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올, 관주도, 조선 민족 –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왼쪽은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어독본』 사진, 오른쪽은 월드컵 거리응원. 조선어독본에서 붉은 악마까지. 민족은, 국민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사진은 모두 웹서핑 중에 가져옴.
베네딕트 앤더슨 (Benedict R. O’G Anderson), 1983, 1991,『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윤형숙 역, 나남, 2002.
12월 13일, 베데딕트 앤더슨이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화장하여, 평생 연구한 인도네시아 자바해에 뿌려진다. 이 글은 어쩌면, 그의 죽음에 대한 나의 개인적 조문이다. 연초에 있을 책읽기 모임도 준비할 겸, 다시 꺼내 읽은 『상상의 공동체』는 상상도 못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오히려 의구심이 생겼다. 나는 이번에는 그의 의도를 이해한 것일까. 그저 내 나름의 오해와 상상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일까. 그 자신도 남겨진 자들의 상상에 맡기지 않았을까. 아무튼 나는 내 나름의 ‘조사’를 쓴다.
14일과 15일에 걸쳐 많은 신문에 부고가 실렸다. 그에 대한 소개와 애도가 이곳저곳에서 이어졌다. 예외없이 이런 소개가 이어졌다. “앤더슨은 “민족(국민, nation)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 공동체”라고 정의하며, 민족주의가 언어와 문해력에 기반을 둔 현대적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대한 소개에는 인쇄자본주의, 상상의 공동체, 민족의 발명, 관주도 혹은 관제 민주주의(official nationalism) 등과 같은 언급이 끊이지 않는다. 이말들은 모두 옳은 말이지만, 산발적이다.
적어도 내가 읽기에 그의 주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셔널리즘(민족주의) 또는 국민됨(민족됨, ‘nation-ness’)라는 개념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크리올(creole)에 의해 시작(80)되었다는 말이다. 4장 크리올 선구자들이 그래서 중요하다.(다음은 4장의 주요내용) 국민됨(민족됨, ‘nation-ness’)의 길을 최초로 열었던 이들은 크리올들이었다. 유럽인이지만, 식민지에서 출생한 이들은 유럽의 언어, 문화 등 모든 것을 공유하지만, 중심부, 즉 식민모국에서의 입신출세하는 길이 막혀 있었다. 심지어 식민지의 총독도 식민모국에서 파견되었다. 이들은 중심부에 가서 공부하고, 자격을 갖추었다고 해도, 주변부인 식민지에서 관료로 일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자기 출신지역이 아닌, 식민지의 다른 지역에서의 활동도 제한적이었다. 식민모국과의 무역도 식민지의 다른 행정구역과의 무역도 모두 제한되었다. 크리올은 기독교단의 사제로 활동하는 데도 제약이 있었다. 중심부 사람들과 크리올 간의 운명적 차이를 결정한 것은 계몽주의였다. 이들은 기후와 생태환경이 문화의 성격을 구성한다고 보았으므로 야만적 대륙에서 태어난 크리올이 중심부 사람보다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추론한다.(93) 이런 일들이 크리올들의 혁명을 낳았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과 이어진 전쟁에서의 승리, 라틴 아메리카의 스페인에 대한 독립전쟁은 이미 1760년부터 일어나기 시작했고, 1830년에 이르면 대부분의 국가수립이 완성되었다. 산 마틴의 다음과 같은 말은 아메리카에서의 ‘국민됨’의 형성을 보여준다. “앞으로 원주민들(aborigines)을 인디언이나 토착민(natives)이라고 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페루의 자녀들이자 시민들이다. 그들은 페루인으로 알려질 것이다”라고.(80) 정치적, 문화적, 군사적 수단을 가지고 있었던 크리올들이 원주민과 토착민을 끌어들여서 ‘국민’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때 라틴 아메리카에 인쇄자본주의가 성숙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설은 아직 확산되지 않았으나, 신문은 식민 행정구역에 따라 지역적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이 신문의 독자층이 바로 “상상된 공동체”였다. 반면, 식민지 13개주가 동부 해안에 가까이 붙어 있었고, 신문 등 인쇄활자의 유통이 활발했던 북미는 훨씬 수월했다. 그래서 그들은 분열되지 않고, 한 나라를 이룰 수 있었다. 그들은 아메리카인이라는 표현을 전유하게 된다. 크리올들은 중심부 모국과 언어를 공유하고 있어서 언어 문제도 없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독립운동은 개념, 모형, 청사진이 되었고, 국민국가, 공화제도, 보통시민권, 인민주권, 국기 그리고 국가 등의 상상된 실재들(115)은 모두 여기서 나와서 유럽에서 표절된다.
