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마 에이지,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


이 모든 민족론이 시작된 것은 실상 메이지천황으로부터다. 정확히는 메이지천황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벌인 담론들이지만.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単一民族神話の起源ー「日本人」の自画像の系譜』, 조현설 역, 소명출판新曜社, 2003(1995).

이 책은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들에 대한 역사적 검토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정체성 형성은 핵심 과제 중 하나다. 일본인으로 말하든 일본 민족으로 말하든 일본이라는 국가로 말하든 천황과 일체인 가족국가의 국체론으로 말하든 그것은 다수의 일본인들로 하여금 그 정체성에 동일시해서 때로는 희생을 때로는 자긍심을 느끼도록 고취하려는 행동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일본인론이 등장했으며, 그것의 다수는 민족론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시가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의 정치적 정체성을 수립하려던 시기였기 때문아닐까. 만일 중세였다면, 일본 왕조의 신적 기원 따위에 더 집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오랜 궤적의 결과 단일민족신화라는 것이 하나의 주도적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오구마 에이지가 이 책을 쓴 1990년대 후반에는 이미 단일민족신화가 비판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오구마 에이지 생각은 조금 달랐는데. 단일민족신화가 그렇게 만악의 근원도 아니고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일본 근대에서 민족론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특히 사회사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그런데 살펴보니 일본민족론을 구성하는 과정은 조선인과 타이완인 그중에서도 조선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그런 고심의 백수십년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그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바로 그 일본식민지를 통해 일본의 정체성 부여에 시달린 한국인들이 해방과 전쟁 후에 다시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이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인데. 제목을 듣는 순간 한국의 단일민족론과 국뽕을 연상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일민족신화라는 단어가 자극적으로 들리는 사람은 아마도 40대도 후반 이상일 것이다. 중고등학교를 거쳐서 한국은 단일민족국가라며 그 우월성을 국민윤리 교육을 통해 강제받은 사람들을 말한다. 일민족일국가, 일민족다국가, 다민족일국가, 다민족다국가라는 참으로 지금 생각해 보면 자극적이면서도 작위적이기 그지 없는 범주를 내세워서 학생들을 현혹하고 강압하곤 했다. 아직 발전 도상국의 가난한 나라이자 군사독재를 분단과 반공이라는 이유로 정당화시키는 논리를 줄줄외우고 시험답안지에 써야만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수 있었던 시절이야기다. 그때 단일민족국가란 뚜렷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한 담론이었고, 훗날 그 무한한 국뽕의 한 자양분으로 굳게 자리잡았다. 식민지의 상흔은 그 압제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되며, 식민지의 경험은 그 경험을 가진 훗날의 국가건설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식민지를 잃어 위축된 본국의 모습 역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아이러니란.

오구마 에이지의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은 그렇기에 꽤나 눈에 띄는 작품이다. 그는 일본근대사를 따라가면서 일본민족론의 역사를 풀어간다. 저마다 당시의 상황과 자신의 신념을 따라 어떤 형태의 민족론을 전개한다. 단일민족론이든 혼합민족론이든. 그리고 그런 민족론은 늘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전쟁이 패전으로 끝나자, 갑작스레 일본은 단일민족국가가 되었다. 설명을 듣고 나면 너무나 쉽게 고개를 끄덕일만한 이야기가 그런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식민지 조선 즉 오늘날의 한국이 교차한다. 제국 일본의 일부였던 그 조선이 받아들여야 했던 그때의 그 담론들 일본의 ‘기기신화'(『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담론들)와 그 현대적인 해석들의 변주가 한반도와 조선인들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남긴 흔적은 무엇일까? 여기서 『환단고기』와 ‘고대사 열풍’을 떠올리는 건 비상식적인 일일까? 그리고 갑작스레 툭툭 튀어나오는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묘한 태도들까지. 그래서인지 이 책의 절판은 한결 더 아쉽다.

제1부는 개국의 사상으로 일본이 본격적인 근대화를 시작하려던 시절, 개국을 앞둔 일본의 불안과 걱정 그리고 근대 세계로의 야망이 뒤섞인 모습니다. “대일본제국은 단일민족국가도 아니고 민족주의 국가도 아니다”라는 문부성이 발표한 글과, “메이지이래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순수한 혈통을 지닌 단일민족이라는 단일민족신화에 지배되어 왔다. 그것이 전쟁과 식민지 지배, 아시아 여러 민족에 대한 차별, 그리고 현재의 소수자 차별과 외국인 노동자 배척의 근원이다”라는 문장이 교차한다. 위의 글은 1942년 전쟁을 한참 치르고 있던 시절에, 아래 문장은 1970년대 후반부터 일본 학계에 유행한 글이다.(21-22) 1970년대 후반 이후 일본 학계는 일본의 전쟁과 제국주의 식민지 등 커다란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단일민족신화’에 돌려왔다. 그러나 실상 ‘단일민족신화’란 패전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허깨비를 공격하고 있는 셈이다. 오구마 에이지의 문제제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이해를 위해 단일민족신화란 “단일하고 순수한 기원을 지닌, 공통의 문화와 혈통을 가진 일본민족만으로 일본국은 구성되어 왔으며 지금도 구성되어 있다”는 관념(27)임을 덧붙여 두자. 너무 당연해 보여도.

일본의 혼합민족설, 또는 도래-정복설은 모스, 시볼트, 벨츠로 이어지는 일본에 관심을 가진 서구인들 인류학자들의 일반적인 학설이었다.(45) 일본 인류학의 시작에 있는 쓰보이 쇼우고로우坪井正五郎, 도리이 류우조우鳥居龍蔵, 고카네이 요시키요小金井良精 등도 처음부터 혼합민족론자였지만,(46-47) 구로카와 마요리黒川真頼나 미토水戸학자였던 나이토우 치소우内藤恥叟 등은 처음부터 일본 고대인론이나 국체론에 입각해 혼합민족론을 강력히 거부했다.(48) 이들의 입장이 서로 달랐다 해도 모두 강력한 민족주의자였음은 분명하다. 이들이 혼합민족설을 수용한 것은 유럽 근대과학의 옷을 입은 거의 유일한 학설이기 때문이었다. 근대과학에 혼합민족설인가, 전통적인 국학에 의한 만일민족설인가가 문제되었을 때, 이것은 일본의 독립을 전통회귀를 통해 고수할 것인가, 그것이 아니면 근대문명의 흡수를 통해 달성할 것인가의 세계관 문제와도 직결되었다.(53) 양자의 표면적 대립은 실제로는 민족주의를 어떻게 발현시키는가의 차이였다고 할 수 있다.(54) 일본민족론은 1880년대까지 두 조류를 형성했다. 하나는 일본민족은 후래의 정복자와 선주민족의 혼합이라는 혼합민족론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는 태고로부터 일본민족이 살고 있었고 그 혈통이 계속 이어졌다는 단일민족론이다.(54)

불평등조약의 폐지와 거류지 철폐를 둘러싸고 벌어진 내지잡거內地雜居논쟁, 즉 개항장을 벗어나서 외국인이 거주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인가의 논쟁은 장래의 일본민족론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흥미로운 단초를 보여준다. 내지잡거 논쟁의 양측은 다구치 우키치田口卯吉와 이노우에 테쓰지로우井上鉄次郎로 대표된다. 다구치는 외국인들이 거류지에 몰려있는 현 상황이 더 나쁘다는 것이다. 내지잡거 형태로 거류지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원래 일본인은 단일민족국가가 아니었다고 말한다.(60-61) 이노우에 테쓰지로우의 주장은 이와 반대다 열등인종이 우등인종과 잡거할 때, 그 인구가 감소하다가 압도되어 버린다고 말한다. 일본인은 열등한 인종이기에 척외주의와 민족적 단결을 통해 독립을 유지하자고 주장했다.(65) 이 시기의 이노우에는 일본 민족의 남방기원설을 취한다. 훗날 북방기원설로 전향하지만.(70) 이때까지 이노우에는 혼합민족설을 부인하지는 못했으나 일본인의 혼합성을 가능한 한 작게 평가하려고 했다.(74) 반대로 다구치는 일본인을 해외진출도 가능한 우등민족으로 생각했기에 내지잡거를 부르짖었다.(71) 특히 일본민족의 동화력 우등인종인 도래인을 동화했던 실적을 강조했다.(73) 잡거찬성파의 승리로 끝난 내지잡거논쟁은 일본이 독립을 유지하는데 있어 국민의 민족적 균질성을 우선시하여 섬나라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이민족을 동화, 흡수하면서 해외진출에 나설 것인가라고 하는 두 개의 국가 플랜, 두 민족주의의 투쟁이라 볼 수 있다.(74)

국체론国体論, 대일본제국을 천황가를 총본가総本家로 받드는 가족국가라고 하는 일본 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 일본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 논리에서 제국 내 이민족의 존재는 일종의 아킬레스 건이었다. 국체론의 근대적 융성은 1890년 교육칙어 반포 이후였다. 국체론은 신분과 지역으로 나뉜 일본의 봉건세계를 타파하는 사상이기에 완고한 국학자의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과 선을 그어야 했고, 가토우 히로유키加藤弘之나 호즈미 야쓰카穂積八束, 이노우에 테쓰지로우 등이 그 중심이었다. 이노우에는 『칙어연의勅語衍義』(1891)에서 보잘것 없는 약소국인 일본이 신뢰할 것은 4천만 동포 뿐이라며 국가의 독립은 민심의 단결에 달려있다고 말한다.(78-79) 천황을 어버이, 국민을 자식으로 구성된 일가一家라고 하는 가족국가관은 국민의 단결을 흩뜨리는 이질적인 자를 허용하지 않았다.(80) 민법전 논쟁을 벌이던 호스미 야쓰카는 민법이 나오면 충효정신이 사라지고, 평등, 박애주의가 시행되면 민속과 핏줄이 멀어진다며, 일본은 조상교祖上教의 나라라고 강조했다. 도시국가의 성격을 버리고 기독교와 로마법의 보편주의에 기댄 로마를 비판했다. 대일본제국시대 내내 로마제국은 다민족국가로 변질하여 추락한 나쁜 사례의 대명사였다. 특히 기독교도가 주창하는 인도박애주의나 인류공화주의 같은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되었다. 이해의 일치나 인위적 계약에 의한 국가통합은 그 단결력에 있어서 혈족적 단체보다 열등하다(82)고 사회계약론을 비판했다. 질서와 경애(친애)라는 두 가지를 모두 갖춘 것이 혈통단체의 특성이다.(82) 국체론자는 이처럼 메이지 국가의 천황 통치를 권력지배가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의 자연스러운 결합이라고 인식했다. 그러니 단일민족신화와 조화하기 쉬운 것은 당연하다.(83)

타이완 영유문제는 국체론으로서는 어려운 문제였다. 이를 근거로 제기된 반론 중에 가장 단순한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였는데, 필요한 것은 토지 뿐이라며, 섬전체를 쓸어버리자고 주장하기도 했다.(83-84) 하지만 국체론에 대한 문제제기는 기독교계 지식인들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노우에 테츠지로우는 교육칙어는 일본 고유의 도덕을 문장으로 표현한 것인데 비해 기독교에서 인류는 모두 신의 자손이 되어 인종의 구별도 국가의 구별도 없어, 기독교와 교육칙어의 정신은 양립할 수 없고, 기독교는 국가에 유해한 종교라고 주장했다. 기독교를 공격한 쪽은 강제적 포교나 식민지화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기독교의 배후로 여겨진 구미열강의 위협을 강조하는 논조였고, 기독교도들은 기독교도라도 훌륭한 애국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85) 일청전쟁 후에는 열강의 위협이라는 의식이 소멸해갔지만, 삼국간섭 후에는 강렬한 반구미 민족주의가 타오르고 기독교를 비난하는 기사가 잇따랐다.(86) 여기에 기독교계 지식인들의 반응도 민감했다. 와타세 츠네유키渡瀬常吉는 민족을 초월하는 보편적 종교가 필요하다는 논법으로 기독교 옹호론을 전개했다.(87) 팽창과 외부진출을 위해 문을 열어야 한다는 논지였다.(88) 국체론자로 이노우에의 제자인 다카아먀 초규우高山樗牛는 국체론은 조국의 관념에 기초한 강력한 권력을 산출하고, 이민족은 권력으로 지배해야 효과적이며 국체론은 권력의 근원이고, 군민동조君民同祖의 혈족의식은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로마제국은 라틴민족지상주의를 버리고 기독교의 평등주의에 물들어 퇴락했다는 주장을 반복한다.(89-90) 그러나 대일본제국의 타이완이나 조선 통치는 이와 달랐다. 타이완 동화를 주장하기도 했고, 이민족 동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일청전쟁의 승리 후 일본인들은 자신들은 우수민족으로 보려는 자의식도 높아지고 있었다.(93) 국체론자들은 일본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우기 위해 혼합민족론자인 인류학자의 손을 빌려야 했다.(95) 기타 잇키北一輝는 타이완의 존재를 들어 국체론를 비판했다.(95) 대표적 국체론자인 가토우 히로유키는 입헌적 족부族父통치라는 개념을 들어 군민은 부자관계라면서 기독교를 공격했다.(97) 와타세의 스승인 조합교회의 에비나 단조우海老名弾正는 민족주의를 통해 세계로 팽창하기 어렵다고 보고, 일본제국은 민족교 시대를 넘어 세계적 종교의 시대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99) 우치무라 간조우内村鑑三도 타국을 다스리는 데 세계적 정신과 인류적 관념이 필요하다(100)고 말했다. 종교의 보편정신이 제국 발전에 쓸모가 있다는 주장이었다.(101) 순수한 혈족국가라는 인식을 버리고 해외 영토에 대한 동화작업을 계속하든가, 동화정책을 포기하고 신영토에는 권력관계와 혼혈기피정책을 선택하든지.(103)

일청전쟁과 일한합병 사이에 후일 전개될 혼합민족론이 등장하고 있었다. 쓰보이 쇼우고로우坪井正五郎는 신생학문인 인류학이 쓸모가 있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혼합민족론의 정치적 응용법을 만들어냈다.(107) 쓰보이는 일본은 다민족국가이고 일본민족은 혼합민족이며, 일본인은 복잡하기 때문에 우월하다고 말했다.(110) 그는 훗카이도의 아이누를 원조하고 인종차별에도 반대했다.(114) 물론 그것은 미국사회에서 선주민족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기독교로 개종시키듯이, 일본어와 농경을 가르치고 천황에 대한 충성을 지닌 일본신민으로서의 도덕을 가르쳤다.(116) 이들이 가진 박애정신과 인류평등관은 소수자를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다수문화에 동화시키고 나아가 한 형태로 통합하여 전장에 동원하는 논리이기도 했고, 다민족혼합은 대일본제국의 대외진출능력에 대한 찬미도 만들어 냈다. 통합된 국가가 침략의 논리로 움직여가는 이상 그 국가에 소수자를 통합시켜 간 것은 소수자를 침략의 일원으로 동원하는 일이었다.(119)

일본인과 조선인의 선조는 같다고 하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다양한 설을 통칭하는 말이면서 일종의 혼합민족론이고 대일본제국 사이즈의 단일민족론이기도 했다.(122) 메이지시기 많은 일선동조론자들은 일본민족순혈론을 지향하지 않는 적극적인 혼합민족론자였다.(122) 호시노 히사시星野恒는 모토오리 노리나가를 비판하면서 상대上代에는 일한이 한 강역이고, 천황가가 반도에서 왔을지라도 일종의 국내이동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도를 천황가의 영토로 끌어들이는 침략의 논리를 펼쳤다. (124-126) 일선동조론은 국체론자에게 대항하던 쪽의 논리였다.(127) 구메 쿠니타케久米邦武는 진취적이고 열린 섬나라 근성과 산에서 발생한 쇄국적인 나쁜 섬나라 근성을 비교하면서(128-130), 아시아에는 중앙아시아와 중국 북부의 북종北種과 인도, 베트남, 필리핀, 중국 남부로 전개된 남종南種이 있어서 조선반도의 남북을 차지하고 있고, 일본의 북종은 점차 밀려나고, 남종이 열도와 중국 남부, 반도 남부를 합하여 삼토연합을 구성하고 일본이 수도가 되었다고 말한다.(131-132) 이 둘은 폐쇄적인 국학자에 대한 대항과 혼합민족론이 동시에 침략의 논거가 되는 이중성을 보인다. 언어학에서도 일본과 조선의 언어적 동일성을 주장하는 논조가 나타나서 가나자와 쇼우사부로金沢庄三郎는 일본어와 조선어는 독일어와 네덜란드어,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같은 관계라고 말한다.(133) 전문가가 아닌 언론 영역에서 일선동조론은 인류학의 혼합민족론과 섞여 사용되었다. 다케고시 요사부로우竹越与三郎는 일한은 거의 한 나라라고 말하면서 일본의 중핵은 남방에서 온 말레이계라고 말하면서 남방으로의 진출을 주창했다. 야마지 아이산山路愛山은말레이계론에는 바론을 제기하면서 정복지는 전세계라고 외쳤다.(134-138) 당시 해외진출론과 민족기원로은 불가분의 관계였다.(139)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는 인종상으로 일본과 같은 조선이 몰락한 이유는 천성이 아니라 정치가 나빠서이며 조선인은 일본인의 수하가 되어야 하고, 일본은 조선을 동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140-141) 다케고시, 야마지, 도쿠토미, 오오쿠마 등은 수구파나 국체론자가 아닌 개방적인 자유민권파로 일본민족이 단일하고 순수한 혈통이라는 구속에 사로잡힌 국체론은 문을 열수없다고 했을 때, 여기에 구애받지 않고 해외진출의 논리를 완성시키고 있었다.(142-143)

1910년 8월의 일한병합과 관련 혼합민족론자들은 그때까지 축적된 논리를 활용하여 많은 신문과 잡지에서 병합을 찬미했고, 혼합민족론은 대일본제국 민족론의 주류의 자리를 확립했다.(144) 에비나 단조우 등을 필두로 동화를 말하거나 조선인의 이름 개명론, 인종 동일에 근거한 동화용이론, 임나일본부로 돌아가는 것, 고대의 일시동인一視同仁, 병합은 복고라는 주장 등이 난무한다.(145-149) 다만 천황가 도래설 만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병합을 복고라고 찬미하고 동화가 용이하다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도래인의 존재나 일본민족의 혼합기원을 이야기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150-151) 당시 지식층이 읽었던 『태양』은 민족적 친연성으로 통치와 동화가 용이하며, 일본민족은 동화력이 풍부한 혼합민족이라 우수민족이라 말함녀서 도래나 혼합의 개방성을 진출론으로 전환했다.(152-154) 에비나 단조우는 이 과정에서 기독교에 의한 교화도 주장했다.(155) 이 시기까지의 혼합민족론은 민족의 혼합을 일본민족의 자랑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156) 이런 과정에서 내지잡거를 주장하던 이노우에 테쓰지로우는 혼합민족론으로 전향한다. 장래 일본민족이 대륙이라는 큰 무대에서 활약할 것이라고 대륙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고, 니토베 이나조도 섬나라 근성에서 벗어날 것을 말했다. 대일본제국은 섬나라에서 벗어나 세계라는 ‘큰 무대’로 웅비한다는 위대한 적극적 정신이 충만했고, 팽창이 임계점에 이를 때까지 이 노선을 달려갔다.(158-159)

이쯤까지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단일민족론이든 혼합민족론이든 언어기원이든 인종기원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된다. 그런 논의들은 메이지 일본에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시대의 편의를 따랐던 것 뿐이다. 크게 보아서 일본인들이 자신감을 획득하기 전에는 단일민족론과 순혈론이 등장하고, 이때는 국체론이 채용된다. 반면 기독교인들이나 자유민권 운동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적극적으로 혼합민족론을 주장하면서 그것이 바로 해외진출론 즉 제국주의 침략과 팽창의 역사로 이어진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 말하는 일본 리버럴의 기원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오늘날 일본 리버럴의 한계도 엿보인다. 요즘 한반도 정세를 보면 미국의 리버럴들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관심이 있기보다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오히려 트럼프의 전통적 성향과 고립주의적 노선이 동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올 가능성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 모든 건 외적인 조건과 순전한 우연에 불과하기 때문에 깊이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이든 미국이든 그들의 진보적이거나 자유주의적 성향 또는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이 한국인이나 한반도의 운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어떤 주장이든 그것은 자국민의 해외친출 즉 침략과 팽창에 대한 관심이었다. 국체론자들의 쇄국론은 자신감이 없음과 약함의 표현이고, 전쟁에 연이어 승리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취득하는 과정에서 혼합민족론은 침략과 팽창을 복고라고 미화하고, 남방 민족 기원론은 남방 침략과 팽창을 정당화하고, 북방 민족 기원론은 대륙 침략과 팽창을 정당화는 논리로 활용될 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흠칫흠칫 놀라는 것은 이런 논의들이 아직도 편린으로 남아서 화석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박혀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 중 하나가 조선인은 인종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정치가 나빠서라는 오오쿠마 시게노부의 주장이었다. 그것이 조선병합을 정당화하려는 논리였다는 사실은 잊은채 술자리에서 상식처럼 누군가를 씹거나 근거없이 평가하는 속설로 사용되고 있다. 모든 속설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그럴 듯한 지식인 것처럼 주워 삼키고 있는 수많은 논의들이 일본의 지식인들이 조선 침략과 병합을 정당화하려는 나름 머리를 쥐어짜낸 애틋한 논리였다는 점이 서글프다.

