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community dinners
ⓒCommnunitydinners.com 시애틀의 한 크리스천 모임으로, 주중 공동체 만찬을 통한 예배를 지향한다. 현재 시애틀 곳곳에서 주중 다섯 군데에서 진행되고 있다. 모든 사람은 동등한 참여자로 참여하며, 음악이 연주되고, 미술작품을 드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며 최대한 품위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공간의 장이 제공된다. 국내 일부 기독교 단체에서 하는 무료급식 전에 강제 예배 같은 것은 당연히 없고, 모임 전에 5분 이내의 간단한 소개와 기도, 공동체 기도를 원하거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토의를 원하는 사람은 남으라는 안내 표지판을 놓아둘 뿐이다.. 신원을 묻지 않고, 성원권을 인정해 주는 환대가 이루어지는 장이다. 주일 모임은 일종의 봉사자 모임으로 오전에 모여 예배하고, 역시 함께 오찬을 나눈다. 현재 이 공동체의 목표는 시애틀 전체에서 스물일곱 군데의 만찬을 제공하는 것이며, 빈곤층을 위한 컨테이너 조립식 주택도 이백개 이상 만들기를 꿈꾸고 있다. 웹사이트 http://www.communitydinners.com에 가면 더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작년 연초에 가보려고 부지런히 연락하고 계획했는데, 막판에 일정이 맞지 않아, 결국 가보지 못하고 다녀온 이들의 이야기만 들어서, 아쉬웠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사실 나는 교회 특유의 환대가 아주 질색이다. 어떤 교회에 가도 대부분 구조가 한 눈에 파악되는 나름의 직업적 경지에 있는지라, 공식적인 안내의 자리를 효과적으로 피하는 눈치는 꽤 발달했다. 대부분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를 밝은 웃는 얼굴로 말하지만, 돌아서면, 그것뿐인 환대. 사십이 넘은 아저씨의 등을 입을 둥글게 말아 “우쭈쭈쭈”소리를 내면서 두드리는 육십 넘은 어른들의 마음이 어떤지 까지는 알수 없다. 정말 반갑고 즐거워서 하는 일인지 아니면 시키니까 혹은 그게 맡은 일이라서, 혹은 이젠 교회 매뉴얼이라면 매뉴얼에 익숙해져서 일지도 모른다. 교회 매뉴얼이라니, 무슨 서비스 품질 교육 향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사실 말이지, 직업으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자리나 상황에 떠밀린 사람들도 나름 일종의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얼마전 폴 투르니에의 책을 읽다가, 버스 기사가 은퇴한 목사의 무뚝뚝함에 투덜대는 장면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말로는 은퇴하기 전까지는 항상 웃으면서 인사하면서 버스에 올랐다고. 진짜 문제는 환대를 ‘인사’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또 접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독립연구자인 인류학자 김현경은 ‘환대(hospitality)’에 대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생각을 들려준다.

이 책의 프롤로그는 흥미롭게도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두 세기는 지난 소설 이야기로 시작한다. 회색 옷을 입은 남자에게 그림자를 팔고, 그 댓가로 보물은 얻었지만, 사회로부터 추방당하는 사나이, 그림자를 돌려줄테니 죽은 뒤에 영혼을 달라고 끊임없이 꼬시는 악마에게 행운의 자루를 돌려주고서야 되돌려 받은 그림자. 그는 한 걸음에 칠십 리를 가는 전설의 장화를 우연히 얻은 후 세계를 돌아다니는 근대적 지식으로 변모하는 주인공. 그림자는 저자가 말하는 성원권, 즉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 위해”(12) 갖추어야 할 조건이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조건”(12)은 아닌. 보드리야르는 1930년대 독일 무성 영화 「프라하의 학생」과 이 소설을 이으며, “상품사회에서의 인간소외”를 논하지만,(16) 김현경은 “그림자의 상실”이 스티그마(어빙 고프만)라고 한다.(16) 스티그마란 사람자격(personhood)에 가해진 손상이다.(17)