두번째로 주목할 것은 내셔널리즘의 ‘표절’이다.(99) 내셔널리즘의 전파와 확산은 반드기 기원이 있고, 원전이 있는 전파와 확산이 아니다. 내셔널리즘은 끝없이 표절된다. 내셔널리즘은 19세기와 20세기의 200년에 걸쳐 가장 효과적인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국민국가(nation state)는 가장 성공적인 정치 단위가 되었고,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아메리카에서 시작된 크리올 내셔널리즘을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 국가들에 의한 국정활자어(민족활자어, national print langage)에 근거한 유럽 국가들의 대중 내셔널리즘을 형성했다. 이는 유럽의 왕조들의 국민(민족)에의 귀화 혹은 관주도(관제) 내셔널리즘(official nationalism)을 형성한다. 러시아화, 스페인화, 영국화, 독일화, 일본화 등으로 나타나는 동화를 강제하는 이 형태는 대중 내셔널리즘의 한 반동이기도 하다. 관주도 내셔널리즘은 제국주의의 이름으로 확산되기에 이름다. 1차대전의 종언, 마지막으로 2차대전의 종언과 더불어, 신생국들은 대중 내셔널리즘과 관주도 내셔널리즘을 결합하여 국가건설에 나선다. 이는 식민지 내셔널리즘과도 다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이 과정을 ‘표절’이라고 부르는데. 누구도 특허권을 주장할 수 없는 내셔널리즘의 확산성을 잘 드러내 준다. 그러나 이 내셔널리즘의 표절에도 일정한 운동방향이 있다. 주변부에서 중심부의 영향력을 탈피하기 위해 대중 내셔널리즘을 통해 독립하고, 혹은 혁명을 일으키며, 중심부에서도 주변부인들이 혁명을 일으킨다. 중싱부는 대중 내셔널리즘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관주도 내셔널리즘으로 대응한다. 대중 내셔널리즘의 압박, 관주도 내셔널리즘의 준동, 그리고 양자의 결합으로 인한 내셔널리즘의 무한 확산과 표절과정이 지난 200년을 지배했다는 것이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이다.
앤더슨은 발터 벤야민을 따라 시간관의 변형 혹은 해체로부터 시작한다. 구세주적 시간(Messianic time)에서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homogeneous empty time)으로의 전환을 말한다.(48) 적어도 중세 말기 까지의 역사 혹은 시간 개념이란 목적론적이고 거룩한 것이었다. 그것은 신(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시작되어, 아브라함, 모세, 이스라엘의 역사를 따라 예수 그리고 그 복음의 전파로 오늘의 유럽 세계에 이른 것이었다. 즉 중세 적어도 근대 초입의 유럽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역사는 목적론적인 동시에 일원론적으로 흘러온 것이었으며, 중세 유렵의 현재는 그 결과였다. 그에 따라 미래도 결정되어 있다. 그것은 신(하나님)의 계시(심판과 구원)의 실현을 향해 흘러가는 것이다. 오늘날 흔히 교회에서 목사들이 말하는 ‘신(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신과 인간에 대한 계시, 언약, 구원, 심판이 이루어지던 그 시절에 지구상의 여러 곳에 다른 문명이 존재했음을 발견하게 되고, 고고학의 발견과 다양한 현존 국가들과의 교류로 인해, 이런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자, 이제 유일하고 단일한 목적론적 시간(신의 창조, 인간의 타락, 구원의 역사)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지구상의 여러 곳에는 다양하고 고대의 문명과 인간이 존재했고, 그것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제 역사라는 이름의 시간은 ‘텅비게’ 된다. 각각의 문명이 역사를 어떻게 구성하고, 기록하든지, 그것은 각자의 역사(시간 해석)이 되며, 단일한 목적론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역사가 위치하게 되는 시간은 문명과 종교의 우열이 없이 동질적이며, 어떤 문명과 종교에도 우선권을 줄 수 없는 공허한 시간이 된다. 바로 이 공허한 열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접촉하고 있는 소수의 한계를 넘어서 문자, 즉, 신문과 소설을 통해 상상된 동시대에 다른 사람의 존재, 즉,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할 기반을 갖게 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기독교를 전도할 때, 나오는 첫번째 질문,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구원을 받느냐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과거에 이런 진리 혹은 계시를 담고 있는 언어, 라틴어와 히브리어는 아주 특별한 위치를 지니고 있고, 거룩한 언어로서 정립된 언어의 자격을 가진다.