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eb%8b%a4%ec%9a%b4%eb%a1%9c%eb%93%9c
자기계발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구본형. 그도 고인이 되었다.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 돌베개, 2009.

9년 전까지, 그러니까 이 책이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되었을 2004년을 포함한 그 시기에, 나는 한참 되지도 않는 컨설팅 나부랑이를 하고 다녔다. 이렇게 말하자니, 그때 나를 믿고 돈을 지불한 분들께 좀 미안한 마음도 든다. 여튼 그 시대는 컨설팅의 시대였고, 경영학이라고는 ‘일자무식’인 나도 컨설턴트 운운하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 시기에 내가 이런저런 컨설팅을 할 수 있게 도와준 건 사실, 대학원 공부하는 동안 읽어온 고전의 힘이었다만. 이런 식으로 인문학 감성팔이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 시절엔 소위 툴(tool)이 넘쳐흘렀다. 그래서 나도 그럭저럭 해냈다. 공부를 때려치우고, 내가 뛰어들었던 세계를 솜씨좋게 분해하는 책을 만나고 나니, 마음 속이 부산하다.

한 시대를 반영하는 좋은 연구다. 미셸 푸코를 꽤나 잘소화해낸, 많은 수고가 들어간, 칭찬할 만한 연구이고, 후반부에 자기 계발을 지배 테크놀로지로 분석하는 부분은 아주 즐겁게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 보다 아쉬운 점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기로 하자. 그러나 어쩌면 이런 지적은 정당한 지적이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시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연구의 많은 부분은 실상 미셸 푸코Michel Foutcault에게, 그리고 그의 연구로부터 영향을 받아 사회과학 연구를 개척하고 진행한 사람들에 많이 기대고 있다. 미셸 푸코의 연구들은 2000년대 후반에 새롭게 르네상스를 맞고 있는데, 그건 무엇보다 그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들이 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동진의 이 연구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안전, 영토, 인구』는 프랑스어판이 2004년에 영어판과 일어판이 2007년에,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프랑스어판이 2004년에 영어판과 일어판이 2008년에 간행되었다. 한국어판은 각각 2011년과 2012년에. 물론 몇몇 중요한 강의들 예를 들면 「통치성」같은 『안전, 영토, 인구』의 한 강의는 『푸코 효과Foucault Effect』로 나와 있었지만. 푸코는 신기하게도, 강의한 내용과 저술이 달랐다. 그래서 강의록이 연거퍼 출간되면서, 푸코에 대한 이해가 한층 넓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가는 과정이 아쉬웠다. 이 책에서 주요 소재로 삼고 있는 “역량” 즉, 인적 자원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이나, 모든 사람의 기업가화 되는 과정이 모두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의 주요한 주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신자유주의적 경제 이론의 기원을 미셸 푸코는 독일과 미국의 2차대전 후 훗날 신자유주의라 불린 경제 체제의 기원을 이룬 독일과 미국의 경제학자들, 특히 2차대전 이후 나치즘의 폐혜로부터 극복하려는 새로운 경제기획의 결과였음을 매우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어느날 갑자기, 우리가 생각하듯이 198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그리고 유럽을 거쳐,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이 아니라, 실상 자유주의 그 자체로부터 형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자유의 내면화, 주체화는 경쟁을 강제하려는 기획이었다.

물론 서동진은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완전히 나누어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주의 비판자들이 신자유주의를 체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잘드러난다. ‘아침형 인간’을 비판하는 책을 낸 자유주의 비판자들이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한 이들임을, 신세대 자유주의 엘리트들임을 지적한다.(340-342) 결어에서 자유의 의지와 자기계발의 의지를 연결지으면서, 자유로워지려는 인간의 욕망은 자기를 스스로 통제하는 주체를 낳았다고 결론짓는다.(376-377) 그러나 무엇인가 애매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어떻다는 것일까. 그리고 해답은 이 논문이 쓰여진 시점에 있었다. 2004년, 노무현 시대의 낙관주의.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 통치 담론의 핵심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통치 대상으로서의 국민 혹은 주민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이들이 자기 삶을 대하고 관리하는 방식에 새로운 원리를 도입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신을 책임지는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개발계획에서 인적자원개발계획으로 국가가 국민(또는 주민)의 안녕을 관리하는 전체적인 기획을 수정할 때, 그것의 핵심은 또한 ‘개발연대’의 수동적인 국민에서 ‘지식기반경제’의 능동적인 시민이 되는 것이었다. 자율과 책임의 시민이라는 새로운 국민적 주체성의 이상은”(348-349)

기억을 10년 정도 전으로 되돌려보면, 그때는 아직 1987년 민주화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해명하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다. 물론 이를 자유주의적 개혁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좌파들이 이미 있었지만, 그런 이념적 비판은 쉽게 수용되지 않았다. 설령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반신반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을 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도 느끼던 한계를 담아낼 언어가 아직 없었던 셈이다. 서동진은 그런 언어를 발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제 와서 보면 너무나 낙관적이었던 수많은 언어들에 그도 아직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해야 할까. 그게 서동진의 잘못은 아니다. 그땐 그러지 않기 어려웠으니까. 어떤 의미에서 서동진은 그 시대의 담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한 셈이다. 그래서 이 책이 가치를 지닌다. 그 넘쳐나는 자기계발 담론과 자기 기업가상과 인재담론과 자유로운 인간상이 모두 실상은 자기 스스로를 자기가 통제하는 자기 통제의 테크놀로지에 불과했음을 이제는 스펙 경쟁에 지쳐나가 떨어진 모두가 알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서동진은 다른 많은 사람과 같이 산업화는 규율권력, 민주화 혹은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주체화라는 이분법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거기서 애매함이 생겨난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의 규율권력은 어디로부터 말미암는 것일까? 당연하게도 이는 자유주의로부터 말미암는다. 이것이 푸코의 발견이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산업화와 규율권력을 낳았다. 그리고 서구 근대가 그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경제적 자유주의가 정치적 권위주의 혹은 독재를 통해 전파되었다. 그리고 강력한 규율권력과 기강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우리는 규율권력과 자유주의를 연결하는 데, 무엇인가 자연스럽지 않은 마음이 된다. 그리고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주의, 정치적 자유주의, 신자유주의적 자기통제가 뒤섞이게 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경제적으로 자유주의를 추구했다기 보다, 경제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경제를 창출해 냈다. 물론 정경유착과 관치경제, 통제, 온갖 부정부패가 뒤섞인 채로, 그것이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속성을 가졌다고 해도, 경제적 자유주의를 지향했고, 특히, 자본은 소비자와 노동자에 대해 절대적 자유를 향유했다. 여기서 규율권력이 파생되었고, 국가에 의해 강화되었다.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권위주의, 즉 독재 사이의 불일치를 타파한 것이 1987년의 민주화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거기서 생겨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자유주의 정부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위기를 맞은 경제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경쟁을 강제하는 시스템’으로서의 새로운 자유주의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규율권력, 즉, 사람의 내면을 통제하는 보다 근본적 규율권력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파국을 맞고 있는 스펙 경쟁이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는 규율권력과 주체화는 산업화와 정보사회든 지식기반경제든 뭐든 이런 것들은 연속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단절과 변화로 이해시키는 것이 오히려 권력과 자본과 체제의 기획이다.