2016년의 한국은 적어도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누구누구에 대한 사람자격의 손상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사회다. 어느날 갑자기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실제 기억하는 지난 수십년 내내 그래왔다. 역사를 살펴보면, 그 이전에도 그래왔다. ‘배제와 차별’이 제도화되고, 구조화되고, 내면화되는 사회는 대학서열화를 넘어 온갖 ‘충(蟲)’들을 만들어내더니 숟가락에 색깔을 입히다가, 마침내 소수와 다수를 반복해서 형성하면서 만들어낸 다층적 층위를 통해 소수가 그것도 작은 소수가 다수를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아니 원래 그랬는데, 모든 것이 좀더 꼼꼼해지고 분명해졌고, 그동안 민주화와 개혁을 하면서 방향을 돌리는 줄 알았는데, 실상 큰 움직임은 제어하지 못한 채, 조정(fine-tuning)만 하고 있었던 거였다. 뒤늦게 모든 것이 분명해진 것 뿐이다. 그러니 실상은 낙인 없는 사람, 사람다움에 손상받지 않은 사람이 드문 사회가 되었다. 이 사회는 처음 만나서 대충 몇 가지만 물어봐도, 직접 물어보기 곤란하면 주위 사람에게 묻고, 소셜 미디어를 조금만 뒤져보면, 정작 상대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 사람의 사람다움이 얼마나 손상되었는지 웬만한 것은 다 알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테러방지법을 만들어서 새삼 핸드폰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미 알 수 있는. 그렇기 때문에 김현경은 다시 한 번 “사람다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31) 사회 안에서만 가능한 사람의 존재, 도덕적 공동체로서의 사회라는 두 언명은 뒤르케임의 사회해석의 핵심이기도 하다. 뒤르케임의 논의를 따르면, 여기서 도덕적 공동체란, 사회 안에서 개인에게 자기를 넘어서는(희생) 의무가 부여된다는 뜻이다.(『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 김현경이런 사람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부류로, 태아, 노예, 군인, 사형수의 예를 차례로 들고 있다. 군인이 가장 흥미롭다. 전장에서의 병사는 자신의 생명권을 주장할 수 없고,(40) 적군과의 우호(hospitality)도 처벌의 대상이 되지만,(42) 무엇보다 한국의 군인들은 병영 외부를 ‘사회’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감옥의 재소자들도 그렇다, 120) 군인들 특히 병사들은 이미 자신이 사회에 속하지 않는 것을, 즉 수용소(43)에 있는 것 알고 있으며, 사회에 속하지 않는다. 즉 사람다움의 권리가 유보된 존재다.

“성원권”이란 생소한 개념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란 최소 ‘국민국가’를 단위로 한다. 임의로 가입하고 탈퇴하는 단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의 성원은 ‘국민’ 혹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으며, 이 부름은 요청인 동시에 기만이기도 해서, 실상은 여러 인종의 복잡한 인종주의 구조가 혹은 구체제 신분제가 그 밑에 깔려있는 때론 실질적이며, 때론 허구적인 부름인 동시에 전장에 나가서 피를 흘려야 하는 희생을 요구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자동적인 일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으며, 누구나 성원이 되기 때문에 “성원권”이라는 개념은 낯설다. 출발점은 한나 아렌트다. 개인적으로 악셀 호네트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간에 너는 폴리스가 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인용한다. 사회의 장소성에서 출발하는 것.(58) 사회란 또 상호작용의 지평으로 타인의 존재를 알아보고, 그가 나의 알아봄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쪽에서 존재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 그의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하는 의미라 설명한다.(58) 헤겔의 주인과 노예에 변증법에 대한 꼬제브의 해석을 통해 인간은 타자의 인정을 받는 존재이며, 최초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주인, 한 사람은 노예가 된다는 변증법을 설명한다. 이때 핵심은 인정투쟁이다.(59) 타인의 인정은 내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 사람 대우, 사람 자격의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래서 김현경은 외국인, 이주자, 미국 남부의 흑인 인종 문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홈랜드 정책을 다루며, 이 문제들이 모두 사회 내부의 성원권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메리 더글라스의 『순수와 위험』을 인용해 오염의 메타포가 결합된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73)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는 하나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사회 속에서 성원권을 인정받을 때, 비로소 사람이 된다, 즉, 사람다움을 인정받는다.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배제되며, 그들은 올바른 곳에 있지 못하다는 모든 표현(이주민, 외국인 등)에 낙인찍히고, 오염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 사고 역시 근본적으로 뒤르케임에게 의존한다. 사람은 사회로부터 빌려온 한 조각의 신성함에 의해 사람이 된다.(80) 사회는 신성함의 근원이고, 이 신성함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나누어져서 모두가 사람으로 사회를 구성하며, 이런 사람들이 있는 장소는 올바르지만, 잘못된 장소에 있는 사람들은 오염을 벗어날 수 없다.