(40) 드 세르토의 『루됭의 마귀들림』에서 구마하는 신부가 라틴어로 답변을 요구하고, 대답하는 것이 그 예이다. 반면, 지구상의 다른 일부, 즉 그리스에서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신약 성서를 기록한 코이네 그리스어)는 그 그런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교회나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라틴어(스콜라 라틴)에서 멀어져서, 구 라틴어(고전 라틴어)가, 즉, 키케로풍으로 장중하고 단아하게 쓰여진 글이 주제보다 스타일 때문에, 즉, 라틴어로 쓰여졌다는 이유만으로 신비스러워졌다.(67) 그러나 교회의 출판물이 넘쳐나고, 교회에서 출판물을 다 소화하지 못하게 되자, 지방어 출판과 지방어화(vernacularizing)가 더 촉진된다. 특히 종교개혁으로 인해, 지방어로 성경과 불온문서(교황청이 금지한 문서가 다양하게 출판되고, 개신교와 인쇄자본주의가 결합하여, 값싼 대중판들이 확산된다. 동시에 각 지방에서 행정지방어들이 등장하여, 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서 지방어로 재판과 행정이 집행된다.(68-69) 이런 일련의 일들은 단지 라틴어의 지위 및 기독교 세계라는 신성한 공동체를 붕괴시켰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생산체계와 생산관계의 상호작용, 인쇄술이라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 숙명적인 인간언어의 다양성(언어의 다양한 기원이 동시적으로 병치되는 일, 특정 언어의 신성성이 부정됨)으로 말미암아, 각자 새롭게 다양한 “국민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72) 근대에 탄생한 거의 모든 국민은 활자어(print-language), 특히 국정활자어(민족활자어, national print language)를 가진다. 이 활자어가 내셔널리즘, 국민됨, 국민의식을 상상할 장을 제공한다.(75, 73)
앤더슨은 1991년에 덧붙인 두 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살짝 변경한다. 원래는 신생국이 국가건설하는 과정에서 19세기 유럽 왕조국가의 관주도 내셔널리즘을 바로 본떴다는 것이었는데, 그는 이 견해를 살짝 수정한다. 신생국의 상상의 바로 윗 계보는 식민국가들의 상상이라는 것. 식민지역에서 등장한 권력의 세 제도, 센서스, 지도, 박물관을 신생국이 이어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211, 이하 10장 요약) 센서스, 지도, 박물관이란 요약하면 통제장치이다. 센서스(인구조사)는 식민지 거주민을 분류하는 일이다. 식민국가는 과거에는 주로 종교를 중심으로 분류되던 식민지 주민을 점차 인종을 따라 분류한다. 지도는 국경을 바꾸고 만들어낸다. 과거의 국경은 일종의 표석이었다. 백두산 정계비를 연상해보라, 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 같은 지리적 사실과 무관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지도나 해도만이 있었을 뿐이다. 메르카토르의 지도제작법에 의한 지도가 등장하고 나서, 나라의 국경은 지도 상에 직선으로 표기되며, 분명한 분리를 드러낸다. 지도는 로고화되어, 대영제국은 핑크빛 적색, 프랑스는 보랏빛 청색, 네덜란드는 노란빛 갈색 등으로 지도상에 로고형태로 표시된다. 이런 로고로 표시된 지역을 동일한 공동체로 상상하게 되며, 그것이 신생국으로 이어진다. 수카르노가 군사력을 동원해서, 서뉴기니(west new guinea)를 정복하고 이리안 자야라고 부른 것은 이런 지도에 근거한 상상으로 부터 출발한 것이다. 박물관은 과거를 분류하고 통제하는 장치이다. 과거의 유적을 발굴하여, 서구식으로 유적지를 만들어 전시하고, 알리는 과정에서 식민국가의 과거의 역사는 부여된 자리를 가지게 된다. 센서스, 지도, 박물관 이 세 가지는 모두 식민국가의 사람, 땅, 과거를 중심부가 만들어 놓은 분류표의 한 곳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식민국가를 통제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신생국은 이 세 가지 장치를 이어받아 유지 발전 시키면서, 자신들의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근대에 생겨난 국민(민족, nation)은 자신의 뿌리를 고대적 기원에서 찾으려 한다.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국민(민족, nation)은 영속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국민이 영속적인 것으로 상상될 때, 국민(민족, nation)을 위한 대규모의 희생(1,2차 세계대전)이 가능해 진다. 