 한국인들이 선발산업국가이자 제국주의 경험을 한 나라들만 쳐다보고 그런 나라들과 수평적 비교를 해대는 통에 이런 특수화를 흔히 한다. 가족 이데올로기 자체가 근대의 상상의 결과물 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면서 그는 무슨 대단한 발견이기나 한 것처럼 “미적 체험에 대한 강렬한 열망!”(385)이 지방대생들이 원하는 것으로 지방대생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고리인 것처럼 말한다. 미학이 서사에 중요하다는 데 대해서는 어떤 이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고심하지 않는다. 게다가 문제는 그게 새삼스럽지 않고 마르크스가 오래 전에 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게 또 줄곧 비판하는 푸코가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푸코의 마지막 귀착점은 미학 흔히 실존의 미학으로도 불린다. 윤리학이라고도 한다. 에피멜레이아 헤아우투(자기배려)와 파레시아(진리발화)를 제시한다. 저자는 보론에서 푸코의 신자유주의 통시성은 영성을 상실한 존재를 만들어낸다며,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만들어낸 주체와 구별한다.(416) 물론 푸코는 자기의 논의를 도구상자(연장통) 같이 쓰라고 했으니 이런 사용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푸코가 말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통치성이라기 보다 자유주의 통치성이고, 신자유주의 통치성이란 해석자들이 만들어낸 용어다. 여기서 형성된 주체화에 대한 연구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사목권력으로 그리고 여기서 인용한는 영성에 관한 논의(『주체의 해석학』)으로 나타난다. 영성이 말하는 자기변형은 신자유주의적인 자기계발과 상반되는가, 그렇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마지막 몇 년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는 점점 고대 그리스와 초기 기독교의 자기배려와 자기돌봄 그리고 자기와 타자의 통치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푸코의 작품들이 어떤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지, 곧 그가 생전에 책으로 출간한 작품들과 13권에 걸친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들과 2권으로 요약된 640여개에 달하는 그의 기고문과 대담 녹취록들(Dits et ecrits)의 구성방식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보니 종종 이런 오해를 보게된다. 게다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미국과 일본에서의 강연들이 거의 모두 출판되고, 번역된 것도 꽤 많으니 더욱 넓은 독서를 권할 뿐이다. 최종렬이 말하는 미적체험의 열망은 경험이자 소비이지만, 푸코가 말년에 말한 실존적 미학이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 자기 자신의 변형을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은 자기계발과 연속선상에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그런 것이다. 푸코를 평면적으로 요약해서 자유의지를 가지면 가질수록 체제에 종속되는 인지적 비관주의(419)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틀렸다기 보다는 푸코의 사유가 가진 강점은 모두 사상시켜버리고, 베버 식으로 이념형을 찾아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 오히려 모순은 이런 것인데. 저자의 논의를 따르면 도대체 자기계발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자기계발에 대해 실패사례들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다가도, 자기계발에 성공 사례들을 말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내려면 자기계발에 성공하는 길밖에 없다. 문제는 지방이라는 환경 속에서 자기계발에 성공하더라도 다시 ‘습속의 왕국’의 일원이 된다는 점이겠지만. 자기계발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돌파할 것인가. 게다가 무엇보다 그 ‘미적 체험’이란 자기계발의 꽃이고, 극점이다. 그는 시종일관 자기계발 경쟁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지방대생의 가족주의와 습속 그리고 적당주의를 비판하고 있으며, 특히 알지 않으려는 의지(푸코의 앎에의 의지를 비튼 것처럼 보이는)를 말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미학의 폴리스야 말로, 자기계발하고 또 자기계발하고 또 자기계발해서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라는 사실이다. 앎을 거부하면서 도달할 수 있는 미학이란 또 무엇이겠는가. 감각적 직관에 의존하는 미학인가. 자기계발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면, 이런저런 자기계발은 틀렸으니, 더 근본적인 자기계발을 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설득력이 있겠다. 