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프롬킨, 『현대 중동의 탄생』.

1919년 5월 23일 연합국(협상국)의 점령에 대한 항의시위,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고, 전쟁의 해결책은 오래 지속되는 불화를 낳았다.

데이비드 프롬킨David Fromkin, 『현대 중동의 탄생A Peace to End All Peace: The Fall of the Ottoman Empire and the Creation of the Modern Middle East』, 이순호 역, 갈라파고스, 2015(1989)

데이비드 프롬킨의 『현대 중동의 탄생』은 오늘날 중동 문제의 발단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저술로 꼽힌다. 1989년에 출간되었지만, 그 이후의 중동은 한층 더 뜨거웠다. 이제 와서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전후 처리, 더 정확히 말하면 오스만 제국의 해체가 모든 중동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싶다. 그 이후로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이 새롭게 새로운 중동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오스만 제국의 해체가 중동 문제의 기원인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은 다소 정리된 것으로 보이는 인종청소까지 등장한 발칸의 분쟁은 20세기말의 악몽이었다. 발칸 문제의 기원 역시 오스만 제국과 무관하지 않다. 1, 2차 발칸 전쟁으로 할양된 오스만의 영토들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등장했던 신생국들이 냉전이 해체된 후 다시 등장하는 과정에서 흘린 피들이다. 피의 궤적을 끊임없이 반복해가는 역사가 두렵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의 중동 문제를 만들어낸 오스만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두드러졌던 것은 전승국의 욕심 그 중에서도 영국의 욕심이었다.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오스만 제국을 거대한 전리품으로 보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의 아랍 영토 분할에 열중했고,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와 윈스턴 처칠은 인도로 가는 길을 육지로 확보하려고 몰두하게 된다. 그렇게 그어진 수많은 국경선들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분쟁의 원인들이었다.

또 영토문제 논의를 위해서는 분할될 오스만제국의 각 지역에 명칭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때 위원회 대표들이 일을 처리한 방식에는 그들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빌라예트(지방)라는 기존 오스만제국의 행정구역 단위가 있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편의대로 중동을 개편한 것이다. 영국의 일반적 통치집단과 다를 바 없이 그들도 학교에서 배운 그리스와 라틴 고전 작품들을 전범 삼아, 2,000년 전 그리스 지리학자들이 사용한 불확실한 용어를 차용해 썼다. 그리하여 아라비아 북쪽의 아랍어권 아시아 지역은, 거기 포함되는 각각의 지역이 불분명한데도 동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서쪽의 ‘시리아’로 통칭되고, 시리아 남쪽은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1,000년 전 필리스틴인들이 점유했던 해안지대, 곧 ‘필리스티아(블레셋)’가 와전된 ‘팔레스타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나라의 국명으로는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순수하게 지리적 용어였던 팔레스타인은 그래서 지금도 기독교 서방세계에서 성지로 통용된다. 마크 사이크스가 주도한 부처 간 위원회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크게 5개 자치지역으로 나눌 것을 제안했다.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르메니아, 아나톨리아, 자지라-이라크(메소포타미아 북남 지역)가 그것이다.(223-224)

언제쯤부터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역을 이런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는지 아주 분명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렇게 오래되지 않는 것도 분명하다. 시리아란 국명은 실로 기원이 오래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이 그의 사후 넷으로 나뉘어졌을 때, 그 중 하나가 시리아였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이라는 지역명은 순수한 창작이다. 블레셋에 대한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는 것도 BC 10세기 이전이 대부분이다. 성경을 제외하면, 완전히 사라졌던 이름이 19세기에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를 통해 유명해진 데다, 팔레스타인으로의 정체성 같은 것도 생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스라엘은 부인하고 있지만. 이런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이 지역을 오랜 기간 지배해 온 오스만 제국의 통치 방식이나 그들이 부르던 이름이 더 궁금해졌다. 대부분의 서구 역사서들은 오스만 제국이 느슨한 통치체제를 취했고, 세금만 내면 자율을 보장했다는 식으로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있지만.