개인의 가장 큰 한계인 죽음을 다른 형태의 불멸성(immotality)로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국민(민족, nation)은 기존에 영속적인 것이 쇠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영속성으로 등장한다. 기존의 영속성이란 바로, 종교와 왕조국가이다. (31-33) 새롭게 등장한 국민(민족, nation)이 새로운 영속성의 기원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먼저 고대적 기원을 기억해 낸다. 그것을 깨어난다고 표현한다. 고대성을 재발견하면서, 언어, 문화의 역사적 뿌리를 상상한다.(248-249) 그러나 아메리카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그래서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모두 사용된 방법이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법’이다.(252) 이 기억은 망각과 잇닿아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성 바르돌로뮤의 대학살이나 미디의 학살(알비파 학살)을 기억할 때, 이들이 당시에는 프랑스인이라는 인식이 없었거나, 다른 언어를 사용했거나, 살해자들이 서유럽의 여러 곳에서 왔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이 사건이 동료 프랑스인 즉, 형제들 간의 전쟁으로 기억하는 것이다.(254-255) 영국의 정복자 노르만 윌리엄과 샌슨 해롤드의 헤이스팅스 전투나, 스페인 내전을 우리의 내전으로 기억하는 방식도 유사하다.(255-256) 아메리카에서는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소설 『가죽양말 이야기 4권, 개척자』에서 백인 벌목꾼과 델라웨어 추장을 프랑스와 영국의 조지 3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아메리칸’으로 묘사하는 것이나, 멜빌의 『모비 딕』에서 폴리네시아 출신 퀴퀙을 조지 워싱턴과 골상학적으로 유사하다고 묘사하는 것이나, 마크 트웨인이 흑인과 백인이 형제가되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 그렇다.(257-258) 국민(민족, nation)은 시작도 끝도 없는 존재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일종의 ‘전기’가 만들어지며, 기원적 현재(originary present)로부터 시작하는 죽음이 특징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을 설명하고, 이스라엘 국가로부터 바르샤바 봉기를 설명하는 식이다. 현재에 죽음에 의한 과거의 재해석(260)
나는 이 글에서 의도적으로 민족주의는 내셔널리즘으로, 민족은 국민(민족, nation)으로 바꾸어쓰려고 노력했다. 민족주의 혹은 민족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정서적 결합을 분리하려는 의도에서 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내셔널리즘은 어느 순간에는 민족주의로 어느 순간에는 국민주의로 등장하기 때문에, 내셔널리즘이라는 중립적인 용어가, nation도 마찬가지로, 국민과 민족이라는 두 개의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n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좋지만, 한국 역사에서는 국민이 보다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국민으로 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해를 위해 괄호 안에 민족과 nation을 병기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에게서 얻은 인상을 따라 한국의 내셔널리즘을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어의 성립이다. 알다시피 조선의 문자는 한자(한문)이었고, 말은 조선어였다. 말은 문자로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유하고 변화하게 마련이다. 조선 시대를 통해 구어가 어떻게 구성되고 변화되었는지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세종이 만든 문자인 한글, 즉 ‘훈민정음’도 한자의 음가를 표기하기 위한 것이 첫번째 목적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에서 국문전용이라고 하여, 한글전용원칙을 발표하긴 했으나, 실제 문서는 여전히 한문으로 작성하거나 조사 정도나 한글로 쓰는 국한문혼용체가 사용될 뿐이었다. 『독립신문』이 한글전용인 유일한 신문이었다. 