물론 이 모든 주장은 2016년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그 이후 입수할 수 있었던 자료와 논쟁들 그리고 경험에 근거한 것이므로, 당연히 2004년에 쓰여진 이 책에는 부당한 사후적 언급이지만. 2016년에 이 책을 읽는 이상, 말해야 한다. 2004년에서 조금도 앞으로 가서 1999년부터 이어지는 벤처붐과 거품, 갑작스레 쏟아져 들어오는 돈을 주체 못해 너도 나도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던 시절. 지금은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계층이동의 장미빛 꿈이, 노무현 대통령으로 나타나 있었던 시절. 그 시절의 자기계발론과 시장에는 몽상이 넘쳐났다. 몽상은 의외로 흥청망청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지금은 모두들 숙취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이 책은 사실 그점을 감안해서 읽어야 한다.

프롤로그에 흥미로운 문장이 있다. “사회적 삶이란 대표되고 관리되며 그것의 내재적인 욕구와 이해를 실현하기 위해 언제나 자신을 가시화하고 객관화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언제나 국가에 의해 규정된다”(21) 말하자면 민주화 이후의 흔한 담론인 ‘국가-시민사회’ 대립이라는 도식을 거부하고, 흔히 알려진 사회란 국가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그것을 그는 이 책의 주제인 주체화를 통해 해명하려고 했다. “개인들이 어떻게 자기 삶을 체험하고 어떻게 자신의 행위를 관리함으로써 자신이 대하는 바깥 세계와의 관계, 즉 사회를 상상하는지 물어야 한다.”(23) 그리고 그것은 “자기계발하는 주체”이다.(24) 흥미롭게도 푸코는 『생명관리통치의 탄생』의 마지막 강의에서 ‘시민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독일은 시민사회와 국가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영국에서는 통치라는 관점에서, 프랑스에서는 제3신분, 즉 부르주아지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시민사회를 통해 통치이성의 탈중심화 혹은 재중심화가 이루어지며, 그것은 “피통치자의 합리성이 통치합리성의 규칙화의 원리”가 되는 것이라 말한다.(『생명관리통치의 탄생』, 430-432) 두 사람의 주장이 미묘하게 엇갈리는 느낌도 들지만,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한국에서 “자기계발”은 “피통치자의 합리성”이라고 보아도 좋을까.

서동진은 1990년대 이후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이 지배했다고 논의를 시작한다. 특히 자연적인 대상으로서의 ‘경제’the economy란 존재하지도 않고, 대상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회적 실천을 헤아리기 위해, ‘재현’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47) 즉, 경제의 담론적 현실을 분석하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말하는 한국 자본주의는 “담론적 현실 속에서만 존재하는 자본주의, 역사적인 담론 구성물로서의 자본주의”(52)라 말한다. 그것이 지식기반 경제이다.(53) 그리고 이 경제적 가상은 사회적 삶 전반의 행위를 규정하고 지배한다.(61) 1997년 외환위기도 경제적 가상의 위기, 주관적인 위기이기 때문에 진정한 위기이다.(61-62) “그는 재경부·KDI 자료를 인용해, “지식기반경제로의 이행은 산업자본 시대에 형성된 경제구조와 패러다임이 지식 중심의 경제구조와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①개인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존중받는 역동적인 경제사회, ②지식가지가 존중, 보상받고 지식거래가 활성화되는 경제사회, ③경제구조의 지식집약화로 고부가가치가 창출되는 경제사회”(63)라고, 이 경제상을 표현한다. 이런 재현의 서사들이 수행적 언표라고 지적하며, 그래서 코드와 규범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67) 이들은 달성해야 하는 다양한 지표로 등장한다. “이런 지식 기반경제의 담론적 현실은 ①경제적 삶의 능력과 잠재성을 재현하는 기술적 현실(컴퓨터 사용의 정도, 광대역 정보통신망의 수준, 정보통신기술 기기의 비용 등), ②담론적 장에 속한 주체들의 행하는 행위와 그 결과를 재현하는 경제적 주체의 현실(R&D에 지출된 비용, 체화된 노하우, 교육수준, 논문발표 수, 특허의 개수와 기술수지 등), ③경제적 활동을 조직하는 사회적 현실(정부의 창업 지원 환경, 기업의 경제활동에 대한 규제의 정도) 등 다양한 현실로 구성된다.”(73)

아마도 서동진의 고민은 ‘지식기반경제’를 실물 경제라고 말하는 순간, 그 이전 경제와의 단절과 연결에서 또 분석과 해석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또 실제 자기 연구 대상이 경제에 관한 담론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기도 할 것이다. 재현을 연구해야 한다는 점에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담론적 현실에서만 존재한다든가, ‘경제’the economy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이르게 되면, 약간의 거부감이 들면서 결론을 유보하게 된다. 그것은 한동안 실물경제에서 움직였던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내가 일하고 살아왔던 영역이 바로 ‘지식 기반 경제’로부터 창출된 ‘실물 경제’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고유한 자연적 의미에서의 ‘경제the economy’란 존재하지 않고, 경제는 재현이 개입한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재현은 실물을 낳고, 실물은 또 재현을 낳는 것이 경제가 아니던가. 무엇보다. 경제가 재현이라면, 지식기반경제 이전의 산업화 시기 개발연대는 경제적 가상이 없다고 보는 태도에 동의하기 어렵다. 문명, 발전, 성장, 수출은 1895년 이래의 한반도를 살아간 사람들의 꿈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때는 이상으로 한때는 실물로 존재했다. 경제가 재현의 담론이라면, 그 재현의 담론은 변형되고, 변용하는 것이다. 게다가 산업화 시대의 개발연대의 경제적 가치나 지향이 계층상승, 부의 추구, 안락, 성장 등 이해관계의 추구(푸코의 표현)가 아니었다고 볼 수 없다. 이해관계를 추구하되,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 따라 추구방식이 변화한 것이다. 외부환경의 변화는 재현의 변화를 넘어서서 실물의 변화로 이어진다. 어쩌면 이것은 문화를 연구하는 사회학자의 한계일 수 있지만, 경계를 넘나드는 규정에서는 주의가 요구된다. 물론 실물과 재현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재현 담론의 변화와 차이 만큼, 실물의 차이는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교차할 수 있다. 실물은 ‘지식기반경제’와 무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재현’으로 환원할 수 없다. 미셸 푸코는 유명론자가 아니다. 좀 사소한 지적, 혹은 사소하지 않을 수 있는 지적이지만, 각주를 꼼꼼히 읽어보면, 서동진은 주로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는 정치학 혹은 철학에 주로 근거하는 정치경제 비판이론가들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바로 그 점이 한계로 작용한다.