두 차례의 전쟁의 승리와 대만, 조선 등 해외 영토를 확대함에 따라 일본이 본격적으로 제국을 지향하면서 이와는 또 다른 다양한 이론가들이 등장한다. 역사학자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는 혼합민족론의 최대 이데올로그였으며 이를 차별해소에 이용하려고 노력했다. (164) 일선양민족동원론을 주장했고, 피차별부락민이 이민족이 아니라고 주장했다.(166-167) 이들이나 아이누는 단지 동화되지 못해서 다른 직업을 가졌을 뿐이다.(170-171) 인종차별 때문에 혼혈을 기피하는 구미에 비해 일본이 윤리적으로 더 우수하다고 까지 말한다.(168) 그에게서 민족의 차이는 혼합의 ‘농담濃淡’으로 축소되며, 열도 내 지방의 차이가 조선과의 차이보다도 크다는 논리는 황국신민화정책 시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유포된다. 일한병합은 복고이므로 ‘동화융합’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172) 그렇다면 대일본제국 내의 이민족은 동화되어야 한다. 피차별부락해방운동으로 알려진 전국수평사는 스스로를 에타민족으로 규정하면서 민족자결권을 요구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기타의 동화론은 그 나름의 선의를 가진 피차별자에 대한 동정에서 발현된 것이었고, 새로 편입된 제 민족을 구별 없는 충량한 국민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차별하는 다수자와 분리하려는 소수자 쌍방에 대한 비난이었다.(173-175) 기타는 아동역사서에서 평화롭고 차별 없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하늘에서 보내진 존재라고까지 말한다.(177) 차별해소는 제국내부에서의 평등이고, 그것은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민이 되는 것과 동의어였고, 사회문제는 천황의 통치에 의해 해결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기타는 병합전 조선을 인민이 돈을 벌자마자 강탈 당하거나 관료의 착취에 시달리는 일본의 헤이안시대와 마찬가지의 무정부 사회로 보고 있다. 병합은 복고이며, 고초를 겪고 있던 분가한 형제가 따뜻한 본가로 되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178-179) 기타는 감귤류의 접목재배에도 비유했다.(180) 제국 내 평등의 궁극적 모습은 함께 천황의 군대에 들어가 대일본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었다.(181) 기타의 목표가 차별해소 였다면 그 결말은 아이러니다.(182)

국체론은 다민족제국으로 팽창했던 일본의 상황을 추수하여 다이쇼 시기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혼합민족론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국체론의 재편성을 시험했고, 국체론은 제국 팽창의 요구에 적합한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185) 일한병합 시에 단일하고 순수한 혈족국가라는 일본상에 고착된 국체론자는 이미 이런 사태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했다.(185) 국체론은 천황통치가 군신의 자연스러운 정이지 인위적인 권력관계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모즈메 타카미物集高見는 조선인은 내지인과 마찬가지로 신손으로서의 동포라고 말했다.(187) 메이지 시기에 군민동조론의 대표였던 호즈미 야쓰카穂積八束는 한 나라가 반드시 한 민족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민족의 구별은 절대적이 아니라 같은 조상에 대한 자각의 산물이며,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말한다. 호즈미는 조선교육에 천황숭배를 이식할 것을 제창했다.(189) 뒤를 이은 우에스기 신기치上杉慎吉도 민족이라는 것은 구성원의 주관적 산물이고 서로가 동포형제이고 동일 민족이라는 신념과 감정에 기초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두 한 가족처럼 동포형제라는 하나의 감정과 의식과 신념을 지닌, 분리할 수 없는 일체를 형성했던 것이라 말했다.(189-190) 이노우에 테쓰지로우도 혼합민족론에 의한 동화론을 주창했고, 제국내 이민족인 조선인, 한족, 아이누, 타이완 선주민족 등을 모두 교육에 의해 일본민족 풍으로 동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190-191) 가토우 겐치加藤玄智도 다소간 혼혈을 거리끼지 않는다고 말했다.(191) 다나카 치가쿠田中智学는 일본민족은 세계의 모든 민족을 통일하고 동화시킬 사명을 지닌 가장 우등한 민족이라고 상찬했다.(191) 가족국가 속의 이민족의 존재는 이민족에 대한 권력지배(가고노기 카즈노부鹿子木員信), 국체를 일본민족 고유의 특질이 아니라 보편적 윤리로 규정하는 것(사토미 키시오里見岸雄) 등으로 설명했으나 다수 국체론자들은 특수하면서 의사 보편적인 것, 요컨대 이민족을 포섭한 가족국가라는 길이었다.(오오시마 마사노리大島正徳) 혈연관계가 없이도 가족의 일원인 것 곧 양자이다. 이민족을 포함하면서도 가족국가관을 유지하고 국체를 확대하는 논리였다. 지배를 지배로 자각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완성을 통해 제국은 국민을 지배에 동원할 수 있다.(192-199) 와타리 쇼우사부로우亘理章三郎는 이민족이 유입되어도 가족국가관과 군민동조는 성립한다고 말했다. 이민족은 양자나 며느리와 마찬가지로 혈통상의 조상과 달리 들어간 ‘집’의 선조 계열에 동화되어 바뀌어진다고 말한다. 일본의 이에家는 혈통이 아니라 제도라는 인식이 확립되어 있다. 우월한 통일성을 지니지 않으면 다수의 동화는 어렵다며 그 중핵은 황실의 초월적인 통일력이고, 일본은 포용성이 풍부한 혈족단체, 큰 황실국가라 말한다.(199-202) 기요하라 사다오清原貞雄도 가족국가는 관념적인 것으로 실제 혈족관계가 아니어도 동화가 완성되어 있으면 상관없다고 설명했다.(203) 이렇게 혼합민족론을 자신의 내부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국체론은 제국 내 이민족의 지위 및 부여에 고민할 필요 없이 무한한 진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제국의 논리로 스며든 혼합민족론이 침략이 공헌할 때를기다리는 일이었다.(203-204)

대만의 식민지화에 뒤이어 조선의 식민지화가 이루어진 후 일본은 혼합민족론을 수용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물론 조선을 이민족 식민지로 보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 지위로 두고 민족적 차별을 완전히 철폐한 것은 아니면서도 또 완전한 이민족이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실은 이점이 오히려 미스테리다. 왜 일본은 조선과 완전한 차별을 두고 완전한 이민족이나 다른 인종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다르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비슷하고 같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달랐던 것인가? 실제 일본은 영국이나 프랑스가 다른 인종을 식민지화 하는 것에 비추어서 매우 유사하고 인접한 국가를 민족을 식민지화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데 매우 몰두했다. 실제, 조선은 거의 마지막으로 식민지가 된 지역이다. 이미 19세기 말에 더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더 이상의 식민지화를 시도하지 않았고, 실제 그렇게 할 땅도 없었다. 일본도 1930년 만주를 침공했을 때, 형식상으로는 국민국가 형태의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만들어 위성국가화하는 전략을 택했다. 2차대전 이후 패권국가들이 만들어낸 위성국가의 원형은 일본이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통합하면서 차별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기묘한 딜레마를 일본은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다. 이 점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두고두고 문제로 남는다. 예를 들면 기타 사다키치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 민족을 하나로 본다고 했지만, 그 결과로 조선인과 대만인을 전장으로 내모는 논리를 만들어 낸다. 차별 없이 천황을 위한 죽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국체론의 전개과정은 더욱 흥미롭다. 1920년대의 일본의 국체론자들은 1990년대 이후 홉스봄이나 베네딕트 앤더슨의 내셔널리즘 논의와 거의 유사한 주장을 펼친다. 민족이란 의식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그 정교함은 떨어지고 논의의 관점은 다르다고 해도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특히 여기서 일본의 가족국가론, 그리고 양자론이 등장한다. 이 일본식 ‘이에家’와 입양에 의한 가족국가론이야말로 일본 쪽에서 보면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 희생을 요구하는 논리인 동시에 지배와 압제하에 있는 조선인의 입장에서보면 이보다 더한 위선은 없었던 것이다. 이들 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친일과 동화론, 자치론 등의 길을 걷게 되는데. 과연 이들이 일본의 이런 논리를 이해했는지는 미지수다. 다수의 조선인들에게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논리는 표면적인 프로파간다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양자와 이에家 그리고 입양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는 동화론자나 식민통치 수행하려는 사람들을 오히려 괴롭게 만들지 않았을까? 아니면 중간에서 이를 악용하거나. 북미정상회담에 재를 뿌리려고 했던 존 볼튼을 예로 들면 쉽지 않을까. 이 부분 논의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결론에서 반복되는데. 그때 다시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919년 3월 조선의 3.1 독립운동은 일본에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일본에서 병합상태를 긍정하기 위해 일선동조론과 혼합민족론이 다시 등장했다. 발표된 수많은 독립선언서들은 독자적 민족의식을 깔고 있었고, 일선동조론을 공격하고 있었다. 지리, 종교, 언어, 역사가 다르다는 주장이다.(205-206) 총독부 고위관료인 고마쓰 미도리小松緑는 일선인은 동족이기 때문에 동화는 가능하다고 말했고,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는 3.1운동을 전후하여 잡지를 발행하여 혼합민족론에 의한 일선융화론을 전개하고 있었고, 도리이 류우조우鳥居龍蔵는 일본인과 조선인은 동원同源이며 친밀하고 애정이 두터운 패밀리 관계라고 말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을 독립부정론으로 기울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207-209) 기타 잇키北一輝도 조선과 일본의 아름은 언어와 풍속의 일부 정도일뿐, 동조동족인 일선 양민족의 일선융합은 민족자결주의라고 말했다. 민족자결주의는 침략에도 이용될 수 있다.(210-211) 도리이의 일본민족기원론은 아이누계·남방계·대륙계의 혼합설을 계승하고 있다. 그의 학설은 정복민족이 조선반도에서 도래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천황가도 반도에서 왔고, 일본이 식민지였다고도 말한다.(212-213) 당시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고대사는 태고의 원시공산사회가 국가의 성립과 노예제의 출현에 의해 타락했다는 마르크스주의 사관을 도리이의 설과 접합시키고 있다.(214) 당시 좌파는 이 혼합민족론을 국체론자나 문부성이 공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대일본제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인식 부족은 좌파들의 일본주의로의 전향의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도리이는 당시의 대세를 따르는 방식으로 혼합민족론을 완성시킨 인물이었다.(215) 국정 지리교과서는 일본이 다민족제국인 것을 내세우고 역사교과서에도 도래인, 에미시, 구마소 등에 관한 기술도 제시되어 있다.(221)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거의 모든 교과서가 민족적으로 혼합되기는 했어도 천황통치는 외국과 같이 지배·피지배관계가 아니라 군신이 가족의 정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222) 쓰다 소우키치의 중학교용 국사교과서는 혼합민족론에서 민족의 동화력과 국체의 존엄함을 드러낸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상 이민족의 존재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교과서도 적지 않다. 초등·중등교과서에서는 다민족제국의 현실과 일본민족의 혼합기원에 관한 기술이 국가에 의해 용인되었다.(223) 미국의 일본계 이민배척은 일본이 혼성민족이 대가족적 국가를 구성한 인종차별국 미국을 상회하는 제민족의 용광로라는 우월론이 주창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카야마 아키라中山哲는 일본의 사명이 아시아의 맹주가 되어서 백색인종에게 빼앗긴 아시아를 되찾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조선을 동화하는 것에 의한 차별철폐를 주창한다. 조선인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원적原籍도 모두 일본 내부로 옮겨 조선에 기류寄留하는 것으로 바꾸자고까지 말한다. 조선어를 금지하고 징병제를 실시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는 선의의 혼합민족론과 차별해소론의 일본형 용광로론의 귀결이었다. 심지어 관동대지진 때 十五円五十銭(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을 조선인들에게 발음해보도록 한 후에 탁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면 학살한 것을 그 근거로 들기도 했다.(226-228) 성서에 나오는 십볼렛, 씹볼렛 이야기의 재판이다.

‘일본인은 사실 백인이다’라는 기괴한 일본민족기원론도 나타난다. 메이지부터 다이쇼 시기에 걸쳐 대두되었다. 이는 일본인을 백인으로 개조하자는 후쿠자와 유키치 류의 주장을 넘어서는 하나의 거대한 귀종유리담貴種流離譚이다. 귀인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혈통을 모르고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고생하는 이야기다. 일본인을 낙윤落胤 즉, 귀인의 사생아로 보는 것이다.(229-231) 일본민족백인설도 혼합민족론과 마찬가지로 수입품이다. 1621년 스페인이 모레온Pedro Moreion은 팔레스티나에서 도래한 사람들이 재래 민족과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라고도 했고, 1690년 독일인 박물학자 캠퍼Engelbert Kaempfer는 일본민족의 바빌론 기원설을, 1878년 스코틀랜드인 맥레오드Nicholas McLeod는 일본민족이 성서의 유대 10부족의 후예가 아이누나 말레이계와 혼합되었다는 설을 제창했다.(231) 개화론자 다구치 우키치田口卯吉는 일본인종은 아리안 인종이라고 말했고,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는 일본민족의 선조는 흉노인종, 즉 훈족이고 현대에는 헝가리나 투르크가 ‘동포’라고 주장했다.(232-233) 다구치의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일청·일로전쟁의 승리 그리고 구미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235) 기무라 타카다로우木村鷹太郎는 성서, 그리스신화, 기기신화, 일본어, 그리스어 등을 근거로 그리스· 아리안 민족이 동천하여 일본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236) 아나키스트였던 이시카와 산시로市川三四郎는 감옥에서 『고사기』를 읽고 히타이트기원설을 주장했다.(239) 기독교 목사이자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훗카이도에서 봉사했던 오야베 젠이치로우小谷部全一郎는 비운의 무장 요시쯔네義経가 몽골로 가서 칭기스칸이 되었다 말하고 일본민족의 히브리기원설을 주장했다.(244) 그는 훗카이도의 아이누가 팔레스티나에 있던 에서의 후손이라며, 차별하지 않고, 동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야베나 긴다이치 큐우스케金田一京助를 보면 이 시기에 백인설고 구제되어야 하는 대상은 제국 내의 피지배민족 쪽으로 옮아가 있었다.(246)

혼합민족론이든 백인기원설이든 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제국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하거나 일본 민족의 열등감을 해소하거나 제국 내 피지배민족의 독립이나 반발을 억누르거나. 그러면서도 동시에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제국주의 사상이나 국체론에 반대할 것이 당연한 기독교인들이나 사회주의자 심지어 아나키스트들까지도 같은 논리를 종종 제시하거나 휘말려들어간다는 점이다. 쓰루미 슌스케는 이 점을 들어서 일본의 ‘전향’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다. 이 모든 이야기 중 가장 어이없으면서도 흥미로운 주장은 일본민족의 백인기원설이다. 희희낙락하면서 웃으면 안된다. 기묘하게도 한국 기독교에는 묘하게 이런 주장이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의 12아들 중 하나인 단지파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이런 단지파가 동쪽으로 와서 한국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군을 그렇게 해석한다. 이런 주장은 일본과 한국만 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고, 영국에도 자신들이 히브리 민족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주장은 자신들이 우월감을 정당화하거나 열등감을 해소하는 하나의 방편인 셈이다. 그걸 굳이 성서의 고대 민족에게 끌어다대는 이유까지는 잘모르겠지만. 오히려 특수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현상으로 읽어내야 할 것 같다.