카이로의 관점에서 보면, 영국과 프랑스의 통치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컸는데도 말이다. 클레이턴과 그의 동료들은 프랑스 식민지 행정관들이 사용하는 방식으로는 한 나라의 특성이 온전히 유지되기 힘들다고 믿었다. 프랑스가 말하는 이른바 ‘문명화 사명’을 원주민 사회에 프랑스 언어와 문화를 강요하는 것도 포함된 합병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집트와 여타 식민지에서 정부 당국을 감독하는 것 외에는 나라와 주민들을 간섭하지 않고, 그들만의 거류지와 클럽을 오가며 생활한 영국인들로서는 그렇게 볼 만도 했을 것이다. 클레이턴과 그의 동료들은 그것을 아랍어권 사람들이 원하는 참된 독립의 형태라고 믿었다.(291)

영국인들의 믿음이 위선적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프랑스의 통치를 영국의 통치보다 선호했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프랑스가 레바논과 시리아를 전리품으로 요구하자, 아랍권 부족들은 차라리 영국의 통치가 낫다고 영국의 위임령을 요청하는 경우들이 나타난다. 미국의 위임령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문명화 사명’이나 문화를 강요하면서 합병하는 식민통치는 한국도 일본으로부터 극심하게 경험해 본 바다. 프랑스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은 순조롭게(?) 영연방을 출범시키지만, 프랑스는 식민지에 군대를 다시 보냈고, 여지없이 전쟁을 치렀다. 베트남에서도 알제리에서도. 두 나라의 식민 통치 스타일이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할까. 물론 영국인들은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지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독립을 원했고 그걸 막을 수는 없었다.

겔판트는 자기 혼자 생각으로 그의 마음을 넘겨짚고는 독일군 참모부와 협의해 레닌과 그의 막역한 정치적 동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가 타고 갈 페트로그라드행 열차를 준비시켰다. 그런 다음 레닌에게 초청장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레닌은 용의주도하게 그의 제의를 거부하고 독일과 별도의 협상을 진행했다. 그 나름의 조건도 제시했다. 20~60명 정도의 러시아 망명객들을 그들이 가진 전쟁관에 상관없이 열차에 탑승시키고 열차에도 치외법권을 적용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베른 주재 독일 영사는 레닌의 요구를 독일 외무부에 이렇게 타전했다. “레닌과 지노비예프는 러시아에서 맞닥뜨릴 위험에 대한 안전을 그런 식으로 보장받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레닌은 독일정부의 이해와 동의를 받아 1917년 4월 마침내 밀봉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향했다.(384)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의 복귀에는 독일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 독일은 동부전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레닌의 복귀는 성공적이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동부전선을 정리한 후, 서부전선에 전력했지만, 미국의 참전 등으로 한계에 부딪힌 후 독일 자체의 혁명으로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식의 패배는 독일에 패전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마음, 국내의 배신으로 전쟁에 실패했다는 의구심을 낳았고, 결국은 나치즘이 발호하는 기반 하나가 된다. 이런 거짓의 한가운데에 유대인에 대한 의심과 비난이 있었다. 제정 러시아는 600만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끊임없이 박해했고, 그들은 소련 서부와 소련과 독일 사이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유대인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근거없는 유대인음모론과 뿌리깊은 혐오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제정 러시아가 박해했던 대다수 유대인들은 결국 독일의 손에 죽어갔다. 비극이었다.

로이드 조지는 동료 각료들과 달리, 유대인의 고향 시온을 그들에게 되돌려주려는 일에 앞장서려는 생각이 영국의 비국교도와 복음주의자들 머릿속에 수백 년간 뿌리박혀 있었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것은 그가 믿는 비국교도 신앙의 배경이 되었다. 로이드 조지야말로 영국에서 청교도주의가 일어나고 메이플라워호가 신세계로 향했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나긴 역사를 지닌 영국 기독교 시온주의의 가장 최신 사례에 속했던 것이다. 미국이든 팔레스타인이든, 당대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약속의 땅에 대한 생각이 서려 있었다. 17세기 중반 암스테르담에 살고 있던 두 영국인 청교도-조애너와 에베니저 카트라이트-가 본국인 잉글랜드 정부에, “잉글랜드 국민이야 말로, 네덜란드 주민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아들딸을 배에 태워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영원한 유산으로 약속한 땅에 가장 손쉽게 실어다줄 최초의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하면서 유대인 추방이 명시된 법률을 폐기해 줄 것을 탄원한 것도 그런 맥락(기독교 시온주의의 일환)에서 행한 일이었다. 청교도들은 성서를 지침삼아, 유대민족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즉시 메시아가 강림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이 개념이 19세기 중엽에도 되살아났다. 섀프츠버리 백작이 된 사회걔혁가 앤서니 쿠퍼는 영국국교회 내에서,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복귀시키고,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을 촉진시키자는 강력한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혼인으로 친척이 된 외무장과 파머스턴에게도 영감을 불어넣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까지 영국 영사관의 보호권이 미치게 했다.(414-415)