흔히 외국인 노동자 집단 거주지나 쪽방촌 등 사회에서 배제된 혹은 배제하고자 하는 이들의 공간을 TV카메라 등을 통해 훑어갈 때, 가장 먼저 더럽고, 냄새나는 이미지를 사람들은 떠올린다. 일제 시대에도 지금도 차별적인 일본인들은 흔히 한국인 혹은 자이니치를 더럽다, 냄새난다고 말한다. 사회 속에 성원권을 인정받지 못한 자들의 공간은 오염되어 있고, 그들조차 낙인(스티그마)가 있는 사람다움에 결함이 있는 존재인 것이다. 김현경의 성원권 개념은 뒤르케임의 사회 구성 논리와 종교 사회학과 인류학 해석의 결합으로 구성되었다. 성원권이 없는 자는 오염되었다. 현대에서 이런 해석을 날마다 들을 수 있는 곳은 이슬람의 중동이나 카스트의 인도가 아니라 교회다. 레위기를 중심으로 구약성서 전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람을 인종, 혈통, 개종, 종교적 순응을 기준으로 거룩성의 정도를 장소에 부여하고, 정결과 오염의 정도에 따라 사람을 분류하는 방식은 오늘날에도 깊은 반성없이 종교적 순수성과 열정적 헌신에 대한 명령과 모범으로 설교를 통해 재현되고 있다.

성원권 주장은 인정, 장소성(오염)과 더불어 수행성(performativity)에 근거하여 기술된다. 언어행위이론(화행이론)을 펼친 존 오스틴의 『말과 행위』와 가장 중요한 이론적 자원인 어빙 고프만에게 수행성 개념은 기대고 있다. 오스틴의 수행적 발화를 김현경은 사람을 연기한다고 해석한다. 사람은 연기함으로써 사람은 존재하게 된다. 이 말은 사람다움은 원래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며, 본질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체하는 것, 서로의 연극을 믿어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83) 말하자면 사회란 상징에 기대어 있고, 사람다움은 사람 안에 있지 않다는 이 말은 뒤르케임의 사유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사람은 인격 개인성과 비개성(집단성)으로 구성되는데,(114) 이중 도덕, 이성, 지성, 의지 등은 개인적이라기 보다는 비개인적인 것들이며,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라이프니츠와 칸트를 전거로 뒤르케임은 논리를 펼쳤다.(『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 그리고 어빙 고프만을 인용하여,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실제로 연기를 하면서 사람자격을 확인받게 된다고 설명한다.(88) 따라서 그 무대에서 연기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침묵하는 대상인, 하인, 노예 등은 당연히 성원권을 갖지 않는다. 연기하는 페르소나 즉, 얼굴이 있는 자에게 명예가 있으며,(88) 그 반대도 성립한다. 피터 버거는 현대 사회에서 명예보다 존엄으로 도덕의 강조점이 이동되었다고 말하는데,(95) 이렇게 되면 현대인은 자기 정체성을 벌거벗은(사적 공간의) 자유에서 발견하게 된다.(96) 매킨타이어도 명예와 존엄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데, 김현경은 벌거벗은 인간도 무엇인가(즉, 문화)를 입고 있으며, 여기에서 존엄이 비롯된다고 문제를 제기한다.(101) 게다가 버거의 도식을 따르면 인간은 사적 공간으로의 후퇴를 통해서만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할 수 있는 것은 순응이 아니면 내면으로의 침잠에 불과하게 된다.(102) 사회에서 내가 아닌 남도 역시 사람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고, 이것이 사람의 역할이라고 인정하고, 또 나의 행위 역시 불특정 다수의 타인들로부터 인정받는 것, 이것이 고프먼과 김현경이 말하는 상징적 상호작용일 것이다.