비록 현대판 스타하노프의 분위기를 풍기며 심형래 같은 인물을 낳고 실패했지만, 김대중 정부의 ‘신지식인’은 지식기반경제의 ‘지식근로자’라는 개념의 변주이다.(79) ‘신지식인’은 자기책임의 구현자라는 시민이라는 주체를 구축한다.(81) 또한 ‘신지식인’은 자기 담론의 특성을 분명히 하고(83), 훗날 등장한 주체성 모델의 특징인 호환성을 가지고 있었다.(85) 2001년 등장한 ‘인적자원’ 담론은 ‘국민 이후’의 사회적 주체성, 즉 ‘자기를 관리하는 시민’이란 주체성 담론을 만들어 낸다.(86) 여기서 열린 교육, 평생 학습이 등장한다.(89) 특히 제7차교육과정과 신교육체제 관련된 정부와 전교조의 논쟁을 살피면서, 반대하는 쪽 조차 교육의 자율성, 다양성, 시민사회화 등 신자유주의적 에토스를 지지하게 되었다.(93) 그 원인은 담론이 ‘교육의 언표’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며,(97) 구체적인 정책, 제도, 테크놀로지, 법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98) 이때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교사 노동의 정체성, 즉 교사의 활동의 책임, 의무, 평가, 측정, 보상의 문제였다고 서동진은 지적한다.(98) 더 나아가 비판적 주장들이 신교육체제가 시민적 주체성의 생산과 노동주체의 주체성, 그리고 개인적 주체성을 결합하는 담론적 결절을 만들어냄을 간과했다고 지적한다.(99-100) 이런 국가 인적자원담론을 통해 “공장과 사무실이라는 일터에서 형성되고 있던 “생산하는 삶”productive life의 주체성과 “시민적 삶”civic life의 주체성(시민, 국민, 지역사회의 성원) 사이에 새로운 연결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104)고 설명한다. ‘생애능력’life competence란 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언표이다.(108) 이를 통해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개인, 사회적으로 건전한 시민, 생산적인 직업인이라는 상이한 주체가 접합된다.(111-112) 서동진은 ‘국민교육헌장’과 ‘국가인적자원개발기본계획’을 비교하며, 사목권력의 개발국가, 독재국가와 국민주체를 “경쟁력 있는 국민”과 대비한다. 이때 국민은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계발’하고 ‘혁신’하는 새로운 윤리적 주체가 된다.(117) 이를 뒷받침하는 인적자원 담론은 새로운 담론형성이며,(119) 푸코의 표현을 따라 “주체들의 가능한 자리를 정의하는 하나의 익명적인 장”이라고 볼 수 있다.(120)