자기계발에 대한 거부라면, 보다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마지막 이야기는 미학적 폴리스로서의 대학에 있을 것이다. 그는 공무원 사관학교에 주말과 방학에는 개점휴업 상태인 지방대학을 비판한다. 대학교육과 시장 요구와의 미스매치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 현상할 수 있는 교육을 못받아서 문화적 역량이 없어서 가부장 사회에서 말한마디 못한다고 비판한다. 한쪽에는 우스꽝스러운 승리감을 다른 쪽에는 의기소침한 좌절감을 안겨주는 교육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학계는 서구 학문의 지방출장소를 자처하기에 학문 공동체가 만들어지 않는다. 지방에서는 학문의 희망이 잘 안보이고, 더 열악하며, 대학원을 나와도 학자의 길이 보이지 않고, 학문이 죽어버린다고 탄식한다. 그리고 대학이 대학다워야 한다고 말한다.(389-391) 뭐라고 할까. 이런 말이 틀렸다고는 할 수는 없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옳은 이야기다. 그러나 지방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10년째 하고 있는 저자가 할 이야기인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다. 한두 학기 지방대학에 처음 출강한 신참 박사인 시간강사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가 아닐까. 지방대학 교육에서 어떤 대안을 가져와야 할 사람도 교수들이고, 그 대안을 실천할 사람도 교수들이다. 학문공동체를 만들어낼 사람들도 자기 자신들이다. 지방대 대학원을 나와도 학자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저자가 속한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프로필을 한 번 쭉 훑어보기만 해도 그 현실을 알 수 있다. 환경이 어렵고, 몰락지경인건 잘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일할 사람도 문제를 해결할 자기자신 아니던가. 이런 식으로 날선 비판을 하게 되는 것은 이 책 전체에서 지방대생이 철저하게 타자화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글의 어디서도 저자가 지방 학문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지방대 교수와 지방대생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인 것처럼 그의 글에서 분리되어서 등장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같은 학문공동체의 일원이다. 지방대는 지방대 교수와 지방대 대학원생과 지방대생과 지방대 졸업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방대생 부모의 이야기를 다룬 다음에 지방대 교수들의 이야기도 다루었어야 하지 않는가. 언제든 기회가 생기면 서울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자녀들 교육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가족은 서울에 있고, 본인만 기러기 생활에 주말부부를 하기도 하고. 지방대 교수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 이유는 실은 지방대 교수들은 지방대학에 그리고 지방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것은 어울려 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꾸릴 자격과 권리가 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삶은 그들의 말을 제약하게 마련이다.
책을 삼분의 일쯤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는데. 끝까지 갔다. 그래서 서글펐다. 아, 지방대학 교수는 지방대학생들과 그들의 부모들인 내는 등록금으로 급여를 받고, 또 은퇴하면 연금도 받고, 학생들의 존경과 학부모들의 존경까지 받고 있다. 지방대 재정일수록 등록금 의존율이 95% 넘는 곳이 많지 않나. 게다가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존경하고 공경하는 것도 그토록 비판하는 가부장주의의 결과가 아닌가. 군사부일체라고. 적어도 앞에서 대거리는 안하는 모양이던데. 곤란하면 피해버리고 도망은 가도. 착하다고만 하지 않나. 그러면서 그 학생들의 삶과 졸업생들의 삶과 부모들의 삶 까지 가져다가 소재로 삼아 연구를 하고, 소비해 버린다. 이토록 철저한 포식자를 본 적이 있는가. 설마 그 성과가 다시 서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저자는 지방대생 밖에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수많은 전문대생과 그 졸업생, 사이버대학생 그리고 고졸들의 초롱초롱하고 한없이 착하고, 여리기만한 그리고 순종적인 눈망울을 보았다. 그리고 그 눈망을들을 잊을 수가 없다. 한국에는 스카이대와 인서울대학과 지방대 뿐 아니라 전문대와 고졸도 살고 있다. 다들 위만 쳐다보고 산다.
2018.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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