명예와 존엄을 상징적 상호작용, 즉 의례로 해석한다면, 모욕과 굴욕도 마찬가지가 된다. 모욕은 표현의 자유나 감정적 표현, 잘못된 재현의 문제가 아니다.(108) 배제, 모욕, 굴욕은 모두 의례의 문제다. 모욕은 (신분을 따르는 혹은 인종을 따르는) 의례적 코드의 위반이다. 즉 의례적 지위가 낮은 사람(평민이나 노예)는 더 적은 모욕을 경험하는 반면, 왕이나 영주는 작은 결례도 큰 모욕이 된다.(127) 김현경은 이런 사례들로 흑인이 백인들의 장소(콘서트장이나 식당)에 등장하는 일,(109) 감옥에서 재소자에게 주어지는 일상적 모욕,(120) 장애인(123), 노예(129), 이광수의 『흙』에서 숭이가 하대하는 순사에게 저항하는 장면,(137) TV에서 재현되는 외국인의 어눌한 한국어(140, 사회적인 타자화는 유아화를 동반한다, 141), 작업장 관리직의 노동자들에 대한 하대(153) 등을 들고 있다. 여기에 더해 21세기 한국사회의 굴욕들,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로 해고당하거나 주택 임대계약이 해지되는 현실, 서비스 종사자들이 당하는 굴욕.(158) 김현경은 굴욕에 쿨하게 대응하라는 사실상의 강요는 아큐의 ‘정신승리법’과 비슷해 질 뿐이라 한다.(160-161) 그러고 보니 갑자기 오래전에 어느 군목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80년대 군목들은 군목 훈련을 받으면서, 군의 계급을 인정하지 않을 것을 선배들에게서 전수받는다고 한다. 약간의 과장이 있겠지만, 중위나 대위인 군목이 사단장에게도 마구 쳐들어가고, 의례를 관례적으로 무시함으로써 권위를 확보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명예와 모욕의 의례를 통해 이루어지는 상징적 상호작용에서 군목은 군대에서는 절대적인 계급 구조를 살짝 빗겨가며 무시함으로써, 거꾸로 권위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상하관계를 벗어나 군목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욕 관계를 전복하는 행위는 폭력에 폭력으로, 불의에 불의로 저항하는 가장 반기독교적인 방법인데, 이런 현상은 군대 뿐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 전체에 만연해 있는 것 같다. 비단 기독교 뿐이 아닐 것이지만. 21세기 한국에서 명예훼손 소송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특히 대통령이 명예훼손을 주장하고, 그것이 먹히는 이유는 대통령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발언이 신분적 의례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정서적 판단에 근거한다. 사회와 대통령의 관계를 얼마나 신분적인 것으로 보느냐가 이 사건의 쟁점이다. 명예훼손 관련 소송의 많고 적음을 다른 나라와 비교할 일이 아닌 것은 명예훼손 소송의 존재가 신분제의 해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현경은 학교 폭력과, 일진, 굴욕 문제는 한국 사회 신분주의가 위험수준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경고음이며, 지금 청소년들은 경멸하는 법과 경멸에 대처하는 법이라는 필수적 기술을 익히는 중일 뿐이라고 던진다.(166-167) 사회적 성원권은 시민권 처럼 한 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성원권은 의례에 의해 끊임없이 확인되어야 한다.(144)

배제와 환대 사이에 자선이라는 회색의 영역이 있다. 문제는 온화한 경멸도 상처를 주며, 따라서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접촉을 줄이려 한다. 그러나 문제는 자선의 일방적 성격, 즉, 갚을 수 없다는 데 있다.(171) 우정 역시 현대사회의 구성적 모순을 드러낸다. 우정은 차별적이다.(174) 우정은 무차별성을 중시하는 기독교적 사랑과 다르다.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에 대한 학위 논문에서,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각각의 사람이 오직 기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적, 그리고 심지어 죄인조차도 사랑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실제로 사랑받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다-그것은 사랑 그 자체다”라고 신랄하게 지적했다. 이런 사랑, 자선은 타자를 이용하고, 증여를 통해 자아의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에 불과하다.(175) 우정은 정신적일 것, 순수할 것 영혼에 따를 것을 강요받는다.(174) 그러나 실상 우정은 주고받음에 의존하고 있는데, 주고받음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177) “경제적 자율성에 기초한 자유로운 관계”란 이상에 불과하다.(181) 미야지마 히로시의 명저 『양반』은 오희문의 임진왜란 중 피난일기인 『쇄미록』에 대한 분석을 통해 조선 양반사회는 증답경제이고, 실제로 선물을 주고 받음을 통해 경제생활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때 선물의 교환관계는 신분, 지위, 유사한 경제적 지위가 동시에 결합된 것일 터이다.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 이해관계와 감정의 구분을 통해 우정이 가능하다고들 주장하지만, 실상 대부분의 일은 구조를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다.(179) 얼굴을 유지하는 데 돈이 든다.(180) 경제력을 상실하여 관리 대상이 된 사람들(생활보호 대상자)은 냉소적으로 말해 애완동물과 비슷한 처지, ‘온정의 손길’, ‘소외된 이들을 보듬는 손길’을 피할 수 없으며, 밥그릇에 놓인 것은 무엇이든 감사히 먹어야 한다. 달리 말해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는 ‘자기만의 공간’이 없는 존재가 된다.(183) 그 나머지는 효나 돌봄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강요하여 해결하는 데, 김현경은 이를 ‘가부장제를 보완하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정의한다.(184) 한국 가족은 무엇보다 경제 문제를 매개로 경제에 접속되어 있기에 ‘사람에 관계를 둔 가족’으로 이행하지 못하고,(188) 경제 위기에도 매우 취약하다.(187)