영국을 승전으로 이끌었고, 모든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전쟁 후에도 권력을 유지한,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웨일즈의 평민 출신이다. 그가 활동한 맨체스터 역시 런던 다음으로 큰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곳이다.(418) 그는 청교도적이고 엄숙한 교육을 받았다. 이튼이나 해로우를 다니면서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배운 그의 동료들과 달리 그는 공교육 기관에서 성서를 기반으로 교육받았다. 데이비드 프롬킨은 영국의 청교도적 전통과 분위기에서 시온주의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 메시아가 강림할 것을 믿었다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은 20세기말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가는 과정을 돕던 한국의 개신교인들을 연상시킨다. 복음주의와 성서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둘은 연결된다. 성서에 대한 깊은 열정을 사람들로 하여금 구약성서, 유대인의 역사에 몰두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유대 국가 건설의 기반을 마련한 밸푸어선언은 영국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어떤 숙명적인 느낌이 든다. 집이 없는 유대인들이 집을 찾아가겠다는 시온주의에는 요람이 필요했다. 그 요람은 영국의 복음주의였던 셈이다.

1912년 말부터는 종교 부흥 운동이 일어난 아라비아의 정치성도 이븐 사우드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부족민들이 유목생활을 버리고 농업 공동체에서 엄격한 와하브적 생활을 하기 위해 말, 낙타, 그 밖의 소유물을 시장 도시들에 내다팔았다. “종교상의 형제들”이라는 뜻을 지닌 이른바 이흐완ikhwan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이븐 사우드는 기다렸다는 듯 이흐완의 수장이 되어 아라비아의 최고 전사들인 베두인족 군대를 장악했다. 이흐완 내에서도 부족장들 권위와 부족들 간 구분은 희미해진 반면 이븐 사우드의 권위는 높아졌다.(643)