1906년부터 이인직이 손병희가 창간한 『만세보』에 연재한 “혈의누(피눈물)”도 『만세보』 자체가 국한문 혼용이었고, 소설도 비교적 한글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나, 한글 소설이라고 보기는 아직 한계가 있었다. 한글이 실제로 국가 차원에서 국정활자어(national print language)가 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조선통감부, 조선총독부로 부터이다. 정확히 말하면, 공식 지방활자어(official vernacular print language)이다. 물론 이는 대한제국의 정책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실효성있는 정책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한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일본 제국주의의 정책을 처음부터 국한문혼용으로 국민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활자어로서의 한글(국문)의 안정화를 주도한 한국인은 『독립신문』 교열을 보던 주시경이었다. 통감부 시절인 1907년 학부에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가 설치되고, 일본학자들과 약 2년 여의 토의를 거쳐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이 만들어지지만, 발표되지 않는다. 1905년에 지석영의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의 상소가 있었지만, 물의만 일으키고 실패한 터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국문 연구에 대한 관심이 제기되던 이 시기는 1905년 제2차 한일협정(을사늑약)으로 1906년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하고,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실제 시정에 관한 일체의 권한 및 주요 고위직 임명 조차 일본 통감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시절이었다. 일본의 입김이나 의향과 무관할 수 없고, 실제 국문연구소가 시작될 때에 上村正己라는 일본인도 참여했다. 그러나 이 연구는 1910년 한일병합 시기에 사라지고 만다. 1912년 비로소 한글에 대한 최초의 법령인 「보통학교용언문철자법(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조선인 4인, 일본인 4인 참여)이 나오고, 『조선어독본』이 발간된다. 한글 또는 국문이라는 이름을 잃고, ‘언문’이라는 격하된 명칭을 얻은 채로. 총독부는 학교를 세우고, 조선어 사용 및 조선어 교육을 장려한다. 일본인(교사와 공무원)들에게 조선어를 배우도록 하고, 3.1운동 이후에는 더욱 그렇게 한다. 1934년에 비로소 “국어상용(일본어)”을 장려하고 1942년에 조선어교육을 금지할 때까지 30년간이다. 한자(한문)이 아닌 지방활자어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은 개항기 대한제국도 마찬가지 였으나, 이를 실제로 이행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국가였다. 일본은 왜 그렇게 했을까? 베네딕트 앤더슨이 프랑스가 점령한 베트남에서 꾸옥응우(國語)를 강요한 것과 비교된다. 17세기 제수이트파 선교사들에 의해 고안되고 1860년대 코친차이나의 당국자들에 의해 사용되던, 로마자화된 문자인 꾸옥응우의 장려는 중국 및 중국문화와의 연결을 끊고, 과거의 왕조 기록과 고대 문헌을 사용할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164) 개항기에 자발적으로(일본의 영향을 받은 갑오개혁) 언문일치의 새로운 활자어를 신문과 행정어로 사용하려고 시도하고, 식민국가가 이의 이행을 완수한 것은 중국과 중국문화의 영향력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키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해방 후 남한의 한글 문맹율이 78%로 보고되는데, 1920년대의 문맹퇴치 운동이 벌어지기 이전, 한글문맹률이 90%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이 자국 문자인 ‘가나’의 사용을 강제하지 않고, 한글 사용을 장려한 것은 특이한 일이다. 당시 일본은 영국의 인도 통치 등 서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영을 배워서 조선에 적용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지방 활자어의 성립과 신문, 소설 등의 출판물, 학교 교육과정에서의 사용 등은 본격적으로 민족(nation, 국가가 없으므로 국민이라 할 수 었음, 일본의 식민지 국민이었다)을 상상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다음은 교육이다. 