김현경은 환대를 단순한 우호의 몸짓이 아니라, 데리다를 따라 타자에 대한 사적 공간의 무조건적이고 전면적인 개방, 즉 ‘순수한’ 환대 혹은 ‘절대적’ 환대라고 말한다.(191) 이 환대는 주는 행위를 동반할 수 있으나 증여와 동일하지 않다. 이는 증여가 인정(증여라는 선행에 대한 기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195-196) 환대는 재분배를 포함한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를 갖는다는 것 외에 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193) 따라서 우정의 조건은 절대적 환대이다. 반면, 최정운이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절대 공동체’에 대한 오래된 환상은 환대와는 다른 비밀 없는 공간으로 이를 현실에 고착시키려 하면 끔찍한 실패를 낳는다고 반박한다.(197) 기독교 교회는 흔히 ‘초대 교회’를 가장 이상적인 교회 형태 일종의 ‘절대 공동체’로 보고, 이 이상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이런 회귀는 무리를 가져올 뿐 아니라 번번이 실패하고, 교인들에게 자괴감과 공허만 남길 뿐이다. 김현경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나오는 대양을 건너 20헤르츠의 소리로 의사소통하는 긴수염고래의 사례를 든다. 이들은 지구 반대편에서도 소통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모든 고래의 모든 소리를 들어야만 하기 때문에, 모든 소리는 소음이 되며, 매미의 합창이나 개구리의 울음, 시위대의 구호 처럼 모두 같은 소리를 내야만 알아들을 수 있다고 빗댄다.(198-199) 환대는 공동체에 대한 환상과 혼동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공동체는 개인에게 자리/장소를 마련해 주고, 거기 울타리를 쳐주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공존이 이루어진다.(203)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한다.(204)

김현경은 절대적 환대의 세 가지 조건을 말한다. 첫째,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로, 이는 현대 사회의 기본적 작동원리이다. 모든 인간 생명은 출생과 더불어 사람이 된다.(209) 즉, 생명에 대해서는 살 가치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211) 또 공적 공간에서 모든 사람은 의례적으로 평등하다.(212) 게다가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뿐이다.(214)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뿐이다. 둘째,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로, 환대가 사회 안에 자리를 마련해 주는 행위라면, 환대에 대한 보답은 가능하지 않다. 벌거벗은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온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를 맞이한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216) 루쉰은 「광인일기」에서 유교를 식인의 도덕이라고 매도한다.(220) 김현경은 유교에서 효자가 자신의 살을 베어서, 부모를 먹이고, 병을 구하는 행동을 칭송하는 일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며,(220-224) 이런 논의를 이황도 따르게 된 것은 유교가 효를 근본으로 충을 지향하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의 은덕으로 살아가듯, 신하는 성은으로 살아가며, 신하는 늘 빚진 상태에 있으므로 목숨을 초개같이 여겨 임금에게 보답해야 하는 논리가, 부모의 은덕에 보답해야 하는 자녀의 논리가 한 쌍이기 때문에, 식인적 효행을 비판할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225) 루쉰은 의무와 빚에 대한 생각으로 사회를 만들 수 없다고 보았다는 것.(227) 셋째는 복수하지 않는 환대로, 적대적인 상대방에 대해서도 환대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28) 일견 불가능해 보이지만, 환대의 권리를 공간에 대한 권리이자 교제의 권리, 즉 친교의 가능성으로 충전된 현상학적 공간-사회-에 들어갈 권리로 이해한다면, 미국 시민이지만, 공공장소 접근 문제에서는 외국인보다 못했던 흑인 처럼, 이를 이해할 수 있다. 환대의 권리는 인류 구성원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이고, 이 권리를 부정당하는 사람은 ‘인류공동체’에 속함을 부정당하는 셈이 된다.(229) 사회는 개인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형벌은 복수가 아닌 범죄 재발을 목적으로 한다.(230) 18세기 프랑스의 사법 개혁론자 베카리아의 사형폐지론은 법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환대가 선행되어야 한다, 즉, 도덕적 공동체로 초대해야 한다, 사회를 만드는 것은 환대이다라는 통찰에 근거하고 있다.(242) 반면 사회 안에서 작동해 온 전쟁을 밝힌 푸코의 비판은 여전히 중요하며, 전쟁을 몰아내는 것으로 사회를 절대적 환대의 공간으로 만들 수 없으니, 환대는 전쟁을 해결해야 한다.(242) 칸트는 보편적 환대를 영구평화의 조건으로 제시한 셈이지만, 영구평화야 말로 절대적 환대의 조건이다.(242) 게다가 사회운동의 현재 속에 이런 사회는 이미 도래해 있다.(242)