서동진의 주장은 ‘국민’이라는 담론에서 ‘시민’이라는 담론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국가가 기능했고, 그 결과 그 담론의 장에서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이 나타나게 되는데, 인적자원, 생애능력, 책무성과 같은 말로 표현된다. 이 장에서 가장 껄끄러운 언표는 시민이었다. 어찌보면 시민은 우리가 가장 만들어 내고 싶은 주체였을지도 모른다. 87년 민주화를 시민민주주의 혁명 혹은 부르주아 혁명의 한 변형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수많은 정치학자, 사회학자, 사회이론가들의 열망은 시민이라는 주체의 호명으로 이어진다. 이를 담론상에서 시민이라는 주체의 국가에 의한 형성으로 서동진은 말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담론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90년대를 넘어서면서, 국민이라는 호명을, 시민으로, 인민으로, 민중으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어느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서동진이 말하는 시민이라는 담론이 아닌, 시민이라는 호명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 시대에 이런 논쟁의 흐름이 활발했고, 그가 활용하는 “국가인적자원개발기본계획”도 당대의 이런 논의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인적자원개발기본계획”은 왜 굳이 ‘국민’이 아닌 ‘시민’으로 호칭했을까. ‘국민’ 담론에서 벗어나려는 시대적 열망이 없었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또 하나 연상되는 것은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이라는 언표다.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지만, 2000년대에 막 들어서면서, 외국계 기업(다국적기업의 한국지사)과 컨설팅사를 중심으로 점점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과 기업 시민 담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내 논의로 멈추곤 했지만, 다국적 기업의 영국이나 미국 본사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진행되는 논의에서 그런 담론이 종종 등장하곤 했다. 기업을 국민으로 부를 수는 없을 것이고, 외국인을 국민으로 부를 수는 없으니, ‘시민’ 담론을 활용하는 방법이 떠올랐을 것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너무나 멋져 보였던, 한국도 곧 미국이나 유럽 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시민 담론은 현실 정치의 장에서 맥을 못추고 결국 퇴출은 아니더라도, 전면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지금 남은 것은 서동진이 지적하듯 ‘책무성’ 뿐이다. 시민이든 국민이든 노동자든 뭐든 사람들에게는 책임만이 남았다. 세금을 낼 책임, 저임금을 받고도 일할 책임, 비정규직이라도 해서 먹고 살고 가족을 부양해야할 책임, 빚을 갚아야 할 책임,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할 책임, 도처에 득시글거리는 감시의 눈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혹시나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 스스로를 감시해야 할 책임.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유연화 담론은 유연한 노동주체 생산으로 이어진다.(128) 이를 안토니오 네그리 등 이탈리아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의 ‘계급구성’을 따라 노동주체의 주체성을 계보학적으로 분석하겠다고 말한다.(128-129) 계급구성이 노동주체의 주체성을 경제적 실재 혹은 가치형태라는 추상적인 코드를 통해 한정된 노동(혹은 네그리와 하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 내부에 통합되는 노동만을 생산적이라고 인식하는” 경제학적 관점에 제한된 노동)이 아니라 자본이 지배 가능한 대상으로 구성안 우연적인고 역사적인 주체, 즉 끊임없이 자본에 의해 주체화된 노동주체로 분석을 전환시켰다”(134-135) 그러나 이는 자기로의 주체화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자기’라는 주체의 분석을 시도하겠다(135)고 한다. 이것 역시 미셸 푸코가 『안전, 영토, 인구』에서 말하는 통치가능성, 통치화가능성 개념을 크게 넘어서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배 보다는 통치에 가깝지 않나는 막연한 느낌도 든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연구를 위해 경영 담론을 분석하겠다고 말하면서, 기업들이 채용시에 말하는 ‘인재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135) 서동진에 따르면 인재란 노동주체를 지배 가능한 대상으로 재구성하려는 담론적 기획이다.(137) 이는 인재상이 창의성, 주도성, 커뮤니케이션, 대인관계, 리더십 등 인성을 언급하며,(139) 역량담론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말한다.(140) 한국 자본주의는 노동 주체에 관한 새로운 규범적인 이상(인재상)을 형성하여 더불어 이를 구성하고 관리하는 권력과 지식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노동주체는 자신을 대상화, 주체화하는 방식에 종속되었다(144)고 설명한다. 이를 국내의 대표적인 기업, 삼성, 포스코, 현대자동차, KT, SK 등의 채용과정과 인재상을 통해 분석한다.(146) 삼성의 이건희의 질경영(149)은 인재우선경영이며, 노동주체를 가시화, 객관화하며, 이를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주장이다.(154) 또 경영담론의 유행과 강박적 소비를 지적하면서, 경영 행위가 담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계속해서 자기정체성을 담론적으로 구성하면서, 이를 통해 경영이 지닌 근본적 모호성과 불안정성을 통제한다고 말한다.(156) 여기서 기업내부의 경영권력이라는 독특한 표현이 등장한다.(159) 서동진은 경영혁신담론의 전개과정을 살피면서, 특히 선호 기법과 척도에 주목하고, 이를 통해 노동주체의 삶과 주체성을 포섭한다고 설명한다.(168)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전략경영, 경영컨설턴트와 조직의 등장, 인재상, 비전, 조직화 인재개발계획을 두루 섭렵하며, 결국 일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판별하는 일,(178) 노동하는 모든 사람의 행위와 정체성 규제,(189) 등에 주목한다. 특히 균형성과표BSC는 일종의 개별화 테크놀로지로서,(192) 일터에서 사람들이 벌이는 활동, 특히 기존에는 경제행위가 아니었던 다양한 사회적 삶(지식과 학습, 감정적인 상호작용, 몰입과 헌신 등)을 ‘자산’으로 구성하고 이를 자본이 효과적으로 전유할 수 있도록 하는 노동의 표상체계라고 일갈한다.(198) 자본은 경영담론의 이름으로 노동자의 인성과 각종 정서적, 감정적, 사회적 활동까지 개발시켜, 그 성과를 가져간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관리하고 추구하는 개인, 지식근로자 혹은 자기주도적 평생학습의 주체가 된다.(199) 이는 기업문화, 목표관리MBO,(204) 자기관리(209) 등이 설명되며, 이는 보상으로 이어진다. 이제 자신의 삶을 어떻게 다뤘는가에 대한 ‘주체화의 행위'(능력개발, 셀프-리더십, 커뮤니케이션 등)에 대한 보상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210) 이는 고과와 연봉제로 이어지지만, 중요한 것은 노동주체가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고 개발하는 자아실현에 대한 지배로, 자신의 능력과 태도를 어떻게 다루는 가에 대한 감시와 통제로, 노도은 자본에 대해 자신을 개별화하고 동시에 자본을 위해 자신을 극대화한다.(220) 능력 담론이 국민역량 담론으로 바뀌면서,(222) 전략적 사고, 혁신적 사고, 변화관리 능력, 비전제시 능력, 네트워크 능력, 자기관리 능력, 시간관리 능력, 의사소통기술, 멀티기술화, 대화상담기법 등이 국가에 의해 개인역량으로 요구되기에 이른다.(224) 이는 일의 정체성을 둘러싼 담론이 바뀌었고, 일의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자기 반영성이 증대되었기 때문이다.(226) 이를 측정하기 위해 지능검사를 넘어 심리검사의 확대가 이루어져 개인적 소비자들이 ‘인성 산업’의 시장에서 자유롭게 소매하는 상품이 된다.(230) 이에 따라 다양한 역량 담론,(232) 역량 관리 담론,(233) 역량내면관리,(234) 역량모델링(235)이 나온다. 경험이지만 사람들은 정말 그림을 좋아한다. 이 역량분석의 원형 쯤에 속하는 것이 직무분석인데, 한국에서 직무분석은 1960년대에 한국전력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AID차관을 받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240) 서동진은 여기서 일을 가시화하고자하는 욕망이 왜 증대했고 경영권력은 어떻게 일을 객관화하는 지식을 생산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지적한다.(241) 역량 모델은 직무분석의 일 분석을 주체성 분석으로 대체한다.(243) 역량 담론이 지칭하는 능력 즉, 주체가 자기 삶을 어떻게 다루어야하는지에 대한 능력은 자기 능력의 형성과 개발 즉, 주체가 자신을 능력있는 주체로 주체화하는 방식에 깊숙이 개입하고 이를 촉진한다.(245-246) 이는 개인 주도형, 자기주도적 경력개발담론으로도 드러난다.(251) 경력개발 담론을 경력을 일과 분리 시켜, 일하는 주체가 스스로 기업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행위하게 하며(욕구의 일치), 조직 즉 일터로부터 벗어난다.(255) 노동하는 주체는 이제 역량기계가 된다.(260) “역량이란 언표는 일하는 주체의 능력을 그려내는 개념에 머물지 않고 일하는 주체의 주체성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다양한 사회적 실천체계를 생산한다.”(261)