식민국가 시기 조선인의 교육은 조선에서의 교육과 일본 유학으로 나뉘어진다. 소수의 유럽과 아메리카 유학이 있으나 이는 중대한 변수가 되지 못한다. 조선에서 관립 혹은 사립, 초등교육 및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식민지 엘리트로서의 길을 꿈꾸게 된다. 식민지 관료로 충원되거나, 경찰로 일하는 것이다. 혹은 식민지에서 생겨나고 있는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기본적인 교육, 일본어 능력, 즉, 이중언어능력 등이 필요했다. 또 일본으로의 유학도 매우 활발하게 전개된다. 초창기 일본과 조선에서 치러지는 고등문관시험(오늘날의 고시) 사법과와 행정과는 1910년부터 조선인 합격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치러진 시험에 합격하든, 조선에서 치러진 시험에 합격하든, 조선인 합격자는 조선에서만 일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일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했지만, 다른 식민지인 대만에서 일하는 경우도 없었다. 게다가 합격자의 수는 매우 적어, 새로운 교육체계에서 지식을 습득한 사람들이 적절한 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조선에서 이들이 얻을 수 있는 직업은 기자나 교사가 고작이었다. 이런 문제는 아메리카에서 크리올들이 당한 상황, 영국의 식민지 인도, 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 네덜란드의 식민지에서 일어난 일들과 전적으로 동일하다. 중심부 모국에서도 주변부 엘리트들의 경로가 꼭 이렇게 전개되었다. 교육의 길을 열렸지만, 교육 받은 이들은 실업자가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박태원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묘사한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바로 이런 식민지 지식인들로 부터 민족(nation)이 형성되는 과정을 그려낸다. 식민지 학교의 교실에서 유럽 민족(국민)역사, 유럽의 내셔널리즘, 유럽의 민족(국민)의식에 대해 배우게 되지만,(154-155) 자신이 중심부 국민(nation)에 속할 수 없고, 하위 파트너도 되기 어려운 현실에서, 자신들의 민족(국민, nation)을 상상하게 된다. 특히 식민지 지식인들은 청년 층으로 유럽과 달리 이전 세대와 단절되는 청년들에 의해 식민지 내셔널리즘이 생겨나게 된다.(156) 앤더슨에 따르면, 식민지 내셔널리즘은 중심부 내셔널리즘을 하나의 틀로 하여 형성된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조선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조선어와 일본어, 수신(도덕), 일본역사, 일본의 국가주의, 일본의 국체인 천황제, 일본의 국가정체성, 일본의 우월성. 식민지 지식인들이 제국주의 국가의 틀 안에서 자기자리를 찾는 자발적 동화(일본화)를 꿈꾸지 않았다면, 위선이다. 다만, 그 길은 너무나 좁았고, 식민지 체제에서 형성된 청년 지식인들이 무단 통치와 끊임없는 차별에 대한 반작용으로 중심부 일본의 국가, 국민, 내셔널리즘을 모델로 식민지 내셔널리즘을 형성하게 되고, 공인된 지방 활자어인 조선어, 조선 왕조를 통해 오랜 단일한 행정단위이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서도 단일한 하나의 행정단위인 조선이라는 영토가, 조선 민족(nation)이라는 상상적 정치 공동체의 출현 내지, 정치 공동체를 꿈꾸는 데 기반이 되었다. 위의 그림에서 보이듯 「조선어독본」에는 조선 지도가 그려져 있다. 아마도 김교신은 그래서 지리교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 형성기 식민지 내셔널리즘은 1919년 3.1운동이라는 대중운동이 폭발하는데,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지식인이 아닌 천도교와 기독교 및 일반인의 참여는 다른 차원의 분석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1920년대에 본격적으로 확산되던, 식민지 문화적 내셔널리즘은 결국 1930년대에 동화(일본화)주의로 전환하게 된다. 그 배경에는 식민세대의 형성이 자리잡고 있다. 성년이 되어서 국권 상실을 목격하는 것과 아동기에 국권 상실을 목격하는 것은 다르다. 아동기부터 일본 천황의 지배하에 있던 1900년 이후 출생자로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식민세대’가 형성된다. 식민국가에서 식민교육을 받고 자라난 식민세대는 성년기에 국권상실을 경험하고, 국권을 침탈한 제국에 협력한 친일파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들은 식민지의 ‘크리올’들이다. 