신성함은 이 책이 마지막으로 다루는 주제이다. 역시 뒤르케임 해석에서 온 이 신성함이란 사회가 영혼이라는 마나의 형태로 인격에 신성함을 부여함을 말한다.(246) 이때 문제는 신성함이 사회에 의해 부여된 다면, 사회가 박탈할 수도 있지 않은가(나치스)하는 두려움이다. 김현경은 사회가 단일한 주체가 아니며, 비록 신성함이 사회에서 오지만, 사회가 구성원에게서 신성함을 박탈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247) 그런 사례로서 현대의료윤리에 대한 공리주의 사람 개념 두 가지를 비판한다. 하나는 싱어의 주장으로 무뇌아의 뇌사인정(장기이식)을 금지하면서, 가혹한 동물실험이나 공장식 축산이 이루어지는 세태를 비판하는 것이다.(249-251) 싱어는 낙태와 자살을 막고 있는 것은 기독교라는 장벽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김현경은 사회의 도덕에 기초에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절대적 환대로 모든 인간 생명체에게는 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싱어의 공리주의를 거부한다.(258-259) 또한 해리스의 서바이벌 로터리, 즉 장기이식을 위한 가상의 추첨을 통해, 한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켜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을 살리는 일, 즉 공공복리를 위한 사고실험의 사례를 제시한다.(261) 이것은 전체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후쿠시마 원전 결사대’나 샌델이 말하는 구명보트에서 죽어가는 선원들의 딜레마-다른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고 살아남을 것이냐의 문제-와 같은 이야기다.(266-267) 문제는 이것이 작동하기 위해 기념비와 동상 같은 신성한 토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269) 싱어는 신생아의 살 권리 인정에 28일간의 유예를 주장하지만, 살 권리는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보호받는 것이 아니다.(271-272) 공리주의의 이런 모순들은 사람을 사회관계에서 끌어내어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생명’으로 환원하기 때문에 발생한다.(276)

사람의 성원권은 사회로부터 사회 안에서 사회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짐으로 발생한다. 김현경이 논의의 마지막에서 ‘신성함’을 언급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에 가지는 권리, 사람을 사람되고, 사람답게 하는 권리인 성원권을 가지는 이유가 ‘사람’은 나면서 부터 신성하기 때문이라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이 신성함은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가 원래 사회의 신성함을 영혼이라는 형태의 마나로 나누어가졌다는 뒤르케임의 논리에서 출발하여, 다시금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사람이기 때문에 장소를 가진다는 김현경의 주장을 덧붙인다. 이때 사람이 이런 권리를 가지는 것은 사람이 신성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신성함의 기원은 사회로 돌아가고, 사회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존재한다는 뒤르케임 논리는 단순한 순환은 아니지만, 삼각형의 세 극점처럼 서로 돌아가는데. 김현경은 본래 논의를 뒤르케임에게 기대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아, 동일한 한계를 보인다. 문제는 이를 순환논법과 환원론이라고 비판할 것인가, 아니면 세꼭지점을 가진 변증법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있을 뿐.

성원권에 이어지는 ‘절대적 환대’ 개념은 이 책의 백미다.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복수하지 않는 환대를 통해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그가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고, 그 공간에서 그가 사람으로서 상징질서에 참여하는 의례를 인정해주는 ‘사람다움’에 기반한 사회는 이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실제 지난 몇백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진 사상적 전환과 법적 전회들은 이런 ‘사회’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문제는 개별적인 현장의 지역사회, 사회의 각 부분에서 이런 승인과 인정을 성원권, 즉 사람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 인정할 것인가이다.