90년대말과 2000년대 초반을 숨가쁘게 휩쓸었던 컨설팅의 열풍 속에서 형성된 수많은 경영담론을 주체화의 행위라는 하나의 스코포로 조망하다 보니, 노동하는 주체의 변화, 노동하는 주체의 형성, 자기관리, 자기 통제와 자기 감시, 심지어 피통치자가 통치자 측에 자기 욕구를 일치시키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것말고도 산업계를 특히 휩쓸었던 것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듣기만 하면 치를 떨 6시그마와 도요타 방식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런 것들은 보다 규율 쪽에 가까운 담론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생산관리 쪽 담론이라서 그런지 슬며시 제외되어 있지만. 여기서(03장 유연한 노동주체) 서동진은 슬그머니 경영권력이라는 언표를 등장시킨다. 아니 그것은 하나의 주체이다. 경영자, 경영 컨설턴트, 경영관련 담론 생산자들 전체를 일컬어서 경영권력이라고 지칭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경영권력의 하수인 이었든 듯. 경영권력을 제기하는 것 자체는 좋은 시도라고 본다. 자본, 기업, 혹은 대기업 등으로 호칭할 때, 권력의 구체적 지칭이 불명료성을 떠나 보다 구체적으로 현황 분석을 할 수 있는 수단적 범주라고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색인에도 빠져있지만, 분석에서는 요긴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실제 분석한 내용을 보면, 통치성으로 충분했을 텐데, 굳이 경영권력이라는 언표를 사용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푸코에게 있어서 권력은 지식 형성의 장 및 그 관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기에 이 개념에 더 집착하게 된다. 이런 지칭은 실상 손쉬운 수단이다. 그러나 실제 경영권력이 피터 드러커 같은 미국의 경영학 구루들에게 있는지, 이건희 같은 재벌 그룹의 총수에게 있는지, 아니면 경영권력 행사의 말단에서 권력의 포로가 되기도 하고 행사자가 되기도 하는 경영 컨설턴트나 상무 같은 초급 임원 혹은 부장 같은 관리자들을 지칭하는지 명료하지 않다. 그 내용상 권력 행사의 관계 속에 매몰되어 있을 뿐이 이들에 대한 분석이 명료할 수 없다. 실상은 각각의 현상들을 기술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텐데, 굳이 이런 언표를 도입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게다가 담론은 숨가쁘게 진행되지만, 담론이 실제 어떻게 침투하는지에 대해서는 인재상, MBO 등을 통해서만 말해지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 정책자금 집행의 흐름이나, 주요 변수, 정책 자금 집행을 위한 평가 기준 같은 것을 보면, 이런 것이 국가의 강제력을 통해서, 국가의 담론 형성능력을 통해서 어떻게 침투되는지 더 분명했을 것이다. 실제 현장에서는 하나라도 정부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예산을 획득하기 위해 공공기관은 물론 민간에서도 경영담론을 스스로 내재화하고, 조직 구성원에게 내면화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곤 했다. 특히 담론 형성의 현장에서 보수적인 언론기관 특히, 경제관련 언론이 경영담론의 도입과 전파에 크게 역할하게 되고, TV등의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과정 등이 너무 소략되어서, 조금만 입체적으로 보여졌더라면, 훨씬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즉, 담론을 분석하겠다는 경제적 가상을 연구하겠다는 목표설정에 의해 실행 측면이 소략해졌다.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이 경영담론의 확산성이다. 서동진이 실증하는 자료로 들고 있는 것은 삼성, 현대차, 포스코, 한전, KT, CJ, SK 등 대표적 재벌기업 인재상이나 자료들이다. 흥미롭게도 가장 외국계 컨설팅사를 좋아하고, 컨설팅에 돈을 쏟아부었던 것으로 알려진 LG는 지나가면서 언급될 뿐이다. 물론 이들이 언론을 장악하고, 이들이 여론 파급력을 지니며, 이런 기업이 드라마 등을 통해 선망의 대상이 되고, 이들 기업이 경영담론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알다시피 한국 대기업의 고용비중은 300인 이상 사업장을 기준으로 12%에 불과하고, 10대재벌은 간접고용 비중 30%를 넘고 있다. 노동자를 자기 주체화하는 담론이 재벌 대기업과 외국계 컨설팅을 중심으로 수립되었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그 폭은 생각보다 훨씬 작아서, 대기업 중에서도 재벌기업의 사무직을 중심으로 일부 생산직을 포함하여 진행되었을 뿐이다. 여기에 맹점이 있다. 실제 공기업을 다수 컨설팅해 본 경험에 의하면, 정부 제출용 컨설팅, 대외 발표용 컨설팅이 쏟아지고 있었을 뿐, 기업 내부로, 노동자들 속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이런 일을 전담하는 부서가 사람들이 늘 따로 있었다. 담론이 외부에서 크게 형성되었는지의 여부와 그 담론이 실제 파급력을 가져서, 파급력이라는 단어 자체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개별 노동자들의 삶을 규율하는 데 성공했는지, 노동자의 자기 주체화에 성공했는지는 정말 의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기능은 했다. 경영 담론이 가져온 하나의 확실한 결과, 그것은 일하는 사람의 개별화와 실패자의 자기 포기이다. 이 숨가쁜 경쟁과 경영담론의 열풍 속에서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업하지 못한 사람들은, 구조조정의 열풍 속에서 직장을 떠나게 된 사람들은, 치킨집으로 대표되는 식당을 차렸다가, 그 마저 들어먹는 사람들은 이런 거대한 담론의 열풍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기며, 경쟁에서의 낙오를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고, 하루하루의 삶을 힘겹게 꾸려가고 있었다. “내가 못해서, 내가 못나서”의 담론만은 확실히 만들어냈다. 경영 컨설턴트 흉내를 내며 깝죽거리고 다닐때는 이런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신학교에 간 후 교육전도사가 되어, 서울이 아닌 경기도의 중소도시들에서 서울에서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밀려난 사람들을 교회와 그와 유사한 공간에서 만나 그런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니 알게되었다. 이런 곳에서도 여전히 대기업에 한발짝 걸친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고, 경영담론에 관심을 가지고 받아들이지만, 실상 대부분은 관심이 없다. 그러나 높으신 분들, 공부많이 하신 분들, 성공하신 분들이 어려운 이야기를 할때, 그저 내가 못나서 그렇구나 체념하게 되었다.

서동진은 경영 담론의 언표가 가지는 특징을 수행적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정말 옳은 말이다. 경영 담론의 언어들은 그것이 구체적인 하나의 지표가 되어 노동자 개인의 삶과 자질과 인성에 까지 잣대를 들이댈 때, 바로 그 순간에 권력으로 기능한다. 문제는 노동자의 주체화 과정에서 체화하고 내면하는 지의 여부이다. 자기 관리와 학습하는 노동자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왜 지금 한국 경제가 이꼴이겠는가. 주체화된 노동자는 전문가 집단에서 존재한다. 대기업과 재벌기업에 존재한다. 지식사회를 이끌어가는 지식인들 사이에 존재한다. 즉, 노동자가 지식노동자로 바뀐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지식노동자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된 것 뿐이다. 노동자의 자기 주체화는 엘리트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이 엘리트 노동자 군에 진입하려는 예비군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런 지식노동자들이 주도하는 대기업의 세계에서 비정규직, 간접고용으로 전락하고 있다.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고, 심지어 젊은 층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고 있다. 이것이 그 결과다. 어떻게든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젊은이들은 이런 노동윤리를 내면화하고 스펙쌓기에 몰두해 보지만, 자기 학습하는 지식노동자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일자리가 없다. 이건희의 한 명이 만 명을 먹여살린다는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만 명이 어떻게 먹고사는지에 대해서 그는 말하지 않았다. 담론에서의 수행성이 현장에서의 수행성으로 어떻게 전환되는지에 대해서 이 책은 말하지 않는다. 연구범위 바깥이다.