사우디 아라비아라는 국명에 보이는 사우드라는 가문의 이름은 와하비즘을 이끌던 사막의 부족장 이븐 사우드의 것이다. 그는 영국이 후원한 헤자즈의 하심 가의 후세인, 파이살의 경쟁자였다. 지금은 결국 사우드 가는 사우디 아라비아로 하심 가는 요르단으로 남았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와하비즘,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은 오늘날 중동의 테러의 한 근원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 바로 이런 와하비즘의 투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와하비즘은 유목생활을 버리고 농업 공동체 생활을 하는 데서 성장한다. 마치 초기 이스라엘을 시작한 유대인 사회주의자들의 노동여단을 연상시킨다. 이스라엘에서 이들을 키부츠를 만들어내고, 훗날 이스라엘 독립의 기반이 된다. 반면, 와하비즘은 사우디 아라비아를 만들어 낸다. 파이살의 부대는 부족을 극복하지 못하고, 느슨한 부족 연합으로 머물렀다. 그게 파이살의 리더십이었다. 그러나 부족을 극복하기 시작한 와하비즘을 당해 낼 수 없었던 셈이다. 네이션을 먼저 만들어내는 쪽이 이기는 법이다. 적어도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는. 사우디 아라비아가 근대 국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중동 지역은 종전 무렵 영국군이 점령할 때만해도 저항의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윽고 분란이 시작되었다. 1918년에 시작된 독립의 요구가 1919년에 들어서는 소요로 발전해간 이집트를 시작으로, 표면상 이집트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인도 변경지에서도 1919년 전쟁이 발발했다. 아라비아의 영국 정책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와해되는 조짐을 보였다. 불행은 겹쳐 일어난다고 했던가. 당시 중동의 영국 당국에는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형국이었다. 트란스요르단만 해도 부족 간 투쟁으로 혼란이 초래되고, 서팔레스타인에서도 1920년 봄 유대인을 향한 아랍인들의 폭동이 일어나며, 1920년 여름에는 이라크에서 봉기의 불길이 타올랐으니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은 아마도 종전 뒤 중동에 주둔한 영국군 병력이 충분하지 못해, 사방에서 도전해오는 적들의 기세를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한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629)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중동의 영국의 점령지와 영국령에서는 끊임없는 문제와 봉기가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3.1 운동이 일어나고 중국과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던 그 무렵이다. 일본이 놀라고 당황했을 것도 이해가 된다. 차이라면 일본은 무력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영국은 그렇지 않았다. 전쟁을 수행하느라 끌어모았던 병력들을 돌려보낼 때가 되었다. 병력은 날로 줄었다. 국내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영국령에서 사용하는 예산도 줄여야만 했다. 간단한 계산만으로도 이 정도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100만 혹은 그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카이로에서는 말해왔다. 처칠도 로이드 조지도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사람도 돈도 없었다. 승전국의 욕심으로 넓힌 영토를 그들은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영국은 중동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그리고는 온갖 음모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1920년 런던에서 그 세계적 음모의 전모가 밝혀질 수도 있는 놀라운 책이 처음으로 발간되었다. 『시온 학자들의 의정서Protocols of the Learned Elders of Zion』의 영역본인 『유대인의 위험Jewish Peril』이 출간돼 나온 것이다. 같은 시기 파리에서 프랑스어 번역본으로도 출간된 『시온 학자들의 의정서』는, 19세기 말 유대인과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몇 차례 집회를 열어 자본주의와 기독교 문명을 뒤엎고 그들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세계국가 수립을 위해 음모를 꾸민 내용을 담은 기록물이었다. 『시온 학자들의 의정서』는 1903년 러시아의 한 신문에 발췌문의 형태로 처음 실렸다. 그것을 러시아 정부의 관리 세르게이 닐루스가 찾아내 1905년 책으로도 발간했다. 책으로 발간되었지만 처음에는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 때 볼셰비키 지도자들 중에 다수의 유대인이 포함되었고, 공산주의 교의에도 『시온 학자들의 의정서』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말이 퍼져나가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20년 무렵에는 런던과 파리에도 『시온 학자들의 의정서』를 진실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동방의 도처에서 일어난 원인 불명의 반영 봉기들도 그것으로 설명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게 주목받던 『시온 학자들의 의정서』는-런던과 파리에서 번역본이 출간된 지 1년 뒤였던-1921년 「타임스」의 콘스탄티노플 특파원 필립 그레이브스가 그것이 차르정부의 비밀경찰이 날조한 것임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마침내 위조로 들통 났다. 백군 출신의 러시아 망명객 미하일 라슬로브레프Michael Raslovleff(1978년에야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가 다른 이유는 없이 오직 “급전의 필요성” 때문에 그레이브스에게 준 정보에 따르면, 러시아 비밀경찰은 가짜 기록을 짜깁기하는 것마저 마다하고 그것을 그냥 표절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프랑스 법률가 모리스 졸리가 쓴 나폴레옹 3세에 관한 풍자문[제네바(1864년)와 브뤼셀(1865년)에서 발간되었다]을 통째로 베껴쓰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시온 학자들의 의정서』는 극소수 복사본만 남았을 정도로 존재가 희귀했다. 그레이브스에게 정보를 넘긴 라슬로브레프도 러시아 비밀경찰 간부에게서 그 책을 얻었고, 「타임스」도 영국 박물관에서 그 책을 겨우 한 부 찾아냈을 정도다. 라슬로브레프는 그 책이 희소했던 이유가 만일 흔하게 돌아다녔다면 발간과 동시에 표절이 들통 났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나중에는 모리스 졸리의 풍자문 외에 그와 비슷한 시기에 발간된 공상소설 등 다른 책들도 표절된 것으로 드러났다.)(706-707)