이것이 이상적이지는 않다해도, 2016년의 한국 사회는 많은 문제와 싸워야 한다. 이 사회가 백여년 전 개화기로부터 시작하여, 근대사회의 든든한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사회진화론’과 여기에 입각한 사람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체계는 꽤나 꼼꼼한 편이다. 신분제는 해체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토지와 건물 같은 자산에 의거해서, 결혼관계에 의거해서, 자녀에게 투자된 학벌에 의거해서, 외모와 여러가지 자격에 의거해서,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새로운 신분사회가 형성되고 있다. ‘헬조선’, ‘노오력’ 담론이나 ‘수저론’은 특수한 현상이 아니고, 사회의 밑바탕에서 구성원리가 신분제로 회귀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런 현실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장이 청소년 사회이고, 그래서 아이들을 계급화하는 노스페이스 패딩은 등골 브레이커로 불렸고, 이제 일진과 왕따는 차별과 경멸을 체계화하고 있다. 아이들이 패딩을 금새 벗어버리고 어른들이 이를 입은 것은 패딩은 단지 사회적 상호작용 의례의 상징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새롭게 형성되는 신분제를 어떻게 깨트릴 것인지 어떤 의례의 원칙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 책을 소개받은 것은 기독교 단체였고, 이 책을 서둘러 읽은 것은 서평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교회 강의를 위해서 였다. ‘절대적 환대’ 개념이 교회에서 하는 공동체 주제의 강의 내용에 꼭맞는다고 생각되었다. 본래 ‘절대 공동체’를 지향했고, 스스로 공동체라 불렀던 교회의 현실은 보이지 않는 층위, 끼리끼리와 수많은 사회적 배제와 차별을 자신 만의 방식으로 때로는 보다 극심하게 내재화하고 있다. 이론상 가장 열린 형태의 사회여야 한다고 믿어지는 교회는 점점 더 닫힌 조직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교회의 현장에서 ‘절대적 환대’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를 단순하게 적용해서 교회를 ‘절대적 환대 공동체’로 바꾸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절대적 환대’는 사회의 속성이지, 공동체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현경은 절대 이 두 단어를 혼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논리를 종교(교회)와 연관지어 해석할 때, 첫째, 종교는 절대적 환대가 이루어지는 사회 속의 특정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종교인들은 타자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절대적 환대’는 사회 전체에 부과되는 것이다. 이를 교회와 연관지을 때, 교회는 기본적으로 종교기관으로서, 사회 속에서의 종교의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절대적 환대’의 공간이어야 한다. 둘째, 교회는 신앙적 차원에서 같은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과 또 동시에 개별 교회의 영역과 공간에서 ‘절대적 환대’를 시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차원에서 누가복음 14장과 마태복음 22장 이해의 공간이 열린다. ‘혼인잔치’, ‘천국잔치’는 ‘절대적 환대’의 공간이다. 비록 초대받은 자들이 거절했다해도 잔치는 계속되어야 한다. 새로운 사람들이 초대될 것이다. 장애인과 죄인의 딱지를 붙여 배제된 자들도 불러오고, 마침내는 지나가는 나그네 누구라도 참여하는 잔치 말이다. 잔치에 오는 자에게는 ‘예복’이 준비된다. 참여한 모든 자에게 ‘사람다움’을 인정하는 의례의 장치다. 첫째와 둘째는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이 두개의 차원을 혼동하는 것, 즉 종교로서의 기독교, 종교기관으로서의 교회와 진리로서의 기독교,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를 혼동하는 데서 수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 두개의 차원은 각자의 자리와 영역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물론 둘은 기독교 교회로서 연결되어져 있지만. 이중성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중성을 이원론이라고 비판하면서, 일원론이 아닌 환원주의를 주장해 온 일에 있다.