식민지 크리올들이 식민지 내셔널리즘을 시도하지만, 아메리카의 진짜 크리올 처럼,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때, 식민지 크리올들이 모든 것을 걸고 저항할 것인가? 동화될 것인가? 양자택일의 기로 앞에 서게 된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베트남의 독특한 사례 하나를 보여준다. 베트남의 식민지 지식인들은 비록 프랑스에서 관리가 될 수는 없었지만, 오늘날의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는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인도차이나의 식민지 관리가 될 수 있었다.(168) 이런 일들이 베트남 지식인들을 얼마나 동화로 이끌었는지 까지는 알 수 없지만, 1930년대 조선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31년대 일본에 의한 만주국 성립 이후, 조선의 만주 붐 혹은 만주 러시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식민지 지식인들은 만주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만주에 가서 관리가 될 길이 열렸다. 최규하는 1941년 만주의 대동학원, 정치훈련반에 입교했고, 여기서 정치를 배웠다고 회고한다. 강영훈도 만주의 건국대학 출신이다. 봉천과 그 후신인 신경의 군관학교를 나오면, 만주국 장교가 될 수 있었다. 정일권, 백선엽, 김일환, 박정희, 이한림, 강문봉, 이주일, 박임항 등이 모두 만주군맥으로 불린다. 이들은 대거 5.16 쿠데타에 가담했다. 만주로 꿈을 찾아간 것은 식민지 청년들만이 아니었다. 경성방직은 조선 보다 훨씬 더 규모로 남만주방적을 설립했다. 김연수의 삼양사는 만주에 4만정보의 토지를 보유했다. 최남선은 만주 건국대학의 교수였고, 정상인, 박형룡, 박윤선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5개 교단을 일제가 통합해서 만든 에큐메니컬을 표방하는 만주조선기독교회 산하 펑텐(봉천)에 있던 만주신학원 교수였다. 조선의 식민지 지식인들은 일본에선 활동할 수 없었지만, 조선과 만주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든 자발적 협력에 의해서든 만주 붐이 생긴 이후, 조선의 식민지 지식인, 문화적 내셔널리스트들은 동화(일본화)의 길로 투항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지식인에게 내셔널리즘과 동화는 큰 차이가 아니었다.
일본의 식민국가를 남한에서 미군정이 계승했고, 한순간 동포(민족)라는 ‘nation’ 대중 내셔널리즘에 불이 붙었지만, 국가 권력의 소유자와 협력자들이 내세운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한 국민(nation) 형성이 정치적 승리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후 오늘까지 대중 내셔널리즘과 관주도 내셔널리즘이 시계추처럼 서로 우세를 점하기 위해 반발하고 있다. 대부분 관주도 내셔널리즘이 우세를 점하지만. 베네딕트 앤더슨은 내셔널리즘이나 국민(민족, nation)을 단순한 상상의 산물로 무엇으로든 쉽게 뒤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상상된 공동체는 주권을 가진 것으로 실재(reality)한다.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내셔널리즘과 민족, 국민, 국가라는 실재들에 둘러싸인 채, 그것들 각자에 중첩적으로 소속된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2002년 광장에서 붉은 티를 입고, 소리질렀던 것도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식민지 해방 이후 남북한과 중국 모두 강렬한 내셔널리즘과 국가주의에 휘말리고, 특히 반일의식이 극심한 이유가 일본 식민지기 특히, 말기에 강력했던 국가주의와 군국주의 내셔널리즘의 틀(Format)이 남아서, 해방 이후 한국의 것으로 그 내용을 채우면서, 한국과 한국인, 한국 국민 혹은 민족은 더 한층 강력한 내셔널리즘과 국가주의의 포로가 된 것은 아닐까. 관주도 내셔널리즘이 활용한 측면도 있겠지만.)
정말 베네딕트 앤더슨이 이런 말을 한 것인지, 이것 모두가 베네딕트 앤더슨이 던진 단초로부터 출발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을 베네딕트 앤더슨을 통해서 읽어낸 것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한 때 아니 지금도 내 사유의 한 지평에 빛을 비추고 있는 그를 기억하며, 이 조사를 쓴다.
2015. 12. 19.
* 필요한 경우 번역서의 쪽수를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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