오늘날 유대인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유대인의 능력에 대한 과장된 찬탄이다. 다른 하나는 고난받는 유대인이다. 고난받는 유대인의 이야기는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로 마무리되고,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다른 하나가 유대인의 능력 특히 한국에서는 교육에 대한 과장이다. 이게 사교육의 나라 한국에서는 장사, 즉 돈이 된다. 온갖 유대인 교육법이 등장한다. 물론 한국에는 일본을 거쳐서 오며, 근대 일본의 유대인에 대한 관심과 나치 독일과의 동맹을 통해 증폭되어서 넘어온다. 그 기원을 파고 들어가면 유대인의 세계 지배론이 나온다. 유대인 세력이 강한 미국의 사례를 들면서, 유대인의 세계 금융지배, 유대인 평의회나 프리메이슨이 등장을 하고, 내용에 따라 뜬금없이 프리메이슨도 등장한다.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오래 된 것이고, 마틴 루터가 「유대인의 거짓말」이란 글을 썼을 정도로 오랜 일이지만, 그 나름의 근대적 기원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온 학자들의 의정서』가 그것이다. 지금도 인용된다. 라슬로브레프의 말처럼 자료는 희소해야 한다. 그래야 거짓말이 통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가장 유대인이 많았던 러시아 제국, 동유럽에서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았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극심했고, 유대인 혐오도 만연했던, 제국 러시아의 비밀경찰이 날조한 자료가 뒤늦게 영국에서 출판되고, 모두들 유대인 음모론을 믿거나 마음이 쏠리기에 이른다.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깊은 음모론의 어두움이 아직도 떠돌고 있다. 이제는 유투브의 동영상들이 그 요람이다.

토머스의 쇼란 다름아닌 슬라이드를 곁들인 강연이었다. 로웰 토머스가 「최후의 성전The Last Crusade」으로 명명된 강연 쇼를 「뉴욕 글로브」의 후원을 받아 1919년 3월 뉴욕의 세기극장 무대에 올린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최후의 성전」 쇼는 그 몇 주 뒤에는 토머스가 바랐던 만큼의 엄청난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옛 매디슨 스퀘어 가든으로 장소를 옮겨 공연되었고, 나중에는 영국 흥행주의 주선으로 런던 최대의 극장들인 로열 오페라 하우스, 코벤트 가든, 앨버트 홀에서도 개최되었다. 과대 선전의 극치 「최후의 성전」은 흥행의 새 역사를 썼다. 런던에서만 무려 6개월 동안 롱런하며 100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았고, 런던 공연이 끝난 뒤에는 전 세계 순회공연에 돌입했다. 젊은 로웰 토머스는 그것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으며,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세계적 영웅이 되었다. 로렌스도 토머스가 쓴 글의 유치함에는 곤혹스러워했으나, 그것이 거둔 성공에는 기뻐했다. 런던에서 「최후의 성전」이 공연될 때도 그는 거주하던 옥스퍼드에서 수시로 올라와 그것을 관람했다. 객석에서 쇼를 관람하다가 토머스 부인에게 들켜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멋쩍게 웃으며 황급히 사라진 것”만 해도 최소한 다섯 차례는 되었다. 그러나 대중은 토머스의 말을 믿었다.(748)

아라비아의 로렌스 전설이 미화되고 과장되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아카바 전투의 실제 주인공은 아우다 아부 타이(영화에서 앤터니 퀸)였다고 데이비드 프롬킨은 말한다. 스콧 앤더슨은 실제 아카바 전투가 포위한 채, 항복조건을 논하는 시시한 전투였다고 말했다. 다마스커스에 먼저 입성한 것도 아랍군이 아닌 호주 경기병들이었고, 파이살은 3일 후에나 도착했다. 앨런비 장군은 영국군이 다마스커스에 입성하지 않고, 주위에 머물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어쨌든 로렌스는 영웅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신문기자가 아마도 토머스를 묘사한 것일 것이다. 1919년에 100만명이 드는 슬라이드 쇼라니 엄청난 흥행의 성공이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로렌스가 그 쇼를 보러왔다는 것이다. 들킨 것만도 다섯 번. 요즘엔 구글로 자기 이름을 검색해 보지만, 그땐 직접 가서 본 모양이다.