앞에서도 잠시 말했지만, 미국 시애틀에서 활동하는 커뮤니티 디너스(Community Dinners) 모임이 흥미로운 사례이다. 증여자와 수여자를 구분하여, 보이지 않는 때로는 보이는 위계를 형성하는 프로그램들에 비해,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는 커뮤니티 디너스가 그렇게 이상적이지 못하다 할지라도 방향성 만은 바람직하다. 참여하는 사람들이 소속감을 느끼며, 편안하게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지표다. 기독교 교회라는 또 하나의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환대’의 중요한 한 형식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이 사진을 보면서, 노숙자들에게 무료급식을 하는 어떤 단체에서 식사 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 시간 이상 예배하던 장면이 생각되었다. 물론 식사의 질은 좋았지만, 사람들은 예배와 밥을 교환한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곳의 사람들은 당당하게 밥을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들의 시간으로 댓가를 치른 셈이다. 이런 일들은 사회복지와 사회지원, 사회정책이 지향하고, 가져야할 기본 방향을 보여준다. 지금 한국의 수많은 교회와 단체, 심지어 정부기관은 지원 대상이 극빈이나 기아를 증명하기를 요구한다. 기아 포르노라고 할만큼 심각한 수준의 요구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그 성서에 위배된다. 신명기 14장에서는 칠년 마다 오는 면제년에 이웃과 동포에게 꾸어준 빚을 모두 면제해 주고, 가난한 형제에게 베풀기를 거절하지 말고, 넉넉하게 빌려주고, 특히 면제년이 가까왔다고, 궁핍한 형제를 냉대하고 인색하게 굴면 그들이 이 사정을 하나님께 호소할 때, 그것이 죄가 될 것이고, 나누어 주는 것은 자선이나 증여가 아니라 의무이다. 신명기 25장에서는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당일 품삯을 미루지 말 것과 이 사정을 하나님께 호소할 때, 그것이 죄가 될 것이라 말한다. 또한 밭을 벨 때나 나무의 열매를 거둘 때, 가난한 자들의 몫을 남겨두라는 명령이다. 이런 일들은 모두 명령이지만, 이 명령의 의미에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들의 존엄성이 최대한 지켜지도록 권유하고 있다.

자신도 곳곳에서 인용하고 있고, 또 아래에 깔려있는 많은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김현경은 뒤르케임의 종교사회학 그 중에서도,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 적잖이 기대고 있다. 마침 요즘 몇몇이서 강독회를 하고 있어서, 『사람, 장소, 환대』를 조금 덜 어렵게 읽어낼 수 있었다. 개인의 근거를 집단에서 찾고, 사회에서 성스러움을 발견해 내고, 사회적 성스러움이 영혼에 마나(mana)의 형태로 개인에게 나뉘어져 있는 것. 사회는 도덕의 형태로 의무를 강제할 수 있는 도덕 공동체로 상정된다. 개인은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사회는 개인의 의식 속에서 존재하는 종교에 대한 일종의 사회환원론이다. 종교학자들은 호의적이지 않지만. 김현경의 논의를 소화하려면, 뒤르케임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그 사회환원론, 구조환원론적 구조가 걸린다. 물론 김현경은 어빙 고프만의 상징적 상호작용이론에 근거해서 이를 벗어라려 하고 있지만, 구조 위에 춤추는 행위자들이 구조를 깨뜨려나갈 수 있을까.

가장 걸리는 것이 전망에 대한 애매함이었다. 절대적 환대라면 상대적으로 영역에 따라 실천 가능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싸울 수 있다. 그러나 김현경의 전망이 흐릿해 보이는 부분은 구조에서 였다. 그가 모욕과 굴종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에서, 그는 모욕이나 굴욕을 쿨하게 견뎌내는 것을 아Q의 ‘정신승리’에 비교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이 굴종을 어떻게 깨뜨려나갈 수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해 답이 없다. 분석은 깔끔하지만, 저항에 대해 말하는 순간 흐릿했던 것이 꼭 미셸 푸코를 읽을 때 같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내 문제 이기도 하며, 모든 사람의 문제이기도 하다, 눈 앞의 모욕과 굴욕과 어떻게 싸워나갈 것인가. 굴욕을 어떻게 받아칠 것인가. 다시 강고해지는 신분제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

폴 투르니에의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대형 병원의 수석 정신과 의사인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란다. 병원은 대형목장도 가지고 있었는데. 목장 관리자가 갑자기 사표를 냈다. 불러서 이유를 들어보았다. “경영자들이 젖을 짜는 전기 기계를 구입했습니다. 그래서 예쁜 젖소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저는 이런 환경에서 계속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쉽사리 사표를 내고, 굴욕을 거부할 수 없는 처지라는 데 있기는 하지만.

2016. 3. 1.

* 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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