아나키스트, 시인, 여성사의 개척자로 알려진 다카무레 이쓰에高群逸枝가 이룩한 고대 모계제 연구는 일본 가부장제의 기반을 타파한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다카무레는 대일본제국에서 혼합민족론에 의한 민족동화를 가장 정밀하게 이론화한 인물이다. 다카무레의 입장은 여성의 지위향상이라는 동기에 근거한 모계제의 입증이었으나 이는 기독교계 지식인이나 인류학자들의 소수자 옹호 논리가 침략의 논리가 되는 것과 같은 비극이 노정되어 있다.(247-248) 다카무레는 인위적 도덕에 속박되지 않았던 여성해방의 이상형을 고대사에서,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고사기전』을 읽는데서 시작했다.(250) 여성에 대한 압박은 중국을 비롯한 외래사상의 영향이므로 고대 일본의 부활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것.(253) 다카무레는 다른 선조를가진 이민족들이 천황가라는 하나의 씨氏아래 ‘피의 귀일’을 완수해 가는 형식이었다. 천황통치를 권력지배가 아니라 정에 의한 가족적 결합으로 보는 것이 국체사상의 중핵이다.(256)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씨족 내부에서 모계제에 따라 수장과 혈통의식을 가져야 했다.(257) 그리고 최대씨족이 천황가였다.(258) 반드시 구성원 각자의 혼혈을 동반하지 않아도 계보적 동화를 통해서 이루어졌다.(259) 그리고 모계제는 부계제로 전환발전된다. 이런 민족의 혼합은 구미에 대한 우월감으로 전환된다.(261) 이런 다카무레에게 있어 여성의 전쟁협력은 봉건도덕의 타파이며 여성이 가정을 나와 사회와의 관계를 복원하는 일이고 태고로의 복귀였다.(263) 여성해방, 인위적 도덕에 속박되지 않는 자연, 열린 자유와 연애 등 엄격해지는 일상 속에서 이런 이상을 일본 고대에 투영하여 전쟁을 통해 그 부활을 꿈꾼다. 다카무레는 제국 이민족 동화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이론화를 이루었다.(266)

오구마 에이지는 저명한 아나키스트 였던 다카무레 마저 국가에의 공헌을 강조한 것은, 일찍이 일부의 기독교계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소수자가 자신의 주장과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지불한 대가였을 지도 모르지만, 어떤 사정으로든 한 번 산출된 논리는 그 논자를 넘어 운동하여, 이윽고 논자 자신을 주술적으로 결박해 간다고 다카무레를 평했다.(261) 이 평가는 깊이 새겨볼 여지가 있다. 이론이나 성찰이 그 존재근거를 인정받고 먹고 살 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국가와 사회에 공헌이라는 근거를 내세울 때, 그 결과가 전혀 엉뚱한 반향으로 흘러가는 일들이 아주 흔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상이 발화자의 의도를 떠나 힘을 얻는다. 이런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사상이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환경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면 끔찍한 결말을 맞게 된다. 어쩌면 이 책은 그런 일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오구마 에이지의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은 총 3부로 구성되는 데, 1부는 개국의 사상, 2부는 제국의 사상 그리고 3부가 도국島国의 사상 즉 섬나라의 사상이다. 섬나라 민속학을 야나기다 쿠니오柳田国男로부터 시작한다. 당시 제국 논단의 대세와는 반대로 혼합민족론에서 단일민족론으로 전향했던 드문 논자이다.(270) 관료로 조선병합에 관여하던 시절 『토오노모노가타리遠野物語』부터 1910년까지 야나기다는 산인山人을 선주민족이라고 부르고, 이른 민담과도 연결지었다. 새로온 조상이 재배한 벼가 산인의 기호품이라 원주민족을 동화시킨 힘이 되었다는 것.(272-274) 3.1독립운동 전후 산인론을 버리고 평지민인 상민常民을 묘사하고 남도론南島論에 집중한다.(274) 야나기다가 산인론을 주장한 것은 타키투스의 게르만에 대한 관심, 기독교의 영향 하에 있던 로마와 대조하여 강건한 자연인으로서의 게르만에 대한 묘사에 대한 관심이며, 하이네나 아나톨 프랑스가 기독교 이전의 동양이나 남양을 꿈으로 빌려온 것을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나 근대문명의 대항자로서의 사명을 담당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275-276) 어떤 사람들을 문명이 지체된 비합리적 야만인으로 보는 것은 문명인의 자기긍정이고, 물들지 않은 신비한 자연인으로 보는 것은 자기를 비판하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야나기다의 산인론은 내부 오리엔탈리즘의 징후이다. 그러나 그는 혼합민족론이나 동화정책론으로 나가지 않는다. 산인론을 버린 야나기다는 이 시대의 다른 논자들과 달리 남도론을 지향하고 조선, 타이완에는 무관심했다.(277-278) 패전 후 출간된 『섬의 인생』의 서문에서 ‘시마島’라는 일본어는 안면이 있는 일가동포가 평화롭게 사는 촌락사회와 동의어이고 선주민이 거주했다면 하나의 시마라는 말로 불렀을리 없다고 말했다.(278) 야나기다에게 섬과 산이 매우 유사하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279) 야나기다가 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소위 제네바의 국제연맹 위임통치위원회에서의 극심한 인종차별과 그에 따라 일본인끼리만 교제한 위축된 경험 때문이다. 그 결과 돌아와서 유럽 대륙문명의 보편주의는 섬들의 문화적·역사적 독자성을 무시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281-282) 야나기다는 일본을 세계의 중앙인 구미의 ‘대륙’ 국가에서 소외된 ‘섬’으로 묘사하고 있다. 중앙에서 지방을 접촉하는 고급관료에서 유럽문화에 비웃음을 당한 촌뜨기로 라는 그의 위치변화에 상응하는 것. 야나기다는 유럽과의 대결에 의해 일본인을 단일한 존재로 묘사하는 시각을 체득했다.(283-284) 실제로는 통일독일보다도 큰 일본을 ‘보잘것없는 섬나라’라고 인식하는 것은 구미 등 외부의 위협 앞에서 위축되어 있을 때 열도의 주민이 발명한 자화상이다.(284) 아메리카의 일본계 이민배척 문제도 야나기다의 시각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백인이 지배하는 ‘대륙’에서 배척 당하는 이민의 문제였다. 일본 정부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계 이민문제를 염두에 두고 국제연맹규약에 인종차별철폐를 넣자는 제안을 했지만 구미 열강의 반대로 부결된다.(285-286) 야나기다는 구미의 위협을 의식하면서, 소멸해 간 남도의 주민에 가까운 약자로 일본을 묘사하면서 일본인의 단일성을 주창한다. 이노우에 테쓰지로우의 반대의 궤적이다.(287) 그는 구미의 위협에 노출된 일본의 상민을 세계의 마이너리티로 묘사하면서 일본의 독자적 토착문화의 방위와 통일을 지향해 갔다.(289) 야나기다는 국민통합이 급무라며 열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통의 문화를 지닌 한 민족이라는 것을 아래로부터 자각시켜 통합을 달성하려 했다.(289) 야나기다는 관동대지진이 천벌이라는 주장에 반대해서 죽은 하층민들도 같은 일본인이라 주장했고, 섬 내부의 결여된 통합이 수입문화침입의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하며, 일본민족은 이민족 대신에 일본민족을 노예화했다고 주장했다.(290-291) 수입문화의 침입을 받지 않은 민족 본래의 모습으로 서로가 같은 ‘일본민족의 일원’임을 자각하면 계급적 대립의 지양과 통일이 가능하고, 그 모습은 상민, 즉 토착민에서 찾아야 했다.(292) 그에게 오키나와의 민속은 살아있는 역사였다.(293) 언어문제도 관심사여서 일본어의 방위는 필수적인 것이고 내부의 단결과 통일, 곧 표준어의 보급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295) 시급히 통일하지 않는다면 일본어나 일본문화도 분열된 채 소멸해 간 오키나와 말과 같은 운명을 피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이다.(297) 표준어는 문자가 아니라 입말이이어야 하는데, 입말이어야 할 표준어가 문자로밖에 고정되지 않는다는 본질적인 모순이 그의 고민이었다.(297-298) 국가의 통일이라는 것이 통상 중앙이 지방을 교과서의 문자가 입말을, 근대화된 쪽이 그것에 지체된 쪽을 압도하는 방식으로 달성되는데, 야나기다는 통일할 실마리가 될 지방에서 구하려고 했으나 지방적·구어적이면서 통일적인 것은 존재할 리 없었다. 그는 “있으면서도 없는 전체”를 “아름다운 꿈”이라고 자인했다.(300) 야나기다는 일본열도에서 지방적이면서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한 유일한 것, 쌀을 ‘일본인’을 아래로부터의 민속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여겼다.(301) 야나기다는 선주민족과 도래민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인류학으로부터 자신의 민속학을 독립시키려고 했다.(302) 조선은 섬이 아니었고, 조선을 포함하고 있는 한 대일본제국은 섬나라일 수 없었기에, 대륙에 있는 조선은 문제의식 밖에 있었다. 그는 동화정책을 찬미하지도 않고 일선동조론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일본민족은 대륙의 민족과 동종동조여서는 안된다. 그의 국민통합론에 천황의 그림자는 극히 희박한 편이며, 단일 민속에 의한 아래부터의 통합은 이민족에게는 닫혀 있는 것이었다. 패전 이후 일본의 다수자인 ‘국민’이 국가권력의 피해자이므로 단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기에는 상민론이, 그 국민이 제3세계나 소수자에 대한 가해자로 의식되면 산인론이 주목받는다. 그의 민속학은 기타 등과는 달리 다민족제국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었다.(303-305) 야나기다에게는 배타성과 어떤 종류의 평화성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민족의 그림자 없이 균질한 문화로 전원이 통합되어 농업으로 자급자족하고 전쟁, 정복, 마찰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 마음의 평안을 구하려고 그려낸 환상, 그것이 마을이고 섬이었다. 그의 남방설은 점차 세력을 얻어 ‘벼농사를 짓는 하나의 민속을 지닌 섬나라’라는 도식은 그 후 일본의 자화상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남기고, 배타와 평화의 이중성은 전후 단일민족신화의 기본적 성격이 된다.(305)

야나기다 쿠니오의 섬나라 민속학은 꽤 길게 요약했지만 그만큼의 중요성을 가진다. 실제 오늘날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본적 성격이 대부분 들어있다. 그 섬나라 민속학의 출발점이 제네바의 국제연맹회의에서의 좌절이라는 점이 너무나도 뜻밖이면서도 동시에 고개도 끄덕여진다. 과연 그랬을 것이다. 일본이 아무리 구미의 반려가 되었다고 해도 역시나 없어지지 않고 있는 인종주의와 인종차별은 그를 괴롭혔다. 며칠간 많은 사람이 마음을 썼던 월드컵 축구에도 보고 있으면 인종차별이 보여서 때론 참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런 그가 마음의 평화를 찾은 곳은 서로 서로 알고 있는 작은 마을이나 섬처럼 모두 같은 습관과 말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쌀을 먹으면서 오손도손 평화롭게 사는 공동체였다. 그러기 위해선 조선이라는 식민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패전 이후 일본에 쌀을 먹는 평화로운 단일민족에 근거한 배타주의가 야나기다에게서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 일도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전쟁의 기억을 잊기에 가장 편리한 논리구조다. 야나기다에게서 출발한 이 단일민족 신화의 내용을 보면, 지금은 공식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한민족 단일민족 신화가 반복적으로 떠오른다. 80년대까지만해도 중등 교육과정에서 공식적으로 전파되면서 강조되면, 벼농사, 단일 혈통, 동일한 언어, 단 한 차례로 외국을 침략하지 않았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 없는 주장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 내용을 외워서 맞는 답을 찾아야만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그 교육의 내용과 야나기다의 섬나라 민속학이 얼마나 닮은꼴인지는 각자 생각해 보면 될 일이다. 지금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 탓인지, 젊은 세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때는 그 시절 교육 내용과 방법까지 설명하면서 꼰대스러움이 한층 더해지지만.

우생학이나 인종사상을 신봉하는 자들도 동화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306) 동화정책은 혼혈을 용인한다. 혼합민족론에 의한 일본의 동화정책론은 혼혈에 의한 피지배민족의 말소를 중요한 요소로 삼고 있지만, 인종사상이나 우생학 신봉자에게 우등한 지배민족의 피가 오염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열등민종은 우등인종과 섞이지 않도록 격리하여 열등한 유전적 소실에 맞는 옛 관습대로 살게 하면서 간접적으로 착취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들은 국체론보다 ‘과학적’인 독자적 단일민족론을 준비해 갔다.(307) 일본 우생학의 개척자 중 하나인 운노 코우토쿠海野幸徳는 조선인종과 일본인종의 잡혼을 말하면서 잡종강세론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주류는 혼혈기피론과 동화반대론 쪽이었다. 훗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도 처음에는 인종사상에 입각해 피의 순혈과 혼혈기피론을 제기했다.(308-309) 타이완 총독부의 도고 미노루東郷実도 잡혼을 반대하며 이민족과의 혼효에 의해 일본민족은 퇴폐에 이른다고 로마제국을 거론했다.(311) 우생학자들이 혼혈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황색인이 황색인을 차별하기 위해서는 조선인과 타이완인 보다 일본민족의 상위를 증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312) 이들에게 1930년대 이후 커져가는 혼혈문제(내선결혼)는 금기였다.(313) 황민화 정책 시기 조선총독부는 혼합민족론을 대대적으로 이용했다. 여기에는 나치(의 유대인 정책)에 대한 비판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권리·의무의 평등은 아니고 차별을 유지한 채 조선민족의 독자성을 말소하고 필요에 따라 동원하려는 것이었다.(315) 1941년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장 후로카와 카네히데古川兼秀의 순혈오염론 비판, 경성제대 교수 오다카 토모오尾高朝雄의 나치비판, 내선일체를 추진하는 녹기연맹 회장 쓰다 쓰요시津田剛의 한반도와 관서인의 골격 차가 적다는 주장, 총독부 정보과장 구라시마 이타루倉島至의 중부 조선반도인과 긴키 지방 내지인 유사성 강조, 조선 총독 미나미의 고려왕을 모신 사이타마현 고려촌의 고려신사 사례 강조 등이 있고, 일본 낭만파인 야스다 요주로保田与重郎의 천황가와 조선 왕가 혈연관계론은 친일파 지식인 이광수도 받아 일한은 상하 모두 혈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316-319) 후루야 에이이치古谷栄一는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삐라를 인쇄하여 총독부에 항의했는데, 굳이 하려면 내지에 없는 성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름이 구별되지 않으면 차별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었다.(320-321) 하지만 조선 뿐 아니라 타이완 총독부도 훗카이도 도청 사회과 원주민계 주임 기타 노리아키喜多章明도 동화와 혼합을 강조하고 있었다.(322-323) 1930년에 우생학에 의한 사회개조를 내세운 일본민족위생학회로 설립했다가 일본민족위생협회로 바꾸는데, 유전병자나 열등자의 단종, 우생학자의 진단에 의한 우생결혼, 산아제한반대, 일본민족의 증식 등을 목표로 한다.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나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도 창립 평의원 명단에 있었다. 이들도 혼혈에 반대했다.(323-324) 부회장 후루야 요시오古屋芳雄는 나치의 민족정책에 공감하여 후생성에 들어가 국민우생법(유전병자 단종 합법화), 국민체력법, 인구정책확립요강(우생지식보강, 피임·중절 금지 등)에 참여한다. 그는 혼혈에 반대하여 타이완이나 조선은 개척이민을 보내 일본의 농촌을 건설하고 재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조선인의 인구증가율이 높은 것을 우려했으며, 창씨개명은 국체명징에 역행하는 상서롭지 못한 사건으로 비판했다.(325-328) 1943년 후생성연구소 인구민족부는 『야마토민족을 중핵으로 한 세계정책의 검토』를 작성하여, 진출지역민족과의 혼혈은 우생학적 고려를 빠뜨렸다며 혼혈방지를 강조하고, 잡혼이 많은 것은 성충동의 결과라며, 열등한 별종의 민족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강제 연행으로 급증한 내지 거주 조선인과 일본여성의 통혼 증가를 경고한다. 정복민족의 남자가 피정복민의 여자를 처로 삼아야 하는데, 거꾸로 되었다는 것. 황민화와 총동원은 진행될수록 순혈주의를 무너뜨리는 성격이 있었다.(329-331) 이 시기 나치 독일에서도 강제동원된 외국인 노동자와 독일인 혼혈의 사회문제가 되어, 소련과 폴란드에서 노동자를 연행할 때 남녀동수가 원칙이고, 독일여성과 성적 교섭을 한 남성은 사형에 처했다.(金子マーティン, ドイツと日本の外国人労働者政策) 일본에서는 몇몇 노동현장에서 조선인 노동자용 조선여성위안소가 설치된 것은 확인되었으나 내선결혼은 표면적으로는 정부에 의해 장려되고 있었다.(331) 후생성연구소 연구관들은 조선, 타이완은 병참기지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출산율은 높고 동화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자 몸 속의 벌레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전쟁 후 송환, 북만주, 동만주에 내지인 집단 이주, 조선인 뉴기니아 등 불모지 개척 위한 이주, 조선, 타이완 인구의 1할을 내지인이 차지하도록 공작, 내선일체론 시정 등이 있었고, 지금까지의 문제들에 내선공학共学이나 징병제까지 문제를 삼아 격리, 배제를 모색한다. 군사동원의 경우 일본군 편입이 아닌 외인부대 편성 이용도 제안했다.(332-333) 이 문서는 일본민족이 이미 고유한 순계의 인종이라고 주장하고 해외 진출시 가족 동반을 주장한다.(334) 조선총독부도 순혈론을 비판하기는 했으나 이는 민족의 독자성을 말살시켜 동원하고자 했던 것이고 우생학계는 이민족이 유입되는 것을 기피하고, 차별의 근거인 민족의 구별이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었다.(336) 우생학계 쪽에서도 혼합민족론에 대항하기 위한 인류학자들이 있었는데, 가나자와의대 교수 후루하타 타네모노古畑種基는 법의학과 혈액형 연구가 전문으로 혈액형 붐의 선구자다. A형은 섬세하고 O형은 대담다는 식인데, 현재 혈액형 인간론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松田薫, 血液型と性格の社会史) 당시 우생학계에서는 각각의 인종과 민족에 특정 혈액형 비율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민족의 기질이나 우열의 지표가 된다는 학설을 제시했다.(337) 교토제대와 도우호쿠제대의 의학부 교수였던 키요노 켄지清野謙次(생체실험을 한 731부대를 지휘한 이시이 시로우石井四郎 중장의 스승)와 하세베 고톤도長谷部言人는 전후 인류학의 정설을 형성하여 단일민족신화의 성립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인골을 측정하여 형질측정통계처리를 하는 것. 키요노는 일본의 석기시대는 일본민족의 직접 조상으로 정복에 의한 민족 교체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석기시대 인골은 현대 일본민족에도 현대 아이누에도 가깝지 않다. 석기시대인은 현대 일본민족의 조상인데, 진화와 혼혈로 인해, 아이누와 현대 일본민족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키요노와 하세베의 학설은 선주민족정복설의 부정이지 혼합민족의 부정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연구가 동화정책을 지지하는 종래의 학설에 대한 위협이 되어도 대량의 측정과 통계학을 구사했기에 반론은 어려웠다.(338-341) 가장 강력한 반론이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론에도 채용된 경성제국대학의 우에다上田는 조선 중부지방 사람과 일본 긴키지방 사람의 형질차는 열도 내 지방차보다 작다는 것.(341) 황민화 정책이 본격화한 1938년부터 하세베는 혼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이민족의 혼혈도 예외적이고, 석기시대부터 벼가 있어서 현대 일본과 문화적 연속성이 있다, 인류가 처음 발생한 후 일본인이 일본 땅을 점거했다고 주장해서 나치의 순수게르만인종우월론을 연상케하는 학설이라고까지 평가되었다. 하세베는 비공식문서에서 열도의 석기시대인은 곧 일본인이며 그 문화는 당시부터 지극히 특수하며 우월했다고 주장했다. 일선동조론이나 선주민족설을 집요하게 부정하면서 조선인을 비롯한 주변인종과 다른 일본인의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중국인과의 유사성만은 인정한다. 일본인은 대동아에서 고귀하고 긴요한 특수성을 지니기 때문에. 인구증식은 중요하지만 범질은 교육과 지도에 의해 개량하고, 악질은 단종법의 규정에 따라 제거할 필요가 있다.(342-345) 키요노는 일본국에 인류가 도래하여 일본 신석기시대 주민을 낳았다면서 다소 혼혈은 인정하지만 큰 체질변화는 없었다고 말한다. 황실은 신대神代부터 일본의 황실이었다고. 기기의 이민족은 같은 인종 가운데 불량분자이고, 일본인은 정치적 우생학적 입장에서 자신의 증가를 통해 공영권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지에서 태어나면 내지 유학을 거쳐 황국민으로서의 적절한 훈육이 필요하다고도 말했다.(346-348) 이들의 주장은 전문지식 없이는 읽기 어려웠으나 소수의 독자가 있었는데, 와쓰지 테쓰로우和辻哲郎나 전후 주류가 된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자들이 있었다. 네즈 마사시禰津正志 같은 경우 과학적인 키요노의 학설이 보급되지 않은 것은 학계에서 없어지지 않은 봉건의식 때문이라고 말했다. 네즈는 키요노의 학설을 기기신화의 전통적 해석을 타파해 준 주장으로 환영했다.(349-350) 메이지 시기에는 혼합민족론을 부정하는 것이 과학의 이름으로 조소거리가 되었더니 이제 역전되기 시작했고, 패전에 의해 제국이 홋카이도와 3부 43현에 지나지 않았던 메이지시대의 일본으로 되돌아오자 일선동조론과 혼합민족론은 세력을 잃고, 두 인류학자의 기원론은 그 발생의 배경을 잃은 채 정설로 받아들여져 갔다.(351)