소비에트 정부는 1921년 또 다른 전시 적국 독일과도 협력관계를 수립했다. 엔베르 파샤의 제안을 받은 독일 신군부의 지도층이 소비에트 러시아와 극비 동맹관계를 구축한 것이다. 그에 따른 후속조치도 취해져 엔베르의 친구이자 신군부의 수장인 한스 폰 제크트Hans von Seeckt 장군은 전시 생산, 군사 훈련, 신무기 개발을 담당할 “특수부 R Sondergruppe R”을 국방군 내에 설치했다. 이어 독일군 장교들이 승전국들이 금지시킨 최신 무기-특히 탱크와 비행기-를 러시아에서 연구하고, 독일 산업계는 산업계대로 소비에트 영토에 독가스, 폭탄, 군용기 제조 공장을 세웠다. 독일은 전차 지휘관과 전투기 조종사들의 훈련소도 소비에트 영토에 설립했다. 러시아 장교들도 그에 대한 대가로 독일에 가서, 두려움과 찬탄의 대상이었던 독일 참모부가 개발한 방식으로 훈련받았다. 독일 정부도 몰랐던 양국의 이런 은밀한 군사동맹(제크트가 이끄는 독일 군부가 민주적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군을 국가 내의 또 다른 국가로 인식하여 벌어진 일-옮긴이)은 1922년에 체결된 라팔로 조약의 비밀 조항으로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1922년 다르다넬스 해협에서는 정세가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벌어졌다. 종전 무렵에는 오스만군의 참모장을 역임했고 1919년부터는 독일 국방군의 수장직을 맡았던 한스 폰 제크트 장군이 러시아 참모부에 군사 상황을 보고하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14년만 해도 독일과 터키의 적이었던 러시아가 두 나라의 동맹이 된 것이고, 이렇게 세 나라 모두 이제는 영국의 적이 되었다.(814-815)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은 망하고, 인플레로 경제는 무너지고, 연합국(협상국)의 제재로 무기하나 만들지 못했던 독일이라는 신화는 사실상 무너졌다. 패전 후에도 독일의 경제 후퇴는 18%에 불과했다. 작은 숫자는 아니지만, 몰락도 아니다. 독일군과 군수산업은 1921년부터 재건하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재건한 것이 아니다. 군부는 알아서 움직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정말 허수아비였던 셈이다. 그러니 1939년 스탈린과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은 기반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공산주의 타도를 외치는 파시즘과 공산주의 소련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비록 2년 후 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무너졌지만.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소련은 러시아였다. 그리고 푸틴의 러시아는 소련이 러시아일 뿐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준다.

보수당 당수 앤드루 보너 로Andrew Bonar Law는 “(그러므로) 그것을 지키는 책임을 영국제국에만 지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영국군이 다르다넬스 해협과 콘스탄티노플에 주둔하는 것은, 영국군 단독으로 군사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의 결정에 따른 조치였고, 연합국에는 미국도 포함돼 있다.” 보너 로는 자주 인용되는 문구로, 미국과 연합국이 그 부담을 나누어 지지 않으려고 하면 영국도 그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영국만 세계경찰act as the policeman for the world이 될 수는 없다. 영국 내 재정과 사회적 여건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로는 또 프랑스가 유럽과 아시아에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영국도 독일과 체결한 조약을 집행하지 않고, 자국의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미국의 본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프랑스에 경고할 필요성도 제기했다.(850)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일 미국의 세계경찰policeman of the world 노릇을 그만두겠다는 말이 금새 떠오른다. 로이드 조지와 함께했던 보너 로는 미국의 고립주의와 미국과 프랑스의 자국 이기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이렇게 말했지만, 오늘날에는 세계 경찰 노릇에 한계를 느끼면서 그만두려는 미국의 대통령이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일견 이해가 안되는 말은 아니지만 이해하면서도 역시 걱정이 안되는 것도 아니다. 2차 대전으로 수립한 세계 질서가 이미 무너지고, 변화되었다고 하지만, 미국의 세계경찰 노릇없이는 현재의 질서도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변화가 올지 알 수 없다. 두 세력권이 변화하고 충돌한다면 전장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의 한반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한반도 평화국면도 어찌보면, 그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작은 틈새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평화를 만들어낼 힘이 한국에 있는 것일까. 며칠 안남은 북미정상회담을 보면서 새삼 간절한 마음이 든다.

2019. 2. 24.

* 괄호 안의 숫자는 번역서의 쪽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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