국가에 의해서 규정되는 책임성있는 시민, 자본 서동진의 표현으로 경영권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기주체화하는 노동자에 이어, 자기계발하는 개인의 일상을 살펴볼 차례다. 04 자기계발의 의지가 이 논문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며, 자기계발이 가진 거대한 거짓말의 정체를 가장 먼저 간파했다. 자기계발을 비판해서 유명세를 얻은 이원석도 서동진에게 기대고 있다. 프랭클린 플래너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프랭클린 플래너. 정말 가난한 대학생이던 내가 당시 4~5만원의 거금을 주고 구입한 가죽장정의 수첩.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그걸 수입해서 국내에 판 사람은 황성주 생식의 황성주였는데. 그 꼼꼼함을 따라가려다 온몸이 비비꼬이는 증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던져버린 그 수첩 이야기다. 공병호와 구본형은 서동진의 주 분석 대상이다.(263) 체게바라가 자기계발 담론에 소비되고, 라이프 스타일, 시사, 잡지와 칼럼으로 재생산되던 시절이다. 자기계발 전문가는 대중의 스타가 되고 있었다.(265-266) MBTI나 애니어그램 같은 성격 검사 프로그램, 수많은 교육훈련, 세미나, 워크샵, 강좌들.(268) 여기서 서동진은 『성공학의 역사』라는 짧지만 흥미로운 텍스트를 소개한다. 정해윤은 한국에서 성공학의 역사의 배경으로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기업교육, 네트워크 마케팅을 꼽는다. 1960년대 경제 기적과 더불어 나타난 선교 기적이 만들어낸 현세 중심의 기복 신앙적 특징과 그로부터 파생된 일군의 부흥목사, 이들에게 영향을 준, 노먼 빈센트 필과 로버트 슐러. 1977년 삼성이 처음 직원교육을 위한 연수원을 개원하고 확산된 기업교육, 마지막이 네트워크 마케팅이다. 특히 1990년대 현상인 네트워크 마케팅은 하위 조직을 육성할 동기부여 프로그램이 절실했기에 성공학과 자기계발서를 탐독한다.(272-273) 지금도 자기계발 산업의 가장 큰 소비자가 이 네트워크 마케팅에 종사하는 여성이라고 한다.(269) 1973년 노먼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이 베스트 셀러였듯이, 자기계발 담론은 1980년대 베스트 셀러에서 이미 나타난다.(276) 자기계발 담론에서 표분적인 ‘사명선언문’ 등이 개신교 성공학 담론의 결과이며, 모르몬 교도인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류에서 전개되는 ‘자아’에 관한 세부적인 반성, 서술, 평가의 테크놀로지들은 모든 개신교의 일상적 종교적 관례들과 떼어놓을 수 없다.(279) 자기계발 담론은 개인적으로 자기를 주체화하는 담론적 실천을 직접적 대상으로 하는데, 언제나 자아에 관한 지식을 생산하고 증식한다.(280)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읽고 분석하며 진단해야 하는 대상으로 자신을 변형시키는 특정한 지식, 자기의 문제화.자신이 계발하고 향상시키며 개조해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다루는 자기의 테크놀로지. 특정의 정치적인 목표, 푸코의 말을 따라 “그가 속한 문화 속에서 발견한 양식이며, 그의 문화, 그의 사회, 그가 속한 사회적 집단들이 그에게 제의하고 부과한 양식”으로 주체화한다.(281) 즉, 문제화, 테크놀로지, 목적의 담론이다.(282) 자기계발은 먼저 ‘나는 기업이다’라는 자기경영으로 나타난다. 스스로를 경영한다.(284-285) 개인사업자로 생각한다.(286)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자유’를 되찾으라 말한다.(287) 공포스러운 해방이다.(289) 담론적 실천을 통해 사회와 자신의 관계를 의식하고 끊임없이 주의 깊게 조정하는 주체로서, 사회적 삶을 자기 내부에 각인하는 것을 자기의 문제설정이라 부른다.(291) 대상의 문제화는 문제로서의 대상에 과한 지식 혹은 언어의 생산, 다야한 실천 및 테크놀로지의 구성, 행위와 주체 사이의 자유와 권력이라는 계기를 가지는 앎의 대상으로서 자신은 하나의 사업, 즉 기업이 된다.(292) ‘1인 기업가’란 새로운 ‘주체화의 윤리’를 받아들여야 한다.(294) 이는 기질, 체질, 적성, 정신 등 개인의 주관적 정체성으로 표현된다.(295) 이는 심리 측정과 검사 담론을 통해, 대상이 되는 심리적 현실을 빚어내고, 특정한 심리적 주체성이 특수한 경제적 주체성의 모델과의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298) 그러나 이는 푸코에 따르면 개인의 체험을 가로지르는 역사적 선험a priori, 즉 정치적 합리성의 지평 안에서 이루어진다.(299) 자기란 곧 기업이다.(301) 그런데 경영 마인드나 기업가 정신이 없기에 ‘기업의 기업화’ 그리고 기업가의 기업화정신화라는 주체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기획으로 이루어진다.(303) 이는 소규모 창업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기업 안에서 경제적 행위가 펼쳐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실현될 수 있는 구체적 프로그램이다.(306) 기업은 기업가형 인재가 필요하다.(308) 자기계발의 자기경영은 자기혁명으로 넓어져 삶 자체가 자기경영, 즉 기업가적 자아로서 살아가는 일상이 필요해 진다.(309) 이를 실천하는 자기계발 테크놀로지는 자기 점검과 자기 검사이다.(311)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아분석과 점검,(313) 인생의 의미 있는 사건, 혼인과 이혼, 가족, 채무, 건강 등은 이제 전문가가 들거가 분석하고 관리할 일이 된다.(314) 자기 점검은 미셸 푸코가 사목권력에서 말하는 고백의 테크놀로지를 사용해 자기가 누구인지 고백한다. 이제 종교교나 학교를 통하지 않는 자기를 읽는 새로운 독본이 제공된다.(317) 여기에 인간관계론 등의 심리적 지식이 끊임없이 증대하고 전문화된다.(318) 이제 일하는 주체와 경영권력은 전략적 행위주체로 자신을 주체와 하여, 위험을 감수하는 비전수립이 이루어진다.(321) 마침내 선언문의 형태로 만천하에 공표한다.(322) 개신교를 통해 발달한 자기계발의 테크놀로지, 자기사명서, 사명선언문 쓰기이다.(323) 이는 ‘묘비명’ 쓰기로 이어진다.(326) 일일 목표 리스트, 일지 쓰기, 편지 쓰기 등으로 확산된다.(328, 330) 자기계발은 자기 삶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점검하는 것이다.(330) 이를 위해 정보력이 요구되고, 자기계발 텍스트 읽기로 실현된다.(331) 요약본 읽기, 서동진의 표현으로 카탈로그적 읽기, 강좌를 통해 정보를 획득한다.(334-335)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시時테크’, 즉 ‘시간경영’으로 자기의 욕망을 위한 자기 만의 시간 두 시간이 강조된다.(338) 구본형이 소개하는 ‘포도 단식’ 같은 것도, 신체와 개인 간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이다.(345) 자기 계발의 목적, 즉 정치성은 먼저 위험을 감수하는 주체로 향한다.(354)실업도 감당하는 자유를 누리는 주체는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는 주체이다.(359) 내 삶에 대한 개입이나 간섭에 저항하며, 자신의 자유를 발휘하는 지평이다.(361) 기업가적 자아는 자기지배이다.(362) 권력은 주체성을 형성하고, 주체가 자신의 삶에 작용하는 방식을 규정함으로써 주체를 ‘멀리에서’ 지배한다. 신자유주의는 그런 지배대상으로서의 주체를 빚어내며, 주체에게 개인적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면서 작용한다.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자유를 통해 자기 삶을 조명하고 해석하며 돌보는 주체이다.(367)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지닌 불안하고 끈덕진 자유에의 욕망은 지식기반경제에 숨겨진 윤리학, 즉 지식기반경제가 일하는 주체를 종속시키고 주체화하는 탁월한 테크놀로지였다.(369)