꽤나 긴 내용을 굳이 한 문단으로 요약해 두었기 때문에 읽기는 다소 번잡하다. 그래도 한 호흡으로 읽을 때만 보이는 핵심이 있다. 그것은 이 책 전체의 핵심과도 같은 것이다. 일본의 일관된 고민은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유지할 것인가, 동시에 외지 즉 식민지를 어떻게 억제하고 효과적으로 착취할 것인가. 여기서 동화론이 등장하든 차별론이 등장하든 그것은 모두 방법론에 따라 편의를 취한 것에 불과하다. 고민의 출발점은 조선과 일본이 너무나 닮았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생긴 것도 비슷하고, 인종적으로도 유사하고, 먹는 것(쌀)도 유사하다. 그럼에도 차이는 분명하게 해서 민족 간의 우열은 분명하게 그려내되, 백색인종이 지배하는 구미에 대해서는 황인종의 단결과 일본이 황인종 아시아의 대표라는 의식을 확고하게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골격이 사용되든, 혈액형이 사용되든 그것은 단지 편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민족 차별에 우생학이 적용될 때, 다른 인종들 사이에서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없지만, 오히려 같은 인종 사이에서 차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복잡하고 상세한 분석과 차별이 필요한 것 같다. 일본인의 조선인 차별은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독일인의 유대인 차별과 유사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유대인들 특히 서유럽에 섞여살던 유대인을 외모상으로 구별해 내는 건 실은 억지에 가깝다. 그 점을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겠지만.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구조가 정교하고 복잡한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했기 때문에 구별해서 차별하기 위한 무수한 노력이 필요했던 거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혈액형이다. 오구마 에이지의 책에서는 일본에서 벌어진 일외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정준영의 “피의 인종주의와 식민지의학: 경성제대 법의학교실의 혈액형인류학”이라는 논문을 함께 읽어보면 아주 흥미롭다. 혈액형이 오스트리아 면역학자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에 의해 처음 등장한 것이 1901년의 일이고 당시로는 아주 최첨단 과학이었던 셈이다. 일본에도 곧바로 등장하지만 자세한 연구는 되지 않는다. 이유는 인종계수라는 것 때문이었는데. 당시에는 A형이 가장 우월하고, 그 다음이 B형이라는 식으로 인종지수를 매겼다. 그리고 서구가 A형이 많았다. 일본이 인종지수가 서구 같았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광범위한 연구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성제대 의학부의 법의학 교실 사토 다케오佐藤武雄이다. (이 시기에 발간된 “일선인 사이에 있어서 혈액속 백분율의 차이 및 혈액속별 특유성의 유전에 대해서”같은 경성의전 논문의 공동저자 중 한 사람은 백인제다. 그렇다 백병원이다.) 여튼 사토 다케오는 식민지인 조선에서 광범위한 샘플을 모집해서 조선남부형, 조선북부형, 조선중부형으로 나누고, 조선남부형이 일본 내지와 가깝다고 말한다. 남쪽일 수록 A형이 많고, 북쪽일 수록 B형이 많았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연구를 만주와 몽골로 확장하여, 일본이 A형이 가장 많고(서구에 비하면 적지만) 조선의 남부와 북부를 거쳐서 만주와 몽골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혈액형의 우열에 근거한 인종적 우열론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A형이 우월하다고 말하기엔 일본에는 B형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전후에 등장하는 바로 그 혈액형 성격론이 등장하게 된다. B형이 오래 참아야 하는 군인에는 더 유리하다는 식이다. 얼마전까지 호들갑을 떨었고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혈액형 성격이론이 유독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과 한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런 것은 도대체 식민지의 어떤 유산이라는 건지. 위에 언급된 후루하타의 경우 전쟁 말기에 광범위한 혈액형 연구를 한 후, 패전 이후에는 혈액형에 따라서 범죄가 성립한다고 말하고, 그의 증언으로 유죄가 선고되기도 해서, 나중에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쓴 오심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게되면 혈액형 타령은 사라지지 않을까도 싶고. 그러고 보니 나치 독일은 유대인과 독일인을 나누기 위해 훨씬 더 큰 고심을 해야했다. 적어도 조선인과 일본인은 언어도 다르고 나뉘어져 살고 있으니까, 구별이 쉬웠던 셈이다. 유대인은 그렇지 않았으니, 나치 독일은 뉘른베르크법을 만들어 한 사람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그리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종교를 확인해서 2사람이 이상이 유대교면 유대인으로 처리했으니까. 얼마나 기묘하고 고심한 방법이었던지. 아예 피부색이 달랐으면, 서로들 그렇게 복잡한 방법은 쓰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지금까지 계속 반복해서 말해왔지만, 이 시대의 이런 인류학과 우생학에 근거한 단일민족론 인종적 순수성론이 일본이 패전하고 영토가 줄어들 후, 자신들의 현재 상태를 이상화하고 정당화하는 논리로 급속하게 전환된다는 점이다.

역사학에서의 단일민족론은 인류학의 그것보다 먼저 다이쇼 시기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논자는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와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다. 시라토리는 나이토 고난内藤湖南과 함께 일본 동양사학의 시조이고, 쓰다는 시라토리의 애재자였으며 기기신화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서 공격도 받았고, 와쓰지 테츠로우와 함께 전후 상징천황을 사상적으로 준비했다고 주목받기도 한다. 당시에는 주류가 아니었지만, 패전 이후 단일민족신화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352-353) 시라토리는 근대 역사학 1세대로 자국의 민족적 정체성 형성에 관심을 가졌다. 시라토리는 일로전쟁기 민족구성이 단순하기 때문에 단결하기 쉽다고 말하면서 단일민족론의 학문적 성립을 위해 노력했다. 기기신화記紀神話의 이즈모出雲와 구마소熊襲는 이민족이 아니라며 구비전설은 후대에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선조는 훨씬 이전에 조선반도를 넘어와 이 섬에 거주했다고 주장했다. 신화가 이루어진 것은 후대로 내려와 민족의 문명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다고 일선동조론을 부정했다. 그도 유럽 유학과 일로전쟁을 거치면서 견해가 변했다.(354-356) 조선을 방벽으로 확보하는 일은 동양평화에 중요하다며 병합을 환영했지만, 스사노오의 반도통치는 신화일 뿐이라며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던 역사는 없다고 주장했다. 일선동조론과 혼합민족론은 동화를 노래할 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시라토리는 일본과 조선국은 예로부터 반대로 살았기에 우정으로 덕으로 이끄는 것은 무의미하다면서 권력에 의한 지배를 주장한다. 시라토리는 조선을 오로지 일본의 대륙진출과 방어의 거점지역, 지형학적 토지 정도로만 보았다.(357-358) 한일합병 3년 후인 1913년 일본과 같은 언어로 말하는 나라는 없고, 일본 민족의 도래는 몇 만년 전이므로, 야마토민족은 이 섬에서 태어났다고 부르짖기 시작했고, 1915년 다카아마노하라高天原가 외국이라는 견해에 반론을 제기한다. 시라토리는 이즈모나 구마소는 같은 민족이고, 이민족인 아이누는 철저하게 배척되었다고 말했다.(359-360) 시라토리는 민족의 분류에서 가장 유력한 것은 유적이나 발굴된 인골이 아니라 언어라고 역설했다. 시라토리의 언어학설 외에 단일민족론의 논거는 없고, 언어나 습관이 일본풍인 조선인은 형질인류학적으로 구별할 수 없다면서, 일본어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언어인 이상 일본민족의 고향은 일본열도라고 주장했다. 기기로써 일본 인종의 본원을 탐구하려는 것은 정곡을 오해한 것이며, 그것은 일본 상대上代에 있어 신념·제도·정치·풍속·습관 등의 사실을 아름답게 시적으로 묘사해낸 모노가타리物語라고 주장했다. 극단적인 기기모독이다.(361-362) 쓰다 소우키치는 만철의 만선역사지리조사부 연구원으로 그도 시라토리 처럼 일로전쟁과 일한합병을 거치면서 단일민족론으로 전환한다. 『신대사神代史의 새로운 연구』에서 기기가 역사적 사실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말한다.(364) 『신찬성씨록』에 게재된 도래인계 씨의 대부분은 순수한 일본인이라고 말하는 등, 기기의 이민족에 관한 기록을 공상적인 꾸며진 이야기라고 하는 방식으로 혼합민족론의 논거를 해체하고 있다. 기기의 이야기 안에 국가 내부의 민족적 경쟁이라는 사상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하나의 민족이라는 증거다라고 말했다. 이민족과의 대립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것. 민족의 동화는 압도적인 정치력의 차이에 의한 지배로만 가능하며 대립의 역사가 남을 뿐이라고 했다.(366-368) 시라토리와 쓰다는 동양사·언어학과 기기연구를 분담하면서 단일민족론의 학문적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중국관과 일본민족관에 차이가 있었는데, 시라토리의 동양사관은 구메 쿠니다케久米邦武와 마찬가지로 북방민족과 남방민족의 투쟁이라는 견해로 일관되어 있다. 일본은 양자의 장점을 취하여 문무에 뛰어난 우수민족이라는 것. 일본문명 진보의 특색은 외부의 장점을 취하여 스스로와 동화시키는 것이라는 것. 시라토리는 단일민족론을 주창했지만 일본민족의 우월성을 말하기 위해 혼합민족론의 레토릭도 받아들이는 절충적 논조를 가지고 있었다.(369) 쓰다는 황실은 국민의 내부에 있고, 민족적 단결의 중심점으로 국민적 단결의 핵심이 되고 둘 사이의 관계는 혈연으로 유지된 일가의 친밀함이어야 한다. 반면 중국은 민중과 통치자가 분리된 전제사회의 대표적 사례로 본다. 일본의 상대인은 대륙에서 격절되어 있는 고도의 국민이었기에 국민적 전설이나 서사시 등 정치적·문화적 능력도 없다. 쓰다의 사상은 국체론 가운데서 천황통치는 권력지배가 아니라 국민과의 자연스러운 정의 결합이라고 하는 부분만을 극대화한 것이다. 국체론자들은 천황통치가 가족의 정이라는 논리를 조선과 타이완까지 연장하려고 혼합민족론을 주장했지만, 쓰다는 이민족 사이에 자연스러운 정의 결합은 있을 수 없고 대립이나 권력관계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혼란스런 다민족국가냐 평화스러운 단일민족국가냐 둘 중 하나의 선택이었다.(370-372) 조선의 병합은 현대에 와서 비로소 필요해진 문제로 옛날 일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단언한다. 해외진출은 국민과 무관한 정부권력이 하는 일로 보고 있다. 조선과 일본의 깊은 관계는 역사적으로도 현대에서도 미혹이며 조선과 일본이 무관하게 되는 것을 환영했다.(373) 쓰다에게 다민족을 통치하는 국가권력은 혐오의 대상이고, 쓰다는 국가주의를 배제한 민족주의자였다. 쓰다에게 일본은 단일민족국가였기에 민족과 국민은 같은 것이지만 국가와 민족은 분명히 구별되었다. 기기는 국가의 역사이지 민족의 역사는 아니므로, 일본민족의 기원은 아득한 태고가 되며, 이민족의 부재와 평화적인 일본민족이라는 주장이 보강된다. 기기의 기록에는 정부가 받아들인 중국사상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쓰다는 관청의 고압적 태도나 경찰관의 횡포 등 국가권력의 노출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에게 국가란 권력이고 이상적인 민족=국민=민중은 평화적·자율적인 것이다. 현실에서 전제에 길들여진 근대 일본의 민중에게 자율성·공공성이 부족하는 것을 무시했다. 조선인은 유교도덕의 인습과 형식적 제도 속에서 생명력을 잃은 민족으로 보고 있다. 민족(민중)의 자율적인 사회와 자연스러운 생명력의 충일을 권력지배와 형식도덕에 대치시키고자 했다.(374-376) 쓰다는 자유주의자였고, 마르크스주의에는 냉담했지만, 무정부주의적 입장을 지녔던 고우토쿠 슈우수이幸徳秋水에게는 호의를 표하고 있었다. 아나키스트인 다카무레 이쓰에나 이시카와 산시로가 『고사기』나 국체론에 심취한 것도 국체사상의 무권력성 때문이었다. 물론 국체론은 국가의 이데올로기이고,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든가 권력 없는 정의 결합이라든가 하는 것은 차별이나 권력지배를 은폐하는 현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현교의 일부분만을 확대해 가면 어느덧 현실의 비판이 되어 버린다.(376-377) 쓰다에게 천황과 민족(국민=민중)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1916년 천황을 국민적 정신을 살리는 상징으로 읽고 있으며, 천황이 정치적 기능은 여러 씨족의 조정역이었고, 무력발동의 씨족의 힘을 빌어 시행하며 천황의 권위는 최고의 문화를 점유하고 있기에 발생한다. 쓰다가 묘사한 천황은 마을 사람들이 흠모하는 장로와 같은 존재였다. 천황은 자율적인 민족(민중) 통치의 상징으로 권력지배와 배치된다. 무정부주의가 발생하는 원인을 정부가 천황과 국민의 결합을 저해하고 천황의 이름을 빌려 권력을 휘두르기 때문이라고 간주한다. 쓰다에 따르면 역사상 정상적인 천황의 존재방식은 에도시대로 대표되듯 무가武家가 통치를 위임받고 있던 천황불친정天皇不親政의 시대이고, 당시 일본의 올바른 존재방식이라고 여겨지던 천황친정의 시대, 건무신정建武新政이나 메이지유신 이후는 예외이고 일탈이었다.(377-379) 일본이 받았던 중국문화의 영향은 일부분의 권력자나 지식인에 그치고 국민은 따로 일본 독자의 문화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의 연구에서 국민의 문화와 권력자의 문화를 구별했다. 한문수업 폐지와 지나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고수했고, 일본과 중국은 민족성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지나인에게는 일본인이 항상 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379) 중국은 혐오한 반면 구미문화의 영향에는 아주 관대했다. 구미문화는 중국문화를 중화시켜 주는 것으로 환영받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 전쟁 중 표면상의 방침 일본민족은 어디까지나 아시아 여러 민족의 혼합이고, 구미의 백인은 완전히 다른 인종으로 귀축鬼畜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380) 시라토리는 일중의 문화적 공통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지만, 쓰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공마저도 이유 없는 외국 침략이라 보고 있었다.(381) 쓰다가 기기를 꾸며진 이야기라고 한 것은 기기를 존중하는 방법이었다. 쓰다에 따르면 기기의 기록을 기기를 역사적 사실의 우화라고 생각한 아라이 핫세키新井白石나 신의 시대에 일어난 기적적인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등은 사실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고 하는 천박한 지나합리주의의 침해를 당한 인물이었다. 쓰다로서는 구메 쿠니다케는 아라이 핫세키의 현대판이었을 것이다.(381) 쓰다는 기기에 담긴 상대上代의 이야기는 역사와도 무관한 한 편의 시라며, 시는 역사보다도 국민의 내적생활을 잘말한다고 요약한다. 신화는 인간세계의 천박한 이성과는 다른 장소에 봉인되어 있기에 국민(민족)정신의 상징일 수 있다.(382) 쓰다의 기기연구는 엄밀하고 합리적이었지만, 쓰다의 목표는 합리적으로 해석하면 도저히 사실史實이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혼합민족론으로 잘게 조각난 기기를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신화로 소생시키는 것이다. 이런 수법은 시라토리의 것이지만, 일본신화로는 인지로는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그 때문에 신의 진리가 깃들어 있다는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것이었다. 쓰다는 모토오리를 비판하고 있지만 엄밀한 텍스트 비판 위에서 인지를 초월한 텍스트로 신화를 신성화한 방법론은 모토오리와 같은 것이었다.(382) 전후의 역사학자들은 쓰다를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과학적 비판자로 높게 평가했다. 역사가들은 쓰다를 국민(민중)사관의 시조로 위치 짓는 경향이 있고, 그의 행동은 진보적인 가치관과 일치하는 항목들이 있었다. 그들은 쓰다의 천황지지와 반공세력에게 보였던 어정쩡한 태도에 반발했지만, 기기연구는 그것과 달리 고대사의 ‘당연한’ 해석으로 전면 수용되어갔다.(383)

일본의 단일민족론이나 일본 민족 또는 국민의 정체성 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장벽 중 하나가 ‘기기신화’의 이해라는 부분이다. 이게 또 임나일본부 해석과 섞여서 뒤죽박죽이 되기도 한다. 일본의 국민/민족론은 기기신화, 고고학, 중국학, 일류학, 우생학, 국민문화론 등 당대에 유행했던 거의 모든 논의가 뒤섞여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 결을 살피는 것이 어렵다. 게다가 그것이 학문적 논제에 따라서 전체적인 방향이 추동되었다기 보다는 정치적인 격변들에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100년이 안되는 기간 동안의 세번의 격변인데. 첫째는 개항과 메이지 유신이고, 둘째는 그것의 성공으로 인한 청일·러일 두 번의 전쟁 승리로 인한 식민지 획득과 제국주의화이고, 셋째는 물론 패전이다. 패전의 기운이나 불가항력은 대략 30년대 중반 이후 전조가 있었고. 1세기가 채 지나지 않는 동안에 이어진 세번의 큰 파도는 각자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방향을 바꾸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의 일부가 패전 이후 정통이 된 ‘상징천황론’에 입각해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단일민족론을 비판하게 되는데. 오구마 에이지는 그걸 비판한다. 어찌보면 이런 것 아닐까 일본 단일민족론은 비판할 만큼의 실체도 사실 없다. 단일민족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실체를 만든다는.