이 흥미로운 이야기르 2004년 논문이 출간되었을 때, 읽지 못한 점이 너무나 아쉽다. 그리고 지금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자기계발의 한 방식인 ‘힐링’ 신나게 두드려맞고, 자기계발이 제자리에 멈추어 선듯한 느낌의 그런 시대이다. 사람들은 이제 자기계발서 조차 읽지 않아, 서점과 출판사는 문을 닫고 있다. 그리고 자기계발의 연장 속에서 ‘감성팔이’ 인문학, 요약 인문학, 강좌 인문학이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 여전히 자기계발의 시대인가? 자기계발은 이제 대놓고 떠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내면화되었는가? 자기계발의 시대가 갔다면 남긴 것은 무엇인가?

이제 2016년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해보자.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사회를 휩쓸어온 자기계발의 열풍이 한 풀 꺾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니 양상이 변화했다. 이는 이글이 쓰여진 2004년이라는 시점과 2016년이라는 시점 사이의 차이이기도 하다. 에필로그에서 슬쩍 엿보이지만, 이 책이 나왔던 그 시대의 자기계발 열풍에는 아직 시대적 낙관이 저물기 전이었다. “새로운 시민형성을 위한 프로그램”(373)이란 언표는 민주화의 성취라는 뿌듯함에 근거한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으로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다는 시각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후 연속되는 두 정부는 형식적, 절차적 민주화가 얼마나 허약한 모래성이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더 나쁠 수 없다 생각했지만, 상황은 상상을 초월하는 곳으로 계속해서 굴러가고 있다. 1997년에 찾아왔던 IMF 외환위기를 극복했다고 생각하고, 벌어진 벤처 열풍과 새로운 발전과 성장에 대한 희망이 자기계발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였다. 자기계발 열풍 속에서 명예퇴직으로 직장을 떠나 창업전선에 뛰어들었던 수많은 치킨집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그들은 빈곤해졌다. 경제의 구조적 위기가 점차 심화될 때, 자기계발은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거렸다. 자기계발은 그러나 책임감을 남겼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네가 정말 원하는 일을 선택하라’는 언명이 가진 무책임성을 지적하며, 이런 자기 선택의 강요는 실패를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 남기게 된다 지적한다. 신자유주의가 요구한 자기계발에 의한 자기 주체화는 경제와 사회의 여유 속에서 성립한다. 그것은 위기의 조절방식이지, 위기의 극복방식이 아니다. 실패와 책임은 끊임없이 개별화된 노동자 개인에게 던져진다.

그렇다고 개인이 과감하게 자기계발을 떨쳐버릴 수 없다. 오히려 자기계발이 해결책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자기계발에 매달린다. 선택받아서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 즉 경영권력의 선택을 받아야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지고, 생계와 삶의 질을 추구할 수 있다. 그렇기 위해 자기계발에 뛰어드는 연령대는 점점 더 낮아진다. 이제 자기계발은 더 이상 서동진이 말하는 자유의 선택이 아니라, 규율의 강요가 되었다. 자기계발은 생각보다 허술한 통치성이었다. 자기계발은 자유의 선택이 아니라 재난을 견뎌내기 위한 ‘생존배낭’이 되었다. 자유를 향한 열망의 발현이었던 자기계발의 동학이 생존을 위한 고통으런 과정으로 전환될 때, 그 환희와 희망이 사라졌을때, 박수와 환호가 사라졌을 때, 힐링이 지나가고 상처가 드러났을 때, 신자유주의는 또 다른 어떤 주체화의 동학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갈 것인가. 아니면, 자유주의의 폐기를 선언할 것인가. 획일적인 자기계발의 시기를 지나 다양성을 찾아 사람들이 움직인다. 다양한 동네책방, 다양하고 조그마한 가게들, 그리고 마을살이. 요즘 한참 유행하는 셀프 인테리어. 아직 이런 접근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경제적 성공에 대한 기대를 줄이면서, 일정한 삶의 안정성은 얻을 수 있고, 자기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더 자유로운 삶으로 전환될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이런 현상이 지금 서울의 일부 뜨는 지역을 넘어서서 확산된다면, 나는 그것을 “미학적(심미적) 자기만족을 통한 신자유주의 통치술”이라 부르고 싶다. 다른 인간형과 다른 테크놀로지가 제시되고, 실험되겠지만.