이런 논의 중 시라토리 쿠라키치와 쓰다 소키치는 꽤 중요한 인물이다. 스테판 다나카의 『일본 동양학의 구조』에도 단일민족 신화 부분은 없지만, 꽤 자세히 다루어진다. 특히 쓰다 소키치가 ‘기기신화’를 다루는 방법을 보면서 해방 이후에 본격화된 한국에서 신화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젠 『환단고기』까지 얽혀서 평가에 대해 인신공격이 난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얼마전 작고한 배형일 교수의 연구가 아직도 한국에는 소개되지 않고 있으니 이것도 안타까울 뿐. Hyung Il Pai, Constructing “Korean” Origins: A Critical Review of Archeology, Historiography, and Racial Myth in Korean State-Formation Theories. 쓰다 소키치는 스사노오의 신라 침공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임진왜란 자체가 불필요한 침공이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런 쓰다 소키치가 식민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평화주의자였을리가 만무하다. 그는 만철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의 오랜 중국 경험이 중국과 문화적으로 대결해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국과의 대결에서 일본의 순수성을 일본 민족을 지키는 방법을 궁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병도를 식민사학이라고 하면서 쓰다 소키치의 제자라고 말할 때, 지적되는 것이 쓰다 소키치가 한사군 즉, 낙랑의 평양설을 주장했다고 하고,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부인했다는 점이 지적되는데. 그것은 쓰다 소키치가 ‘기기신화’를 다룬 방식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역사적 기록으로 보지 않은 것처럼, 『삼국사기』의 고대 부분을 역사적 기록으로 보지 않은 것. 이런 한두가지로 쓰다와 식민사학을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고, 쓰다 소키치를 일본의 당시 역사 이해의 맥락 위에 놓고 평가할 수 있어야만, 이병도의 식민사학 역시도 평가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행히 젊은 사학자들이 나서서 유사역사학과 싸우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와쓰지 테쓰로우和辻哲郎는 일본의 국체라고 하는 것은 민족과 국민이 완전히 일치하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민족과 국민의 일치는 말할 것도 없이 단일민족국가의 모습이다.(384-385) 1917년 와쓰지의 일본 민족론은 혼혈로 시작한다. 호오류우지法隆寺는 대일본제국의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의 한 상징이다. 당시에는 이를 도래인과 일본인 중 누가 세웠는지 논쟁이 있었다. 와쓰지는 쓰다의 기기연구는 평가하면서도, 인도와 중국이라는 동양의 2대 문화가 이론에서 종합되었다고 주장했다. 일본민족은 쿠로시오黒潮를 타고 도래한 정복민족인 남종南種이 대륙에서 도래했던 퉁구스계의 한족과 다른 민족인 북종北種을 정복하고 혼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남북종의 혼합은 흔한 것이었지만, 남종을 중국계로 보는 다수설과 달리 와쓰지의 특징은 남북종 어디에서도 한족을 제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구메의 남종의 인도기원성을 좋은 기회라고 말하고, 열도의 선주민이었던 북종은 원시적이지만 소박하고 직감적이었다고 주장한다. 한족의 선진문화를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직감적이고 정감적인 남북종의 혼합인 소박 강직하고 감정이 격졀한 ‘자연아’인 일본민족이었다. 인도문화는 정의적·미적이고 한족은 지적이며, 북종은 인도문화에 친숙하기 쉬운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우수한 불교미술은 북방 퉁구스계통의 ‘피’와 인도문화의 ‘정의’가 원동력이었다. 인도계의 남종과 인도문화에 친숙하기 쉬운 소박 강직한 북종의 혼합으로 일본민족이 형성되었고, 거기에 도래인의 지성이 소화되면 가장 이상적인 불교미술을 낳을 것이다.(386-392) 와쓰지는 『일본고대문화』에서 일본이 혼합민족이라며, 현대 아이누와 달리 인도까지 소급되는 암색구미인종군과 연결되는 범 아이누와 남퉁구스인 조선계라는 두 종류의 혼합설을 주장했다. 양자는 같은 시기 열도에서 공존했다. 기기신화 시대에 이미 하나의 일본어를 가지고 하나의 혼성민족이 되었다. 와쓰지는 일본민족의 예술·신앙·성질·사회조직 등을 대단히 소박한 것으로 여기고 기기신화는 자연아의 신화를 묘사한 것으로 보았다. 일본가족은 남녀동권에 모계제적이었다고 말한다. 와쓰지의 일본회귀는 1차 대전부터였다. 근대이성의 한계 사상이나 일본계 이민배척문화와 인종평등제안의 부결 등의 영향으로 보인다. 자연인이라는 와쓰지의 일본 고대인관에는 니체의 선악의 피안 개념도 중첩되어 있었다. 스승 이노우에가 기기로부터 국민도덕을 논한 것에 대한 대항이기도 했다. 야나기다가 보편주의의 상징을 구미(대륙)에, 쓰다가 형식도덕의 상징을 중국에 투영했다면 와쓰지는 구미나 중국, 양쪽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와쓰지에 의하면 지성이나 도덕으로서의 불교가 들어 왔지만 일본의 자연인은 본래의 어린이 같음을 잃지 않고 불교의 특수한 생육을 이룩했다고 말한다. 나라시대에는 귀화인이 이미 완전히 일본인이 되어 있으며, 중국·조선으로부터의 영향은 최소한으로밖에 평가하지 않는다.(392-396) 고대 일본인은 개인으로 분화되지 않는 군중으로 자연스러운 정으로 연결된 작은 나라를 형성하고 있기에 인위적인 제도나 위로부터의 권력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 작은 국가의 군주는 인민을 억압하는 전제군주가 아니라 ‘신의 마음’인 군중 의지의 ‘상징’이다. 여기서는 국체론이 감지된다. 와쓰지는 일본 역사상 권력에 의한 압정은 민의를 헤아릴 줄 몰랐던 장군이나 대신 등의 행위였고 천황과는 무관했다고 주장했다. 국체를 내세워 민본주의를 공격하는 것은 잘못이라 비판했다. 그는 고대 일본을 선악의 피안으로 중국의 지와 인도와 퉁구스의 정의 변증법적 지양으로 긍정했고, 기독교 도덕에 반발하여 그리스 비극을 찬양한 니체에 경도되었다. 혼돈과 생명의 신 디오니소스와 이성과 질서의 신 아폴로로 대표되는 두 원리가 조화되었을 때 그리스 비극이 성립하고, 고대 그리스는 예술로서의 축제와 정치적 공동체가 분리되지 않은 것으로 개인과 전체가 분리되지 않은 중의衆議로서의 공동체 의지가 군주로 상징된 와쓰지의 고대 일본상과 부합하는 것이다. 이런 고대상과 천황상은 쓰다와도 유사하다. 와쓰지는 일본문화의 복합성을 근거가 박약한 인도기원설에 의거한 민족의 복합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397-400) 와쓰지는 1927년 문부성 재외연구원으로 유럽에 나갔다가 야나기다와 마찬가지로 유럽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찍 귀국한다. 여행체험을 『풍토』로 정리하여 피를 대신해 풍토가 설명의 요인이 된다. 몬순의 특징은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덥고 습윤한, 요컨대 자연의 위력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이다. 인도철학은 인간에게 삶을 베푸는 자연의 힘을 찬양한다. 사막은 건조함과 황량함이 지배하는 세계라, 엄격한 인격신과 계율을 가진 유태교단, 권력과 복종의 의해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빚어낸 피라미드가 제시된다. 목장은 기후적으로 습윤함과 건조함의 종합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이다. 인간은 자연의 속박에서는 해방되나, 주인인 시민과 가축과 같은 노예로 분리된다. 일찍이 일본민족론에서 인도에 부여된 ‘정의’의 위치가 ‘몬순’으로, 중국의 지성과 퉁구스의 전투성의 위치가 ‘사막’으로, ‘목장’인 고대 그리스나 유럽이 그 종합으로 묘사되어 있다.(401-403 이 몬순의 특수형으로 일본과 중국을 논한다. 양쯔가 유역의 광대한 풍경에서 변화가 결핍되고 막막하고 단조로운 기분을 주는 토지에서 태어난 지나인은 무감동성이라는 특징이 있고 강한자에게 면종복배한다. 자신과 친족만 빋으며 돈벌이의 타산과 무감동으로 태어난 지나인은 국가나 공공의 관념을 지니지 않은 무질서한 민족이며, 크기만 한 문화밖에 없다. 지나인은 생활의 예술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실제적인 국민이고, 일본인은 지나칠 정도로 생활을 예술화한 비실제적 국민이다.(403-404) 일본은 습윤한 몬순지대여서 풍부한 자연을 지녔고, 수용적이고 인종적이지며, 태풍과 눈도 있어 열대적·한대적 이중성격을 가지고 있다. 기질에 있어서 늘 변하지만 저류에서는 변하지 않는 성격을 몬순적인 인종성은 태풍적인 돌발성과 어울려 전투성을 지니면서도 체념을 지닌 자포자기하면서도 담백하게 잊는다는 돌발적 인종성이 된다. 일본문화의 복합성을 북종이나 남종이 아니라 열도의 단일하면서 복합적인 풍토에서 설명하려는 태도이며, 수입문화를 소화하면서 독자성을 잃지 않는다는 도식과 쉽게 부합한다. 일본은 종합이다.(405) 유럽의 목장문화는 정복하는 방식으로 가족이 형성되어 가家의 의의가 적고 조상숭배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일본의 가는 조용하며, 전투적이며, 담백하다는 일본적인 인간관계의 실현이다. 가는 가족의 전체성을 의미하며, 군주와 마찬가지로 가장은 전체성의 상징이고 조상을 포함한 가족의 전체성은 가장 개인보다 우월하다. 가족의 전체성이 구성원보다 선행하고 가족 안에서 개인의 구별은 소멸한다. 고대 일본은 가로서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감정융합적 공동체였다.(406) 그리스와 달리 일본은 하나의 축제에 의해 사람들이 결합되어 있다. 마츠리고토祭事, 政이 정치적 의미로도 종교적 의미로도 사용된 것은 일본이 근대적 의미에서 정교가 분리되지 않은 제정일치의 신성국가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아마테라스와 고대 천황은 공동체의 중의와 일치되어 있다. 국민은 물론 천황조차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괴뢰였다. 천황 친정을 주장하는 국가주의자의 제정일치론에는 반대했다. 와쓰지는 일본문화론의 복합성을 풍토의 복합성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혼합민족론을 버리고, 단일하고도 복합적인 문화를 지닌, 평화로운 자연공동체라는 일본상이 전면에 드러날 준비가 되었다.(407-408) 1939년 와쓰지는 일본인의 모지, 일본인의 고향은 일본에 인류가 거주한 이래 일본국이다. 일본민족의 특수한 성격은 석기시대에 비롯되었다. 남을 정복한 적이 없는 평화롭고 단일한 일본민족이 기기신화시대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어패류와 과일·채소로 체질을 만들어 왔기 때문에 온화하고 평화로우며 담백한 의욕, 찰나적일 뿐인 격렬한 감정한 감정이라고 하는 식의, 흉포하지 않은 마음을 지녔다. 그는 일본인의 평화로운 곡선미를 찬양한다. 와쓰지의 단일민족론은 거기에 평화성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전후에 살아남았다. 국가가 인륜의 최고단계라는 헤겔의 견해를 받아들여 국가를 초월한 인간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민족을 피와 흙의 공유에 의해 한계지어진 문화공동체라 설명하면서 민족의 본질을 문화의 공유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상적 군주는 문화공동체인 민족의 전체성을 상징하는 국가의 주권자이다. 국가와 국민의 동일성으로부터 법률=도덕이 된다고 말했다. 다민족국가로마는 국가와 민족이 일치하지 않았다. 와쓰지는 보편적 입법과 개인의 도덕의 조화를 국가와 개인 사이에 문화공동체인 민족을 매개시키는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다. 다민족국가는 인위적 권력이 전체를 지배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민주국가에는 국가의 전체성을 표현할 사람이 없기에 다수의 전제가 되어버린다. 민족이 낳은 전체성을 통해 절대적 전체성과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본래의 국가에는 군주권과 민주권이 서로 다르지 않다. 와쓰지의 단일민족론은 폐쇄적이지 않고 일종의 국제다원주의, 즉 세계 각지의 민족이 각각의 문화 아래서 단일민족에 의한 정치조직을 만든다는 생각에 기초해 있다.(409-412) 이런 논리에서 와쓰지는 동화정책에 반대했다. 그는 동양인의 해방과 동서양문화의 통일을 일본의 임무라고 보았으며, 식민지 제국을 구축하는 구미를 비판하고 초국가주의 대해서도 은근히 저항했다. 이는 일본의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와쓰지는 진출지역민족의 종교, 습속 등에 간섭할 것이 아니라 그 전통을 존중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대동아전쟁을 구미의 식민지지배와 근대를 청산하는 전쟁이라고 지지했다. 권력을 현재화시키지 않는 천황이란 일본민족 내부의 문제에 지나지 않으며, 이민족과의 관계에서는 혼합민족론에 의한 일시동인이나 융합동화 등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의식했다. 상징천황 구상은 다민족제국으로 팽창해 간 일본에 대한 비판도 되었고, 1928년에 이미 조선·타이완·일본계 이민 등을 국민성의 고찰에서 제외했고, 패전 직후 천황의 신성성은 일본 국민공동체라는 지반으로부터 생육된 것으로 다른 민족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와쓰지의 단일민족론은 전쟁 전부터 전후에 수용될 만한 평화성과 문화성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풍토론은 전후 일본상에 야나기다와 비슷한 정도의 영향을 미쳤고, 쓰다와 함께 상징천황제를 지지하는 유력한 논자가 되었다.(413-415)

와쓰지 테츠로의 논의 역시 실상 지나치게 상세하게 요약한 느낌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동기인데, 야나기다와 마찬가지로 구미 여행의 경험이 그를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직접 여행과 미국의 일본계 이민배척 등의 영향도 있다. 일본 민족의 순수성과 혼합민족론의 거부가 제국주의 그 자체의 거부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그 역시 시류에 편승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의 풍토론, 실은 지리환경결정론은 일본 민족이 모든 식민지를 상실한 패전 후에 일본 민족의 정체성 또는 자기동일시의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그러는 동시에 그 역시 기기신화에 몰두하는데, 기기신화를 신화로 해석한 쓰다의 전회가 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서 국체론이 가족국가론으로 그리고 천황과의 일체를 강조하는 쪽으로 전환된다. 훗날 상징천황론의 근거가 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본인과 천황의 자연스러운 연결에 집착한다. 이 역시 기묘하다. 일본식 민족의 형성론이 일본식 국민의 형성이나 일본식 사회계약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형성에 집착한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숙명론적이고 결정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기묘한 기분이 든다. 공부든 경험이든 할만큼 한 사람들이 왜 이런 결말에 집착하는 걸까.

만주사변, 일중전쟁으로부터 태평양전쟁 전반기에 혼합민족론은 허다하게 논단에 등장한다. 도쿠토미 소호우徳富蘇峰는 현대의 야마토 민족은 여러 종족이 하나로 섞인 일종의 합금이라며 혼합민족론을 통해 일본민족의 동화력이나 적응력을 칭찬한다. 대아시아주의자로 알려지 오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는 선주민족도 귀화인의 자손도 야마토 민족에 동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시하라 칸지石原莞爾도 남북종의 혼합을 말했다.(416-418) 교토학파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도 천손족 아래 통일·융합하여 한 민족을 이루었다고 했고,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다카타 야스마高田保馬는 동아시아 제민족의 피는 거의 모두 들어있다고 말했다. 인류학자·민속학자 니시무라 신지西村眞次는 일본 민족은 해외에 진출한 해양민족으로 아시아의 일곱민족과 유태·로마인과의 혼합이라고, 대일본주의를 주창했으며, 모성중심적 부가장 규제 제도를 지닌 가족국가라고 말한다. 야나기다나 오리쿠치 시노折口信夫 등도 일본민족과 남방과의 관계를 주장하는 강연을 했다. 이 시기 민족론은 이상할 정도로 많은데, 기원론까지 언급하는 것은 거의 이런 논조였다. 이 시기에 단일민족이라는 말은 일본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니다, 대일본제국은 단일민족국가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부정형으로 사용된다.(418-422) 이와 병행하여 혼합민족론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혼혈에 대한 두려움이 한 요인으로 학습원 교수 시라토리 키요시白鳥清는 일본민족의 말레이도래설, 퉁구스 계통설, 조선인과 동일민족이라는 설을 비판했다. 일선동조론의 가나자와 쇼우사부로우金沢庄三郎 등이 비판대상이었다. 해군성 비공개간담회의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 다니카와 테스조谷川徹三, 와쓰지 테쓰로우和辻哲郎 등도 마찬가지 였다. 혼혈만이 아니라 징병제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해군성 정치연구회는 조선인 징병제는 로마제국의 교훈에 따르면 일본 붕괴의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일본 육군은 전투부대의 조선인 비율이 20%를 넘지 않도록 하고 포로수용소 부대 등으로 돌렸고, 훗날 포로 학대를 이유로 BC급 전범이 된 다수의 조선인이 나오게 된다. 조선인의 황군 유입은 위험이었다. 침략을 찬미하고 동화정책을 추진하며 징병과 동원을 시행하는 데는 동조론과 혼합민족론이 편리하다. 그러나 혼혈을 막을 수 없다. 혼혈을 방지하기 위해 혼합민족론을 부정하면 일본의 침략이 단순한 권력지배라는 것을 자백하는 꼴이 된다.(422-425) 쓰다 소우키치가 천황가 모독혐의로 출판법을 위반하여 재판을 받은 것은 제국의 혼란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쓰다가 1938년 이와나미 신서로 출판한 『지나사상과 일본』으로 이 책에서 유교사상은 중국 권력계급의 도덕으로 특수하게 발달한 것이라 보편성이 부족하고, 민중을 금수와 동일시하여 지나의 민중은 행복하지 않았으며 일본에 대한 중국사상의 영향은 지배계급 일부에만 미쳤다고 말하며, 모토오리 노리나가나 히라타 아쓰타네의 일본중심주의나 고사기에서 신의 도덕을 끌어내는 자세도 중화를 말하는 지나의 사상과 책으로 형식적 도덕을 이야기하는 중국의 영향이었다. 일본문화는 일본민족 독자의 문화로 중국과 전혀 다르며 동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일중전쟁 중이던 당시 일지친선론이 주장되고 있었지만, 문화의 공통성을 주장하면 일본인을 경멸할 것이라며, 한자를 버리고, 동양일체론을 파기하라는 동양부정론은 중국혐오와 일본의 독자성 주장으로 발현된 것이었다.(425-426) 그 점에서 우익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원리일본사의 미노타 무네키蓑田胸喜는 대일본제국의 모순을 체현한 인물인데, 그는 일단은 쓰다가 일본의 특수성을 입증했다고 칭찬하고 다음에는 일본에 보편성이 없다고 하는 괘씸한 말을 꺼냈다고 비판한다.(428) 미노타 등의 쓰다 비판 캠페인에 의한 재판에서 쓰다는 기기를 ‘지어진 이야기’라고 했다는 이유로 천황가를 모독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그는 기기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보아 천손민족도래설이 생긴 거라며,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보면 고사기의 기록을 파괴하고 없애는 결과가 된다. 자신을 고전을 부활시켰다고 주장했다. 특별변호인으로 법정에 선 와쓰지는 천손민족이 해외에서 왔다면 어떤 신성도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쓰다의 기기연구는 출판만 정지되고, 나머지 혐의는 유야무야 된다.(428-430) 오오카와 슈메이는 1944년 쓰다의 이름을 들어 동양부정론자를 비난했지만, 자신도 미노타의 공격에 걸려 아니누가 열도의 선주민이었다는 표현을 정정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431-432) 쓰다에 대한 재판은 동양부정론이 되어 버린 단일민족론이 침략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탄압받은 사건이며, 오오카와의 정정은 혼합민족론이 순혈의 부정으로 규탄되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여기서 대일본제국의 ‘민족론’은 ‘이중구속상태’에 빠졌다. 일본민족을 단일하다고 해도 혼합이라도 해도 공격에 노출된다. 그 결과는 사실상의 침묵이었다. 문부성 출판물에도 방침은 일정하지 않았고, 혼합민족론 천손민족과 천황가 도래의 기원을 언급하지 않고, 순혈론 쪽은 추상적으로 순수하다고만 서술했다.(431) 전쟁 국면이 유리했던 1942년까지는 점령지역에 대한 진출적응론이나 동화정책론 등으로 혼합민족론이 그런대로 보였지만, 전쟁 국면이 확실히 불리해진 1944년경에 혼합민족론은 거의 사라진다. 도쿠토미 소호우 조차 합금론을 철회하고, 미국은 혼합인종으로 전쟁이 지연되면 미국 내 인종대립이 일어나리라고 주장했다.(432) 전쟁 후반에 단일민족론이 대두된 것도 아니었다. 조선, 타이완의 징병과 동원은 일선동조론이나 내선일체론을 부정하기 어렵게 했고, 일본민족론은 기원을 언급하지 않는 추상적 구호에 그쳤으며, 민족이란 말은 멋대로 외쳐질 뿐이었다. 뒤에 남은 것은 논리적·물리적 침묵이었다. 민족론에 관한 한 대일본제국은 군사적 패배 이전에 내부에서 붕괴하고 있었다.(433)