1970년대 부흥목사들의 성공학 이후, 개신교가 자기계발과 자기테크놀로지에서 뒤로 물러났다는 것은 오해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교회에 폭발적으로 도입되고 전파된 QT라는 도구는 자기고백, 자기감시, 자기선언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겸손, 기도, 봉사, 노력, 반성, 도전 등으로 점철되는 오늘의 결단은 늘 교회 봉사와 자기 계발을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곤 했다. 교회를 휩쓴 리더십 열풍, 긍정적인 사고방식, 목적이 이끄는 삶, 평신도 제자훈련을 통한 평신도 사역자화, 일상의 반복되는 자기 고백과 격려의 장인 소그룹 운동은 자기계발과 힐링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개신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바로 서동진도 지적하는 수행성이다. 어떤 아카데미나 강연도, 어떤 자기계발을 위한 결심도,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서너번씩 교회에 모이고, 소그룹으로 모여서, 날마다 다시 결심하고, 결단하고, 고백하고, 점검하고, 새로 출발하는 일련의 과정보다 강력할 수 없다. 나는 오히려 교회 외부의 자기계발 열풍은 말 그대로 열풍이지만, 교회 내부에서의 자기 계발은 담론과 자기 주체화 차원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자기계발 열풍이 과연 얼마나 개인의 자기계발과 자기 주체화를 가져왔는지 거꾸로 회의적이다. 이것 또한 지식인의 놀음에 몇몇이 허덕이며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대중화를 위해 손쉬운 방법론이 필요하겠지만. 통치의 합리성인 자기 주체화를 개신교의 종교 의례와 종교 활동이라는 비합리성을 통해 강화하는 일은 아직도 베버 테제가 유효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2016년에 개신교가 위기를 말할때, 복음주의 4인방이 이끈 신앙운동이 실패했다, 제자훈련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피상적인 분석이다. 실제 이들은 성공했다.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자기 주체화를 이끌었다. 신자유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적절히 섞어서 전파하던 교회가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위기라는 현실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다만 자기계발 이후의 통치성, 통치 합리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경영담론과 자기계발의 모범이 되는 수많은 기업들의 사례 목록에서 흥미로운 건 이랜드의 등장이었다. 균형성과표BSC에 의한 목표관리경영의 성공사례로 등장한다.(200-201) 그러고 보니 당시 언론에 소개나 보도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개신교 기업인 이랜드는 아래에 나오는 직장인의 자기계발을 마치 교회 청년부에서 권고하듯 직장에서 강요했던 회사이다. 초창기엔 예배와 QT를 강제하고, 기독교 서적과 자기계발 서적을 읽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90년대 초반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기독교 정신을 삶으로 옮기려고 굳게 무장한 젊은이들이 이 회사로 몰려들었다. 그때 이랜드는 꽤나 인기였다. 비록 얼마 가지 못해 많은 사람이 떠나기는 했지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위 말하는 기독교 정신과는 무관한 사례들에 등장한다. 이 회사의 계열사인 홈에버에서 비정규직을 부당해고한 사건은 영화 『카트』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들은 2007년 이 회사의 회장 박성수의 모교회인 사랑의교회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박성수 회장은 사랑의교회 장로를 사임한다. 사랑의교회는 1990년대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끈 옥한흠 목사가 개척한 교회로, 옥한흠 제자훈련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박성수 회장을 들어서 개신교인 대학생들에게 수십년간 역할 모델로 칭송받아 왔다. 그리고 자본의 이익과 개신교 신앙이 더이상 공존하지 못하고 충돌하는 상황이 왔을때, 그는 교회의 장로직을 사임한다. 이것이 실상이다. 며칠전 국정감사에서 이 회사의 계열사가 운영하는 외식업체 ‘애슐리’에서 파트타임직원(알바)의 급여를 부당하게 지급하지 않았다고 지적되자, 곧장 사과문을 낸 회사이기도 하다. 이 회사는 개신교 정신과 기업운영을 결합했다고 할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사족같은 이야기지만 청년목회가 어렵다고 말하는 일. 교회에서 청년이 떠난다고 하는 말은 뒤집어서 달리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개신교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며, 어떤 담론을 가지고 있는가? ‘일’에 대한 해석이 변화하고 있다. 일을 재정의하는 일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이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한 이해는 농경사회의 근면과 산업사회의 성실과 노력을 넘어서서, 지식정보사회에 적합한 일부 중산층 교회의 다양한 성공 프로그램 이외에 어떤 해석을 가지고 있는가? 일에 대해서도 여가에 대해서도, 젊은이들의 삶이 처한 현실에 대해 신학적 해석도 제안도 하지 못하고, 어물거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목회가 된다면 더욱 어색하다. 반대로 성경 만을 근거로 일에 대한 신학을 수립하는 일도 꽤나 위험하다. ‘일’의 역사적 발전과 변화,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설령 교회와 신학이 일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가졌다고 해도, 그 해석대로 일할 수 있도록 취업할 수 있는가. 그런 방법을 따르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기도하고, 교회 봉사하면 해결된다고 더 이상 말하지 말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여기에 신학과 목회의 맹점이 있다.

2016. 10. 7.

이 글을 포스팅한 후, 서동진에 대한 다른 서평을 뒤적이다가, 영국의 비판경영연구Critical Management Studies를 활용한 것이라는 지적을 보게 되었다. 영국의 노동과정론자인 윌모트Hugh Willmott과 나이트David Knight가 푸코의 논의를 따라 주체성에 대한 연구를 한 것이라고 하는데. 스쳐지나가듯 본 포스팅이었지만, 머리를 쳤다. 어째 이론이 좀 어색한 느낌은 들었다. 이탈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가 나오고, 에티엔느 발리바르Étienne Balibar가 등장하고, 밥 제솝Bob Jessop이 나오다가, 테일러리즘 이야기를 한참하면서 규율권력을 말하다가 포디즘은 확 건너뛰고, 포스트 포디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푸코로 넘어가는데, 통치성은 건너뛰고, 주체화로 이어진다. 어딘지 이론의 연결고리가 어색하다 싶으면 슬쩍 등장하는 저자와 논문이 있었다. Peter Miller and Nikolas Rose, “Governing Economic Life”, Foucault’s New Domains, 1990. Nikolas Rose 혼자서도 종종 인용된다. 또 하나 C. Rhodes and J. Garrick, “Economic Metaphors and Working Knowledge: Enter the Cogito-Economic Subject”, Human Resources Development International, 2002. 신기하게도 이런 사람은 꼭 색인에 빠져있다. 다시 보니 프롤로그 각주 5번(378)에 이런 흐름들에 대해 간략하게 덧붙여 두었는데. 개운하지 않다

2016. 10. 8.

* 괄호 안의 숫자는 쪽수이다.
** 이 글의 저작권은 ⓒFELIVIEW.COM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FELIVIEW
FELIVIEW
felixwon.lee@gmail.com

Must Read

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7-1).

0
튜더 왕가의 가계도. 앞쪽에서는 아담과 이브로부터의 기원과 노아의 방주도 등장한다. 중간에 리처드 3세에서 단절이 있고, 그 아래로 헨리 8세가 이어진다. British Library, Kings MS 395, fols. 32v-33r. Ernst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