쓰다의 필화사건 이후 전면에 등장한 이중구속상태, 혼합민족론도 순혈론 즉, 단일민족론도 주장할 수 없고, 어떤 것도 추상적으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으며, 구체적 기원이나 사상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을 전쟁에 내보내서 죽게 하고, 또 후방에서 한없는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목청껏 민족을 외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천황을 외쳤겠지. 전쟁의 막바지 기간에 이미 안으로부터 붕괴했기 때문에 패전이 확정된 후엔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전황에 대한 약간의 자신감이 혼합민족론을 유지시켰던 것은 청일·러일전쟁의 승리로 혼합민족론이 득세한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망한 것이 혼합민족론이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민족론을 어떻게 설명할지의 문제였는데. 이런 근대 일본에서 민족사상이 명멸해 가는 일련의 과정은 서구 근대에서 내셔널리즘의 명멸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극적이다. 갑자기 모든 근거가 생겼다가 사라진다. 근거들은 어디까지나 활용될 뿐이며, 중요한 것은 입장이다. 그런 입장이 국가 단위에서 등장하는 것은 전쟁과 같은 국가 단위의 경험에 의해서이지만, 야나기다아 와쓰지와 같이 먼저 개인적으로 해외를 다녀온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의 한계 속에서 미리 장래를 위한 사상의 싹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치적 단위를 형성하는 정치적 정체성 근대에서는 그것이 국민이고 민족인데. 그 유효기간은 의외로 짧은 것 같다. 일본의 경우만 해도 100년이 채 안되는 동안 3번의 큰 흐름이 움직인다. 모두들 표면에는 민족을 내세우고 있지만, 내용은 각기 다를 때, 그런 민족을 어떤 단위나 어떤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거기에 정치적 동일시란 존재하는 걸까. 어떤 동일시가 어떤 동원을 이루어내는 걸까. 그렇게 부박하게 움직이는 민족론에도 불구하고 동원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은 끊이질 않는다.

패전 후 일본은 진출지역에 쫓겨난다. 조선, 타이완을 상실하고 제국인구의 3할을 점하던 비일본계는 일시에 소멸한다. 논리의 전환을 압박당하자 전전의 군사적인 다민족제국을 대신하여 단일민족의 평화국가를 주장하는 논자가 대두했다. 이질적인 자들이 포함되지 않은 평온한 섬나라라는 일본의 자화상은 전쟁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는 힘이 있었고, 그 평화로운 섬나라를 통합하는 상징이 천황이었다. 조선인과 타이완인은 하루 빨리 돌려보내고.(434-435) 쓰다 소우키치는 패전 직후인 1946년 잡지 『세계』에 천손민족도래설을 비판했고, 패전 이래 기기신화를 사실로 강제했던 황국사관으로부터의 탈피가 요구되고 있다며, 단일민족사관과 상징천황제를 제시했다. 내용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일본국, 일본민족, 평화적 농업, 외로운 섬나라, 이민족 접촉 경험 없음, 자연스런 정으로 야마토 조정에 통합, 동일민족의 애정, 이민족과 전쟁 부재, 천황지 직접 통치하지 않는 불친정, 무력이 아닌 문화적·종교적 권위를 통한 군림, 만세일계, 국민과 천황은 일체라는 관념 등이다. 달라진 것은 전쟁책임론에 대한 대응이다. 메이지유신 후의 한바츠藩閥정부는 제왕과 민중을 대립적으로 보는 사상을 근거로 국민에 대한 천황을 강화했고, 군부나 관료가 친정의 이름 아래 천황을 전제군주처럼 여겨 그 이름을 부당하게 빌려 시행했던 것이 이번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단일민족국가인 일본에 황실은 국민적 결합의 중심으로 국민적 정신의 살아 있는 상징으로 존재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 국민이 국가의 주인인 것이 민주주의라면 일본민족=일본국민의 상징인 천황이 국가의 상징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국민은 황실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곳, 바로 그곳에 민주주의의 철저한 모습이 있다고 말했다.(435-437) 와쓰지 테쓰로우도 인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것과 천황이 주권자라는 것은 하나라고 천황제 옹호를 주장한다. 천손민족이 정복민족이라는 주장을 비판하고, 와쓰지의 주장도 전전의 연장이었다. 천황은 불친정이 원칙이고 민중은 천황을 자신들의 전체성을 상징한느 것으로 생각해 왔다고 강조한다. 전시의 충군론을 비판하면서, 고래 일본 사람들의 천황에 대한 진심은 청명심, 정직심, 충명지성 등이지 충의, 충군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를 존황사상이라고 불렀다. 그는 국가 신토나 침략행위와 천황은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고 했다. 신토가 교의를 확립하여 국가종교가 된 것은 불교에 대한 대항과 주역이나 유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신토를 세계에 적용하자는 것은 큰 오류이고 일본과 천황의 본래의 존재방식에서 빗나간 것이다. 그 결과 제국주의적 침략이 천황통치의 전통과 필연적으로 연관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되었다는 것. 와쓰지는 일본에서는 전체성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선거가 부적당하다고 주장했단 선거로 뽑힌 정치가가 오직을 되풀이하고 군부에 굴복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 천황이 신헌법에서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규정되는 것을 환영하면서 국민 하나하나가 천황으로 표현된 전체의지의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라며 상징으로서의 천황과 민주주의의 결합이야말로 바람직한 정치라고 했다. GHQ만이 아니라 일본 내부에도 천황의 상징화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와쓰지의 논의가 아마노 테이유우天野貞祐 문부상,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에게 영향을 주었다. 45~46년 당시 헌법연구회·사회당·헌법간담회 등은 ‘국민협동체'(사회당), ‘군민동치주의'(헌법간담회) 등과 같은 천황의 초정론超政論 입장을 취하고 있다. 쓰다와 와쓰지는 전후 상징천황제의 논리를 응축한 것이다. 국내의 이문화·이민족에 대해 무력이라는 최후수단을 상실한 일본이 문화에 바탕한 천황을 그려내려면 이민족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들의 사상은 동화정책과 제국의 팽창에 브레이크를 거는 요소를 포함했지만 ‘국민’의 내부에 이질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구상이었다.(438-442)

쓰다 소키치와 와쓰지 데쓰로, 이 두 사람은 패전 이후 상징천황론의 중요한 토대를 낳았다. 그리고 일본민족의 특이성, 고립과 평화애호는 물론이지만, 전쟁의 책임을 군부의 폭주와 천황친정에 돌리는 것도 특이하다. 메이지 유신의 결과가 천황제도를 왜곡시켰고, 전후의 상징천황제는 미국의 요구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전통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며, 천황과 일본 국민 전체의 총의가 연결되는 민주주의라는 주장이다. 얼핏 보면 루소의 일반의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이 천황을 전쟁책임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비판했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입헌주의, 천황친정 그리고 민주주의란 어떤 의미에서 일본 근대화의 핵심이고, 나름의 진보가 아니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에 의한 입헌군주제가 실제 헌법에 의해서 천황이 권력을 행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메이지 헌법은 실제 매우 엉성한 구조였고, 그런 틈새에서 메이지의 소위 원로들이 사실상의 권력을 행사했다. 이걸 한바쓰정부라고 하는데. 메이지 원로들이 정치전면에서 사라져 나가자 메이지 정부에서 비대해진 군부를 통제하지 못했고, 관제 민주주의도 실제 무기력했던 거다. 그런데. 여기서 패전은 복고적 해결책을 제시하고, 사람들은 천황과 민중의 직접 연결이라는 복고적 이데올로기에 열광한다. 이런 해결책은 실은 전시기간의 국체론의 근대 초극과도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런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 정치사상으로 접근하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나 마르크스주의적인 접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살펴 보자.

1948년 인류학의 최고 권위자인 도교대학 교수 하세베 코톤도長谷部言人가 열도에 구석기 시대가 존재했다는 아카시明石원인설을 발표했다. 1931년 나오라 노부에直良信夫에 의해 발굴되어 구석기시대인으로 발표되어 있던 것이었다. 일본인이 일본의 원주민이라는 설과 자연과학에 의한 기원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홍적세에 이미 아카시원인(니포난드로푸스=아카시니엔시스)이 열도에 있었고, 중국 남부로부터 석기시대인이 도래했다며, 현대인과의 형질 차이는 진화의 결과라고 말했다. 조선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일본민족을 아시아의 문화적 중심인 중국의 직계로 본다. 일한동조론과 도래인에 대한 과대평가를 비판한다. 또한 열도를 외부로부터 차단된 천혜의 행복을 누리는 평화향으로 묘사했다. 쓰다나 와쓰지와의 공통점이다. 특히 일본군이 현지 주민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사례를 들어 정복민족의 도래는 있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중국남부에서 석기시대인의 이동 후 육로가 가라앉아 차단·격리 상태가 되었고 저들의 자손은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평화로운 일본에서 번성하여 현재의 일본에 이르렀다. 이국의 전장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패전의 피로로 평화를 갈구하던 사람들의 마음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키요노 켄지清野謙次는 후생과학연구소장에 취임하여, 전쟁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국토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생육했던 자가 일본인종이고 일본인종의 고향은 일본국이며, 황실은 신대로부터 일본의 황실이고 일본민족의 비약적 문화증진은 늘 황실 중심으로 행해졌다. 키요노와 하세베의 학설은 인류학계 일본민족기원설의 2대 정설이 되었고, 제일 먼저 받아들인 것은 진보적 역사학자들이었다.(442-446) 『일본역사』 창간호는 황국사관의 타파를 위해 고대사 논문을 게제했고, 네즈 마시사禰津正志와 기시로 슈우이치木代修一가 키요노 학설을 소개했다. 기시로는 일본 열도는 인류 서식이래 일본인의 고향이라며, 혼혈이 석기시대인을 본격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키요노설을 미혹된 채 그대로 소개했다. 네즈는 키요노의 학설을 석기시대인이 혼혈을 통해 아이누와 일본민족으로 전화되었다면서, 천황은 신이 아니라 대지주이고, 군벌이고 침략자라고 말한다. 천황가 이전은 원시 공산제였고, 천황국가는 같은 민족의 정복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이노우에 키요시井上清도 천황이 생기기 훨씬 전에 일본인이 이 섬에 평화롭고 자유로운 철저한 민주주의 사회를 즐기고 있었다. 네즈나 이노우에의 천황관은 쓰다와는 달랐으나 일본 민족이 천황 이전인 태고시대부터 열도에 거주하며 평화로운 원시공산제 사회를 실현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진보적 역사학자들 사이에는 ‘기기는 모노가타리’라고 하여 탄압을 받은 쓰다에 대한 호평이 압도적이었다. 키요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들의 보수반동적 상식론에 대해서는 유감이었지만. 쓰다나 키요노 등의 학설에 근거하여 황국사관의 재평가가 진행되었다. 신무동정이나 구마소 정복, 신공황후의 조선침공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일선동조론은 소멸하고 『신찬성씨록』도 사료로 사용할 숭 없다는 견해가 확산되었다. 일본에는 선주민족이 없었다는 주장이 고고학의 성과로 알려지고, 인종적으로 신석기시대의 원일본인을 조상으로 한다는, 단일인종이 동일지역에서 공동생활을 했다는 견해가 확산되었다. 도리이나 도쿠토미 소호우 등의 혼합민족론은 구세력의 유물로 여겨졌다.

인류학과 고고학이 모두 구석기 시대, 원인설 등을 주장하면서 일본 단일민족설의 역사적 기원을 훨씬 뒤로 가져가게 된다. 이런 주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30년대라고 해도, 이런 주장이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패전 이후이다. 그러니까 매우 새로운 주장인 셈이다. 천황가 황기 2600년을 외치던 시대를 멀리하고, 4천년, 5천년 혹은 그 훨씬 이전부터 일본 열도, 일본인, 일본인종 등의 존재가 정당화되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되는 학설은 보수적인 인사들이 대고, 이런 주장을 널리 확산시키는 일은 당대 역사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일본의 평화주의를 정당화하는 일본은 평화로운 사람들, 평화로운 민족이었다는 주장은 이렇게 좌우합작이다. 좌파와 우파의 차이는 천황가에 대한 태도 뿐이다. 천황가도 평화로웠다와 천황가 이전부터 평화로웠다는 주장의 차이이다. 그러면서 그동안의 혼합민족론을 주장하는 여러 논거들 특히 기기신화에 의거한 황국사관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이런 일본의 단일민족론으로의 급격한 전환은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과 타이완인에게도 영향을 미쳤지만, 조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한반도의 구석기 유적에 대한 발굴이다. 한반도 구석기 유적에 대한 발굴은 1960년대에 비로소 시작된다. 공주 석장리 유적 발굴이 그것이다. 1964년 UC 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연세대 교수를 하던 손보기 박사가 공주 석장리 유적을 발굴해 한반도에 구석기 시대가 존재했음을 증명하며, 일본을 앞서 한반도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는 식민사학의 주장을 뒤집은 것으로 알려진다. 구석기 연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원로 고고학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조선시대 사회사다. Sohn Pokee, Social History of the Early Choson Dynasty. 그가 버클리에서 학위를 받은 것도 1964년이고 공주 석장리 유적을 처음 발굴한 것도 1964년이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하늘에서 땅만큼 멀어보이는 조선시대 사회사와 구석기 유적 발굴 사이에 1964년에는 간극이라고는 없었던 것. 다른 증언을 확인한 바 없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만. 실제로 한동안 한국과 일본은 구석기 시대 유적을 둘러싸고 서로 오래되었음을 증명하는 경쟁을 벌이게 된다. 참고로 북한에서 도유호 박사가 일제시대 발견된 구석기 유적인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를 발굴한 것은 1963년. 한일간에만 경쟁한 것이 아니고 남북한도 경쟁 중이었다. 석장리 발굴에 참여했던 김정기는 박정희 총애를 받아 경주발굴을 주도하고. 한편, 1931년 아카시원인을 발견한 나오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였고, 당시 동경대 교수의 검증을 시도했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이 인골은 1945년 5월 미군의 도쿄공습으로 소실되고 만다. 1948년 하세베의 주장은 검증을 위해 만들어두었던 이 유골의 석고모형을 근거로 주장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계속해서 아카시 유적 발굴을 시도했지만, 아직 확인되었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일본을 4대문명 중 하나라며 환호하게 했던 일본의 1970년대 구석기 유적 발굴은 이를 주도했던 후지무라 신이치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의 유물 조작 사건으로 2000년대초 큰 회오리에 휘말린 바가 있기도 하다. 기기신화의 뒤를 이은 일본판 ‘환*’라고 해야할런지.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기기묘묘한 것.

1949년 오카 마사오岡正雄, 야와타 이치로우八幡一郎,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이시다 에이이치로石田英一郎 등이 좌담형식으로 발표한 기마민족도래설은 천황가의 도래를 전면에 내세웠기에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학설로 정착되지는 못했으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되던 혼합민족론과 상당히 유사했다. 에가미는 기타의 일선양민족동원론을 상찬하며 기타설의 현대판이라고 말했지만, 역사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마르크스주의의 내발적 발전단계설의 유행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시가 요시오志賀義雄는 국가는 씨족원시공산사회에서 계급이 분화해 발생했다며 일본인은 신석기 시대부터 이 섬나라에 살고 있다고 말했고, 진보적 고대사학자 도우마 세이타藤間生大는 생산력 발전 노선을, 이시모타 쇼우石母田正는 도작 성립에 대한 내발적 주체성을 중시했다. 에가미 등도 이를 의식해 단일민족의 내적 발전을 동인으로 한 진화주의에 반대하여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중시한 역사주의를 취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사의 외래적 요소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1948년 전후 유일의 마지막 국정 사회과 교과서에도 이런 사관은 반영되어 있었다. 생산력의 발전과정에서 외부로부터의 민족이동이나 정복은 없었다. 당시 민족문제에 대한 최고의 해답은 민족자결과 단일민족국가이기도 했다. 도우마는 고대일본의 조선침공을 일민족 국가에서 다민족을 산하에둔 세계제국으로의 전화라고 말했고, 진보적 역사학자 후지타니 토시오藤谷俊雄도 영국 등 단일민족 국가가 타민족의 영토를 손에 넣어 다민족국가, 식민지영유국가가 되었고, 일본도 그렇게 되어, 민주적 민족국가로 가는 길이 막혔다고 주장했다. 당시 아메리카는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에게 한국전쟁을 벌여 일본 각지에 군사기지를 만들고 국내에서는 흑인을 차별하는 아메리카제국주의였다. 일본에서 다민족국가가 플러스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70년대 이후. 진보적 역사학자들은 쓰다도 포함된 천황제옹호론에 대항했던 사람들었지만, 당시 일본은 경제 재건과 기아 극복을 목전에 두었고, 재일 한국·조선인에게는 강제 연행을 사죄하고 조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이며, 일본이 재군비를 갖추어 다민족제국으로 팽창하는 것을 저지하는 쪽이 큰 과제였다.(451-456) 전전의 혼합민족론자가 소멸한 후 신화의 정착을 막을자는 없었다. 태고부터 단일한 민족, 변경의 평화로운 섬나라, 이민족과 접촉도 전쟁이나 외교도 못하는 자연의 농업민, 처음부터 상징천황, 민주적 원시공산사회의 자화상, 국제관계에 자신을 상실한 전후 일본의 분위기에 적합했다. 패전 후 일본은 영세중립국 동양의 스위스를 이상으로 추구했다. 이런 배경에서 단일민족이 긍정형으로 정착해 나갔다. 1960년대 이후 본격화. 단일민족신화의 하나는 국가와 천황의 일체성을 주장하는 보수적인 경향. 상징천황제의 연출자로 알려진 고이즈미 신조小泉信三는 일본국민은 다행스럽게 단일하고 동질적이라고 했고,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는 단일한 국어, 독자적인 문화, 거의 단일민족이라는 유일한 사례라고 말했다.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문화방위론은 보수적 단일민족론의 전형으로 단일민족, 단일언어의 나라 언어나 문화전통을 공유한 민족, 태고로부터 정치적 통일, 민족과 국가의 비분리를 말하며, 재일조선인문제는 국제문제이고 난민문제라 말한다. 민족의 목적과 국가의 목적을 문화개념에 포괄시키고 일치시키며 문화의 전체성을 대표하는 문화개념으로서의 천황을 부활시키자 주창했다.(457-458) 다른 한편 단일민족론은 일본비판론으로도 쓰여, 무국제성은 단일민족국가라는 사실에서 발현된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1967년 나카네 치에中根千枝의 종적사회론, 단일사회이론이다. 마스다 요시로우増田義郎도 단일민족, 단일문화, 순수배양적 조건, 순수문화라며, 이민족 취급경험이 없다고 주장했다.(459) 보수적 단일민족론과 비판적 단일민족론은 논자에 따라 뒤섞여 사용되기도 했다. 일경련의 마에다 하지메前田一는 천황중심주의 일본민족의 통일성과 세계를 모르는 온실속의 화초, 복종성, 감수성, 근면성, 배타적 독선성을 말하면서 임금을 억제하자고 주장했다. 이사야 벤다산(야마모토 시치헤이)의 『일본인과 유태인』이나 도이 타케오土居健男의 『어리광의 구조』 등도 일본인을 긍정하든 비판하든 왜 특수하며 태고로부터 동질적이었나는 강조한다. 1982년 정치학자 가미시마 지로우神島二郎는 전전의 일본은 야마토 민족은 잡종 혼합이라 했고, 전후에는 진보적 문화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일본은 단일민족이라고 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단일민족 신화가 패전 이후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여는 절대적이었다. 전전의 우파학자들도 그들의 부름을 받았다. 좌파 역사학자들은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발전단계론은 속류적으로 이해한 나머지 원시공산제 일본사회로부터 내재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마르크스주의가 중요한 것인지 내재적 발전론이 중요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중요한 점이 하나 있는데. 한국에서도 처음에 내재적 발전론을 좌파가 이끌었다는 점이다. 이때 한국은 고대사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내재적 근대화론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내재적 발전이 가능했는데, 싹이 잘렸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그리고 갑자기 이런 연구자들이 조선시대에 연구에 몰두하고, 조선시대를 재발견하고, 또 소위 말하는 『환단고기』에 몰두하기에 이른다. 『환단고기』와 내재적 발전론은 한 쌍을 이루고 나아가는데. 이것이 패전 이후 일본의 역사학계의 진행경로와 기묘하게 조응한다. 그러나 일단 형성된 내재적 발전론이나 고대사에 대한 열광은 그후 전혀 다른 길을 걷는데, 일본에서 미시마 유키오가 결국 자위대의 궐기를 요청하면서 자결한 기괴한 사건이 발생한 것처럼. 고대사의 대한 열광은 좌파와 우파로 분산된다. 일본에서는 이 과정을 거쳐서 단일민족신화가 정착되었지만. 한국은 처음부터 단일민족신화가 주창되었다. 단일민족신화의 출발점은 일제강점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복자 측이 혼합민족론을 주장하는 이상 저항하는 쪽에서 단일민족론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럼에도 야마토혼이 중국혼, 조선혼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처럼, 저항하는 쪽의 담론이 지배하는 쪽의 담론을 모방하면서 전개된다. 을지문덕, 감강찬이나 이순신 같은 무인을 되살리고 상무정신을 주장하고, 무사도와 매우 유사한 화랑도를 부각시키고, 나라와 교토를 되살리듯이 경주를 발굴해서 성역화를 시도하고.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혼합민족론은 인정할 수 없다. 대륙을 지배해야 하는데 말이다. 일본이 패전 후 단일민족론으로 전환하자 한국에서도 단일민족론이 등장한다. 북한까지는 모르겠지만, 없었을리가 없다. 주체사상의 나라니까. 그런데, 평화를 사랑하고, 이민족과의 접촉이 없고, 농업국가, 순종적인 국민, 벼농사, 단일한 언어, 오래된 정치체제, 우물안 개구리, 두레 등을 강조하는 농민 자치의 문화. 이런 내용들 중에서 부정적인 부분을 식민사관이라고 하기엔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단일민족론이 등장한 시차가 너무나 적다. 양쪽 다 전쟁 후에 본격화된 것이다. 어떻게 비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볼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혼합민족론을 요약하면 제국은 타이완과 조선을 획득하여 그 땅의 원주자를 제국 신민에 포함하려 했다. 태곳적에 대량의 이민족과 도래인을 동화한 경험이 있다. 일본민족은 남북 아시아 여러 민족의 혼합이며, 진출은 귀환이다. 일본은 예로부터 여러 민족을 일시동인으로 혼합·동화해 왔다. 이민족을 병합하더라도 양자의 지위를 부여한다면 가족국가와 모순되지 않는다. 태고에 천황가는 조선반도에서 도래했으니, 조선반도를 다시 천황가의 영토에 편입해야 한다. 단일민족론은 패전 이후 일반화되었다. 일본에는 단일민족이 살았으며, 이민족 없는 농업민의 평화로운 국가였다. 천황가는 평화로운 민족의 문화공동체의 통합의 상징이었다. 변경의 섬나라에 살았기에 외교능력과 전쟁능력이 취약하다. 일본은 단일민족국가로 역사적으로 평화로운 나라였고 현재도 평화로운 나라다. 이는 전후의 일국평화주의의 심리와 합치하는 것. 일본은 약할 때는 단일민족론을 몸을 지키고, 강해지면 혼합민족론으로 외부의 것을 취하는 식의 움직임이었다.(465-467)이런 일본의 동화주의 또는 민족 연구를 분석하기 위해 고든Milton Gordon의 인종주의, 동화주의, 자유로운 다원주의, 집합적 다원주의 등의 분류에서 인종주의와 동화주의 분류를 참고하고, 프랑스 사회학자 따귀에프Taguieff의 동화주의에 의한 인종차별1과 분리형 인종차별2(아파르트헤이트)를 비교해 볼 때, 대일본제국 우생학계의 경우 인종차별2 인종주의에 의한 체제의 구축이었다. 일본의 동화정책론도 권리와 의무의 평등은 부인하는 한계가 있었다. 동화는 같게 하는 것이고, 차별은 구별하는 것인데, 같게 하면서 구별하는 양자는 양립할 수 없다.(468-471) 일본 동화정책의 이념은 무엇인가? 야마나카 하야토山中速人는 문화적으로는 동화시키고 사회적으로는 차별하는 계층화라는 유형을 통해 전전의 동화정책론을 설명했다. 야마나카는 미디어의 논조를 분석해서 이런 결과를 가져왔지만, 실제 문화적 차원과 사회구조적 차원을 구별하기는 매우 어렵다. 일본의 동화정책이 우선적으로 추진한 일본어 강제나 통혼의 경우가 그렇다. 언어나 혼인은 경계영역이다.(471-472)

차별을 유지하면서 동화를 추진한다는 것. 현재의 한국의 외국인 정책이나 다문화 즉 국제결혼가정에 대한 정책이 딱 그렇다. 혼혈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서는 벗어낫지만, 인종주의에서는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백인과의 혼혈과 흑인 혹은 동아시아인과의 혼혈은 차원이 다른 차별을 받는다. 게다가 그 외국인 혹은 다문화 정책이라는 것이 사실상의 동화정책이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 까지는 필요성이라고 하자. 한국 요리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흔한 방법인데. 대표적인 것이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치는 것. 그러나 실상 한국인들도 김치를 사먹는다. 그리고는 외국인 배우자 특히 여성 배우자 쪽에게 시부모 공양 같은 것을 요구하고 강요한다. 이런 것들을 한국의 미덕으로 포장하는데, 흔히 가난한 집에서 시집왔으면 시댁을 잘 모셔라라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학교 또는 학령기 이전의 교육과정에서부터 다문화 아동이라고 해서 분리와 차별이 이루어진다. 외국 문화를 받아들인다든가, 이중언어 교육을 한다든가.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해야 한다는 개념이 서있지도 전파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자나라인 한국에 온 동화를 선택하고 동화되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피부색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른 그들은 영원한 이방인이며 외국인이다. 이런 동화와 차별의 이중적 모순을 한국의 정책과 대중은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한국인이 전세계에 난민으로 떠돌던 것이 1세기도 되지 않았는데. 예맨난민이 한국에 고작 몇 백명 도착하자, 이를 두고 몸살을 앓고 있다. 인권과 동등성이라는 이념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후쿠오카 야스노리福岡康則는 일본인의 유형을 혈통, 문화, 국적의 세 범주로 분류한다. 일반적으로 일본인은 세 범주 모두를 가지지만, 혈통 이미지의 우월성이 보인다고 한다. 전전의 혼합민족론도 혈통으로 한정하는 단일민족신화를 넘어선 것은 아니었다. 이민족 지역을 버릴 수도, 이민족을 배제할 수 없었던 대일본제국은 타자를 차별하고 배척하거나, 양자의 차이를 넘어서 보편을 추구하거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이들 중 어느 것도 아닌 태고의 일본민족의 요소의 일부요 일본민족의 혈연으로 연기는 즉 이민족의 타자성을 소멸시켜 얼치기 일본인으로 변화시키는 트릭이었다. 혼혈을 통해 동화를 강제한다는 대일본제국은 자신족의 순혈을 포기하더라도 우선하고 싶을 만큼 혈통의식이 강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혼합민족론은 제국의 실정에 맞추어 확장되었다. 제국 팽창의 이데올로기였다. 20세기 영국, 프랑스 등은 동화정책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혼합민족론은 많을 일본 지식인에게 지배를 지배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혼합민족론을 통해 차별을 해소한다는 일본이 윤리적으로 우월하다는 인종주의를 극복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혼합민족론은 혈통의식으로부터 분리된 국적이나 인권의 개념을 성립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전후 단일민족론과 기능적으로 동일하다.(473-478)

오구마 에이지는 결론의 한 절, 한 절에서 가장 중요한 주장들을 내어놓는다. 혼합민족론과 단일민족론은 기능적으로 동일하다는 점. 일본은 혈통 우월의 국가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러나 일본은 그런 혈통 우월 사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오히려 개방적인 가족제도를 가지고 있다. 한국이 분단을 극복한다고 해도 바로 이 혈통주의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혈연, 지연, 학연 등 수많은 연결 사상은 그 기원이 혈통주의다. 게다가 한국의 가족제도는 일본과 달리 폐쇄적인데. 그것이 다음다음에서 다루게 될 이 책 전체의 핵심이다.

자국민을 여러민족의 혼합으로 보고 그 자체를 정체성으로 하는 것은 아메리카합중국의 용광로이론이 있다. 그러나 미국은 장래에 도달할 미지의 목표를 생각하고 있으되 일본은 이미 과거에 형성되었던 일본민족의 현상이 이상적 모델이었다. 일본 따라가기와 앵글로 따라가기 양자의 특징이 구비된 모습이다. 대일본제국의 최대의 특징은 접촉의 상대가 근접지역에 있고, 종교적·문화적 차이도 명확하지 않았다.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말처럼 같은 인종, 같은 민족을 향해 팽창하고 있었다. 인종적 동일성 때문에 혼합민족론이 애매한 차이를 메우는 역할을 했다. 대일본제국은 소거할 수 없는 차이의 배제가 아니라 ‘소거 가능한 차이’를 삭제하려 했다. 창씨개명 등 동화정책이 조선에서 가장 격렬했던 것은 조선이 대륙진출기지이기도 했으나 일본민족과의 친연도 인식과도 일치했다. 혼합민족론은 차이를 애매하게 하는 장치로 명확한 배제도 완전한 평등도 줄 수 없는 처음부터 동화하면서 차별한다는 모순된 해우이가 가능하게 된다.(478-482)

일반론적으로 식민주의가 남긴 유산이란 무엇인가 규정할 때, 그것을 차별구조의 제도화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차별의 중층화라고 이야기하는데. 각종 차별과 모순이 이중적 또는 삼중적으로 구조화되고 제도화된 화석이야말로 식민주의의 유산이다. 탈식민이란 차별해소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시행했던 차별의 구조를 살펴보는 것도 꽤나 중요하다. 인종적·종교적 차이가 분명했던 상태에서의 차별과 그 구별이 다소 모호했던 상태에서의 차별은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의 조선 정책은 차별을 절대로 없애지 않으면서 차별하지 않는 척하는, 차별을 해소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차별을 해소하지 않는 애매한 차이를 유지하는 정책이었다. 애매한 차별을 직시하는 것, 애매한 차별이 낳은 분열의 구조를 명료하게 하는 것은 중요한 출발점이다.

영국, 프랑스 뿐 아니라 동아시아 내부의 중국이나 조선과 비교할 때도 중요하게 드러나는 특징은 일본의 가족제도다. 일본의 가족제도는 중국, 타이완, 조선의 부계혈통에 기초한 가족제도와 다르다. 중국이나 조선은 동성(동본)불혼, 이성불양의 원칙이 있다.(482-483) 일본에서 묘우지名字라고 불리는 씨氏는 간단하게 바뀐다. 결혼하면 같은 씨가 된다. 데릴사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씨는 부계혈통의 상징인 성姓과 달리 소속된 가문의 명칭으로 혈통과 직결되지 않는다. 이노우에 테쓰지로우는 자신의 묘우지는 세 번 바뀌었다고 했지만, 조선에서 성을 바꾸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으니, 창씨개명에 대한 반발이 크다. 일본에서는 혈통이 달라도 유능하면 양자로 삼는 인재발탁이 가능했다. 혈통이 달라도 친척이 된다. 이런 개방성은 억압적 성격도 띄는데 새로 들어간 가문의 일원으로 가풍을 받아들여야만 했다.(483-485) 이런 가족관계의 문제해결법이 국제관계에도 제언하는 일이 발생한다.(485) E. 토드는 유럽의 가족제도를 부모과 권위주의인지 자유주의인지, 형제가 유산상속에 있어 평등한지 불평등한지에 따라 넷으로 분류한다.(486) 일본의 가족국가론으로 거론된 동화정책론에 가족제도는 반영되어 있었다.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나 와타리 쇼우사부로우亘理章三郎를 필두로 조선, 타이완의 가족국가에 있어 위치를 ‘양자’로 표현한 것은 널리 퍼져 있었다. 일본에서는 양자는 출신을 잊고 이름을 바꿔 양가養家의 가풍에 동화하는 것이 도리이나 이성불양의 조선의 가족제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였다. 일본의 가족제도에서는 가문집단의 유지와 번영 쪽이 혈통보다 우선되었다. 와타리는 일본의 가문에는 혈통상의 조상과 제도상의 조상이 있으므로, 조선인이라도 가족국가에 양자로 들어온 이상 천황이 제도상의 조상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면 세계 민족을 흡수하여 하나의 가문에 포함시킨다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슬로건이 된다. 일본인에게 가족적이란 동화였다. 샤삥夏氷에 따르면 중국 가족제도에서는 자신이 황제의 적자赤子라고 하면 황제의 친척이나 사생아를 의미해서 불경이 되나, 대일본제국에서는 국민의 조상이 천황이라고 하고 의제혈연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일본의 논자들이 혼합민족론을 받아들인 것도 혈통이 모호한 가족제도와 무관하지 않다. 가문이 유지되는 한 혈통은 2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가문의 유지 ·번영이다.(486-488) 다카무레 이쓰에高群逸枝는 일본 고래의 가족제도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높았는데, 유교 등 중국의 영향으로 낮아졌다고 주장했다.(489) 이런 가문제도에 의한 가족국가론은 나와 너의 이분화상태에 하나의 질서를 만들어 낸다.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도 아니고 타자로서 명확히 구별하는 것도 아닌 상태로 피지배민족을 고정하려면 자신도 타자도 아닌 것으로 상대방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가족이다. 자기도 타인도 아니면서 자연스러운 상하의 질서가 있는.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차별은 인종차별이 아니라 민족차별이라고 하는데. 이는 같은 인종내에서도 계층질서를 구성하는 세계관이다. 미국의 인종사상가는 별종이라며 지배나 격리를 실시하지만, 일본에서는 피지배민족을 동종, 동문의 형제라며, 천황을 가장, 일본민족을 형이라고 하는 가족국가론으로 피지배족을 받아들이며, 양자가 된 제는 양가로의 동화가 강요되며, 영원히 형을 추월할 수 없는 지위로 고정된다.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우南次郎는 조선인들에게 멋대로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충량한 황국신민의 본질을 완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장자가 독점적으로 호주상속을 하여 가장이 되는 가족제도를 전제했다. 다카무레는 고대일본의 피지배자를 “가족으로서의 노예”라고 표현했다. 동화를 강제하면서 평등한 대우를 하지 않는 대일본제국의 소수자의 위치. 1947년 가와시마 다케요시川島武宜는 일본의 의제적 친자관계의 변형이라고 노예제의 한 형태로서의 양자를 논의한다. 주인의 친심에 대한 보답으로 무상봉사, 주종관계가 본가-분가 관계, 노예제적 강제와 가족주의적 친애라는 완전히 모순되는 두 원리가 모순없이 통일되어 있다. 천황가는 신민의 총본가로 불렸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1950년 일본의 국체사관이라고 하는 와和에 대해 평등자 사이의 우애가 아니라 종적 권위관계를 부동의 전제로 한 ‘와’이고, 도전하는 자는 그럴지 모른다고 추정되는자는 배은망덕하다고 박해로 전환되다고 말한다. 지배자는 ‘와’ 정신의 화신으로 분쟁은 복종자가 사악한 분자에 선동당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무지하고 저급한 자들에게 서둘러 권리를 부여하면 안된다. 마루야마는 또한 선을 바라는데도 악을 행한 것이 일본의 지배권력이라고, 난징대학살의 책임자인 마쓰이 이와네松井岩根 육군대장이 형이 동생을 후려친 반성을 촉구하는 수단이라고 한 것을 언급한다.(489-493) 동화와 차별, 복종과 화합, 권력을 현재화하지 않는 지배라고 모순을 덮어 숨기는 것이 가족국가론의 역할이었다. 가네코 이쿠요우金子郁容는 경쟁원리와 계층조직의 모순을 극복한 형태로 가문집단을 논했다. 이는 호즈미의 가족국가론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가와시마 다케요시는 가족질서란 한쪽은 권력만을 소유하고 다른 쪽은 의무만을 진 관계로 상호간의 친밀함이 행동의 논리가 되어 제 목소리를 내는 것은 평화의 파괴를 의미하고 서로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고 있어서 개인적인 책임이라는 의식은 발생할 수 없다고 한다. 와쓰지 테쓰로우는 천황조차 집단에 종속되어 개인적 전제자가 아니기에 전쟁책임은 없다고 하는데, 절대군주를 최초의 근대적 개인이라고 하지만 국체론의 표현인 천황은 그 이전의 존재다. 먼저 집단이 있고 집단의 소외현상으로 개인이 출현한다. 대일본제국 찬미자들 가운데서도 본류의 이데올로그는 눈에 띄지 않으며, 많은 방류 이데올로그의 언설을 종합해 분위기를 더듬을 뿐이다.(493-495) 가족국가론 내부에는 명확한 타자나 자기가 없었다. 차별은 자타의 분리에서 비롯되는데, 일본의 동화정책론은 자타의 명확한 분리를 전제하지 않았다. 교토학파를 필두로 동아협동체를 주장하거나 자유와 평등의 상극을 넘어설 길을 찾던 자들이 국체론에 심취한 것 그것이 모순을 해소하는 논리가 아니라 타자를 무화하여 모순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로버트 스미스가 일본의 조상숭배는 사적인 애정의 영역이라하고, 루스 베네딕트는 조상범위의 애매함이라고 하는데, 혈통보다 아는 범위가 중요하고, 함께 생활하거나 일을 하는 사람은 가족으로 동화되지 않으면 곤란하다. 타자는 배제할 수 없으면 가족의 일원으로 포함시켜 타자성을 무화하려고 했다.(495-496) 여기서 신입자는 혈통을 불문하고 동화를 요구받는다. 나간 사람은 가문의 일원이 아니다. 아리가 키자에몬有賀喜左衛門은 일본의 가문은 혈연인 아니라 생활집단이라 비혈연자의 포함여부는 본가의 경영을 규정하는 생활여건에 달려있가도 한다. 가족인지의 여부는 필요로 하고 있다는데 있다. 야나기다 쿠니오는 가문은 임금이 필요없는 노동조직이고 자식은 노동단위이며, 오야코親子란 노동조직 내의 상하관계를 보여주는 말이고, 자식이란 권리를 포기하고 봉사하면서 비호를 받는 인간이고, 조화를 어지럽히고 권리를 요구하면 불량한 아이가 된다. 그렇기에 조선인을 동원할 때는 가족을 강조하다가 전쟁이 끝나면 타인으로 잘라내고, 재일 조선인의 국적을 박탈하고 전후보상을 무시하는 것이 가족국가론의 윤리감각과 어긋나지 않는다. 『문명으로서의 가족사회』에서는 혈연을 흉내내지만 혈연을 넘어서는 초혈연성의 예로 양자제도가 지적된다. 일본사회의 종신고용제도. 일본의 가족은 경영상태가 악화되면 가족으로 대하기를 중단한다. 경영이 좋으면 분가를 하고 양자를 고용하여 가족의 발전을 기대한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의 초국가주의논리를 ‘세로축(시간성)의 연장, 원(공간성)의 확대라고 묘사했다.(496-498) F. L. K. 슈Francis L. K. Hsu는 대동아공영권은 본가(종가)를 범형으로 한 조직체였다고 지적하는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가장을 중심으로 신참을 흡수 동화하여 직분이나 위치를 부여하면서 영속적으로 동심원을 확장하는 가족질서였다고 할 수 있다. 세계는 일가 인류는 형제로 표현된다. 가족국가론에서 제국내 이민족은 양자나 며느리에 비유되는데,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는 일본의 가족제도에서 처는 자기 친족과의 관계가 끊어져 남편에 의해 운명이 좌우되는 남편에 의한 처의 지배=가부장제가 완성된다고 한다.(498-499) 실제로는 무라카미 등이 말한 가족의 초혈연성과 부계혈통의식이 미분화된 채 혼재되어 있다. 가족의 명칭인 씨氏와 부계혈통의 명칭인 성姓이 혼동된다. 그러나 대체로 자식이 아버지의 성을 따른다. 가족국가론에 있어 이민족지역을 성장시키고 국가를 쇠퇴시키기 보다는 혈통의 포기를 선택하겠지만 번영에 장애가 되지 않는한 혈통도 중시된다. 상황이 바뀌면 양자는 귀찮은 존재가 되며, 가능한한 혈통이 가까운 쪽이 좋다. 천황가의 조선계 혈통도 모친의 사례 뿐임은 부계혈통의식의 반영이기도 하다.(499-500) 일본에 혈통이미지가 강한데, 그것은 생물학적 순혈의식, 중국·조선형 부계혈통, 가족집단의 계보라는 세 형태의 혼합이다. 일본의 동화정책론은 혈통의식의 강함과 애매함이 결합된 결과다. 다민족국가에서 생겨나는 보편타당한 이념은 대일본제국에서는 혼합민족론과 가족제도의 의사보편성이었다. 제프리 허프에 따르면 반동적 모더니즘을 예로 들며 보편주의로서 변혁이 강조될 때, 기존 문화내에서 의사보편적인 것을 만든다고 한다.(500-501) 나카에 치에는 일본의 며느리가 친족에서 분리된 채 복종을 요구받는 점을 신입사원에 비교하면서, 단일민족사회의 동질성에서 원인을 찾는다. 하시즈메 다이자부로우橋爪大三郎는 결정적 대립을 해소하여 주체도 객체도 발생하지 않는 일체성의 우월함이 일본사회의 근본법칙이라고 천황제와 함께 열도주민을 지배했다고 말한다. 이런 사례들은 일본을 결정적 대립이 없는 정애사회로 그리고 싶은 현대 논자의 의식이 투사된 것이다.(501-502) 일본 가족제도의 확정은 오래되지 않았다. 부부동성은 1898년 민법이고, 양자가 양가의 성으로 동화되는 경우는 그보다는 오래다, 민접으로 일원화하기 이전에는 지방이나 계층에 따라 가족제도가 달랐으므로 일본의 가족제도라는 단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도에 의해 만드어진 측면이 강하다.(502) 혼합민족론으로 결합된 가족의 세계관에 대한 분석은 팔굉일우八紘一宇라는 슬로건의 정체를 가르쳐주며, 조선과 중국에서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ㄴ 이유도, 열린 공동체의 수출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괴로움에 빠지는 것으로 끝났다.(503)

‘가족제도의 반영’이라는 이 한 절이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주장이다. 중국과 조선과는 다른 일본 특유의 가족론이 가족국가론으로 식민지에 강요된 것이고, 그것은 가족의 일원을 양자라는 이름의 노예의 삶을 강요하는 구조였다는 점이다. 그럼으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거대한 가족국가가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해 가게 된다. 이런 일련의 논의가 가능했던 것은 피점령지가 가까고, 친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 하에서는 타자로의 분명한 인식이 생기기 보다 혈통을 확대하여 타자성을 무화시키는 전략을 택하게 되는데. 이런 함정에 빠져든 사람들이 바로 친일파 혹은 식민지 근대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조 안으로 들어가 양자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신참을 노예로 삼아나가는 구조에 빠지게 된다. 왜 징병에 감사하고 징병을 독려하고, 선거와 의회참여를 원했는지 알만하다. 전후 일본 기업을 지배했던 이 구조는 박정희와 그 이후의 국가운영에도 기업운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파가 왜 그토록 국부를 갈망하는지 이해할 법하다. 모 기업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캐치프레이즈 뒤에 그룹의 지배자로서 회장이 가장으로 서있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다. 그리고 여기서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근대 가족이 일본에서도 메이지민법과 함께 생겨난 것이었다는 점이다. 여기까지 읽고나서 비로소 일본이 식민지 시기에 구사했던 언설의 구조, 담론의 구조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식민지가 끝난 후 그토록 신속하게 없어진 것도 이해하게 된다. 애초에 그들의 담론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담론들이 이해되지 않았었기에 완전히 제거도 되지 않고, 구석구석에 파편화되어져 남아 있고, 그것이 해방 후 새로운 국가와 국민형성 과정에서 재료로 활용되어 변형된 모습을 띄게된다. 기기묘묘한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후 정착한 단일민족신화 아래서 재일이나 아이누 등은 귀찮은 문제로 취급되었다. 후쿠오카 야스노리는 전후 재일정책을 분석하여 배제, 동화, 인권, 억압의 네 유형으로 보고, 억압이 전후 재일정책 적합한 유형이고, 배제와 동화는 부수적이었다고 본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후 일본 정부는 조선인의 일본 국적을 일방적으로 박탈했다. 후쿠오카의 억압은 심슨과 잉거의 복종Continued Subjugation에 해당하는데 받아들이지도 배제하지도 않으면서 종속적 위치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1991년까지 공립학교 취학 안내서가 나오지 않았다. 배제한 것도 아니고 애물단지처럼 방치해 왔다. 전후의 동화정책은 방치처럼 소극적이진 않았는데, 방치할 수 없을 만큼의 다수였기 때문이다. 명확한 배제도 권리의 평등화를 수반하는 동화도 아닌 점에서 전전과 전후는 공통점이 있으며,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소수인 경우에는 귀찮은 일로 관계를 끊고,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다수면 포함시키려고 했던 것이다.(504-505) 단일민족신화의 본질은 순혈의식이라기 보다 동화되지 않는 타자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다.(505) 전후의 단일민족신화나 상징천황제는 일면적으로 일국평화주의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현재의 일본은 국제화가 제창되고, 폐쇄성이 적합하지 않은 사회이다. 내지잡거논쟁 부터 일본은 약소국의 지위에서는 단일민족론으로 강대국이 되면 혼합민족론으로 외부의 것을 취하는 왕복운동을 보여주는데 일본이라는 경제대국의 상승한 위상은 혼합민족론이 대두할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506) 보수계 논자는 이미 단일민족론 비판과 혼합민족론 제창이 나오고 있다. 하야시 후사오林房雄, 가세 히데아키加瀬英明 등은 천황제 지지입자에서 전후형 혼합민족론을 부르짓고, 하시모토 토미사부로우橋本登美三郎는 상고, 고대사의 기초가 조선반도라며 혼합민족론과 일선동조론이 잔존해 있다.(506-507) 보수계 논자 우메하라 타케시梅原猛는 일본인은 혼혈민족인데, 인종적으로 다른 사람을 동일화하는데 매우 뛰어나가고 말하며, 아이누는 이 동일화 원리를 지닌 고대 일본의 언어나 문화를 보존해 오고 있다고 말한다. 나쁜 놈을 무리에서 배제하고 일본의 경제발전을 지탱한 원일본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 아이누라는 것. 일본인과 아이누의 언어적·인종적 동계를 말한다. 에가미 나미오의 장두형 농경민족과 단두형 유목민족의 계통을 말하며 기마민족도래설과 민족주의의 연결을 보여준다.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선조인 고대 일본인은 자연아라며 남방도래설을 지지하다, 수상으로 국제화를 부르짓던 때는 선주민족과 남방, 북방, 대륙계와의 혼합을 말했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전아시아계 혼합민족이라고 했다. 일본이 다민족국가로 되어가는 것은 필연이다. 대일본제국은 국경을 넘어 팽창한, 혼합민족론이 주류인 쌀수입국의 다민족국가였다. 다민족국가가 되기만 하면 천황제와 일본사회의 결점이 해소될 수 있다는 생각은 오해다.(507-510)

일본의 재일조선인 정책은 전전의 식민지 정책의 연장선 상에서 크게 변한바가 없다는 오구마 에이지의 지적은 통렬하다. 내지에서 식민지인으로 살았던 것이 조선적의 정체다. 다만 수가 많은데, 쉽사리 배제할 수 없으니 동화를 시도한 것 뿐이다. 나머지는 방치했다는 것. 재일 조선인 문제에 대한 시각을 열어준다. 그리고 일본의 단일민족신화에 대한 비판도 이미 오래되었다. 좌파나 진보로부터의 비판이 나이브하다는 문제점과 달리, 보수의 혼합민족론의 재등장은 다시 한 번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유명인사나 정치인 때로는 천황이 도래인의 업적이나 천황가 도래설 등을 언급하면, 한반도가 일본의 원류임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열광하지만, 그런 환영도 실은 일종의 열등감의 반영일 뿐이다. 좌파는 그런 언술이 무의미함을 알고 있으니 발언하지 않는 쪽을 택하지만, 대체로 한국인의 귀에 그런 발언이 들여로는 것은 일본의 보수파들이고, 그들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던 20세기 전반기에 노래하던 혼합민족론을 다시 꺼내고 있다는 점 정도는 이해했으면 좋겠다. 그런 발언이 대서특필되는 것을 보고 얼마나 비웃겠는가. 조선을 식민지로 누리던 옛 기억을 떠올리면서.

순혈의식의 타파가 단일민족신화의 비판으로 전화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과거나 민족의 기원에 관한 신화가 발생한 원인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버거와 루크만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를 유형화해서 이해한다. 제도적 질서의 시작이 자신과 타자의 행동을 유형화하는 일이며, ‘그들’의 유형화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유형화도 진행된다. 이런 제도가 축적된 것이 전통으로 현재의 지침을 제공해 준다. 정당화 도식은 침전화된 경험에 그때그때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에 의해 행위가 반복되면 신화적인 원형의 모방으로 정당화되기도 하지만 신화는 현재의 요망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모방으로 현재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자신이 지니고 싶은 행동양태를 투영하여 민족의 역사를 만들고 이에 따라 현재의 정책에 근거를 부여한다. 민족 정체성을 찾는 행위는 다른 존재와의 만남으로 인식의 질서가 흔들릴 때의 반응이다. 민족의 역사는 민족의 일원으로 행동지침을 이끌기 위한 지식창고로 창조된다. 민족의 기원은 추측에 기댈수밖에 없기에 적합한 창조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반드시 의도적 역사의 왜곡은 아니다.(511-513) 일본민족기원론의 결정적인 정설은 없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타자와의 관계가 변할 때마다 자화상인 일본민족론은 요동쳤다. 일본민족의 역사라고 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이나 잠재의식이 투영된 역사를 이야기했다. 인간에게 자신의 과거를 자유로이 말하는 것만큼 매력적인 일도 없다.(513-514) 현재의 일본이 다른 나라에 비해 균질성이 높다해도 그 최대의 요인은 식민지화나 분할을 경험하지 않았으며 세계적 규모의 대제국을 구축할 정도의 선발국도 아니었다는 지난 100년 정도의 국제적 조건 때문이다.(514) 일본만 아니라 대부분 국민국가는 자신들의 기원신화를 만들고 있으며, 그 이면에서는 현재로부터의 도피라는 심리적 배경이 깔려있다. 과거에 대한 신화화의 본질은 타자와 마주보고 대응하는 괴로움과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여 현재에 적용시키고 싶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형을 역사에 투영하는 일일 것이다.(515) 직접 마주보며 유형을 만들지 않고 사소한 접촉의 충격조차 견디지 못한 채 신화를 만드는 쪽으로 도피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세계를 덮어버리고 상대를 무화하려는 억압. 이 도피야 말로 신화의 기원이다. 요구되는 것은 신화로부터의 탈피이다. 다른 이와 공존하는 데 신화는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약간의 강함과 예지이다.(516)

오구마 에이지는 요약 정리는 정말 잘하지만 주장은 분명치 않다는 비판을 일본 쪽에서 본 것 같다. 확실히 그의 책은 정말 여러가지 이야기를 망라하여 정리해 놓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너무나 생소해서 건너뛰기 쉬운 그런 이야기지만, 그런 이야기를 상세하게 특히 3부를 상세하게 요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물론 나 자신을 위해서지만, 그것보다 식민지를 운영하던 제국이 식민지를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었는 지에 대해서 였다. 그것도 제국 내부의 동학을 통해서, 그런 점에서 실제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도 식민사관을 비판하기는 하되 무엇이 식민사관인지 딱잘라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뭐든 식민사학으로 몰아부치는 세력도 존재하고. 여전히 시야를 넓히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 뿐이다.

한국과 일본에 비슷한 시기에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시차를 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확산되었던 단일민족의 신화는 결국 알고보면 국가 또는 국민적 정체성에 초월적 근거를 부여해 만들어내려는 환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은 실상 국가를 설명하기 위한 논리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물리적 실체성을 가진 국가. 그러나 그 국가는 국민의 이름으로 통제되는데. 이 국민의 호명에는 역시 신화가 존재한다. 비록 그것이 아주 현대의 신화라 할지라도 그렇다. 국가/ 민족/ 국민의 신화 속에서 어디쯤에 선을 긋는 것이 좋을런지.

단일민족국가라는 신화가 국정교과서를 통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통용되고, 그것이 국가 통치방식으로 활용되던 시기를 지나 더 이상단일민족국가 아니라고 깨어지는 가 싶더니 기기신화에 버금가는 위서에 기대어서 신박한 동북아 고대제국론이 퍼지다가 제동이 좀 걸리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늘어나는 이주민과 난민들이 눈앞에 보여지는 것을 계기로 공포와 배제의 논리가 되살아나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쉽게 정착되는 것은 학습된 공포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공포의 학습에 기독교도 한몫한다. 선교사들이 모금과 선교사 모집을 목적으로 과장해서 확산시킨 이슬람 포비아와 이슬람 악마론이 되돌아와서 기독교의 뒤통수를 치고 있다. 신화의 다른 한쪽 측면을 이루는 공포는 사람을 쉽게 조종한다. 한 번 사람을 조종했던 그 맛을 잊지못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공포를 조장해서 다시금 지배력을 확보하려 한다. 이런 반복되는 이야기는 이제 지겨울 정도지만, 사람들의 삶은 실제로 그리 변화하지 않았다. 생각도 변화하지 않았으며, 조금만 어렵거나 조금만 귀찮으면 곧장 신화의 세계로 도피한다. 신화가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걸 보여주는 일은 몹시 수고스럽다. 애초에 이해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2018. 7. 4.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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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H.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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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년 왕의 인쇄업자 로베르 에티엔, 라틴명 로베르투스 스테파누스가 출판한 루이 12세의 장례행렬 목판화. 관가 위에 등신상이 보인다. 칸토로비치의 제자 랄프 기제Ralph E. Giesey의 T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